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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요 16:5~15)

성령강림절 조회 수 5348 추천 수 0 2021.05.23 19:40:13
설교보기 : https://youtu.be/WQ1egpbbCp4 
성경본문 : 요한복음 16:5~15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16:5~15, 성령강림절 주일, 2021523

 

 

오늘은 전 세계 교회가 성령강림절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성령강림절은 유대교의 오순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오순절은 유월절이 지나고 50일째에 오는 유대교 절기입니다. 신약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따르면 유월절에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 사건이 일어났고, 오순절에는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성령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삼위일체의 한 구성 요소로서 우리를 살리는 영(프뉴마)이라고 말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은사주의 관점으로 성령을 이해합니다. 방언, 신유, 투시, 예언 등등을 일으키는 힘이라고 말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말은 기도를 열심히 하고, 전도에 자기 인생을 걸고, 늘 기쁨이 가득한 사람처럼 사는 삶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성령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성령을 받으며, 성령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성령이 정말 존재할까요?

우선 오늘 설교 본문에 속하는 요 16:5~7절이 가리키듯이 보혜사, 즉 성령을 보내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묻는 것으로 시작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이 코앞에 닥친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스승이 자기들 곁을 떠날 것이라는 말을 듣고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는 것이 오히려 제자들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떠나지 않으면 보혜사, 즉 성령이 그들에게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에는 성령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도 예수님과 함께했습니다. 4:1절에 따르면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 성령에게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모두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을 보내겠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부재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사역이 계속된다는, 또는 제자들에 의해서 이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일을 이끄는 이가 곧 성령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신 성령의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게 곧 성령을 받는 것이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일이 자신의 삶을 가득 채우면 그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보혜사, 즉 성령의 일을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8절에 나옵니다. 첫째는 죄를 밝히는 일, 둘째는 의를 드러내는 일, 셋째는 심판을 실행하는 일입니다. 이어서 9, 10, 11절에서 각각 항목을 나눠서 풀이하셨습니다.

 

9절은 이렇습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문장이 모호합니다. 대충 들리는 대로 보면 세상이 예수를 믿지 않기에 죄에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문장을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남을 해롭게 하지 않았는데도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로 죄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게 죄인 이유를 알려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무슨 뜻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오늘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할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2천 년 전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소수였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습니다. 예수는 사회 체제를 위태롭게 할 위험인물로 낙인찍혔기 때문입니다. 유대교 최고법정인 산헤드린이 볼 때 예수는 신성모독자였고, 로마 법정이 볼 때 예수는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를 깨뜨릴 자였습니다. 기존의 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이런 자는 큰 사고를 일으키기 전에 제거해야 합니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일은 물론 중요합니다. 개인과 사회를 파괴하는 이들은 강제로라도 격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강제력은 손쉽게 어느 대상이나 집단을 파괴하는 데 이용됩니다. 자신들의 체제나 기득권에 장애가 된다고 여기는 대상을 강제력으로 제압하거나 제거하는 것입니다. 독일 나치즘이 유대인을 박멸했듯이 말입니다. 강제력은 칼과 같아서 바르게 사용하면 사람을 살리지만 잘못 사용하면 죽입니다. 사람은 칼을 통해서 자기의 힘을 과시하려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습니다. 거기서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게 죄입니다. 예수 십자가 처형은 세상이 죄에 물들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사건입니다. 그런 일은 지난 2천 년 역사에서 반복되었고, 지금도 여전합니다. 예수 십자가 처형 사건이 교회에서 고백 될 때마다 인간의 죄가 밖으로 드러납니다.

 

10절은 이렇습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성령이 하시는 두 번째 일은 의, 즉 정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정의를 윤리와 도덕과 관습과 실정법의 차원에서 생각합니다. 검찰과 법관도 그런 기준으로 정의를 실현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이 세상에는 그런 정의 실현도 없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정의를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말합니다. 생명 구원이라는 차원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곧 정의를 실현하는 일입니다. 착한 사람과 못된 사람을 구분하는 일은 법이 하는 것이고, 착한 사람과 못된 사람이 각각 생명을 얻게 하는 일은 성령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과 승천 사건 앞에서는 착한 사람과 못된 사람의 차이가 사라집니다. 똑똑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도 무의미합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난파선이 있다고 합시다. 선장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을 살리려고 방법을 찾습니다. 수영할 줄 아는 사람은 바다에 뛰어들라고 말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구명정에 올라타라고 말합니다. 누구를 먼저 살려야 할지도 판단해야 합니다.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거대한 구조선이 그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구조선에는 남녀노소, 악인과 선인 가릴 것 없이 모두 올라탈 수 있습니다. 이런 구조선이 바로 부활과 승천의 예수라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이가 성령입니다. 이게 옳은 가르침일까요?

 

심판

11절은 이렇습니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심판 항목과 앞에서 언급된 죄와 의는 나뉘지 않고 한 묶음으로 연결됩니다. 세상 임금은 말 그대로 세속 권력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입니다. 세금을 거둬서 길을 내고 학교를 운영하고 군대를 유지합니다. 때로는 전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범법자들을 감옥에 넣습니다. 경제를 발전시킴으로써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자신들이 정권을 잡아야만 세상이 더 좋아진다고 선전합니다. 자신들이 세상을 끌어가고 심판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들이 오히려 심판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려면 정치가 세상을 구원하는지를 일단 물어보십시오.

가장 간단히 말하면 정치는 필요악입니다. 정치는 없어도 살아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정치가 없으면 세상이 카오스로 떨어지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겁니다. 정치가 필요악이라면 정치인들은 자신과 자신의 행위를 조심스럽게 성찰하면서 국민을 섬기는 데에 모든 힘을 쏟아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코로나19라는 대재난도 결국은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직간접으로 정치에 관련된 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이와 달리 정치적인 이해득실만 계산하는 정치인들이 우리나라에 너무 많습니다. 코로나19 초기에 중국에서 오는 이들을 막지 않았다거나 마스크를 준비하지 못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정부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있을 수 있고, 시간을 기다려야 성과가 나는 대책도 있는데, 무조건 비판하는 정치인들이 많았습니다. 언론도 이런 정략적 행동에 한몫 감당했습니다. 요즘의 백신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나라가 상대적으로 많이 들여온 백신 아스트라제네카의 효용성이 다른 백신에 비해서 크게 떨어진다고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아스트라제네카만 접종한 영국이 집단 면역에 성공했다고 칭찬합니다. 모순되는 주장을 펼칩니다. 일부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정권을 잡을 수만 있다면 나라가 코로나 방역에 실패해도 괜찮다고 여기고, 일부 언론인들 역시 자신에게 우호적인 정권이 들어설 수만 있다면 나라가 망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진리의 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심판자 노릇을 하는 세상 임금에 대한 심판이라는 게 요한복음의 주장이 모든 사람의 눈에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그들 눈에는 세상 임금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는 성령이 우리가 참된 것을 보게 한다고 역설합니다. 성령이 곧 진리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진리의 성령이라는 말은 헬라어 τΠνεμα τς ληθείας의 번역입니다. 이런 단어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제논 등등,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도 사용하던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진리라는 뜻의 헬라어 알레테이아를 탈은폐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알레테이아에서 이라는 접두사이고 레테이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로 죽은 사람이 건너게 될 레테의 강(망각의 강) 개념에서 나오는 망각을 가리킵니다. 알레테이아는 망각으로부터의 탈출, 즉 탈은폐라는 겁니다. 이렇게 숨어 있는 실체를 드러내는 영이 곧 진리의 영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진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거짓과 위선을 폭로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착하냐 아니냐와 상관이 없습니다. 착한 사람도 진리를 무서워하고, 외면합니다. 하나의 단적인 예는 며칠 전에 기념일을 보낸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1980년 봄 당시에 저는 광주 인근에 있는 보병학교에서 군종 장교 후보생 군사 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시위에 나선 이들을 폭도라거나, 더 나아가서 5.18 사건에 북한군이 개입했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일부 국민에게 설득되는 이유는 진리를 두려워하거나 진리를 외면함으로써 자신들의 심리적 안정감을 도모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던 국회의원이 속했던 야당에서 얼마 전부터 5.18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욥 이야기에도 우리가 피하고 싶은 실체적 진실이 있습니다. 욥은 졸지에 모든 재산과 자식을 잃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까지 그를 비난했습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2:9). 욥은 3장에서 자기 생일을 저주합니다. 어머니 태 안에서 죽는 것이 더 좋았다는 탄식입니다.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욥 3:26). 극심한 고통에 떨어진 사람이 쏟아낼 수밖에 없는 절규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를 게 없습니다. 우리 자신은 운이 좋아서 편안하게 사는지 모르나 누군가는 저런 운명을 당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욥이 한탄했듯이 태어나지 못했거나 빨리 세상을 떠나는 게 차라리 낫다는 심정으로 삽니다. 간혹 저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도박판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거기서 재미를 느끼면서 가능하면 오래 머물고 싶어 합니다. 어떤 사람은 도박판이 너무 지루하거나 답답해서 당장 떠나도 아쉬울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에서 아쉬운 게 없다고 여기는 나이는 어느 정도일까요? 객관적인 나이보다는 인생살이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 정도의 나이면 되겠지요. 그 실체를 뚫어보는 게 진리의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인생은 어떻게 살아도 고뇌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현실의 삶을 부정하거나 도피하는 게 옳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자유와 같은 의미입니다. 진리는 우리를 위선과 독선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우리를 어린아이 상태에서 어른으로 만듭니다. 이 세상과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무엇이 죄인지, 무엇이 정의인지, 무엇이 심판인지를 뚫어보게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보내시겠다고 약속하는 성령은 곧 자유의 영입니다. 여러분은 그 자유의 영을 원하지 않으십니까?


예수의 영

어떻게우리는 진리와 자유의 영이신 성령의 이끌림을 받을 수 있을까요? 착한 일을 많이 하면 될까요? 교회에서 봉사 생활 열심히 하면 될까요? 공부 많이 하고 자식 잘 키우면 될까요? 자연에 들어가서 농사짓거나 바닷가에서 고기 잡으면서 유유자적하게 살면 될까요?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이뤄지는 여러 삶의 방식이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데에 도움이 되긴 할 겁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이런 삶으로 만족해도 좋으나 기독교인이라면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더 근본적인 차원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은 13~15절에서 설명합니다.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한 설명입니다. 세 가지입니다. 1) 성령은 오직 들은 것을 말합니다. 예수가 전한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가리킵니다. 2) 성령은 예수 영광을 나타냅니다. 3) 성령은 예수의 것으로 하나님을 알게 합니다. 한 마디로 성령은 예수의 영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이끌림을 받기 원한다면 당연히 예수와 그의 가르침에 가까이 가야 합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예수님은 일종의 모닥불과 같습니다. 추운 날 가까이 가면 몸을 녹일 수 있고, 밤에는 빛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변 사람이 다 떠나도 외롭지 않고, 삶이 나락으로 떨어져도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런 따뜻하고 환한 느낌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다는 말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자신의 고유한 인격 안에서 예수를 느끼는 분도 있고, 느끼지 못하는 분도 있는 겁니다. 느끼지 못하는 분들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다만 성령의 도우심을 자신이 피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정말 절실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공기가 점점 줄어드는 방에 갇힌 사람은 답답한 숨쉬기가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껴야만 탈출구를 찾는 거 아니겠습니까. 느끼지 못하면 그대로 갇혀 그럭저럭 지내겠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으신가요? 원 없이 재미있게 살고 싶으신가요? 다른 사람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 싶으신가요? 세상 임금이 되고 싶으신가요? 하나님이 주신 은사대로 마음껏 행복하게 살아보십시오. 여기서 핵심은 여러분이 예수의 영이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이끌림을 온전하게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저의 평생소원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도 저와 같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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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은혜

May 25, 2021
*.83.84.157

금수저로 태어나서 엘리트 코스를 밟은후에 판 검사가 된 젊은이들에게는 법복을 바로 입혀서는 안된다고 하죠?


신학생들도 인간, 삶, 역사에 대한 통찰없이

신학대학, 해외유학..등 기계적인 코스를 밟은후 안수를 받기만 하면

설교단 위에 세워선 안되겠구나....

이번 목사님의 설교를  접하면서 그런 단견이 들었답니다.


가끔 그러셨죠?..

목사는 성경을 자기 언어로 해석해내야 한다..고요

자기 언어라는게 수사적인 표현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겠죠?

인간, 역사, 삶에 대한 설교자 고유의 경험과 그 통찰의 배태속에서 성경해석이 녹아나와야 한다는 의미겠죠?


작금의 설교들이

종교적 언어의 성찬으로 가득한데도, 교장 선생 훈화같이 들리는건

인간, 역사, 삶..  그 깊고, 불가해한 인간 실존에 대한  성찰과 고뇌, 욥을 방불하는 절규의 상흔이  없기때문일까요?


성령론을 설명하면서 생경하게도 욥기(2:26)를 인용하셨는데, 그 여운이 오래갔습니다.  

인생의 실존을 뚫어보게 하는 눈을 갖게하는게 성령의 역할이다....


비단 우리의 삶이 나락에 떨어졌을 때만이 아니어도,

실존 자체가, 존재의 깊이가 평안도, 쉼도 없고 불안뿐이라는..

도망가고 싶고, 외면하고 싶은 이런 하루 하루의 실존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퇴비로 쌓여가는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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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25, 2021
*.182.156.93

부스러기 님 처럼 텍스트의 근본 줄기를 따라가는 청중들이 있을 때

설교자는 게을러지 않을 뿐만 아니라 힘도 날 겁니다.

설교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욥 이야기가 끼어들었습니다. 

욥의 외침와 진리의 영이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기독교 가르침 안에서 짚었다면 어느 정도는 창조적인 설교가 되었겠지요.

그건 그렇고 요즘 저는

욥의 저 절규와 바울이 말하는 '피조물의 탄식'(롬 8:22)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예수님의 외침이 오버랩되는 걸 느낍니다.

저 실존을 피하지 말고 직시해야만 구원의 빛에 반응할 수 있겠지요.

평화가 임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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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8 부활절 선한 목자 (요 10:11~18) 2021-04-25 4887
897 부활절 회개 (행 3:12~19) 2021-04-18 5549
896 부활절 그는 "변호인"이다 (요일 1:1~2:2) [1] 2021-04-11 5910
895 부활절 빈 무덤 앞에서 (막 16:1~8) [3] 2021-04-04 6142
894 사순절 "일어나라, 함께 가자!" (막 14:32~42) 2021-03-28 5825
893 사순절 순종과 영원한 구원 (히 5:5~10) [6] 2021-03-21 4394
892 사순절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 (요 3:14~21) [15] 2021-03-14 6293
891 사순절 십계명 "너머" (출 20:1~17) [7] 2021-03-07 6341
890 사순절 아브라함의 믿음, 우리의 믿음 (롬 4:13~25) [2] 2021-02-28 5838
889 사순절 예수와 복음 (막 1:9~15) [9] 2021-02-21 6385
888 주현절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공의 (시 50:1~6) [2] 2021-02-14 4287
887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9~39) [2] 2021-02-07 3711
886 주현절 선지자의 운명 (신 18:15-20) [2] 2021-01-31 6322
885 주현절 세상의 외형 (고전 7:29-31) 2021-01-24 4630
884 주현절 하늘이 열리고 … (요 1:43-51) [7] 2021-01-17 7850
883 주현절 하늘로부터 … (막 1:4~11) [3] 2021-01-10 9438
882 성탄절 영광-찬송 (엡 1:3~14) [2] 2021-01-03 5826
881 성탄절 행위에서 존재로! (갈 4:4-7) [5] 2020-12-27 8349
880 대림절 "은혜를 받은 자여!" (눅 1:26-38) [2] 2020-12-20 9856
879 대림절 "너는 누구냐?" (요 1:19-28) [4] 2020-12-13 10759
878 대림절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2020-12-06 10796
877 대림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3-9) 2020-11-29 8479
876 창조절 영벌인가, 영생인가! (마 25:31-46) [3] 2020-11-22 8007
875 창조절 '주의 날'과 일상 (살전 5:1-11) [4] 2020-11-15 8478
874 창조절 생명 완성의 때 (마 25:1-13) [2] 2020-11-08 8036
873 창조절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수 3:7-17) [2] 2020-11-01 10007
872 창조절 삶의 견고한 토대 (시 90:1-6, 13-17) [4] 2020-10-25 6143
871 창조절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출 33:12-23) [4] 2020-10-18 11162
870 창조절 청함과 택함 "사이" (마 22:1-14) 2020-10-11 7243
869 창조절 자기 의(義)와 하나님의 의 (빌 3:4-14) [2] 2020-10-04 7929
868 창조절 대제사장과 장로, 세리와 창녀 (마 21:23-32) [2] 2020-09-27 9285
867 창조절 복음, 은혜, 믿음, 고난 (빌 1:21-30) [2] 2020-09-20 5647
866 창조절 용서, 그 불가능한 명령 (마 18:21-35) [9] 2020-09-13 7997
865 창조절 "급히 먹으라!" (출 12:1-14) [2] 2020-09-06 5561
864 성령강림절 "사탄아!" (마 16:21-28) [2] 2020-08-30 5154
863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5] 2020-08-23 4715
862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하심 (롬 11:1-2a, 29-32) [4] 2020-08-16 4874
861 성령강림절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마 14:22-33) [2] 2020-08-09 7759
860 성령강림절 "브니엘"에서 (창 32:22-31) [5] 2020-08-02 5340
859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마 13:31-33, 44-52) [5] 2020-07-26 5350
858 성령강림절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롬 8:12-25) [2] 2020-07-19 4933
857 성령강림절 에서와 야곱 이야기 (창 25:19-34) [4] 2020-07-12 13420
856 성령강림절 쉼 (마 11:16-19, 25-30) [2] 2020-07-06 8362
855 성령강림절 냉수 한 그릇의 궁극적 의미 (마 10:40-11:1) [2] 2020-06-28 5831
854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9) 2020-06-21 5454
853 성령강림절 못 하실 일이 없는 하나님 (창 18:1-15) [6] 2020-06-14 6468
852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고후 13:11-13) [4] 2020-06-07 5282
851 성령강림절 성령 공동체의 길 (고전 12:4-13) [2] 2020-05-31 4519
850 부활절 영광과 영생 (요 17:1-11) [4] 2020-05-24 5273
849 부활절 사랑과 계명 (요 14:15-21) 2020-05-17 5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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