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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사장과 장로, 세리와 창녀 (마 21:23-32)

창조절 조회 수 9298 추천 수 0 2020.09.27 19:56:39
설교보기 : https://youtu.be/RhJlEbAh9bw 
성경본문 : 마태복음 21:23-32 

대제사장과 장로, 세리와 창녀

21:23-32, 창조절 넷째 주일, 2020927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 파격적이어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이 바로 그렇습니다. 21:3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당시 세리들은 유대 사회에서 가장 크게 비난받던 직업군입니다. 로마는 자기들이 식민 지배하는 지역에 일정한 금액을 세금으로 부과했습니다. 세금 징수의 책임을 맡은 사람은 원래의 액수보다 더 많이 거둬서 그 차액을 착복했습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당시 세리들은 친일세력이었습니다. 창녀들이 왜 손가락질을 받는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인간의 생존에서 가장 중요한 성을 상품으로 다루기 때문입니다. 요즘 유럽의 몇몇 나라에서는 매춘부를 정식 노동자로 간주한다고 하지만 일반적이지는 않습니다. 2천 년 전 유대 사회에서 모든 이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던 세리와 창녀가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할 사람은 손에 꼽기도 어려웠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

예수님이 세리와 창녀들만 있는 곳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면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도의 불가촉천민에게 살아갈 용기를 주려면 그들이 신의 은총을 가장 많이 받는다고 말해야 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만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대제사장들은 유대교 고위층이며, 장로들은 유대 사회의 고위층입니다. 그들은 유대 백성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대제사장과 장로가 모두 비판받을만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신앙과 지식과 성품에서 괜찮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이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예수님은 무슨 이유로 이렇게 저주에 가까운 말씀으로 비난하신 걸까요? 좀 심하신 거 아닙니까?

그 대답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본문 32절에 그 대답이 나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는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세리와 창녀는 받아들였다는 게 대답입니다. 요한의 가르침은 예수님과 똑같이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돌아서라는 요청입니다. 그런 삶을 가리켜 오늘 우리말 성경 개역 개정은 의의 도”(호도스 디카이오수네스)라고 번역했습니다. 의의 길입니다.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사실 요한이 너희를 찾아와서 올바른 길을 가르쳐줄 때에 너희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고 그를 믿지 않았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세례 요한이 선포한 의의 길을 거부했다는 말은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당시 일반 사람들에게도 이상하게 들렸을 겁니다. 누가 보더라도 대제사장과 장로는 의의 길을 따르는 유대교 전통에 충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로 인해서 유대교라는 종교와 유대라는 나라의 정체성이 유지되었습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유대교와 유대는 존속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곧바로 내리치셨습니다. 예수의 이런 진단은 옳은가요?

엄밀하게 보자면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직접 세례 요한을 거부하지는 않았습니다. 기존의 예루살렘 성전의 전통과 달리 광야에서 재야 선지자처럼 활동하던 세례 요한이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하나 배척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당시 유대 민중들에게 세례 요한은 가장 뛰어난 선지자로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메시아로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 왕을 비판하다가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나서서 세례 요한의 구명운동을 펼쳤다면 요한의 운명은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그들이 속으로 세례 요한을 불편하게 여겼기에 그 상황을 방조했다고 봐야 합니다. 여론을 의식해서 세례 요한은 대놓고 비판하지 못한 그들이 예수님은 대놓고 거부했습니다. 세례 요한에 대한 태도와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겉으로는 다르지만 실제로는 똑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로 돌아서라는 메시지를 거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28절부터 이들의 행태를 비유로 설명합니다.

 

두 아들 이야기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먼저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했습니다. 맏아들은 , 일하러 가겠습니다.”라고 대답은 했으나 실제로는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똑같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일하기 싫습니다.”라고 대답했다가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따른 것이라는 사실을 대제사장과 장로들도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지는 설명에서 둘째 아들이 세리와 창녀에 해당하고 맏아들이 대제사장과 장로에 해당한다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는 누가 보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일단 로 대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말만 그렇게 할 뿐이지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세리와 창녀는 누가 보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일단 싫습니다.”라고 대답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나라에, 즉 의의 길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습니다. 이 비유는 완전히 역설적인 사태입니다. 상상하기 힘듭니다. 세리와 창녀가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가는 일은 기적에 가깝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이 두 계층에 속한 사람 이야기가 개별적으로 나옵니다. 먼저 눅 7:36-49절에 나오는 죄 많은 여자가 바로 매춘부입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이 바리새인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제사장이나 장로에 해당하는 사람입니다. 그 동네에 사는 한 창녀가 그 집으로 와서 예수님 곁에서 울면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고 발에 입 맞추며 고급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습니다. 집주인인 바리새인은 이 여자의 행동을 못마땅해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이 창녀의 행동을 칭찬했습니다. 이 여자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놀라운 말씀을 전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바리새인은 듣지 못한 말씀입니다.

19:1-10절에는 여리고 지역의 세금 징수 책임자인 삭개오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렸습니다. 경건한 유대인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는 건 율법이 금하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포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 보시기에는 창녀와 세리를 죄인 취급하고 따돌리는 바리새인과 당시 여리고 성의 일반 백성들이 오히려 죄인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과 비슷한 내용입니다. 죄인과 의인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이 당시 사람들과 전혀 달랐기에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겁니다. 그 다른 관점이 무엇일까요?

오늘 설교 본문에서 대제사장과 장로는 세례 요한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믿지 않았고, 세리와 창녀는 믿었다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선포는 마 3장에 나옵니다. 그 메시지의 핵심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찍어서 불에 던진다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고 대제사장과 장로는 열매를 맺지 못했지만, 세리와 창녀는 열매를 맺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 열매가 의의 길입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열매가 손에 잡히지는 않습니다. 세리와 창녀가 요한의 설교를 듣고 당장 자기가 하던 일을 그만두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던 창녀가 그날로 창녀 일을 그만두었다는 말이 본문에 없고, 예수님에게 인정받은 삭개오도 세리 일을 그만두었다는 설명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열매라는 게 무엇일까요?

 

뉘우침의 영성

오늘 본문에 따르면 그 답은 뉘우침입니다. 이는 자기 삶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가리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는 너무 잘난 사람들이기에 회개하라는 요한의 메시지를 들어도 감동이 없습니다. 그런 말은 세리나 창녀 같은 사람에게나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모범 답안이니 그렇게 생각하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그들이 뻔뻔하고 몰상식한 사람들이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나름 고상한 사람들입니다. 교육도 충분히 받았습니다. 체면을 지킬 줄도 압니다. 이미 인생살이에서 합격증을 받았기에 자신의 인생에 잘못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자체가 없을 뿐입니다. 제사장 업무를 더 확실하게 하는 일이, 장로 업무를 더 열정적으로 하는 일이 유일한 관심입니다. 거기서 보람을 느낍니다.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설교하는 저 스스로 양심이 찔리긴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모두가 잘났습니다. 세계가 열광하는 BTS의 노랫말은 대부분 너 자신을 사랑하라.”라는 메시지를 바탕에 깔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자신감이 생기고 즐거워집니다. 거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그런 데에만 치우쳐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자기를 성찰하기보다는 남에게 삿대질만 합니다. 무슨 일이 없어도 트집을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켭니다. 불의 앞에서도 입을 다무는 게 능사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선 자기의 중심을 살펴야 합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자기의 인식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거나 많이 배우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아져도 모두가 어린아이입니다. 저를 보더라도 분명합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나 세상을 비판하더라도 자기도 잘못할지 모른다는 점을 전제해야 합니다.

세리와 창녀로 대표되는 사람들은 일단 자신들이 이룬 업적이 없습니다. 없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지경입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압니다. 자기를 부정할 줄 아는 겁니다. 이게 쉽지 않습니다.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게 아니겠습니까. 일단 가진 게 없어야, 이룬 업적이 없어야,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지 않아야, 아는 게 없어야 하나님 나라 앞에서, 즉 생명의 원천 앞에서 자신을 낮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기 부정이 개인으로나 사회적으로 얼마나 힘든지, 저는 교회 안과 밖에서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다른 설교에서도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1) 첫째는 목사 연봉입니다. 대한민국 목사의 연봉은 천차만별입니다. 억대를 받는 목사도 있고, 최저생활비도 받지 못하는 목사가 있습니다. 실제 연봉 액수의 많고 적음은 둘째 치고 일단 목사의 연봉을 공무원처럼 표준화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사제들은 교구별로 똑같이 받습니다. 개신교회도 이런 방식으로 목사 연봉 제도를 바꿀 수 있을까요? 세리나 창녀의 영성이 있다면 현재 목사 연봉 문제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인정할 것입니다. 그것이 뉘우치는 겁니다. 오늘 대한민국 교회는 대제사장과 장로의 영성으로 살다 보니 이런 행태를 잘못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제가 목사 연봉 문제를 말씀드린 이유는 세상살이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연봉의 차이를 무조건 없애자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연봉이 높은 분들에게 부담감을 주려는 말씀도 아닙니다. 우리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살기에 혼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만은 인정하고, 그래서 자기 삶의 관행을 돌아보자는 말씀입니다.

2) 둘째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아파트입니다. 지구에 사는 생명체 중에서 자기가 사는 집을 자기가 직접 만들지 않는 생명체는 인간과 숙주를 이용하는 기생충 외에는 없습니다. 이전에는 인간도 집을 자기 손으로 지었습니다. 이웃의 도움을 받을 정도입니다. 지금은 전문 건축가가 짓습니다. 우리는 그걸 빌리거나 사서 삽니다. 여기까지는 어쩔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의식주의 한 부분이 일부 사람에 의해서 독점되거나 치부의 수단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오늘 대한민국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집은 자기 살아있을 때만 소유하고 죽으면 국가가 관리하는 방식으로 법을 개정하면 어떨지요. 죽으면 집이 필요 없지 않습니까. 자식들을 걱정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모든 사람의 집이 국가 관리로 들어가면서 자식들도 집 문제로 고통당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저의 생각이 오늘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얼마나 낭만적이면서 비현실적인지를 압니다. 제가 잘 알지도 못하는 사회과학이나 정치 경제 문제를 설교하는 게 아닙니다. 세리와 창녀가 자기의 잘못을 뉘우쳐서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갔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실제의 삶에서 설명한 것입니다.

 

공정 문제

제가 늙어서 그런지 몰라도 일부 젊은이들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공정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공정을 내세운 지금 정권도 실제로는 공정하지 않다고 비난합니다. 공정이 중요한 가치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게 이데올로기로 자리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100% 공정한 사회나 개인은 없습니다. 50% 공정하지 않은 사회나 개인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10% 공정하지 않은 사회나 개인을 똑같은 잣대로 비판하면 이 세상은 카오스로 떨어지고 맙니다. 개인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습니다. 공정을 그렇게 강조하는 젊은이들 스스로 외국인 노동자들이나 난민들에게 전혀 공정하지 않습니다. 공정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떨어져 버린 게 아니겠습니까. 기성세대나 젊은 세대 모두 우리는 왜 이렇게 대제사장과 장로처럼 자신의 주관적인 잣대에 묶여서 살고 있을까요?

답은 이미 앞에서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의 기득권에 물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게 좀처럼 쉽지 않다는 사실이 부담으로 다가왔을지 모릅니다. 저는 지금 마태복음을 비롯한 신약성경 전체가 제시하는 근원적인 답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자신의 위치가 기득권이라 할 대제사장과 장로인가, 아니면 소외 계층이라 할 세리와 창녀인가 하는 점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세례 요한이 선포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현실이 된 하나님 나라 앞에 서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에 대한 경험만이 우리를 의의 길로 이끌어가지 않겠습니까. 가장 간단한 비유로, 사랑하는 사람이 기다리는 다음 정거장에서 내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지하철 빈자리에 자기가 먼저 앉아야 한다고 이전투구처럼 살지 않습니다


profile

[레벨:40]새하늘

October 03, 2020
*.126.124.2

예전에는 기득권에 대해 도전해가며 살아갔는데, 

어느새 기득권이 되어 버렸습니다.

무엇 하나를 버리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아 버렸습니다.

비움의 영성, 가난한 자의 영성 안에 채워지지 않는 충만한 영성이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October 03, 2020
*.137.91.228

새하늘 님 같이 불공정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소외된 이들을 배려하고 사는 분을

기득권자라고 한다면 우리 모두 거기에 포함될 겁니다.

주님의 자비를 구하면서 가는데까지 가봅시다.

복된 주일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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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149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3720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172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925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539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485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184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579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071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08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736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462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197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407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317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847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507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404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650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549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560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158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06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400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660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364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443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716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3919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501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857
952 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2] 2022-05-08 3599
951 부활절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의 삶 (계 5:11~14) [1] 2022-05-01 2763
950 부활절 예수를 '믿는 자' (요 20:19~31) [1] 2022-04-24 4645
949 부활절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 (행 10:34~43) [1] 2022-04-17 2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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