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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벌인가, 영생인가! (마 25:31-46)

창조절 조회 수 5621 추천 수 0 2020.11.22 17:50:22
설교보기 : https://youtu.be/uRBns6sk1XE 
성경본문 : 마태복음 25:31-46 

영벌인가, 영생인가!

25:31-46, 창조절 열둘째 주일, 20201122

 

 

심판 이야기

마태복음 25장에는 세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1~13절에는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는 열 명의 젊은 여자들 이야기, 14~30절에는 달란트 이야기, 오늘 설교 본문인 31~46절에는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옵니다. 세 이야기의 주제는 같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실행되면 의인과 악인이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25장의 마지막 구절인 마 25:4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영벌과 영생이라는 말은 위협적으로 들립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겁을 줘서 자기를 따르게 하려는 게 아닐 텐데 말입니다. 일단 전체 맥락을 살펴봅시다. 영생에 들어갈 자와 영벌에 처할 자가 누군지에 관한 설명이 앞에 길게 나왔습니다. 둘을 구분하는 기준은 지극히 작은 자를 돌보는 일입니다. 영생에 들어갈 자들은 지극히 작은 자를 돌 본 사람들이고, 영벌을 받을 자들은 외면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지극히 작은 자는 큰 어려움에 떨어진 이들입니다. 그 어려움의 내용이 본문에서 지루할 정도로 반복됩니다. 네 번이나 나옵니다. 굶주림, 목마름, 나그네, 헐벗음, 병듦, 옥에 갇힘입니다. 이들에게 행한 것이 곧 마지막 심판자로 묘사되는 임금에게 행한 것입니다.

여기서 특징은 그들을 보살핀 자나 외면한 자나 자기들이 한 일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의인들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37절부터 39절까지입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영원한 형벌에 떨어질 자들도 44절에서 똑같이 말합니다. 자신들은 주님을 외면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임금은 양쪽에 각각 40절과 45절에서 똑같은 답변을 합니다. 한쪽은 긍정문이고 다른 쪽은 부정문이지만 의미는 같습니다. 40절만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배운 삶의 요령은 작은 자와 큰 자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큰 자에게는 될 수 있는 대로 잘 보이고, 작은 자는 무시합니다. 작은 자의 신세에 떨어질까 두려워하고, 큰 자의 자리에 서면 기고만장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추세가 그렇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개인의 차원에서도 그렇고, 사회의 차원에서도 그렇고, 국제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작은 나라를 진심으로 돌보는 큰 나라가 있나요? 대개는 무시합니다. 하청 기업을 배려하는 대기업이 있나요? 작은 교회를 진심으로 보살피는 큰 교회가 있나요?

 

파루시아

지극히 작은 자에 관한 오늘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상황을 전제합니다. 25:31절이 그 특별한 때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인자, 영광, 천사, 보좌라는 단어는 일상과 직접 연결되지 않습니다. 어떤 종교적인 깊이를 가리키는 은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단어를 사실적인 것으로 보려고 해서도 안 되지만, 허황한 것으로 무시해도 안 됩니다. 본문에 열거된 이런 단어들이 가리키는 차원은 파루시아입니다. 파루시아는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헬라어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은유적인 설명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지극히 크고 놀라운 일이 된다고 말입니다. 이 사실을 뚫어볼 줄 아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 경험이 곧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일상적인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여러분이 슈퍼마켓에 가서 상품을 가트에 담아 계산대 앞에 섰습니다. 물건을 계산해주는 계산원이 보입니다. 서로 인사를 나눌 수도 있고, 그저 무덤덤하게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계산원을 무시합니다. 작은 실수에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그 사람에게 이 계산원은 인격체가 아니라 소품에 불과합니다. 조금 상상력을 발휘해서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이 계산원은 이 손님과 아주 특별한 관계입니다. 그 사실을 두 사람이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이 손님이 초등학교 시절 신세를 많이 졌고, 가장 존경하던 선생님의 딸입니다. 이 사실을 알았다면 이 손님은 계산원의 실수에 짜증을 내지 않았을 겁니다. 상상력을 조금 더 발휘해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먼 훗날 이 계산원의 손자와 이 손님의 손녀가 결혼하게 됩니다. 이 비밀을 미리 알았다면 지금 손님과 계산원의 관계는 달라지지 않았겠습니까. 우리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상의 소소한 일들은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이를 아는 사람은 지극히 작은 자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라는 파루시아의 관점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게 눈에 보이지 않기에 작은 자와 큰 자를 분리해서 바라보는 세상의 관점에 묶입니다. 파루시아의 관점을 실질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 몇 가지 예를 더 들어야겠습니다. 파루시아를 죽음이라고 생각해보세요. 절대적 사건인 죽음 앞에서는 유산의 많고 적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 큰 기업체의 사장이 있고, 그 기업체 건물을 청소하는 말단 직원이 있다고 합시다. 요즘은 청소원을 직원으로 두지 않고 주로 용역으로 대체하는가 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두 사람은 차이가 큽니다. 그러나 파루시아의 관점에서는 다를 게 없습니다. 파루시아는 하나님의 임재이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누가 더 가까이 갔느냐, 하는 관점으로 두 사람을 봐야 합니다. 사장은 기업을 돈벌이로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돈벌이로 이용해야 할 대상입니다. 청소부는 건물을 청소하는 일 자체를 귀하게 여깁니다. 청소하면서 만나는 회사 직원들을 사랑합니다. 이 청소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극히 작은 자를 사랑했으므로 영생에 들어갈 것입니다.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

영벌이나 영생은 죽은 다음의 문제이니 세상의 문제로도 충분히 골치 아프니까 이에 관해서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영벌이나 영생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작은 자를 무시하는 사람 중에서도 건강하고 편안하게 잘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평범한 시민들은 작은 자를 무시하지 않고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으면서 남부럽지 않은 인생을 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들은 보통 나는 다른 욕심이 없어요. 늙어서도 건강하기만 하면 충분해요.”라고 말합니다. 가능한 한 착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다만 그들은 오늘 본문이 말하는 영벌과 영생은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의 가장 일반적인 삶이 이렇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 남부럽지 않게 사는 지금의 삶이 곧 끝난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외면하는 영벌과 영생이 이미 여기서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첫 번째 사실을 보십시오. 지금 우리의 삶이 곧 끝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죽음이 그들에게는 추상일 뿐입니다. 죽음을 추상이 아니라 실체로 안다면 대통령직을 맡겨도 고사할 겁니다. 사명감으로 나설 수는 있으나 정치적 욕망으로 대통령이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대통령 될 사람을 삼고초려 해서 맡길 수 있는 때가 왔으면 합니다. 여전히 잘난 척하고 이기적이고 중상모략하고 돈을 신으로 여기고 지극히 작은 자를 무시하면서 사는 이유는 어딘가에 취해서 죽음이라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기 때문이겠지요. 길을 잃은 아이가 엄마 아빠가 자기 곁에 왔는데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외롭고 무서우니까 울고, 그게 더 심해지면서 공황에 빠집니다.

영생이 이미 여기서 시작했다는 둘째 사실을 생각해보십시오. 성경이 말하는 영생(eternal life)은 무한한 생명(endless life)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무한하게 반복되고 이어지는 시간이 아니라 질적으로 달라진 시간을 가리킵니다. 이를 소유와 존재 개념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이해하기 좋습니다. 소유 지향적인 것은 말 그대로 소유(to have)를 통해서 자기 삶을 확인하는 태도입니다. 존재 지향적인 것은 존재(to be)를 통해서 자기 삶을 확인하는 태도입니다. 소유 지향적인 삶은 소유가 확인되어야만 행복하지만, 존재 지향적인 삶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합니다. 교회가 작아도 예배를 드린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영적으로 행복하다면 존재 지향적인 신앙이고, 교회가 커야만 만족스럽다면 소유 지향적인 신앙입니다. 영생은 하나님 안에서 질적으로 변화하는 생명이니까 그걸 알고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죽음 이후가 아니라 지금 살아 있는 여기서 우리는 영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으시는지요.

하나님을 잘 믿어도 실제로 우리 인생은 영원한 생명과 거리가 멀게 느껴집니다. 모두는 병들고 늙어갑니다. 걱정이 그치지 않습니다. 외롭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합니다. 인간적인 약점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죽을 때까지 이런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영생이 아직은 실현되지는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지금 경험할 수 있는 영생은 영생 자체가 아니라 영생의 흔적, 영생의 그림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생을 태양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실제 삶에서 경험하는 영생은 태양 빛입니다. 빛은 상황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밤이 되면 빛이 없습니다. 구름이 끼어도 빛은 없습니다. 눈을 감으면 아무리 밝은 빛 아래에서도 빛을 느낄 수 없습니다. 영생의 궁극적인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은 종말입니다. 이 종말을 기독교 전통은 예수의 재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완성된 영생 자체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영생의 흔적이 무엇인지 알고 느끼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태양 자체는 직접 볼 수 없더라도 거기서 흘러나온 빛은 이 세상에서 느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만 그 빛을 향해서 인생을 살아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이미 그 답을 알 것입니다. 예수가 바로 생명의 빛입니다. 예수를 아는 사람은 곧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즉 영생에 들어간다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11:25, 26).

 

율법 너머의 생명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리고 오늘 우리가 예수를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믿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우선 예수 당시의 유대교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교는 구원을 얻으려면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법을 율법이라고 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율법은 민중들에게 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을 자유롭게 해야 할 법이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훼손했습니다. 당신은 왜 안식일에 병을 고쳤어. 당신은 왜 손을 씻지 않았어. 당신은 왜 성지 순례를 다녀오지 않았어. 당신은 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어. 당신은 왜 군대에 가지 않았어. 온갖 규범이 사람과 사회를 옭아맸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어디로 가고 율법만 그들의 목표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게 삽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철저하게 구분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죄인으로 몰았습니다.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은 유대 사회에서 차별받았습니다.

예수는 그들이 절대시하는 율법을 절대시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관행처럼 행해지던 돈거래를 못 하게 했고, 심지어는 성전을 허물라고까지 말했습니다(2:19). 안식일 논쟁 과정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27). 율법 실증주의에 대한 부정입니다. 쉽게 말해서 가난해도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의 발언과 행위는 혁명이었습니다. 기존 질서와 대립하는 말씀을 선포한 예수는 십자가 처형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에게서 영혼의 해방을 경험했습니다. 삶을 파괴하는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당시 삶의 기준이었던 율법을 더는 절대시하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오래 묵은 체증이 풀리는 심정이었을 겁니다. 말이 그렇지 이런 경험은 쉽지 않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각오해야만 따라갈 수 있습니다. 이를 오늘의 상황으로 바꾸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자본의 힘에 완벽하게 지배당합니다. 사회 메커니즘은 오직 경제적 이익을 바탕에 둡니다. 이권을 두고 패싸움을 벌이는 조폭과 다를 게 없습니다. 아파트 문제가 우리 삶의 토대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집을 사도 경제적 이익을 크게 보지 않고, 집을 사지 않아도 크게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어야 이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런 확신이 가능할까요? 기독교인에게 이런 확신이 있을까요?

예수 제자들은 율법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생명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아니 따르지 않아야만 궁극적인 생명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하는 걱정에 사로잡혀서 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이제는 세상에서 지극히 작다고 여기는 이들이 작은 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제자들은 자신들이 작은 자가 되는 걸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이 땅에서 영생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참된 생명이 최종적으로 완성될 순간을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작은 자가 되는 걸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게 저절로 되는 게 아닙니다. 생명 완성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대답은 이미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생명 자체이신 예수의 제자가 되기만 하면 다른 조건은 살아가는 데에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른 조건은 가능한 한 포기하는 게 더 바람직했습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9:23). 이게 실제로 말이 될까요? 말이 된다고 생각하면 여러분은 제자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제자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마태복음 기자가 전하는 영생에 들어갈 것입니다. 아니 이미 영생에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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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流水不爭先

November 24, 2020
*.172.97.160

영생, 질적으로 달라진 시간, 하나님의 임재

지극히 상식적인 삶의 자세와는 다른 무엇처럼 다가오는데

잡으려 하면 손가락사이로 빠져나갑니다

저의 인식너머에 계시다는 분을 어찌 인식하리요

주님의 도움을 기다려 볼 수 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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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24, 2020
*.137.91.228

예, 유수 님의 고백이 바로 저의 고백입니다. 

다만 사족 같은 말을 붙이면 두 가지입니다.

1) 하나님은 우리 인식 너머에 계시면서 그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분이겠지요.

2) 2천년전 예수가 오늘 내 삶에 생생하게 경험된다면 

   우리는 질적으로 달라진 시간이라 할 파루시아를 경험하는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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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9]새하늘

November 29, 2020
*.186.140.199

'사람 사는 세상'을 생각하며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본주의 차원을 넘어서 세상의 상식적인 사회로 가야 되는데,
이것을 이야기 하면 색다르게 보는 것일까요?

조금 다르게 이야기 하면
교회 안에서도 기본적인 상식이 통하는 것이 정말 힘든가 고민을 해봅니다.
물론 교회는 상식을 뛰어넘는 믿음 그 이상이 있다고 믿지만
기본 상식조차 금기어가 되어버린 작금의 교회 현실이 이해가 안됩니다.

오늘 설교 말씀도 이 사회에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말씀인데,
이런 이야기 하는 것 자체가 불순자로 몰아 가고 있는것 자체가 답답합니다.
예수님을 믿어 삼박자로 흥해서 살기보다
하나님을 섬기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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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0 창조절 청함과 택함 "사이" (마 22:1-14) 2020-10-11 3011
869 창조절 자기 의(義)와 하나님의 의 (빌 3:4-14) [2] 2020-10-04 4381
868 창조절 대제사장과 장로, 세리와 창녀 (마 21:23-32) [2] 2020-09-27 5809
867 창조절 복음, 은혜, 믿음, 고난 (빌 1:21-30) [2] 2020-09-20 2976
866 창조절 용서, 그 불가능한 명령 (마 18:21-35) [9] 2020-09-13 5624
865 창조절 "급히 먹으라!" (출 12:1-14) [2] 2020-09-06 3072
864 성령강림절 "사탄아!" (마 16:21-28) [2] 2020-08-30 2472
863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5] 2020-08-23 2464
862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하심 (롬 11:1-2a, 29-32) [4] 2020-08-16 2534
861 성령강림절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마 14:22-33) [2] 2020-08-09 3380
860 성령강림절 "브니엘"에서 (창 32:22-31) [5] 2020-08-02 2959
859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마 13:31-33, 44-52) [5] 2020-07-26 2636
858 성령강림절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롬 8:12-25) 2020-07-19 2261
857 성령강림절 에서와 야곱 이야기 (창 25:19-34) [4] 2020-07-12 6465
856 성령강림절 쉼 (마 11:16-19, 25-30) [2] 2020-07-06 6129
855 성령강림절 냉수 한 그릇의 궁극적 의미 (마 10:40-11:1) [2] 2020-06-28 3250
854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9) 2020-06-21 2635
853 성령강림절 못 하실 일이 없는 하나님 (창 18:1-15) [6] 2020-06-14 3454
852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고후 13:11-13) [4] 2020-06-07 2771
851 성령강림절 성령 공동체의 길 (고전 12:4-13) [2] 2020-05-31 2644
850 부활절 영광과 영생 (요 17:1-11) [4] 2020-05-24 2487
849 부활절 사랑과 계명 (요 14:15-21) 2020-05-17 2556
848 부활절 어두운 데서 기이한 빛으로! (벧전 2:2-10) [4] 2020-05-10 2819
847 부활절 성찬 예배 공동체 (행 2:42-47) [2] 2020-05-03 2220
846 부활절 눈이 밝아진 제자들 (눅 24:13-35) 2020-04-26 4236
845 부활절 예수의 손과 옆구리 (요 20:19-29) [2] 2020-04-19 5866
844 부활절 "위의 것을 찾으라!" (골 3:1-4) [2] 2020-04-12 4070
843 사순절 주의 손과 주의 얼굴 (시 31:9-16) [6] 2020-04-05 3087
842 사순절 여호와의 손과 영 (겔 37:1-14) [2] 2020-03-29 2769
841 사순절 예수는 심판 주다! (요 9:35-41) [2] 2020-03-22 5222
840 사순절 생존의 위기 앞에서 (출 17:1-7) 2020-03-15 3260
839 사순절 영생과 예수 (요 3:1-17) 2020-03-08 2810
838 사순절 의와 생명 (롬 5:12-19) [2] 2020-03-01 3367
837 주현절 영광스러운 미래의 생명 (마 17:1-9) 2020-02-23 2345
836 주현절 "생명을 선택하라!" (신 30:15-20) [8] 2020-02-16 3834
835 주현절 십자가에 못 박힌 이 (고전 2:1-12) [8] 2020-02-10 3435
834 주현절 가난한 사람과 하늘나라 (마 5:1-12) 2020-02-02 6813
833 주현절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2] 2020-01-26 3203
832 주현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7] 2020-01-19 3004
831 주현절 하나님의 정의 (사 42:1-9) [9] 2020-01-13 4266
830 성탄절 하나님을 본 사람 (요 1:10-18) 2020-01-05 3050
829 성탄절 환난에 동참하시는 하나님 (사 63:7-9) [2] 2019-12-29 3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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