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1

축귀 능력자 예수 (눅 8:26-39)

성령강림절 조회 수 10780 추천 수 0 2019.06.23 22:00:00
설교듣기 : https://youtu.be/QSitPyDEXxQ 
설교보기 : http://afreecatv.com/nfermata 
성경본문 : 누가복음 8:26-39 

축귀 능력자 예수

8:26-39, 성령강림후 둘째 주일, 2019623

 

26.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29.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30.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2.마침 그 곳에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시니 33.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34.치던 자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마을에 알리니 35.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36.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그들에게 이르매 37.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38.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39.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정신 이상 된 사람

오늘 설교 본문 눅 8:26-39에 나오는 이야기는 한편으로 흥미진진하고, 다른 한편으로 황당하기도 합니다. 흥미진진하다는 말에는 보충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공동묘지에서 살던 한 귀신 들린 사람이, 사실은 정신 이상 된 사람인데, 예수를 만나 제정신을 찾았습니다. 그 와중에 돼지농장에서 방목되던 수백, 수천 마리의 돼지 떼가 호숫물에 뛰어들어 죽는 장면도 나옵니다. 영화로 만들었으면 천만 관객을 끌어모았을지 모릅니다. 이 이야기에는 예수님과 귀신 들린 사람의 대화가 나옵니다. 당신 이름이 무엇이오? 귀신들린 사람은 나는 군대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말 성경 각주에 따르면 군대는 로마 군대의 여단 규모를 가리키는 헬라어 레기온입니다. 이 사람 안에서 활동하는 악한 영이 그렇게 강력하다는 뜻입니다. 귀신은 무저갱, 즉 지옥으로 쫓아내지 말고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예수님에게 간청하여 허락받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나, 일부 기독교인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는 황당하게 들릴 겁니다.

당시에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누가복음만이 아니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이 사건이 나오는 걸 보면 이 이야기는 초기 기독교에 잘 알려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 기독교인들은 돼지 떼가 몰살당하는 장면을 통쾌하게 여겼을 겁니다. 돼지는 유대인들에게 부정한 짐승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거라사는 유대인들이 낮추어보는 이방인 지역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이야기를 완벽하게 재구성해낼 수는 없습니다. 2천 년 전 전 사람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떤 사건을 사실대로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내용의 첨삭이 일어났습니다. 그걸 고려하면서 이것을 기록한 사람이 전하고 싶어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가려내야 합니다.

본문은 정신 이상 된 이 사람을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묘사합니다. 고대인들은 주술적인 세계관을 붙들고 살았기에 그런 묘사는 자연스럽습니다. 그들의 지적 수준이 유치해서 그렇게 묘사한 건 아닙니다. 자신들이 이해할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는 악한 현상을 귀신의 작용으로 본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우주와 인간과 역사와 생명에 관해서 모르는 게 많습니다. 궁극적인 것은 아는 게 거의 없습니다. 본문은 이 사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8:27). 29절의 괄호에 묶인 내용은 좀 더 과격합니다.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끓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그를 쇠사슬과 고랑으로 묶은 사람들은 마을의 정상적인 사람들입니다. 광인이 자신들에게 피해를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겠지요. 이 광인은 마을 사람에게 배척과 혐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신약학자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이 왜 정신병에 걸렸는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렸을 때 로마 군대의 만행을 경험했습니다. 로마 군대는 로마 제국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제압했습니다. 그 기억은 이 사람에게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월남전에 참전한 미군에게서도 트라우마가 많이 발생해서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미군들은 나라에서 의료상의 도움을 받았지만,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은 방치되었습니다. 그는 로마군이 저지른 살상행위에 관한 기억으로 정상생활을 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씻지도 않고 옷도 입지 않았습니다. 로마군에게 죽은 사람들의 공동묘지를 자주 찾아가서 머물다가 급기야 거기에 터를 잡게 되었습니다. 며칠 굶어 허기가 지면 마을로 내려가 구걸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를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찬밥 한 덩어리라도 주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냉정하게 쫓아냈겠지요. 허기를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면 남의 집 부엌에 몰래 들어가 밥을 훔쳐먹지 않았겠습니까. 철없는 아이들은 그에게 돌을 던졌겠지요. 마을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불편하게 여겼을지는 불문가지입니다. 이 사람의 정신병이 어디서 시작했는지 우리가 확실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마을에서 이웃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지 못하고 공동묘지에 거주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극심한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한마디로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축귀 현상에 관해

본문의 미친 사람은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서 제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귀신이 나갔다고 말합니다. 정신병이 나았다거나 귀신이 나갔다는 말은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많은 환자를 고치셨기에 여기까지는 특별할 게 없습니다. 오늘 이야기에는 다른 이야기에 나오지 않는 반전이 있습니다. 돼지농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돼지 떼가 호숫물에 빠져 죽는 걸 보고 놀라서 마을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현장으로 몰려왔습니다. 이게 얼마나 큰 구경거리였겠습니까. 현장에 도착한 그들은 예상하지 못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광인이었던 그 사람이 완전히 정상적인 사람으로 변한 광경입니다. 옷도 단정하게 입었고, 행동도 보통 사람과 비슷했습니다. 눈빛도 물론 달라졌겠지요. 이 소문이 거라사 근방에 퍼졌습니다. 모두 놀라워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준 것에 대해서 감사의 말을 하고, 자기들 마을에 당분간이라도 머물면서 귀한 가르침을 달라고 예수에게 부탁했었어야만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거기서 떠나주기를 바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몇 가지 이유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보다는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냈다는 사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사실이 더 중요하기도 하고, 이 설명을 통해서 마을 사람들의 이상한 행동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축귀 능력자들의 활동은 흔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퇴마라는 단어가 일반적입니다. 무당들의 주요 업무가 귀신을 쫓아내는 겁니다. 무당 말고도 직업적으로 그런 일을 하는 심령술사들이 요즘도 있습니다. 원한에 차서 죽은 아무개의 혼령이 들어와서 이유도 없이 아프거나 사고가 자주 일어나게 되었으니 혼령을 위로하여 나가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축귀나 퇴마 의식을 거행하려면 만만치 않은 돈을 내야 합니다. 마음 약한 사람들은 그런 말에 쉽게 빠져듭니다. 보통 사람들도 굿이나 퇴마 의식을 직접 보면 마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묘사된 예수님의 행위는 심령술사들의 행위와 비슷해 보입니다. 귀신과 대화하고 제압하는 과정이 그렇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이런 심령술사와 비슷하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돈벌이하는 마술사가 아니고 남의 심리적인 약점을 이용하는 전문적인 축귀 심령술사도 아닙니다. 심령술사들은 인간 심리의 무의식을 다루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총체적 인격을 인격적으로 대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의 핵심은 더러운 귀신이 돼지 떼에게 옮겨갔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구원이 발생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축귀 능력입니다.

정신병에 걸린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습니다. 육체적으로 완전하게 건강한 사람이 없듯이 정신적으로도 완전하게 건강한 사람은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건강하거나 약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요즘 조울증을 앓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조현병도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아주 두드러진 경우를 제외하면 약을 처방받아야 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경계 역시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정신병으로 이름을 붙이지 않지만 삶을 파괴하는 사회현상도 많습니다. 이게 사실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집단적 혐오 현상은 정신병일까요, 아닐까요? 장애인 시설이 자기 동네에 들어오지 못하게 실력행사를 불사하는 일들은 또 어떻습니까? 과도한 물질숭배는 정신병일까요, 아닐까요? 외국인 노동자들 때문에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차별을 받는다는 어느 대표적인 정치인의 주장은 제정신일까요, 아닐까요? 수학능력 고사 점수에 따라서 평생의 운명이 결정되는 대한민국의 사회현상은 정신병일까요, 아닐까요? 150개 이상의 교파로 갈라진 기독교의 분열 현상은 정신병일까요, 아닐까요? 생명을 파괴하는 세력을 더러운 귀신이라고 한다면 21세기 우리는 대부분 귀신 들린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사회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우리는 생명 지향적으로만 살지 못하고, 종종 알게 모르게 생명 파괴적으로 삽니다. 그것이 자신의 세계관으로 자리를 잡으면 악한 영에 사로잡히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습관적으로 지나치게 자신을 염려하는 건 정신병일까요, 아닐까요? 습관적으로 잘난 척하는 건 어떻습니까? 이런 태도는 의학적으로는 질병이 아닐지 모르나 실제로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정신병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신과 이웃의 삶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과도한 자식 사랑이 오히려 자식의 삶을 위축시키기도 하고, 지나친 교회 사랑이 오히려 교회의 본질을 훼손시키는 일이 있습니다. 저 자신도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일로 귀신 들린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평생 키리에 엘레이손!’(주여 불쌍히 여기소서)이라는 기도를 드려야겠습니다.

 

하나님의 큰일, 예수의 큰일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이 사건으로 인해서 뭔가 불편해진 겁니다. 미쳤다가 정신 차린 사람이 계속 광인으로 머물러 있는 게 그들에게는 편했습니다. 광인이 있어야 자신들이 그 사람과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떠나라는 마을 사람들과 입씨름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마음의 문이 닫히거나 세계관이 전혀 다른 사람들과는 길게 이야기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예수님은 타고 왔던 배에 다시 오르셨습니다. 광인이었다가 정신을 차린 사람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나섰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말렸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을 따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후자에 속합니다. 그를 돌아가라 하면서 주신 말씀이 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귀신과 예수의 대화나 돼지 떼 이야기는 기억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39절만 기억하면 됩니다. 이 구절이 성경 기자가 정작 하고 싶은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갈릴리호숫가에 묶여 있는 배 안으로 장면이 바뀝니다. 광인이었다가 정신을 차린 한 사람이 예수 앞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도 옆에 있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을 이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큰일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큰일을, 즉 위대한 일을 행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만이 위대한 일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경험은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경험이 당연하거나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에게만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 자주 나오는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한 가지 예로 오늘 본문은 마을 사람들에게 귀신 들린 자로 취급받고 배척당했던 사람이 제정신을 차린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옳습니다. 이 사람은 이제 자신의 아픈 상처로 고통당하지 않고 정신 차리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 사람 중에서 이 사람만 제정신을 차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의 제자로 살고 싶어 했지만, 교양이 있다고 자부하던 마을 사람들은 마땅히 환대했어야 할 예수를 거부했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서 생명을, 즉 제정신을 차리고 살아있다.’라는 경험을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어디서 경험합니까? 그런 경험이 있어야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배드릴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예수님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은 이 사람은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 마을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전하라고 했지만, 이 사람은 예수님이 어떻게 위대한 일을 했는지를 전파했다고 합니다. 본문은 초기 기독교의 신앙을 정확하게 여기서 짚었습니다. 예수님의 큰일은 바로 하나님의 큰일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사건이 예수님에게서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말씀에 따라서 예수님을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로 믿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아가는데 굳이 예수님이 필요한 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없이도 얼마든지 잘산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삶을 이끌어가는 힘은 현실적으로 돈과 오락입니다. 돈과 오락이 현대인들에게 구원의 실체입니다. 그걸 부정하기도 힘듭니다. 그것으로 삶의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돈과 오락이 생명의 실체라는 것은 일종의 뉴에이지 현상입니다. 당신의 내면에 잠재한 신적인 능력을 발현하라는 것이 뉴에이지의 토대입니다. 오늘날 연예 오락과 상품 선전은 너 자신을 사랑하라.’(Love your self!)라는 메시지를 반복해서 전파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하기에 예수는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메시지를 회의적으로 생각합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 믿어도 별로 달라질 게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습이 신앙 자체로 보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나 자신들이나 별로 다를 게 없으니 굳이 예수를 믿을 필요는 없겠지요. 그들을 우리가 억지로 설득시킬 수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은 우리가 예수를 통해서 생명을 경험하고 있는지,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경험하고 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당연히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그런 경험 없이 교회에 기쁨으로 다닐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경험하기는 했으나 말로 설명하기 힘든 분들과 아직 그런 경험이 충분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 예수 사건이 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인지를 제가 간략하게나마 설명하겠습니다. 이것은 곧 저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저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실제로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나는 거대한 퍼즐의 한 조각입니다. 조각으로나마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전체 퍼즐과 연결되어야만 내 존재의 의미가 살아납니다. 퍼즐 조각이 자기만 생각하면서 모양과 색깔을 바꾸면 결국 전체 퍼즐 그림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퍼즐 조각으로서 죽기 전까지 전체 그림에 포함되기 위해서 전력을 다할 뿐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말과 행동과 운명으로 나타내셨으며, 오늘 성경 본문에서 보듯이 진정한 의미에서 축귀 능력자이신 예수님에게 가까이 가는 것이라고 최선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멘!


profile

[레벨:17]김사관

June 24, 2019
*.160.198.36

목사님, 마을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를 통해 오늘 나의 모습을 되돌아 보게 하신 말씀 고맙습니다. 역시 난  아무것도 아닌 자요, 성령의 도움만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하는군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ne 24, 2019
*.182.156.135

예, 오늘 우리의 사는 모습이 저 본문에 나오는 동네 사람들처럼 

구차스럽고 뻔뻔하고 몰염치하고 불쌍합니다.

이런 것만 생각하면 세상살이는 정말 재미  없습니다.

아니, 그럴수록 예수에게 더 가까이 가야겠지요.

profile

[레벨:6]알아야

June 28, 2019
*.131.14.207

남편 숙제를 하느라 '초예측'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세계 석학 8인에게 인류의 미래를 묻는 인터뷰 글인데 장은 '호모사피엔스'라는 책을 이스라엘 교수의 글입니다. 그는 서두에 인간은 국가, 법인, 인권 같은 허구를 신봉하는 능력때문에 호모 사피엔스가 지금의 인류가 되었다고합니다. 그러면서 그런 허구의 노예가 되어서는 된다고 그것들을 목적으로 살면 고통을 초래한다고 합니다. , 인류는 자신이 만든 허구에 의해 고통을 만들어 있다고 하네요. 어찌 보면, 목사님의 설교에 내용과 연결되는 같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신봉하는 허구는 재력, 교육, 이념 전쟁이 있고, 그것으로 인한 고통으로 자살을 하거나 불행한 삶을 사는 사는, 고통스러운 삶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 모습이고요그리고 귀신을 쫓아 예수님께 떠나가가라고 마을 사람들의 반응 그리고 그들과 차이가 없는 자신, 모순덩이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자비가 진정 필요한 같습니다. 하지만, 커다란 퍼즐의 조각, 나의 정체성을 조금씩 깨달아 간다면, 희망은 있는 같습니다. 저도 설교를 들으며, 예전처럼 축귀에 포커스를 맞추지 않고, 다른 부분에서 성경의 메시지메 찾으려고 했던 자신을 보고 나의 생각과 관점이 조금씩 달라졌구나성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ne 28, 2019
*.182.156.135

앗, 남편 숙제를 대신 해주시나요? ㅎㅎ

아니면 남편이 아내에게 숙제를 낸 건가요.

성경과 예수 이야기는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의 영혼을

그 중심으로부터 흔들어놓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깊이 이해하기 시작하면 다른 이야기들은 정말 시시해질 겁니다.

알아야 님이 성경읽기의 눈높이가 달라졌다니 박수를 보냅니다.

profile

[레벨:4]순복

June 28, 2019
*.26.146.204

'키리에 엘레이손! '이라는 고백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주님을 잊고사는 우리는 어쩌면 다 정신병환자들이겠지요. 그것을 깨닫는 자가 예수님의 치유의 손길을 경험하고 늘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고백을 할 수있겠어요. . .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ne 28, 2019
*.182.156.135

누가 정신 나간 사람이고 제 정신 차린 사람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시대를 우리가 삽니다.

겉모양은 세련미가 더해가지만 영혼은 더 경직되는 게 아닐는지요.

최소한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사람으로 살아야겠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sort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9658
1051 부활절 죽은 자 가운데서 (눅 24:36b-48) [2] 2024-04-14 388
1050 부활절 생명의 로고스 (요일 1:1-10) [2] 2024-04-08 511
1049 부활절 예수 부활의 첫 증인들 (막 16:1-8) [4] 2024-03-31 632
1048 사순절 향유를 손에 든 여자 (막 14:1-11) [4] 2024-03-24 668
1047 사순절 새 언약의 날 (렘 31:31-34) [2] 2024-03-17 579
1046 사순절 죽임에서 살림으로! (엡 2:1-10) [6] 2024-03-10 815
1045 사순절 십자가의 길과 하나님의 능력 (고전 1:18-25) [2] 2024-03-04 863
1044 사순절 예수 승천과 하나님 우편 (벧전 3:18-22) [9] 2024-02-18 1195
1043 주현절 예수의 변모 사건 (막 9:2-9) [5] 2024-02-11 929
1042 주현절 여호와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 (사 40:21-31) [6] 2024-02-05 961
1041 주현절 예수의 배타적 권위 (막 1:21-28) [4] 2024-01-28 879
1040 주현절 부름-버림-따름 (막 1:14-20) [2] 2024-01-21 926
1039 주현절 사무엘의 하나님 경험 (삼상 3:1-10) [2] 2024-01-14 980
1038 주현절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 (행 19:1-7) [5] 2024-01-07 980
1037 성탄절 만물의 찬양 (시 148:1-14) [2] 2023-12-31 1114
1036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2] 2023-12-24 2032
1035 대림절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 (사 61:1-4, 8-11) [2] 2023-12-17 2201
1034 대림절 하나님의 날: 새 하늘과 새 땅 (벧후 3:8-13) [2] 2023-12-10 2194
1033 대림절 깨어있음이란? (막 13:24-37) [2] 2023-12-04 2488
1032 창조절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다! (엡 1:15-23) [2] 2023-11-26 1129
1031 창조절 은혜를 갈망하는 시인 (시 123:1-4) [2] 2023-11-19 1182
1030 창조절 외면당한 사람들 (마 25:1-13) [5] 2023-11-12 1275
1029 창조절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의 역설 (마 23:1-12) 2023-11-07 1028
102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마 22:41-46) [7] 2023-10-29 1321
1027 창조절 재림신앙 (살전 1:1-10) [4] 2023-10-22 1273
1026 창조절 금송아지 이야기 (출 32:1-14) 2023-10-15 1164
1025 창조절 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 (마 21:33-46) 2023-10-09 1107
1024 창조절 과정으로서의 구원 (빌 2:1-13) 2023-10-01 1149
1023 창조절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마 20:1-16) [2] 2023-09-24 1284
1022 창조절 홍해 이야기 (출 14:21-31) 2023-09-17 1274
1021 창조절 도반 공동체 (마 18:15-20) [4] 2023-09-10 1221
1020 창조절 '악' 앞에서 (롬 12:14-21) [4] 2023-09-04 1403
1019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2023-08-27 1158
1018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6] 2023-08-20 1520
101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2023-08-08 1711
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1633
1015 성령강림절 여기 계신 하나님 (창 28:10-19a) [4] 2023-07-23 1766
1014 성령강림절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1-11) 2023-07-16 1306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1595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2023-07-03 1274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4] 2023-06-25 1771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2023-06-18 1425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1577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1535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1453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1754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1575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1839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1338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1753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2189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2390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1907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1859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1850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2869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268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207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703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589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444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430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487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566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532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240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194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3160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384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3978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404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969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598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543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239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643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121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57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780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561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258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470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399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898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575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449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714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599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620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212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45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450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697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415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507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773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3995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564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923
952 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2] 2022-05-08 3655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