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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골 1:1-20)

창조절 조회 수 7745 추천 수 0 2019.11.24 21:11:38
설교듣기 : https://youtu.be/ujH5qM8_SCE 
설교보기 : http://afreecatv.com/nfermata 
성경본문 : 골로새서 1:11-24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1:11-20, 창조절 13주일, 20191124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여러분은 시를 좋아하십니까? 저는 시 마니아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좋은 시는 읽으려고 노력하고, 그런 시를 통해서 세상과 사람과 삶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받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시가 대중들의 사랑을 받지는 못합니다. 기독교인 중에서도 성경은 손에 들고 살면서도 시는 멀게 느끼는 이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쉽게 이해가 가지만 시는 어렵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오해입니다. 성경과 시는 서로 통하는 게 많아서 성경을 은혜롭게 읽는 사람은 당연히 시도 감동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어떤 궁극적인 세계를 감추고 있다는 점에서 성경과 시는 서로 통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골 1:11-20절도 그냥 읽어서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와닿지 않습니다. 우선 13절과 14절을 읽을 테니 들어보십시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여러분 자신에게 질문해보십시오. 흑암의 권세가 무언지, 아들의 나라가 무엇인지, 속량은 또 무엇인지 말입니다. 대략은 압니다. 인간 삶을 파괴하는 죄가 바로 흑암의 권세이고, 믿음을 통한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들의 나라이고, 세례받음으로 죄가 용서받는다는 사실이 속량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시 두 가지를 질문해야 합니다. 일종의 교리문답으로 알고 있는 이 대답의 실질적인 내용이 무엇인지가 하나이고, 그 내용대로 우리가 살아가는지가 다른 하나입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여러분을 대신해서 이 질문에 대답해보겠습니다. 저의 대답이 여러분의 생각과 같은지 다른지, 다르면 어떤 부분이 다른지 확인해보십시오.


흑암의 권세

골로새는 지금 터키 내륙 지역에 있는 도시로서 당시 로마 제국의 교통 요지였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의 영향을 받은 에바브라에 의해서 설립되었습니다. 골로새 교회에서 벌어진 신앙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은 골로새서를 썼습니다. 거기서 벌어진 문제의 발단은 복음의 본질을 왜곡하는 세력의 등장입니다. 2:8절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골로새 교회의 문제는 한마디로 혼합주의 신앙입니다. 이들은 유대교 전통인 할례(2:11)와 거룩한 특정한 날을 지키는 일(2:16)과 금욕 규례(2:23)를 광범위하게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주장들이 근본적으로 잘못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런 주장으로 인해서 결국 복음의 본질이 약화하거나 왜곡된다는 사실입니다.

대구 샘터교회의 정체성은 예배 공동체입니다.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는 것이 우리의 교회 생활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 이외의 요소들은 예배를 돕는 역할에 머물러야 합니다. 교회의 다른 기능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도와 봉사와 구제와 친교와 교육도 필요합니다. 예배만 잘 드리면 다른 요소들은 무시해도 된다거나, 예배와 다른 요소가 밀접하게 관련되지 않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교회에 따라서 전도를 강조하거나 구제를 강조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처음부터 예배를 상위 개념으로 삼았습니다. 예배를 예배답게 드릴 때 다른 요소들도 저절로 의미 있게 수행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른 요소들도 예배와 비슷한 정도로 강조되기 시작하면 예배는 교회 기능에서 다시 ‘n분의 1’의 자리로 떨어질 겁니다. 여기서 예배 공동체 개념이 소위 율법적인 의미의 성수 주일이라는 구호가 아니라는 사실은 여러분이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바울이 혼합주의를 배격하고 복음만을 붙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세상이 흑암의 권세에 놓여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나려면 일단 빛으로 나와야 합니다. 흑암의 권세 아래서 조금 형편이 나은 쪽으로 피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장대비가 쏟아질 때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지 나무 밑으로 피해봤자 소용없는 거와 같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흑암의 권세는 단순히 파렴치하고 악한 힘이 아닙니다. 이런 힘들은 악하다는 게 뻔히 드러나기에 역설적이게도 심각한 문제는 아닙니다. 정말 위험한 흑암의 세력은 오히려 세련된 문명의 꽃으로 나타납니다. 골로새서가 기록되던 당시의 문명은 로마입니다. 로마 제국의 이데올로기는 세련된 방식으로 주변 사람들을 압도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첨단 문명과 이데올로기에 쉽게 세뇌됩니다. 좀 거칠게나마 오늘 우리의 삶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교를 나와서 대기업에 취업하는 사람을 이 시대는 높게 평가합니다. 큰 노력을 기울여서 자기 인생을 성취했으니 칭찬해줘야 합니다. 우리 교회 청소년들도 가능하면 이 사회에서 인정받는 성과를 내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궁극적인 차원에서 보면 그런 시대 정신이 바로 흑암의 권세입니다. 이상하게 들리시나요?

우리가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가장 행복하다고 여기는 삶의 조건들이 무엇인지 다 아실 겁니다. 그걸 쌓아가면서 삶의 재미를 느낍니다. 반면에 그런 조건들을 놓칠까 해서 전전긍긍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몸으로 살아야 하니 쾌적한 삶의 조건을 쌓는 삶이 이상한 게 아닙니다. 저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문제는 그것의 절대화입니다. 골로새 시대에는 로마 문명이 제시하는 삶의 조건이, 우리에게는 21세기 문명이 강요하는 삶의 조건이 우리의 정신세계를 완벽하게 지배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중에 거기에 노예가 됩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조건에서 성실하게 살 뿐이지 재물과 사회적 지위를 절대화하지 않는다고, 노예로 사는 게 아니라고 생각할 겁니다. 정말 그런가요? 각자 자신에게 솔직하게 물어보십시오. 자녀와 길을 가다가 폐휴지를 수레에 끌고 가는 노인을 보고 너도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돼!”라는 말을 한다는 게 바로 노예의 삶이 아닐까요?

현대인의 고급스러운 삶으로 우리의 영혼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만한 이들은 다 압니다. 장관과 차관, 국회의원과 사회 저명인사라는 자리는 모양만 그럴듯하지 여전히 그것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런 데에 목을 매게 하는 세력이 바로 흑암의 권세입니다. 그런 흑암의 권세 운운은 복잡해서 생각하기 어렵고, 지금 소박하게나마 남에게 민폐 끼치지 않고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는 그렇게 살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렇게 살아도 괜찮습니다. 다만 저는 지금 골로새서가 말하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영성을 설교하는 중입니다. 영혼의 눈이 밝은 기독교인에게는 이런 메시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흑암의 권세라는 말은 한 단계 더 깊은 차원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실존 자체가 흑암이라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너무 어두워서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모든 것의 근원이 숨어 있습니다. 꽃을 보십시오. 그 꽃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젊은 부부들도 그 아이가 어디서 왔는지, 그들의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시간과 공간이 어떻게 결합하는지를 물리학자들도 모릅니다. 시간의 속도가 위치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고, 공간이 휘어질 수 있다니, 우리가 세상에 아는 게 하나라도 있을까요? 그래서 신학자들은 <감춰진 하느님 나라>(엘루아 르클레르, 분도출판사)를 외칩니다.

이 흑암에서부터 자유를 얻으려면 삶의 모양을 조금 바꾸는 게 아니라 삶의 패러다임 자체가 혁명적으로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의 인격이 조금 원만해지거나 남에게 본이 되게 살거나 심리적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해결되지 않는 방식을 고집스럽게 강요하는 이들이 바로 골로새 교회의 혼합주의 교사들이었습니다.

 

아들의 나라

바울은 이제 전혀 새로운 삶, 즉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는 삶을 가리켜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우리가 흑암의 권세로부터 빛의 세상으로 옮겼다는 말은 14절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속량, 죄 사함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게 복음의 진수입니다. 이를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외모에 콤플렉스를 느꼈습니다. 매일 아침 화장에 한 시간씩 투자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불안해서 사람을 만날 때마다 신경을 씁니다. 이 사람에게 어느 날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새로 나타난 사람은 외모가 아니라 내면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외모에 콤플렉스를 느껴 화장에 신경 쓰던 사람이 거기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삶의 모양 아니라 중심을 완전히 바꾸는 삶의 태도가 바로 아들의 나라가 가리키는 의미입니다.

위의 설명은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지만 문제는 흑암의 권세로부터 아들의 나라로 옮겼다는 사실을 실감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저는 앞에서 우리의 실존 자체가 흑암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실존이 두려워서 사람들은 자신이 뭔가 빛을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생명의 근거를 만드는 겁니다. 자신의 생명을 자기 힘으로 완성하려는 안간힘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생명을 완성한 사람은, 절정의 행복을 누린 사람은 없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전혀 다른 사실을 말합니다. 생명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를 가장 간단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입니다. 예수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너무 간단해서 믿어지지 않아 뭔가 여기에 인간의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생각됩니다. 이런 생각이 혼합주의로 떨어지는 출발점입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예수를 믿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겉으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믿지 못합니다. 믿지 않습니다. 예수만을 믿기에는 내가 믿어야 할 대상이 옆에 너무 많습니다. 대도시 번화가에서 우리 눈길을 끄는 게 너무 많아 저 구석에 핀 민들레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와 비슷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의 인격과 운명에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그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삶을 전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믿지 못합니다.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으나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살리셨습니다. 모든 이들로부터 버림받은 예수님에게서 절대 생명이 시작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별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세상이 요구하는 작동원리에 충실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겁니다. 믿지 않으니 구원도 없습니다. 믿음의 분량만큼 구원의 분량도 주어지지 않을는지요.

 

그리스도 찬양

예수 안에서 죄 사함을 받아 아들의 나라로 옮길 수 있는 근거가 15-20절에 나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쓰면서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던 이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이 구절을 그리스도 송가라고 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20절입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여기서 핵심은 평화와 화해입니다. 특히 만물과의 화해가 눈에 띕니다. 만물과 화해했다면 이제 만물이 죽음의 운명을 벗어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큰 빚을 졌다고 합시다. 빚을 갚을 길이 없어서 종살이를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이 사람에게 벌어졌습니다.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친척이 죽으면서 이 사람에게 큰 유산을 남겼다는 소식을 고인의 변호사에게서 들었습니다. 이제 빚졌던 사람은 이 유산의 일부를 처분해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종살이의 운명에서 자유인의 운명으로 바뀌었으니, 인생의 화해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말이 너무 이론적으로 들릴지 모르겠군요.

,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해봅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과 만물 사이에 화해가 일어났다는 말의 실체가 무엇일까요? 그리고 무슨 근거로 이 말을 믿을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하나님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는 13절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양쪽 모두 생명을 얻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13절을 이미 앞에서 설명했기에 이번의 질문도 대략 어떤 대답이 나올지 감을 잡았을 겁니다. 예수의 죽음은 세상의 종교적인 권력과 정치적인 권력에 의해서 벌어진 악행입니다. 이게 우리가 사는 세상의 돌아가는 원리입니다. 지금 미국은 막강한 힘을 바탕으로 다른 나라의 주권에 개입합니다. 미국과 군사 충돌을 감행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밖에 없습니다. 중국도 군사력 자체만으로 보면 미국보다 하수입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충돌하면 대기업이 대부분 승리합니다. 이런 세상의 작동원리가 우리의 삶을 지배합니다.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세속 사회에 들어와서 사는 한 없습니다. 그 실증을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서 발견합니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살리셨다고 증언합니다. 우리가 부활이라고 믿는 그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부활 사건은 이 세상의 압도적인 권력을 향한 하나님의 무효화 선언입니다. 세상의 악한 권력은 아무리 막강해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예수 십자가와 부활 이후로는 흑암의 권세가 세상을 더는 지배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완성하기 위해서 더 많은 재물을 모아야 하고, 더 높은 지위에 올라서고, 더 많은 행복한 조건을 채워야 한다는 주장이 폐기되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었으니 하나님과 만물의 화해가 일어난 것입니다.

여전히 이런 설명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저는 더 설명할 자신이 없습니다. 여기까지가 저의 역할입니다. 이 메시지를 이해하고 동의할지는 여러분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도움이 될지 몰라서 한 가지만 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삶의 마지막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이뤄보려던 모든 것은 어디론가 종적을 감춥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 건강했거나 병약했거나, 잘났거나 못났거나, 지식인이나 일자 무식쟁이나 구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사실은 그 마지막 순간이 곧 들이닥친다는 것입니다. 너무 두려워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 순간에 여러분과 함께하십니다. 아니 지금 이미 여러분과 함께하십니다.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는데, 여러분은 무엇을 더 바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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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김사관

November 25, 2019
*.42.209.52

목사님, 흑암의 권세가 바로 이런 것이었군요. 파렴치하고 악한 힘이 아닌, 화려하고 세련된 문명의 이기(器)들... 한국교회가 화려하고 세련된 행사를 지향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귀한 말씀, 흑암의 권세가 한국교회 안에 만연한 것을 꾸짖는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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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25, 2019
*.182.156.135

예, 흑암의 권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우리가 특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단순히 화려하거나 세려된 현대 문명 자체가 흑암은 아니고요.

우리의 생명을 왜곡하거나 훼손시키는 세력을 가리킵니다. 

인간 문명이 자신의 분수를 모른 채, 즉 교만하게 

스스로 구원의 담지자로 행세하게 될 때 흑암의 권세라고 할 수 있어요.

일반적으로는 그 문명이 절대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기에 

신약성경 시대의 로마 문명을 흑암의 권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1세기 자본주의 문명이 그렇겠지요.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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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하늘연어

November 26, 2019
*.86.237.246

모든 이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리얼리티로 경험합니다.

그 심판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으니 더 이상 바랄게 뭐가 있을까요.

죽는 그 날까지 사는 것을 벅찬 기쁨으로 감사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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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28, 2019
*.182.156.135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실재로 경험한다면 

우리에게 세상과 삶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영적인 시각이 열리겠지요.

하나님만이 정의롭고, 자비롭고, 사랑 충만한 분이니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기쁨의 찬양을 부를 수 있겠지요.

문제는 신경질적으로 사는 우리에게 그런 시각이 열리느냐,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생각할수록 저도 갈 길이 멉니다. 

자, 가는 데까지 가봅시다.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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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김혜식

November 28, 2019
*.167.103.80

'괴물의 아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봤습니다. 거기서는 흑암의 권세가 한 외톨이의 가슴속의 검은 구멍으로 표현되더라고요. 이 구멍은 분노와 미움, 외로움, 복수심, 경멸, 열등감, 정체성의 혼란, 생명을 갉아먹는 절망으로 나타나더라고요. 그런데 아버지와 같은 스승이 검으로 화해 구멍난 외톨이의 가슴을 메워주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희생으로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겨지는 것 같았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문을 읽고 '괴물의 아이'를 보니 여러가지 상념이 떠오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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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28, 2019
*.182.156.135

와, 그런 메시지가 담긴 애니가 있군요. 저도 한번 볼까요? 

성경에 나오는 악마, 사탄, 천사를 오늘날에도 우리는 만나나 봅니다.

눈이 밝아야 그런 세력을 뚫어보고 저항할 수 있을 텐데,

우리의 눈을 가리는 게 워낙 많아서 쉽지 않습니다.

자,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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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1542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2023-07-03 1219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4] 2023-06-25 1729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2023-06-18 1370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1520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1464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1380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1696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1506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1754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1281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1598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2021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2246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1847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1823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1795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2797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206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154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648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539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387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357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420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513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481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129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025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2888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144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3714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162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918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535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476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179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573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066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04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727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457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194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405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310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847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502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399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645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545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553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153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04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394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652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358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438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714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3912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496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850
952 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2] 2022-05-08 3593
951 부활절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의 삶 (계 5:11~14) [1] 2022-05-01 2754
950 부활절 예수를 '믿는 자' (요 20:19~31) [1] 2022-04-24 4635
949 부활절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 (행 10:34~43) [1] 2022-04-17 2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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