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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 (마 11:16-19, 25-30)

성령강림절 조회 수 8371 추천 수 0 2020.07.06 09:31:00
설교보기 : https://youtu.be/2bQi39dhAXM 
성경본문 : 마태복음 11:16-19, 25-30 

11:16-19, 25-30, 성령강림 후 다섯째 주일, 202075

 

 

예수와 세례 요한

마태복음 10장은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다뤘고, 11장은 세례 요한과의 관계를 배경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인물입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세례 요한은 예수와 친족간으로 6개월 먼저 태어났습니다. 그는 요단 광야에서 낙타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지냈다고 합니다(3). 일종의 광야 노숙 생활입니다. 그의 메시지는 심판이었습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하나님이 찍어내서 태워버릴 것이라고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당시 민중들을 비롯하여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앞다퉈 세례 요한에게 몰려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 왕이 동생 빌립과 이혼한 헤로디아를 아내로 맞이한 일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다가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감옥에서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에게 보내서 당신이 유대인이 기다리는 메시야인지 대답하라.”라고 묻게 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에게 준 예수의 대답은 마 11:4절 이하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예수는 세례 요한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11:14).

세례 요한과 예수에게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공통점은 그들의 메시지가 하나님 나라였다는 점과 젊어서 죽임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에 의해서 목이 잘렸고, 예수는 빌라도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차이점은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출가 수도승처럼 금욕생활을 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는 먹고 마시는 일에서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이런 예수의 생활방식을 많은 사람이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처럼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은 예수를 식탐이 있는 사람처럼 취급했습니다. 11:18, 19절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미친 사람이라고 보았고, 예수는 먹고 마시기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을 친구로 여긴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예수는 오늘 설교 본문 마 11:16절 이하에서 당시 어린아이들의 놀이를 비유로 해서 설명합니다. 장터에 앉은 아이들은 서로 편을 나눠서 다음과 같이 놀았습니다. 한쪽에서 피리를 불면 저쪽에서 춤을 추고, 한쪽에서 슬피 울면 저쪽 아이들은 가슴을 쳐야 합니다.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이 학자들에게 따라서 둘로 나뉩니다. 1) 세례 요한은 슬피 울었으나 아무도 따라서 가슴을 치지 않았고, 예수는 피리를 불었으나 아무도 춤을 추지 않았습니다. 영혼이 무감각한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라는 해석입니다. 2) 사람들은 피리를 부는데 세례 요한은 춤을 추지 않고 가슴을 쳤으며, 사람들은 슬피 우는데 예수는 가슴을 치지 않고 춤을 추었다고 비난했습니다. 어느 쪽이 더 정확한 해석인지 끊어서 말할 수 없으나 당시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삶과 예수의 삶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런 생각이 쌓이면서 그들은 세례 요한과 예수를 제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은 헤롯과 빌라도에게 있지만, 당시 사람들의 지지가 있었기에 이런 참사가 발생한 것입니다.

 

율법 실증주의

예수를 비난한 사람들은 비인격적이거나 몰염치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으로 칭찬받을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 대표되는 그들은 당시 사회의 절대 규범이었던 율법에 맞춰서 살았기에 모든 이에게서 인정받았습니다. 요즘에도 그런 모범적인 사람들은 인정받습니다. 그런 이들이 있어서 세상이 이런 정도나마 굴러갑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는 기존 질서와 규범과 범주를 위험에 빠뜨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의 삶이 실제로 그들에게 비난받아도 될 정도로 불량했을까요? 그들의 비난을 두 가지로 나눠서 봅시다.

하나는 예수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긴다는 비난입니다. 사실 예수가 먹는 걸 밝히고, 포도주에 취해서 종종 정신을 잃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먹기를 탐한다는 비난이 예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비난하던 그들도 모르지 않았을 겁니다. 이 비난은 예수가 먹는 문제에서 율법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먹는 문제를 아주 엄격하게 다루었습니다. 먹을 수 있는 짐승과 먹지 못하는 짐승, 먹을 수 있는 생선과 먹지 못하는 생선을 구별했습니다. 피를 마시면 안 되고, 손을 자주 씻어야 하고, 금식해야 할 절기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근동의 다른 민족들과 구별된다는 사실을 이런 먹을거리에서 확인하고, 동시에 이런 방식으로 민족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요즘 코로나19 사태에 거리 두기와 손 씻기를 지키는 일과 비슷합니다. 이런 율법의 기준에 비춰보면 예수는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가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지낸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관점으로 보면 이런 표현은 칭찬으로 들리지만, 당시에는 이런 태도가 율법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세리와 죄인은 상종하지 말아야 할 대상입니다. 이들의 주장에 나름으로 일리가 있습니다. 전염병 걸린 사람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합니다. 로마 체제에 빌붙어 사는 세리들은 일종의 매국노이기에 공동체에서 퇴출해야 합니다. 사과를 보관할 때 썩은 사과를 골라내야만 온전한 사과가 상하지 않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들도 세리와 죄인이 불쌍하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눈물을 머금고 그들을 공동체로부터 분리해내는 게 사회를 건강하게 지킬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이 전통으로 자리 잡으면서 율법에 기록되었습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철저하게 지키던 그들의 눈에 예수는 율법을 무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을 중심으로 한 유대 지도층 인사들이 예수를 비난했다는 사실을 무조건 매도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도 나름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진정성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자신들이 아는 율법을 절대화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율법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종의 율법 실증주의자들이었기에 그들은 예수를 비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둑에서 아마추어 유단자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프로 바둑 9단의 수를 비난하는 거와 같습니다. 모르면 배우면 됩니다. 그들은 예수가 전하는 삶의 깊은 차원을 배울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 수준에서 예수를 비난만 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그리고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실 겁니다. 교회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외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으니 양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이상하게 보이는 겁니다.

 

진리 경험

어떻게 우리는 외눈으로가 아니라 양 눈으로 하나님, 즉 생명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이 말은 곧 진리를 어떻게 직면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게 안 되면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를 비난한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살게 됩니다. 외눈으로 산다는 말은 한쪽에 치우쳐서 세상을 보면서 남을 판단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모든 이들에게 이런 위험성이 있으나 특히 전문직으로 살면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일이 자주 벌어집니다. 똑똑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삶의 실체를 더 정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11:25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이 말씀을 오늘의 상황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서울대학교에 들어간 젊은이는 삶의 본질을 모르고 지방 전문대학에 들어간 젊은이는 안다고 말입니다. 또는 대법원 판사는 진리를 모르고 컴퓨터 부품업체 말단 직원은 안다거나, 신학대학교 총장은 하나님을 모르고 작은 교회의 이름 없는 목사는 안다고 말입니다. 세상은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세상의 지식과 부와 권력이 그들에게 주어집니다. 이런 현실에서 보면 예수의 말씀은 공허하기 짝이 없습니다. 적지 않은 기독교인 역시 이런 말씀을 한쪽 귀로 듣고 흘려보내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의 말씀이 실질적인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에서 얻어들은 경험으로만 그 말씀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생명을 자신들이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행복한 삶의 기준을 친절하게 제시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기준에 들기 위해서 매진합니다. 그 기준들은 매혹적입니다. 그 기준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만나서 나누는 대화는 모든 이런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부동산 이야기가 그런 대화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동창회 모임이나 심지어 교회의 선교회 등의 모임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욕망이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해가 가긴 합니다. 연봉보다 많은 돈을 부동산 투자로 일이 년 안에 쉽게 벌 수 있으니 어쩌겠습니까. 주변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데도 마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는 다른 말씀을 주셨습니다. 사람의 행복이 세상이 제공하는 기준에 달린 게 아니라고, 거기에 매달릴수록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입니다. 11:25절을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부동산 투자(또는 투기)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능력과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이 있는 사람은 행복을 모르고, 그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행복을 안다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에 동의하십니까?

 

안식의 삶

행복은 구원이라는 말과 뜻이 같습니다. 예수는 마 5장에서 복 있는 사람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서 언급된 복 있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는 참된 복의 기준을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던 것과는 다르게 말씀했습니다.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입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 아니라 어린아이에게 하나님의 진리가 나타났다는 오늘 본문과 같은 뜻입니다. 이런 말씀을 이해하려면 먼저 행복이 무엇인지를 외눈이 아니라 양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이겠지만, 저의 생각을 거기에 조금만 보충하겠습니다.

언제 여러분은 정말 행복하십니까? 어떤 순간에 생명을 얻었다는 느낌이 드십니까? 오늘 본문에 따르면 참된 이 있을 때가 그 대답입니다. 아무리 많은 권력과 재물이 있어도 쉼이 없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권력과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서 한순간도 쉬지 못하고 신경 쓰는 사람을 어떻게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정신없이 일하고 경제를 발전시키고 자기 이름을 내는 데만 마음을 두기에 삶이 무엇인지를, 행복이 무엇인지를, 쉼이 무엇인지를 아예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평생 크고 작은 무거운 짐을 진 채로 살면서, 그게 인생이려니 생각합니다.

어떻게 참된 쉼을 얻을 수 있을까요? 참된 쉼을 누구나 원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도 힐링이라는 이름으로 심리적인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이런 데에서는 불교가 훨씬 실용적입니다. 참된 쉼을 얻을 수 있는 마음공부를 중요하게 다루는 종교니까요. 저는 다른 종교에 관해서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아는 기독교 신앙만 말하겠습니다. 예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향해서 자신에게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에게 오는 사람은 을 얻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이 약속을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똑같이 예수의 제자로 삽니다. 단순히 심리적인 힐링이 아니라 영혼의 쉼을, 즉 우리 인격의 가장 깊은 차원에 속한 영혼 구원을 선물로 받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통해서 참된 안식을 얻은 경험이 있으십니까?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 경험을 다른 이에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 사건

가장 원초적인 기독교 교리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예수의 십자가를 직면하는 것이 이 경험의 토대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인생살이에서 가장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사건입니다. 당시에 모든 이들은 십자가 처형을 피하고 싶고, 어리석은 죽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라고 생각했습니다(고전 1:2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구원(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제로 바꾸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참된 쉼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이게 과연 말이 될까요?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그 현장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에게 그 사건은 절망입니다. 어떤 누구에게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자리였습니다. 지난 일에 대한 후회나 앞으로의 인생 설계가 개입될 수 없습니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고립무원의 순간입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제자들에 따르면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일곱 마디를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한 마디로 줄이면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죽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가 이 세상에 이뤄지기를 절대적으로 희망하지 않았던 사람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경험의 이면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외친 예수의 이 발언은 그가 하나님에게 완전히 자신의 운명을 맡겼다는 증거입니다.

십자가 죽음이라는 실존을 좀더 실질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십자가 사건 앞에서는 누가 더 고급스러운 집에서 사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에게 인정받는 일도 무의미합니다. 우리의 크고 작은 자랑거리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위대한 신학자들이 마지막 순간에 자기의 저서를 하찮게 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공산주의냐로 다툴 여지가 없습니다. 저 사람이 이성애자냐 동성애자냐 하는 것도 정색하면서 따질 일이 못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벌거벗은 실존으로 서는 자리가 바로 십자가 처형입니다. 그 십자가 사건이 우리의 일상에 자리한다면,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의 실존인데, 우리는 인정 욕구로 인해 산만해지는 오늘의 삶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으로 나아갈 겁니다. 그제야 우리에게 참된 쉼이 주어질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깊이 들어오지 않으면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세상의 그럴듯한 처세술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그럭저럭 인생살이를 마칠 수는 있겠지만 노예처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삶을 인생이라고 여긴 채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영혼의 참된 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게 곧 구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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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최용우

July 06, 2020
*.107.101.180

<쉼>부분이 너무 공감이 가서  <들꽃편지>7월호   쉼 코너에 넣고 싶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ly 06, 2020
*.182.156.135

예, 제 글이 <들꽃편지>에 실리는 건 큰 기쁨입니다.

최용우 님이 하는 일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놀라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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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7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126
966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186
965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129
964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072
963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548
962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190
961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129
960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270
959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8929
958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332
957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047
956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8803
955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406
954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522
953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551
952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358
951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2924
950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500
949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0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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