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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출현 (삼상 8:4~11, 16~20)

성령강림절 조회 수 3803 추천 수 0 2021.06.07 08:49:12
설교보기 : https://youtu.be/TGKolzn62-Q 
성경본문 : 사무엘상 8:4~11, 16~20 

왕의 출현

삼상 8:4~11, 16~20, 성령강림 후 둘째 주일, 202166

 

 

구약성경의 배경에는 유대 민족의 사회 발전과정이 나옵니다. 그들의 족장이라 할 수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활동하던 시절이 바로 씨족사회입니다. 씨족사회의 마지막은 야곱이 대 흉년을 당하여 대략 70여 명에 달하는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이주하는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4백여 년을 지내면서 인구수가 크게 늘었습니다. 후손의 한 사람인 모세가 유대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했고, 이어서 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는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영토 전쟁을 주도했습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지도자들을 사사라고 부르는데, 그 시대를 부족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사사는 사무엘입니다. 그 시기는 기원전 11세기입니다.

 

왕정 요구

사무엘은 늙은 한나가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바쳐서 낳은 아들입니다. 그런 사람을 나실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실로의 성소에서 제사장 엘리와 함께 지내다가 엘리가 죽은 다음에 자연스럽게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당시의 유대가 처한 상황은 녹록지가 않았습니다. 강력한 지도 체제를 갖췄던 블레셋이 늘 위협적이었습니다. 블레셋이 유대의 열두 지파를 무력으로 공격할 때마다 위대한 사사들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곤 했습니다. 백성들은 사사 체제로는 이런 곤경을 벗어나기 힘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백성의 대표 격인 장로들이 당시 제사장이자 사사였던 사무엘에게 와서 자신들의 의견을 전했습니다. 한 마디로 왕정을 시작하자는 주장입니다. 그들의 주장을 5절이 이렇게 전합니다.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그들의 주장이 이해됩니다. 강력한 세력을 갖춘 주변 민족들은 대개 왕정 체제였습니다. 왕정 체제가 유대 백성들에게도 매력적으로 비쳤습니다. 당연합니다. 왕정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왕권이 왕 후손에게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왕은 왕권의 혈통을 지켜내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경제를 발전시켜야 하고,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도 이겨야 합니다. 왕을 중심으로 강력한 나라가 되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상비군을 갖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왕권의 강화와 직결됩니다. 사사 시대에는 상비군이 아니라 예비군만 있었습니다. 평소에 농사를 짓거나 양을 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무기를 드는 겁니다. 사사들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이런 예비군을 데리고 블레셋의 정규군과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여기 가나안에서 다른 민족들과 영토 분쟁을 벌이기 훨씬 이전인 이집트 시절에 이미 왕정의 힘을 경험했습니다. 이집트 백성들의 왕인 파라오는 신격화되었습니다. 나일강 유역에서 나오는 풍부한 농산물이 국력의 토대였습니다. 피라미드가 상징적으로 가리키듯이 이집트는 당시에 지중해 인근의 그 어느 나라보다 부강한 나라였습니다. 이런 역사 경험이 분명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 당장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고 해서 유대 백성들은 왕정을 강력하게 요구한 것입니다. 사무엘의 약점까지 파고들었습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이 백성들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는 겁니다. 사무엘의 스승인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도 백성의 신임을 얻지 못해서 결국 사무엘이 지도자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사무엘은 장로들의 요구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만 본다면 장로들이 사무엘 자신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분 나빠했는지 모릅니다. 담임 목사에게 장로들이 이제는 다른 목사를 데리고 와야겠다고 말하는 상황과 비슷하긴 합니다. 평생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살폈던 사무엘은 더 본질적인 이유로 반대했을 겁니다. 그는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기도 응답이 7~9절에 나옵니다.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

 

이어서 왕정 체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관한 내용이 길게 나열됩니다. 그 내용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젊은 남자들은 군대에 가야 합니다. 군사비도 지출해야 합니다. 왕궁을 화려하게 지어야 하고, 왕을 보필할 관료를 둬야 합니다. 이게 다 세금으로 충당해야 할 일들입니다. 왕과 가족을 시중들 젊은 여자들도 필요합니다. 17절에는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백성들은 다른 나라처럼 왕이 있어야만 전쟁에서 잘 싸울 수 있다는 논리를 제시했습니다. 전쟁에서의 승리가 바로 왕정의 본질입니다. 로마 시대에도 전쟁 승리가 절대 이데올로기였습니다. 황제가 되려면 반드시 전쟁에서 승리한 업적을 보여야만 했습니다. 왕정이 아니라 민주시대인 오늘날도 이런 본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정치 지도자를 백성들은 갈망합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이런 백성의 갈망을 이용합니다.

 

요담 우화

사무엘 시대 이전에 이미 유대의 왕이 되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기드온의 아들 중의 한 사람인 아비멜렉입니다. 사사 기드온에게는 70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부인도 여러 명이었습니다. 세겜이 고향인 여자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아비멜렉입니다. 기드온이 죽자 아비멜렉은 외가가 있는 세겜 사람들을 설득하여 왕이 됩니다. 그가 설득한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기드온의 아들 70명이 지도자가 되는 것보다는 세겜 출신의 어머니를 둔 자신이 왕이 되는 게 당신들에게 훨씬 좋은 거라는 논리입니다. 70명을 섬길래, 한 명을 섬길래, 하는 압박입니다. 거기에다가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라고, 우리가 남이가.” 하는 말로 설득했습니다. 그는 세겜의 왕이 되었고, 날을 잡아 기드온의 남은 아들들을 다 죽입니다.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이었습니다. 한 왕자만 용케 죽음을 면했습니다. 요담입니다. 그는 세겜 사람들에게 아비멜렉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이 왜 잘못인지를 우화 형식으로 전합니다. 9:8~15절입니다.

나무들이 왕을 정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감람나무에게 가서 너는 우리 위에 왕이 되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감람나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감람나무가 사람보다 낫군요. 나무들은 다시 무화과나무에게 가서 왕이 되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의 단 것과 나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나무들의 세계가 사람들의 세계보다 훨씬 수준이 높습니다. 나무들은 다시 포도나무에게 가서 부탁했으나 똑같은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시나무에게 갔습니다. 가시나무는 자기에게 복종하고 아부하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대답합니다. 감람나무의 기름도 없고, 무화과나무의 아름다운 열매도 없고, 포도나무의 포도주도 없는 가시나무만 우쭐대기를 좋아하는 겁니다.

정곡을 찌르는 우화입니다. 그림에 자신의 영혼을 담는 화가는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되어달라는 요구를 거절할 겁니다. 목회를 소명으로 받아 열심히 일하는 목사 역시 기업 총수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당연히 손사래를 칠 겁니다. 풀꽃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나태주 시인에게 대학교 총장이 되어달라고 하면 사양하지 않겠습니까. 대학교 행정 업무에 시달려서 시를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니까요. 지나가듯이 인터넷 뉴스에서 들은 말인데, 문재인 대통령은 다시 태어나면 농사를 짓든지 나무를 심는 사람이 되겠다고 합니다. 정말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정치인이 되고 싶어 하지 않은 사람인데, 우여곡절 끝에 정치를 운명으로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자기 삶을 희생하는 중입니다. 그동안 수고 많았으니, 대통령직 마무리를 잘하고 시골로 내려가서 농사짓고 나무 심으면서 여생을 편안히 보내기 바랍니다.

저는 정치를 백해무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치 혐오주의자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현실적으로도 옳지 않습니다. 인류는 왕정에서 시작하여 봉건제와 민주 공화제를 거치면서 정치를 떼어놓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와 로마의 카이사르로 대표하는 권력의 맛을 포기할 수 없게 된 겁니다. 백성들도 간접적으로 그런 맛을 즐기려고 기꺼이 종으로 사는 걸 택합니다. 이런 역사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최선은 정치 권력의 문제점을 주시하고 정치의 본질을 뚫어보며 끊임없이 대안적인 정치제도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정치 영역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인생 자체에 해당합니다. 우리 개인도 부단하게 왕정 지향적으로 살아갑니다. 백성들이 왕을 원한다는 말을 들은 사무엘이 기도했을 때 들은 대답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사무엘을 버리는 게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유대 백성의 미래를 확실하게 지킨다는 사실을 알고 믿었다면 굳이 골치 아픈 왕정을 원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확신이 없으니 눈에 보이는 왕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신으로 섬겼던 일의 반복입니다. 유대 백성은 출애굽 이후로 반복해서 다른 신을 섬겼습니다. 가나안의 신인 바알을 섬겼습니다. 그런 우상숭배의 결정판이 왕정 시도입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에 사울이 왕으로 옹립되었습니다. 유대 백성은 전쟁의 소용돌이 안으로 휩쓸리고 말았습니다. 구약성경이 보도하는 역사의 마지막은 유대 백성의 바벨론 포로였습니다. 그 포로 역사의 출발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신 왕의 출현이었습니다.

 

피조물의 절대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다.”(삼상 8:7)라는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마치 세속 왕과 경쟁이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성경에 여호와 하나님은 분노하고 시기하는 분이라는 표현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런 표현은 모두 문학적 수사입니다. 문학적 수사와 실체적 진실을 혼동하면 곤란합니다. 유대 백성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들이 피조물을 절대화한다는 뜻입니다. 왕정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그것의 절대화에 대한 경고입니다. 피조물의 절대화는 우상숭배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그 결과는 파멸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무엇을 왕처럼 절대권력으로 믿고 종처럼 사는지를 보십시오. 어떤 이는 과학이나 돈이나 가족이나 쾌락을 절대화할 겁니다. 일일이 제가 거론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요담 우화의 표현을 따르면 우쭐대는 세력이 바로 절대권력입니다. 가장 노골적으로 우쭐대는 권력은 물론 정치입니다. 저는 정치인들과 가깝게 지내본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나, 언론에 나오는 몇몇 이야기만 보더라도 그들이 매우 우쭐댄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입니다. 정치 권력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들은 무슨 말이나 하고 무슨 일이든지 합니다. 자신의 권력의지를 실현하려고 국민을 도구로 여깁니다. 모든 정치인이 그렇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정말 겸손하고 자기 주제를 파악하고 상대 정치인을 인정하면서 품위 있게 정치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런 분들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전반적으로는 우쭐대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여긴다는 말은 이 세상을 실제로 통치하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통치가, 그의 사랑이, 그의 선하심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고대 유대 백성도 자신들이 원하는 일들이 그대로 일어나지 않기에 하나님의 통치를 실감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삼상 8:8a)라는 문장을 보십시오. 홍해가 갈라지고, 만나가 내리고, 요단강이 멈추고,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그런 일들도 하나님의 통치를 실감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게 불만스러운 겁니다. 세상이 불만스러우면 불만을 해결해줄 다른 대상을 찾게 됩니다. 다른 대상을 찾아도 문제는 계속됩니다.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도 여전히 곤란한 일들이 나타나듯이 말입니다. 모두에게 불만이 없는 세상이 가능할까요?

저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도움이 될까 해서 요담 우화를 다시 짚겠습니다. 왕이 되기를 원치 않았던 나무들의 공통점은 자신들의 존재 근거를 외부가 아니라 자신 안에서 찾았습니다. 남 앞에서 우쭐대는 방식으로 사는 게 아니라 기름을 내고, 과일을 맺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런 일을 찾은 사람은 자기를 높이는 엉뚱한 일에 눈을 돌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런 자세로 살면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이 안하무인으로 굴지는 못할 겁니다. 아무도 그들 앞에서 종이 되려고 하지 않는데, 어떻게 왕이 잘난체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 안에서 존재 근거를 찾는 삶이야말로 하나님을 왕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니까요. 그렇습니다. 그 창조의 기쁨이 충만한 사람은 다른 데에 자기 인생을 소비하지 않습니다. 걷고 청소하는 데서 존재의 기쁨을 안다면 조금 큰 집에 살거나 작은 집에 살거나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만약 밥 한 그릇만으로 충분한 기쁨을 누릴 줄 안다면 공연한 일로 다투지 않습니다. 이런 존재의 기쁨 끝자락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궁극적으로 선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쁨의 찬양을 부릅니다. 그분이 바로 생명의 세계에서, 또는 존재의 세계에서, 자유의 나라에서 왕이라는 사실을 절감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또는 무엇을 왕으로 섬기면서 사십니까? 여러분은 어디서 삶의 희열과 존재의 기쁨을 충만하게 느끼십니까?

예수님의 출생 전승에 왕 이야기가 나옵니다. 동방에서 별을 보고 찾아온 천문학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2:2) 하고 묻습니다. 그들은 새로 태어난 아기를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바쳤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에도 왕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를 심문하는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27:11)라고 묻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왕 중의 왕(king of kings)라고 믿습니다. 그는 평화의 왕이고, 정의의 왕이고 사랑의 왕이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이해되지 않고 실감 나지 않는 분이 혹시 이 자리에 계십니까? 안타깝지만 저의 설교는 여기까지입니다. 성령께서 그분들의 영혼을 선하게 이끌어주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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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June 0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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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백여 년-아브라함의 때부터 400년(창 15:13), 430년(갈 3:17)이니 300여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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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2 성탄절 영광-찬송 (엡 1:3~14) [2] 2021-01-03 5826
881 성탄절 행위에서 존재로! (갈 4:4-7) [5] 2020-12-27 8350
880 대림절 "은혜를 받은 자여!" (눅 1:26-38) [2] 2020-12-20 9860
879 대림절 "너는 누구냐?" (요 1:19-28) [4] 2020-12-13 10761
878 대림절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2020-12-06 10797
877 대림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3-9) 2020-11-29 8480
876 창조절 영벌인가, 영생인가! (마 25:31-46) [3] 2020-11-22 8010
875 창조절 '주의 날'과 일상 (살전 5:1-11) [4] 2020-11-15 8480
874 창조절 생명 완성의 때 (마 25:1-13) [2] 2020-11-08 8036
873 창조절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수 3:7-17) [2] 2020-11-01 10010
872 창조절 삶의 견고한 토대 (시 90:1-6, 13-17) [4] 2020-10-25 6144
871 창조절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출 33:12-23) [4] 2020-10-18 11163
870 창조절 청함과 택함 "사이" (마 22:1-14) 2020-10-11 7244
869 창조절 자기 의(義)와 하나님의 의 (빌 3:4-14) [2] 2020-10-04 7929
868 창조절 대제사장과 장로, 세리와 창녀 (마 21:23-32) [2] 2020-09-27 9288
867 창조절 복음, 은혜, 믿음, 고난 (빌 1:21-30) [2] 2020-09-20 5648
866 창조절 용서, 그 불가능한 명령 (마 18:21-35) [9] 2020-09-13 8001
865 창조절 "급히 먹으라!" (출 12:1-14) [2] 2020-09-06 5564
864 성령강림절 "사탄아!" (마 16:21-28) [2] 2020-08-30 5156
863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5] 2020-08-23 4717
862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하심 (롬 11:1-2a, 29-32) [4] 2020-08-16 4874
861 성령강림절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마 14:22-33) [2] 2020-08-09 7760
860 성령강림절 "브니엘"에서 (창 32:22-31) [5] 2020-08-02 5340
859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마 13:31-33, 44-52) [5] 2020-07-26 5354
858 성령강림절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롬 8:12-25) [2] 2020-07-19 4935
857 성령강림절 에서와 야곱 이야기 (창 25:19-34) [4] 2020-07-12 13423
856 성령강림절 쉼 (마 11:16-19, 25-30) [2] 2020-07-06 8364
855 성령강림절 냉수 한 그릇의 궁극적 의미 (마 10:40-11:1) [2] 2020-06-28 5833
854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9) 2020-06-21 5455
853 성령강림절 못 하실 일이 없는 하나님 (창 18:1-15) [6] 2020-06-14 6471
852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고후 13:11-13) [4] 2020-06-07 5284
851 성령강림절 성령 공동체의 길 (고전 12:4-13) [2] 2020-05-31 4519
850 부활절 영광과 영생 (요 17:1-11) [4] 2020-05-24 5273
849 부활절 사랑과 계명 (요 14:15-21) 2020-05-17 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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