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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선택하라!" (신 30:15-20)

주현절 조회 수 7053 추천 수 0 2020.02.16 19:46:21
설교보기 : https://youtu.be/DiKeIizq91g 
성경본문 : 신명기 30:15-30 

생명을 선택하라!”

30:15-20, 주현 후 여섯째 주일, 2020216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복과 화

모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볼 때 자기 민족을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해낸 민족 영웅입니다. 그는 40년 광야 생활이 거의 끝나고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 모압땅에서 죽습니다. 생존이 위태로웠던 광야 생활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서 기력이 완전히 소진된 탓이었을까요? 어쨌든지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가르침을 유언처럼 남겼습니다. 그게 신명기의 내용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 16절은 가나안에 들어서 하나님을 따랐을 때 주어질 운명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이스라엘 백성은 생존하고 번성하며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겁니다. 17, 18절은 이와 반대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면 망할 것이며, 가나안 땅에서 오래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아 번성할 것이며, 불순종하면 화를 당할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자주 들어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가르침입니다. 당연하다 보니 새롭게 다가오지도 않습니다. 영혼의 공명이 일어나지 않는 뻔한 이야기로 들립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모세의 이 메시지가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도 불행한 일을 당할 수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잘 사는 사람은 잘삽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국가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던 고대 이스라엘은 다른 어느 민족보다 훨씬 더 큰 불행을 겪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본래 그곳에 살던 토착민들과 영토 분쟁을 끊임없이 벌였습니다. 주변의 여러 제국으로부터 많은 시달림을 받았습니다. 급기야 기원전 587년에는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가 완전히 망했습니다. 역사가들은 유대의 멸망을 하나님 신앙과는 별개로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바벨론의 제국주의적 호전성에 유대 나라가 희생되었다거나, 유대 나라의 외교정책에 오류가 발생했다고 말입니다. 이런 일들은 오늘날에도 반복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유대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손에 달렸으니 신앙생활을 똑바로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일반 역사가들의 진단과 성경의 진단 중에서 어느 쪽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 두 주장 사이의 적당한 위치에서 일상을 살아갑니다. 한쪽으로 치우치기도 하고, 중간쯤에 자리를 잡기도 합니다. 대다수 기독교인은 이 주장을 분리해서 받아들입니다. 실제의 인생살이는 세상의 원리에 따라서 대처하고, 신앙생활은 교회의 메커니즘을 따릅니다. 그래서 시계추처럼 오락가락합니다. 삶의 중심이 없는 겁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성서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생명 집중

모세는 신 30:15-18절에서 하나님을 따를 것인지, 다른 신을 따를 것인지 선택하라고 다그쳤습니다. 모세가 중간자의 관점에 서서 이스라엘 백성 당신들이 알아서 하라는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따라야 한다는 강력한 권고이자 명령입니다. 19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이 구절에서 핵심은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입니다. 모세는 이것을 백성들에 영혼에 각인시키고 싶었을 겁니다. 이런 표현이 모호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생명을 선택합니다. 모든 이들이 살려고 하지 죽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돈을 버는 이유도 역시 생명을 얻으려는 데에, 즉 잘살아 보려는 데에 있습니다. 모세가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비장하게 선포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우선 생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간단히 말해서, 살아있는 것입니다. 숨을 쉬고 먹고 배설하고 무엇을 보고 말하고 생각하는, 그리고 아기 낳는 모든 일이 생명 현상입니다. 문화 활동도 생명 현상에 속합니다. 그림을 그리고 작곡하고 시를 씁니다. 부분적으로 육체적인 현상이 있고 정신적인 현상으로도 나타납니다. 어쨌든지 지금 우리는 살아있기에 기기묘묘한 세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합니다.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합니다. 모든 게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숨 쉬고 살다가 모든 생명 현상이 끝장나는 순간이 옵니다. 갑자기 오기도 하고 시나브로 오기도 합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은 여러분이 다 압니다. 알지만 평소에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잠시 생각하다가도 그 생각을 거둬들입니다. 그것보다 더 절실한 것에 매달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절실한 대상은 여럿입니다. 가장 대표적이고 일반적인 대상은 돈입니다. 돈이 우리에게 쾌적한 삶을 보장해준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확신으로 인해서 생명 자체에 관한 관심을 줄어들고 쾌적한 삶의 조건을 향한 욕망은 늘어납니다. 그 결과는 평화와 안식의 실종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현상이 극대화됩니다. 이를 교회 문제와 연결해서 설명하면, 교회를 성장시키고 전도해야 한다는 목적에 묶여서 하나님을 놓치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인생살이와 신앙생활의 메커니즘은 똑같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생명에 대한 오해가 자리합니다. 사람들은 생명을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소유로 여깁니다. 그렇게 오해할만합니다. 각자가 숨을 쉬고 각자가 먹습니다. 자기가 걸어야 하고, 건강도 자기가 챙겨야 합니다. 자기의 인생을 자기가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생명은 훨씬 깊고 다양하고 풍부합니다. 제가 평생 취미활동으로 삼았던 테니스를 예로 들어야겠습니다. 테니스 수준은 천차만별입니다. 프로 선수들이 있고, 실업 선수들이 있고, 아마추어 동호회원들이 있습니다. 테니스 황제로 일컬어지는 페더러와 저 같은 동네 동호회원들의 실력은 비교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페더러처럼 실력이 좋아야만 테니스를 즐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실력이 부족한 사람도 일종의 테니스 영성을 경험할 수 있고, 아주 뛰어난 사람도 그걸 놓칠 수 있습니다. 실력이 뛰어나면 더 좋겠지만, 테니스 영성에 들어간다면 그 실력의 차이는 미미해집니다. 테니스 실력을 돈으로 바꿔놓아도 똑같다는 사실을 아는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삶의 본질을 성찰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돈의 많고 적음이 결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 말이 옳기는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게 살기가 힘들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옳습니다. 우리가 눈을 뜨기만 하면 집값, 일자리, 경제성장 수치 등등만을 듣고 있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 이야기는 희미하고 사람 이야기만 과잉되는 형국과 같습니다. 지금 모세의 연설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사실은 우리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가나안의 문명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을 섬겼습니다. 바알은 풍년과 후손을 약속하는 농경신입니다. 풍년과 다산이 당시 가나안 원주민들의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인간은 어느 곳, 어느 때나 생존의 위협을 받기에 이런 풍요 이데올로기는 강력하게 작동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의 빈궁했던 삶에 진저리를 냈습니다. 그들의 눈에 가나안 문명은 1970-80년대에 미국에 이민 간 한인 교포들의 눈에 비친 미국 문명과 같았습니다. 모세는 지금 그 바알을 섬기지 말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의 연설은 짜증 나는 잔소리로 들렸을 겁니다. 이런 현실에서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오늘날 정말 각박하게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택하라는 모세의 연설은 여전히 정당할까요?

생명을 택하라는 말은 생명에 집중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복잡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숨 쉬고 먹고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다른 이와 관계를 맺는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건 시시한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생명의 실체(reality)입니다. 여러분이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고 합시다. 은행이나 보험회사에 다닐 수 있고, 교사나 의사로 활동할 수도 있고, 농기구 공장이나 자동차 부품회사에 다닐 수도 있습니다. 무슨 일에 종사하든지 일단 숨 쉬고 먹고 보는 일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야말로 생명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지금 세상이 요구하는 스펙이나 조건이 없어도 생명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 국회의원과 그 의원실에서 일하는 직원이 있다고 합시다. 두 사람의 사회적 신분은 크게 차이가 나지만 생명 선택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여기 친구가 많은 사람이 있고, 외로운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외로운 사람도 생명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생명과 밀착할 수 있습니다. 외롭기에 겨울나무가 더 생생하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인생을 살기 원하십니까. 돈도 많고 친구도 많아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에 묶여 있지는 않으십니까.

생명 집중만으로 우리가 어떻게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느냐고 반문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행복한 인생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머리에 뭔가가 그려질 겁니다. 우리 교우들은 그런 행복한 인생을 살았으면 합니다. 제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런 인생 설계는 여러분이 잘하실 겁니다. 거꾸로 생각해보신 적은 없으신지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행복한 인생이, 사실은 행복하다기보다는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는데, 실제로는 수준 낮은 인생이거나 행복하지 않은 인생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우리가 세상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성취했더라도 숨 쉬고 먹고 마시는 기쁨, 소리를 듣는 기쁨을, 즉 하나님이 창조한 지구에서 존재하는 시원적인 기쁨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사물이 빛처럼 다가오는 존재의 신비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가 비록 대학교 총장이 되었다고 해도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명을 택하라고 말한 이유는 그런 삶이 우리의 일상을 새로운 차원으로, 즉 생명 충만한 차원으로 올려놓기 때문입니다. 일상에서는 뜻하지 않은 여러 가지 갈등과 충돌로 인한 불편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친구 관계와 가족 관계도 그렇고 교우들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자기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하기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자기 기준이 옳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습니다. 자기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도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이 작동되지 않는 무의식이 있기도 하고, 충동적으로 자기를 합리화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한 가지 사실만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으면 이런 갈등과 충돌을 대개는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을 선택하고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으면 불편한 일들을 크게 문제 삼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변에 짜증을 내게 하는 사람이 있어도 내가 숨을 쉬고 먹고 소리를 듣는 일에 방해를 받지 않으면 용납할 수 있습니다. 생활비가 줄었다고 합시다. 은근히 걱정되겠지만 생명 자체에 집중하는 사람은 그 상황을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중요하니까 조금 더 설명해야겠습니다. 여기 두 사람이 걷고 있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이번 총선에 나선 후보입니다. 그는 표를 얻기 위하여 지역 주민들을 만나는 일에만 마음을 빼앗긴 터라 무심코 걷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시간이 많아 산책을 나온 백수입니다. 그는 중력을 느끼면서 황홀하게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두 번째 사람이야말로 걷는 행위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다리 수술로 2년 침대에서 누워지내다가 목발을 짚고 다시 걷게 된 사람도 이런 황홀한 느낌을 절감할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황홀한 경험을 몇 번이나 하겠습니까. 대개는 무언가에 쫓기면서 첫째 사람처럼 삽니다. 구도 정진의 자세로 생명에 집중하지 않으면 우리는 생명을 외면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점에서 생명을 화두로 삼는 수행자들입니다. 우리는 출가하지는 않았으나 본질에서는 수도승들입니다. 일종의 재가 수도승들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면서 생명에 더 집중하게 되었습니까? 그 생명의 신비 앞에서 더 기뻐하고 놀라워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한 번뿐인 인생살이를 여러분은 어떤 자세로 살고 싶으신가요?

 

생명 집중의 길

마지막 질문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생명에 집중할 수 있을까요? 모세가 이미 대답했습니다. 30:20절에서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세 항목이 거론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청종하고 의지하라고 말입니다. 모세가 이런 말을 한 이유는 이럴 때야 비로소 생명의 본질이 무엇인지가 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같은 구절에서 하나님이 네 생명이시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이라는 말은 막연한 게 아닙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아름답고 선합니다. 그 사실을 실제로 믿는다면 자기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선한지도 알게 될 겁니다. 연봉이 적다고 해서 자기 삶을 초라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삶이 아름답고 선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다른 사람의 삶도 아름답고 선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선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은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면 고치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아무리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마치 악마처럼 보이는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혐오하지 않습니다. 저는 잘난 채 잘하는 미국을 혐오하지 않듯이 밉상처럼 못나 보이는 북한도 혐오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라고 충고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살이에서 관건은 생명을 생명답게 살아내는 일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바로 생명이라고 선포했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야말로 생명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형상으로 우리의 역사에 들어오신 분이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실제로 예수에게 가까이 간다면, 그의 말씀과 그의 운명을 통해서 하나님과 친밀해진다면 세상과 인생을 이전과는 전혀 새롭게 경험할 것입니다. 땅과 하늘, 불과 바람, 새와 꽃, 그리고 빵과 포도주와 인간 노동과 이웃들이 다르게 경험될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세상 만물에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내재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생명 경험입니다. 이미 그런 경험을 한 분들이 많을 것이며, 그런 경험 안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아직 그런 경험이 없다면, 이제라도 눈을 돌려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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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모모

February 18, 2020
*.39.162.108

저는 이제 막 생명 경험을 하고 있는거 같습니다. 점심은 장애인 급식소에서 먹고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책 읽으며(주로 목사님 관련 책들) 숨쉬고 걷고 보고 듣고 먹고 마시며 생명에 집중하고자 애쓰는 행복한 백수입니다.
목사님 덕분에 이것이 가장 행복한 길임을 더욱 분명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저의 생명 경험이 더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목사님의 생명을 살리는 말씀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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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18, 2020
*.182.156.135

점심을 장애인 급식소에서 드신다니

모모 님이 장애인이신가요? 아니면 개방된 급식소이겠군요.

'행복한 백수'로 살아갈 수 있는 내공을 갖추었으니 

그 중심을 놓치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일반적으로 백수의 삶은 생명 충만이 아니라 

무료함에 떨어지기 쉬우니까요. 

백수였던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넘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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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5]은성맘

February 18, 2020
*.127.168.235

생명에 집중하는삶에 대한 예가  비 종교인에게도 관통하는것이라 생각하여 교회를 다니지않는 남편에게

설교문을 읽어줬습니다( 개신교에 대한 선입견이 커서 성경적내용은 편집(?)....)

저 처럼 홀로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교회문밖만 나오면 가정에서 특히나 괴리감이 너무 커서 힘들때가 많은데

목사님말씀과 책에 있는 내용들은 가장 성경적 핵심내용이면서도 믿지않는분에게 들려줄 수 있는것이라

참 좋습니다

(하나님을 믿는것이 삶과 직결된 그 자체이며 그것이 생명경험)이라는 사실을 ..

이렇게 타인에게도 전달하고싶은 충만감이 가득차는것도  또다른 형태의 생명경험 이라고 할 수있을까요?

아무튼 마음가득 기쁜 하루 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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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18, 2020
*.182.156.135

남편에게 설교문을 읽어주는 아내와 그걸 듣고 있는 남편이라,

이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구나 남편이 교회에 대해 일정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데도

설교문 읽기를 받아들이는 건 아내에 대한 신뢰심이 크기 때문이겠지요.

세상과 생명의 깊이에 대한 자신의 깨달음을 '타인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갈망'은 

물론 생명 경험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마땅한 행동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라."(요 1:46)라고 말한 경우와 비슷하겠지요.

앞으로 은성 맘 님에게 하나님 경험이 더 풍성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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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3]웃겨

February 18, 2020
*.199.33.6

생명을 선택하라는 말씀이 이렇게 절실히 다가오기는 처음입니다.

보고 듣고 숨쉬고 느끼는 일...! 거품이 걷어진 간결한 눈으로 보면

삶은 그렇게 단순하며 오묘한 것임을 요줌 조금 느끼며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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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19, 2020
*.182.156.135

'거품이 걷어진 간결한 눈'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듭니다.

미시로부터 거시까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신비가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날이 갈수록 더 풍성해지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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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하늘연어

February 19, 2020
*.86.237.246

수정의견

생명집중 편 마지막에서 위로 3번 째 문단의  끝에서 위로 3번째 줄b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사물이...."를 ..........."사물에서"로 바꾸는 것이

원래 목사님께서 표현하시려는 의미같습니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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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19, 2020
*.182.156.135

ㅎㅎ '사물에서'보다는 '사물이' 더 적절한 표현이랍니다.

존재 신비의 차원에서 사물과 빛이 하나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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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1382
1017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1464
1016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6] 2023-08-20 1486
101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1508
1014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1520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1542
1012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1582
1011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1599
1010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2023-08-08 1653
1009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1697
1008 성령강림절 여기 계신 하나님 (창 28:10-19a) [4] 2023-07-23 1700
1007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4] 2023-06-25 1729
1006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1756
1005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2] 2023-12-24 1792
1004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1796
1003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1823
1002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1848
1001 대림절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 (사 61:1-4, 8-11) [2] 2023-12-17 1937
1000 대림절 하나님의 날: 새 하늘과 새 땅 (벧후 3:8-13) [2] 2023-12-10 1965
999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2023
998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156
997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208
996 대림절 깨어있음이란? (막 13:24-37) [2] 2023-12-04 2244
995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2251
994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389
993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401
992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421
991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476
990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482
989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513
988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536
987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541
98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574
985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648
984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653
983 부활절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 (행 10:34~43) [1] 2022-04-17 2660
982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727
981 부활절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의 삶 (계 5:11~14) [1] 2022-05-01 2755
980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2799
979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05
978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851
977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2889
976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920
975 주현절 예수 변모 순간 (눅 9:28~36) 2022-02-27 3026
974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030
973 사순절 예수의 하나님 (눅 15:1~3, 11b~32) [5] 2022-03-27 3043
972 주현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 71:1~6) 2022-01-30 3050
971 주현절 첫 제자들의 출가 이야기 (눅 5:1~11) [7] 2022-02-06 3050
970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130
969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180
968 주현절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전 15:12~20) [6] 2022-02-13 3181
967 사순절 목마름의 실체 (사 55:1~9) [4] 2022-03-20 3185
966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194
965 사순절 시험받는 예수 (눅 4:1~13) 2022-03-06 3197
96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05
963 사순절 유월절 마지막 식사 (눅 22:14~23) [2] 2022-04-10 3217
962 사순절 영광의 몸으로! (빌 3:17~4:1) [2] 2022-03-13 3303
961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312
960 주현절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창 45:3~11, 15) [2] 2022-02-20 3349
959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358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361
957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396
956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406
955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439
954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459
953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502
952 주현절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사 62:1~5) [7] 2022-01-16 3513
951 창조절 불행한 서기관 (막 12:38~44) 2021-11-07 3523
950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546
949 성령강림절 만물의 충만-그리스도의 충만 (엡 4:1~16) [3] 2021-08-01 3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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