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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임, 살림, 증인

부활절 조회 수 16214 추천 수 0 2009.04.27 16: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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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도행전 3:11-19 
 

죽임, 살림, 증인

(행 3:11-19)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의 설교가 세 번 등장합니다. 2:1절 이하의 오순절 설교, 3:11절 이하의 솔로몬 행각에서의 설교, 4:8절 이하의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의 설교가 그것입니다. 이 설교는 단순히 베드로의 설교라기보다는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설교의 대상은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입니다.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인들의 관계는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했습니다. 원래 초기 기독교인들은 모두 유대교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 이외의 모든 추종자들은 유대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 경험 이후에도 여전히 유대교인들이었습니다. 그 기간이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길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교를 버리고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냥 유대교 안에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가 있듯이 나사렛파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당시 주로 유대인들로 구성된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을 가리켜 유대-기독교인들이라고 부릅니다.

이들과 다른 기독교 공동체가 시작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중심이 되는 기독교 공동체였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로부터 복음을 받았지만 점점 거리를 두게 되었습니다. 이 이방인 기독교의 특징은 유대교의 율법과 할례를 거부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의를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대표자는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 지도자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소아시아 지역에서도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고 결국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역으로 밀려났습니다. 지금의 그리스 땅인데, 바울에 의해서 복음이 유럽으로 넘어간 셈입니다. 

이렇게 두 갈래로 갈라진 초기 기독교의 차이가 세월이 흐르면서 더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사도들과 동생이 주축이 된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는 기독교적 특징을 잃고 결국 역사에서 사라진 반면에, 바울이 중심이 된 이방인 기독교는 큰 세력으로 자랐습니다. 이 헬라 기독교 전통에 속한 누가라는 사람이 기원후 80년대에 기록한 문서가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그가 사도행전을 기록한 목적이 있습니다. 이방인 기독교가 유대교와 어떻게 다른지를, 기독교가 왜 유대교로부터 벗어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설명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놓여있습니다.


죽임

누가는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설교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었고,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했던 빌라도를 반대했다고 말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유대인들의 잘못을 정확하게 짚습니다.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자를 놓아주었습니다.(행 3:14) 결국 그들은 “생명의 주”를 죽인 것입니다.(15절) 유대인이 예수님의 죽음에 전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역사는 죽임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지는 마세요. 지금 유대인이라는 한 민족에게만 책임이 있다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이런 죽임의 역사를 자행해온 인류를 대표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하나는 신성 모독죄입니다. 이것은 유대교의 산헤드린 지도부가 내린 대답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가 신성 모독으로 비쳤다는 건 이해할만합니다. 예수님은 유대교가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율법과 성전을 절대화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 논쟁은 대표적입니다. 사람들의 죄도 용서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산헤드린 종교지도자들의 눈에 예수님은 마치 자신이 하나님이나 된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예수님은 명시적으로 자신을 신이라거나 하나님의 아들이라거나 메시아라고 드러낸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가르치고 행동하셨을 뿐입니다. 그것이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하나님을 참칭하는 죄로, 신성모독으로 비쳤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회 소요죄입니다. 이것은 로마의 총독 빌라도가 내린 대답이었습니다. 복음서와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석방하고 싶었지만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민중들이 반대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형 선고를 내린 것처럼 말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성서 기자들은 종교적인 차원으로만 예수님의 사건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설명한 것입니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팍스 로마나, 즉 로마의 평화와 질서를 훼손할 가능성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의 판단은 물론 잘못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사회 혁명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기대를 갖고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차원의 사회개혁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로마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된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아니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인간의 해방과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사회가 민주화된다고 해서 영적인 만족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전적으로 순종할 때만 영적인 만족이, 구원이 가능했습니다. 빌라도가 오해했지만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정치적 위협이 된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사람이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인 생명과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빌라도는 산헤드린과 유대 민중들의 압력에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분명한 정치적, 사법적 관점에서 예수님을 사형시켰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런 일을 반복했습니다. 때로는 진리 투쟁이라는 명분으로, 때로는 유치한 생각으로 상대방을 죽였습니다. 선악과를 취한 아담과 이브는 남에게 책임을 미루기에 바빴습니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한 이유는 시기심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에서도 그런 일들은 수없이 일어났고 지금도 반복됩니다. 옳고 그름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 편이냐 아니냐 하는 차원으로 악을 행하기도 합니다. 그런 일을 행할 때 자신들은 그게 무언지도 잘 모릅니다. 아니 자신들이 옳다고 합리화합니다. 마녀를 죽이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갈릴레오를 종교재판에 회부해서 지동설을 주장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 보편적인 인류 역사만이 아니라 우리 개인들도 이런 죽임 역사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그런 피해의식은 순식간에 공격심리로 나타납니다. 하루에 열두 번도 넘게 우리는 죽임을 반복하고 있는 게 아닐는지요.  


살림

베드로는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리셨다고 선포합니다. 이 말을 처음 들은 유대인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을 겁니다. 그들은 예수 공동체의 주장을 술에 취해서 외치는 헛소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걸 잘 알고 있던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그 시간이 오전 9시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자 요엘이 말한 것처럼 성령이 임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유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전하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자칫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하기 쉽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 사실을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전할 뿐이었습니다. 솔로몬 행각 앞에서 설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 기회는 그 앞에서 일어난 어떤 특별한 사건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3시 기도하는 시간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다가 걷지 못하는 거지가 성전의 미문 앞에서 구걸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무엇을 얻을까 하고 기대하고 있는 그를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웁니다. 그 사건을 본 예루살렘 주민들이 크게 놀라워했습니다. 그들을 향해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게 아닌데 왜 자신들을 주목하느냐 하고 말입니다.(12절) 이를 걷게 한 것은 바로 당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하나님이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라는 것입니다. 거지 장애인의 치유 자체는 여기서 핵심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유대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필요한 표적에 불과합니다. 베드로는 그런 종교적 표적이라는 호기심으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유대인들의 관심을 돌립니다. 그게 초기 기독교의 중심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장애와 병이 치유되기를 원합니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도 근본적으로 이런 치유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복지를 확대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성서에도 자주 나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 불치병이 치유되고 가난에서 벗어나서 부자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편리하게 살아가는 도구입니다. 정치와 경제는 모두 그것을 목표로 합니다. 유대인들이 바라는 하나님의 표적도 그런 방식이었습니다. 기독교에도 그런 요소들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거의 미미할 정도의 의미만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자녀들이 부모에게 용돈을 받는 것과 비슷합니다. 용돈으로 부모의 사랑을 측정할 수는 없습니다. 용돈을 한 푼도 주지 않는 부모가 많은 용돈을 두는 부모보다 더 깊이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우리에게 구원을 알리셨습니다. 예수의 부활입니다. 그 부활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달성할 수 없는 생명의 아르케, 생명의 알짬입니다. 이에 비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하는 모든 노력들은 헤어스타일을 꾸미거나 화장을 하는 정도입니다. 또는 성형수술을 통해서 외모를 가꾸거나 암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거나, 약을 먹는 정도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생명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분들은 다 알 겁니다. 그것은 단지 겉모양의 개량일 뿐입니다. 죽은 자로부터의 살림은 사람이 손을 댈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것은 창조자 하나님만이 가능한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하셨다는 사실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력적인 방식으로 예수님을 죽지 않도록 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민중을 동원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접수하고 로마를 몰아낸 뒤 예수를 왕으로 모시고 새로운 세상을 펼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모두 무기력하게 손을 놓았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부활 생명은 하나님의 배타적인 사건이라는 말씀입니다.

배타적이라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렇게 설명을 드러야겠군요. 저는 역사를 새롭게 개혁해야한다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샘터교회도 역시 한국교회의 개혁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우리의 가장 중요한 과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회가 민주화되고 정의로워져도 인간의 삶은 질적인 차원에서 별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한 집안에서 부모가 준 용돈을 공평하게 나눠 쓰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교회가 아무리 새로워져도 그것으로 우리가 참된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무의미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죽은 자로부터의 살림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증인

기독교는 바로 이 사실을, 즉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허락하시는가를, 어떻게 죽임의 질서로부터 살림의 질서로 이끌어주시는가를 우리의 온 영혼을 기울여 대면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일으키는 생명나라의 파수꾼입니다.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는 베드로의 말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15b) 증인을 가리키는 ‘마르투로스’라는 헬라어에는 순교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재판정에서 증인들은 자기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부활의 증인이라는 말은 부활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에 자기 목숨을 건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사실에서 기독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거기에 자신들의 모든 삶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예수님만이 ‘퀴리오스’(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로마의 황제를 퀴리오스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주가 부활의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것의 증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거부될 경우에 순교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전통에 따라서 오늘 우리도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물론 우리는 베드로와 동일한 차원에서의 증인은 아닙니다. 우리는 부활을 직접 경험한 사람도 아니고 그 사실을 사도들에게서 직접 말을 들은 사람들도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성서와 기독교의 전승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부활 경험자들이며, 동일한 증인들입니다. 이 사실을 동의하시나요? 이런 사실로 우리의 마음이 움직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사도들의 교회 전통을 잇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경험했고, 그것에 증인으로 나선 사도들의 공동체가 바로 오늘 우리에게 2천년동안 역사적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2천년은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닙니다. 바로 어제 우리가 베드로와 요한의 설교를 들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2천년 기독교 역사가 무엇을 말해 왔는지를 숙고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2천년의 역사를 통해서 이어져온 예전 예배를 드려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르게 수행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서’ 사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런 깊이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이런 영성이 깊어지는 사람은 죽임으로부터 살림의 세계로 나가기 마련입니다. 죽임의 문화에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오늘 한국의 청소년들이 죽임의 교육제도에 묶여 있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살림의 교육으로 끌어낼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물질 만능적 시대정신이 죽임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죽음의 자리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토대인 자연까지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돈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분들이 평생 풀어야 할 신앙적인 숙제입니다. 완전히 풀지는 못할 겁니다. 부활이 현실이 되는 종말에나 완전히 해결되겠지요. 그때를 기다려야겠지요.    

오늘은 부활절 셋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사람들입니다. 그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그 증인으로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부활 생명의 증인으로 나설 자격이 있을까요? 부활의 주님이 우리를 끌어주십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주님, 저희를 붙으시고, 부활의 빛을 비추소서. 아멘! (2009.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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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2]머리를비우고

April 27, 2009
*.146.226.207

전에 목사님 설교 하신 요한일서 3장 설교 말씀에 요한일서 기자가

창조주에 대한 개념을 파괴할 위험성을 안고도 영지주의 요소를 끌어들여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대비하면서 죄의 현실성을 처절하게 외친것 처럼...

우리 삶에도 이런 아슬하고 위험한 싸움이 끊이질 않는거 같습니다.

그저 저 개인만 해도 그런거 같네요.

예를 들어 죽임과 탐욕의 상징인 '로또'와 '경마사업'으로 돈을 벌어서 

'이웃을 돕는' 이런 모순이 과연 나눔과 살림의 모습인지 잘 모르겠지만...

찾아 보니 이런 일들이 많아서 잠시 복잡해 집니다....

머리는 하늘에 있고 발은 땅에 있으니... 어지럽고 어렵습니다.

특히 '증인'이라는 말이 오늘 따라 부담스럽게 다가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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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28, 2009
*.139.165.36

내가 설교한 내용을 나보다 더 잘 기억하고 계신 머리를 님,

역시 머리가 좋으시군요.

놀라운 사실이죠.

우리가 부활 생명의 '증인'이랍니다.

우선 그것을 경험해야만 증인 되는 건데,

정말 두려운 말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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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살람

April 27, 2009
*.30.4.116

'죽임의 길' 속에서 '죽임에 길들여져 살다가

주님의 큰 은혜로 '살림의 길'을 깨닫고 '죽임의 길'을 거슬러 사는 힘을 주시는 그 분께

끝까지 충성하며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대장 주님께만 의지하며

이번 한 주도 소망의 말씀으로 살아갈랍니다^^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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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28, 2009
*.139.165.36

살람 님,

인터넷이 있으니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설교를 들을 수 있고,

좋지요? ㅎㅎ

무엇이 죽임이고 살림인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바르게 인식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빨리 쾌차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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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0]새하늘

April 27, 2009
*.126.124.163

부활의 생명의 신비를 아는 자로서 어떻게 증인으로 살아 가야 하는지에 대해 또다시 고민을 해봅니다.

단순히 윤리적인 사람으로서 보다 하나님의 나라에 참 소망을 가진 자로써 그 날이 어떻게 실현되고,

어떻게 실현할지 증인의 한 사람 되기를 기도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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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28, 2009
*.139.165.36

부활의 증인이라니,

우리가 대견하지요?

일단 우리가 기독교 전통 안에

두 발을 굳게 딛고 서 있는 게 중요하답니다.

주여, 증인의 몫을 감당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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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April 27, 2009
*.116.154.86

정 목사님!  귀한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어제 들었던 저희 주일예배 말씀과 오버랩 되는 게 있어서..

은혜는 갚아야 한다 그리고 나누어야 한다.

우리의 삶이 다할 때까지 숙제를 얼마나 마칠 수 있으려는지..  ^^

 

말씀을 읽다가 초기 기독공동체-유대 기독교와 이방 기독교--의 그 갭이

지금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얼마전 내셔널 지오그라픽 잡지에

러시아에 기독교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마음이 좀 답답했었죠.

그 기사의 기독교는 러시아 동방 정교로 일컬어지는 것이고

요즘은 더군다나 신학공부를 제대로(!!) 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목사 또는 사제의 일을 마구잡이로 하기도 한다는군요.

오랜 동안 종교의 자유가 없었던 사회에서

변형된 새로운 모습의 기독교가 태어나는 거 아닌가 싶었거든요.

하긴 제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겠지요. ^^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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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28, 2009
*.139.165.36

모래알 님,

유대-기독교와 이방 기독교와의 차이는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큽니다.

갈라디아서에 잘 나와 있습니다.

러시아 정교회는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신학적으로, 영성적으로 깊이가 있습니다.

신학공부가 짧은 분들이 사제가 되는 일은

한국의 개신교회도 비슷한 실정이랍니다.

서로 다른 교파들이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여하는 게

극단적인 분파로 빠지지 않는 정도이겠지요.

좋은 한 주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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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April 28, 2009
*.116.154.86

예, 목사님! 

러시아 정교회의 신학이 깊은 영성을 가지고 있군요.

제가 읽었던 기사는 민속신앙과 합해지는 교회 같다는 인상을 주었거든요.

 

갈라디아서 공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헌데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부터 그렇게 치열한 다툼이 있었는데

이천 년이나 더 지난 지금 그 갭이 여전히 있지는 않은지요?

예수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있었던 다툼이

더 커지고 깊어지지나 않았을까는 생각을 잠시 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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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April 28, 2009
*.216.132.150

우리가 하루에도 열두번씩 죽임을 반복한다는 말씀에 깊은 공감이 갑니다.

죽임과, 살림의 명확한 분별력이 없는한 우리는

'생명'을 지향하고 살아내기엔 너무 힘겨울 것 같습니다.

분명히 저는 옳다고 소신있게 행동했지만,

그것이 생명사건과 무관한 '죽임'일 수 있다는 거,오늘 깊이 깨닫습니다.

말씀처럼 화장으로 때로는 성형수술로 또  암세포를 제거했다해도

그것으로는 '진리의 사수'가 될 수 없다는 가르침을 배웁니다.

그래서 민주주의 개혁은 인본주의적 사고라는 생각을 오늘 처음으로 해 보게 됩니다.

'우리의 나눔'차원에서 가능하다는 것도요. 

목사님, 말씀을 들으며 큰 위안을 얻었습니다.

며칠전부터 묵상하던 주제가 폭풍우중에도 태연히 주무시는 예수님이었는데,

하나님의 생명, 살림의 길에도 적용 될 수 있을 거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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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28, 2009
*.139.165.36

라라 님,

말씀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그렇게 적용하시는군요.

길을 잘 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정의로운 나눔이 이 현실에서 중요한 것이지만

그 나눔 이전의 손길에 주목하는 것이 훨씬 본질적인 것이겠지요.

물론 이 세상에서 악한 세력과의 투쟁은

또 하나의 다른 주제이고요.

그러니까 우리 기독교인의 싸움은

근본적으로 선한 것이며,

이미 승리를 선취한 것이라 할 수 있어요.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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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Epiphany

April 28, 2009
*.52.65.76

생명이 완성되는 그 날까지 기다리며 사는 삶이 때로는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여전히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고...

묵묵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의 완성을 갈망만 하면 되는 것인지..

이런 고민 안에 나태함을 묻어 두는건 아닌지..

온 우주 가운데 운행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볼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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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28, 2009
*.139.165.36

에피파니 님,

이 현실에서 우리가 행해야 할

윤리적 요청에 관심을 끄라는 말씀은 아니랍니다.

종말론적 생명을 기다린다는 사실에는

이미 그런 행위가 포함된 것입니다.

그 행위가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만 다른 거지요.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지금 죽음 앞에서 행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그 죽음을 넘어서는,

즉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 참된 생명의 현실인데,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요?

아무 것도 없답니다.

그러나 그 생명과 그 약속을 아는 사람은

이 현실이 그런 생명의 빛이 침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말하고, 행동하겠지요.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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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3]웃겨

April 28, 2009
*.156.34.82

"이런 영성이 깊어지는 사람은 죽임으로부터 살림의 세계로 나가기 마련입니다. 죽임의 문화에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목사님, 이 말씀이 계속 맴도는군요.

이 죽임의 문화가 팽배한 사회에서 노예로 살지않고 어떻게 흔들림없이 살림의 세계로, 증인으로 살아나야느냐... 이것이 오랜 저의 목마른 고민이고 관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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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28, 2009
*.139.165.36

웃겨 님,

내가 보기에는 지금 웃겨 님은 살림의 영성으로 살아가고 있는데요.

더이상 무엇을 원하시는지요?

지금 끊임없이 자기를 반성적으로 바라보고

주변의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고 있지요?

생산과 소비가 악순환되는 이 문명을 거역해보려고 몸부림을 치고,

인간 삶의 허위의식을 멀리하고 있으시잖아요.

그러면 됐습니다.

나머지는 웃겨 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이랍니다.

아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몫이구요.

우리는 그전 흉내만 낼 뿐입니다.

다비아에서 그림일기를 그리고 쓰는 것도

살림의 역동적인 프락시스랍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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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April 29, 2009
*.216.132.150

저도 평소에 웃겨님의 그림일기를 통해서' 생명의 길'을 배우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그동안 마땅한 표현을 몰랐는데, 그게 '살림'이라는 거군요. 

오모나, 그러고 보니, 이거 익숙한 말이네요. 그렇지요?

김지호 목사님 평안 하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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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9]이선영

April 28, 2009
*.164.230.58

부활 사건에 모든 것을 건 삶이란 우리의 구체적인 삶 에서 대체 어떤걸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럼 직접 경험도 아닌 간접 경험도 아직 못 해본 그 부활은 뭘까..

삶의 토대가 되는 부활을 알기위해서라도 기독교의 전통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것 같아요.

우리는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이고, 지금도 죽이는 일을 하고 있지만 절망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이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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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28, 2009
*.139.165.36

이선영 양,

나이답지 않게 진지한 고민을 하시는구료.

스스로 답을 찾았소.

기독교의 중심, 그 공동체의 삶 안으로 들어가는 게 중요해요.

그런 삶에 실제로 영혼을 걸기만 한다면

부활의 현실이 천천히 열리게 될 거요.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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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늘노래

April 30, 2009
*.144.99.137

(질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가 역사의 무대에서 살아졌다고 하셨는데

지금 이스라엘에 (미미하게)존재하는 기독교는 신앙적으로 어떤 정체성을 띠고 있는지,

과거부터 명맥을 유지해 온 유대계 기독교인인지

바울쪽으로 기울어진 헬라적 영성에 기초한 지금의 기독교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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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30, 2009
*.139.165.36

늘노래 님,

질문한 내용의 대답을 제가 잘 모르겠네요.

그냥 상식적으로 말하면

지금 이스라엘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초기 유대-기독교의 후예라기보다는

헬라파 기독교가 다시 전파된 것으로 보이는데요.

연구해 보시고,

정확한 정보가 있으면 알려주세요.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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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병훈

May 01, 2009
*.223.90.153

질문이요!!!

파일의 내용은 뭔가요?

요즘 첨부파일에 바이러스가 워낙 많아서 설명이 없는 파일은 열기가 겁이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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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J_카타리나

May 02, 2009
*.177.101.175

요근래 눈에 들어오는 글의 내용들이 부활에 관한 글인 걸 보니

주께서

제게 부활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시고자 하시나 봅니다.^^*

오늘은 왠지 글을 가져간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 댓글 남김니다.

그동안은 로그인도 안하고 글만 옮겨갔었거든요.^^;;

감사히 읽고 옮겨갑니다. (꾸벅^^*)

이 곳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평화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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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02, 2009
*.139.165.36

예, 카타리나 님,

안녕하세요.

부활에 관한 글에 마음이 간다고 하시니

동지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주님의 부활을 기리는 좋은 주일을 맞으세요.

 

profile

[레벨:26]병훈

May 06, 2009
*.223.90.153

설교 제목을 처음 대할 때 부터

죽임 살림 증인 - 마치 우리 삶에 화두 인듯 합니다..

이것을 붙잡고 어떤 깨달음이 있을지 기다리고 기대하는 맘을 가져 봅니다..

굳이 불가와 차이를 두자면 깨달음의 원천을 수행으로 생각하느냐 은총으로 보느냐가 아닐까요..

여전히 깨달음과는 100만 광년 떨어져 있음을 느끼지만 이럴 때 일수록 주의 은총이 필요하니 함께해 주시기 않겠습니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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