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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9)

성령강림절 조회 수 5455 추천 수 0 2020.06.21 19:31:41
설교보기 : https://youtu.be/vMhumBTfQDo 
성경본문 : 마태복음 10:24-39 

두려워하지 말라!”

10:24-39, 성령강림 후 셋째 주일, 2020621

 

 

성경 내용이 늘 편안하고 은혜로운 건 아닙니다. 읽기에 불편한 내용도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런 특징이 두드러집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마 10:24-39절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두 단락으로 구성됩니다. 첫째 단락은 24-33절입니다. 32절과 33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예수를 인정해야 예수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제자들을 인정하고, 부인하면 자신도 부인한다고 말했습니다. 뭔가 위협적인 말씀으로 들립니다. 둘째 단락은 34-39절입니다. 예수는 자신이 평화가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원수가 집안 식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왠지 겁박처럼 들립니다. 영적인 의미가 깊은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현실적이지는 않습니다. 오늘 저는 이 불편한 말씀을 야곱이 천사와 씨름했듯이 붙들려고 합니다. 이를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만나고 싶습니다.

 

1) 첫 단락에서 전체적으로 강조되는 단어는 두려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라거나 두려워하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한 이유는 훗날 제자들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닥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만이 아니라 마태복음을 읽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살던 상황도 비슷했습니다. 예수, 제자들, 그리고 후대의 기독교에 속한 이들은 똑같은 운명에 떨어진 겁니다. 공동 운명체입니다. 그 사실을 본문 24절과 25절이 일종의 격언처럼 들리는 문장으로 설명합니다. 제자는 선생보다 높지 못하고 종도 그 주인보다 높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선생인 예수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바알세불이라고 비난하던 당시 사람들은 예수 제자들을 바알세불의 졸개들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주변에서 이런 비난을 받으면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2월과 3월 대구에서 신천지에 의해서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할 때 신천지 교도들이 느끼던 두려움과 비슷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실존은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가 로마 형법에 따라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건이 그 출발입니다. 예수가 체포당한 뒤에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을 감추거나 부정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대교 당국과 로마 제국에 의해서 오랫동안 크고 작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서 신앙을 포기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오늘은 로마 제국 시대가 아니라 종교 자유가 충분히 보장된 시대이기에 신앙 문제로 인해서 두려워할 일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 제국의 세계관과 오늘 21세기 시대정신은 다르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를 아는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예수는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28절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몸은 마음먹은 대로 처리할 수 있으나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은 세상 권력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였고, 제자들을 영악하게 또는 무자비하게 박해했고, 그 이후에 수많은 기독교인을 체포하고 가두고 고문하고 죽이기도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당한 수난의 역사는 길고 혹독했습니다. 예수는 그런 강력한 세상 권력도 제자들의 영혼에는 손을 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정작 두려워할 대상은 세상의 악한 권력이 아니라 몸과 영혼을 지옥에 넣으실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런 말씀 앞에서 무감각한 이유는 영혼이 아니라 몸에 종속되는 삶에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21세기 물질주의 시대에는 이런 경향의 삶이 옛날보다 훨씬 강합니다. 우리 삶의 대부분은 몸과 물질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한 마디로, 돈이 우리 모든 삶을 지배합니다. 영혼이 없는 것처럼 사는 겁니다. 일부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정의와 평화를 생각합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생태 환경을 염두에 두고 역사의 진보를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소수일 뿐만 아니라 이런 이들의 삶에도 일관성은 떨어집니다. 모두가 돈이 우리 삶을 결정한다고 생각하기에 한편으로는 자신이 가난에 떨어지는 걸 두려워하고, 다른 한편으로 가난한 사람을 혐오합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두려운 조건을 피한다고 해결이 될까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영혼이 더 풍성해야만 몸을 위협하는 세력에게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 문제를 아주 현실적인 계산에 따라서 결정한다고 합니다. 외모, 돈벌이, 성품 등등에 예민합니다. 자신에게 사랑의 능력이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영혼의 능력은 안 보는 겁니다. 그러니 결혼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다른 삶도 비슷하게 돌아갑니다. 영혼이 풍요롭지 못하기에 돈이 지배하는 세상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혼이 풍요로워진다는 게 뭐지, 하고 질문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영혼의 풍요라는 말이 익숙해도 그 실질적인 의미는 낯섭니다. 오늘 본문이 그 문제를 정확하고도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본문 29절을 보십시오. 참새 이야기가 나옵니다. 보잘것없는 참새도 너희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당시 로마 황제 앞에서 참새에 불과합니다. 아무런 힘도 없고, 인정받지도 못합니다. 그렇지만 궁극적인 차원에서 그들에게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겁니다. 즉 하나님과 관련된 일입니다. 황제에게 인정받는 게 중요한지,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게 중요한지 생각해보십시오. 황제의 일과 하나님의 일이 칼로 두부 자르듯이 갈라지는 건 아닙니다. 비바람이 어떤 사람에게는 불편하나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 충만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똑같은 일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황제의 일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영혼의 눈이 밝은 사람은 참새처럼 세상이 하찮게 보는 일에서도 하나님의 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학교나 회사 식당일을 한다고 합시다.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일입니다. 영혼의 깊이에서 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 일에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식당 일은 참새처럼 별 볼 일이 없을 겁니다. 여러분이 전쟁 포로라고 상상해보십시오. 대다수는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데 여러분은 포로수용소의 식당 일을 합니다. 행복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저도 그런 느낌으로 집에서 청소하고 설거지를 합니다. 조금 더 현실적인 예를 들까요? 제가 뇌졸중이나 교통사고로 쓰러졌습니다. 다행히 몇 달 후에 의식이 돌아오고 일 년 뒤에 일어나서 걷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청소하고 설거지하는 일이 황홀할 수밖에 없습니다. 황홀하다면 그건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입니다. 이런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런 삶이 우리 기독교인에게 실제로 가능할까요? 왜 우리는 그런 삶 안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걸까요? 이런 질문에 대답하는 게 설교입니다. 설교하는 사람이 먼저 이런 삶을 알고 실제로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설교자로서 저도 늘 초심으로 돌아가서 이 질문 앞에 섭니다. 거기서 얻는 대답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중입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말은 세상의 기준과 다르게 삶의 기쁨과 존재 이유를 발견한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에게서 그 기쁨과 존재 이유를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따른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어부라는 직업을 버렸고, 가족도 버렸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전 직업을 사람들에게 자랑하지 않았고, 그것으로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에게서 완전히 새로운 삶의 기준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2절과 33절이 바로 그 사실을 가리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2) 둘째 단락은 매우 파격적인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34절에서 예수는 평화가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예수의 발언이 아닙니다. 그는 평화의 왕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닙니까. 35절과 36절은 더더욱 비상식적으로 들립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절은 오해받을 소지가 큰 내용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과 딸을 예수 당신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자신에게 합당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런 표현은 사이비 이단 교주들에게서나 나올만한 내용입니다. 1990년대에 신도들에게 집을 나오라고 부추긴 이단도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왜 오해받을만한 말씀을 이렇게 대놓고 하신 걸까요?

예수 말씀에 열거된 이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큰 힘이 되는 대상입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인류가 존속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역설적이게도 여기에 함정이 있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을 지켜주고 풍성하게 해주는 가족으로 인해서 정작 중요한 삶이 파괴될 수 있습니다. 사회 정의를 위해 희생적으로 맞서는 자식에게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면서 말리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자신은 평범하게 살고 싶었는데 부모의 과욕으로 인해서 원하지 않는 직업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자신에게 필요할 때 힘을 주고 정확한 방향을 제시해주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아마 후자의 경우가 일반적일 겁니다. 서로를 인격적으로 배려하는 가정은 가장 행복한 삶의 조건입니다. 이런저런 경우를 다 전제하더라도 다음의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의지할 사람이나 대상이 있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비유적으로, 친구들과의 놀이에 마음을 빼앗긴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거와 같습니다. 수도승들이 출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족과 친구 사이의 행복을 몰라서가 아니라 더 절대적인 생명을 찾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는 예수 발언에서 칼은 적당하게 우호적인 인간관계에 머물지 말라는 통렬한 인식과 깨달음과 실천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이 자기의 영혼을 가득 채웠다면 세상의 일반적인 삶의 기준과 방식에 그대로 머물 수는 없습니다. 그런 삶의 기준과 방식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제가 이 자리에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게 딱 부러지게 나타나는 게 아니기도 하고, 각자의 삶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에 목을 매지 않는 것입니다. 노벨상처럼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일만으로는 결코 생명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은 의미가 없으니 돈벌이도 하지 말고 세상과 싸우면서 외톨이가 되고 민폐를 끼쳐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는(살후 3:10) 경구는 옳습니다. 우리의 인생살이 전체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가 처리할 수 있는 재량권이 커질수록, 즉 경쟁력이 탁월할수록 삶이 행복할 것이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는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3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28절이나 자기 목숨을 잃는 자가 얻는다는 39절은 똑같이 불편하게 들립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과 어긋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주 하는 말이지만, 자본주의 체제가 빅 브러더처럼 강력하게 작동하기에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뒤처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인생살이가 잘못될까 전전긍긍합니다. 신경이 날카로워집니다. 영혼이 점점 더 궁핍해집니다. 그걸 피하려고 더 많은 물건을 소유하고, 더 많이 자기를 치장하고, 더 많이 소비합니다. 돈을 쓰는 재미로 돈을 버는 데 자기 인생을 소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생명을 얻는 게 아니라 잃는다는 2천 년 전 예수의 이 진단은 오늘의 현실에서도 옳다고 저는 믿습니다.

 

3)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가 목숨을 얻는다는 말씀을 여러분은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이 문장은 모든 신약성경의 압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이 사실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는 의롭다는 인정을 받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앞으로 생명이 완성될 종말에 심판자로 다시 오실 분이십니다. 이런 가르침이 신약성경 곳곳에 자리합니다. 예수야말로 우리가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실제로 이런 기독교 믿음으로 살고 계십니까?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이런 말씀에 근거해서 사는지 아닌지를 시험해볼 수 있는 기준은 두려움 여부입니다. 두려워하면 예수 말씀으로 살지 못하는 겁니다. 두려워하지 않으면 예수 말씀대로 사는 겁니다. 여기서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자기가 잘났다는 자부심이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세상을 두려워하는 대표적인 사람은 조폭들과 군인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보통 사람에게 없는 강제력이 있어서 겉으로 두려움이 없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조직 폭력과 인간을 죽이는 무기가 없으면 견디지 못하는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강제력으로만 자신의 존재를 나타낼 수 있는 개인이나 집단은 겁쟁이들입니다. 세상의 인위적인 조직과 강제력에 매달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실제로 믿었기에 그 이외의 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는 율법사에게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22:34절 이하). 이를 예수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던 요한은 훗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니라.”(요일 4:18).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생명을 얻었기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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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0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2799
979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05
978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851
977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2889
976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920
975 주현절 예수 변모 순간 (눅 9:28~36) 2022-02-27 3026
974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030
973 사순절 예수의 하나님 (눅 15:1~3, 11b~32) [5] 2022-03-27 3044
972 주현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 71:1~6) 2022-01-30 3050
971 주현절 첫 제자들의 출가 이야기 (눅 5:1~11) [7] 2022-02-06 3050
970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130
969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180
968 주현절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전 15:12~20) [6] 2022-02-13 3181
967 사순절 목마름의 실체 (사 55:1~9) [4] 2022-03-20 3185
966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194
965 사순절 시험받는 예수 (눅 4:1~13) 2022-03-06 3197
96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05
963 사순절 유월절 마지막 식사 (눅 22:14~23) [2] 2022-04-10 3217
962 사순절 영광의 몸으로! (빌 3:17~4:1) [2] 2022-03-13 3303
961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312
960 주현절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창 45:3~11, 15) [2] 2022-02-20 3349
959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358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361
957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396
956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406
955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439
954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459
953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502
952 주현절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사 62:1~5) [7] 2022-01-16 3513
951 창조절 불행한 서기관 (막 12:38~44) 2021-11-07 3523
950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546
949 성령강림절 만물의 충만-그리스도의 충만 (엡 4:1~16) [3] 2021-08-01 3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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