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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9~39)

주현절 조회 수 3748 추천 수 0 2021.02.07 17:24:48
설교보기 : https://youtu.be/HNk-uoLHtDE 
성경본문 : 마가복음 1:29~39 

예수의 축귀 능력

1:29~39, 주현절 후 다섯째 주일, 202127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삼십 대 초반 2~3년간 유랑 랍비로 살았습니다. 그 기간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preaching)하고 가르치고(teaching), 장애인과 환자를 치유하셨습니다(healing). 환자 치유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을 고친다는 뜻의 신유(神癒)입니다. 선포와 가르침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나 신유는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복음서에는 이런 신유 현상과 귀신 축출이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기에 자연과학의 세례를 받은 현대인들에게 복음서의 그런 이야기는 괴기스럽게 보입니다. 어떤 이들은 본문에 나온 내용을 있는 그대로 무조건 믿는다거나 예수님의 저런 신유와 축귀 능력을 자신도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복음서 기자들이 오늘 우리 눈에 기이하게 보이는 축귀(逐鬼) 이야기를 자주 보도하는 것일까요?

 

귀신 현상

오늘 설교 본문인 막 1:29~39절에는 이와 관련해서 세 가지 독립적인 전승이 나옵니다. 첫째 전승은 29~31절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시몬 베드로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집에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자 열병이 나았다고 합니다. 둘째는 32~34절입니다. 날이 저물자 많은 사람이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안식일이 끝났으니까 사람들이 안심하고 몰려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각종 병든 사람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았다고 합니다. 셋째 단락은 35~39절입니다. 예수님이 새벽 기도를 드리는 중에도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만 계속 머물러 있을 수는 없으니 갈릴리 다른 지역으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전반적인 상황을 마가복음 기자는 39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면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오늘 설교 본문보다 앞에 나오는 구절과 뒤에 나오는 구절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앞 구절에는 회당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뒤에는 나병 환자를 고쳤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21절 이하에는 다시 중풍 병자를 고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마가복음을 처음 읽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일종의 초능력자로 느낄만합니다.

이런 초능력적인 행위가 당시에는 특별하지 않았습니다. 고대 유대 역사에도 비슷한 사건은 종종 나옵니다. 홍해를 가른 모세는 물론이고 그의 후임자인 여호수아도 기적적인 초능력을 행했습니다. 그의 기도로 해와 달은 운행을 멈추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죽은 아이를 살리기도 합니다.(왕상 17:17이하) 그리스 신화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권과 이집트 문명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점성술이 당시에는 오늘의 자연과학 정도의 권위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초능력을 행했다는 사실 자체가 핵심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혹시 예수님의 초능력 이야기는 실제로는 없는 거를 꾸며낸 이야기냐, 하고 묻고 싶은 분들이 계신가요? 이런 질문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당시 상황을 추정해보십시오. 3년 공생애 동안 예수님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아픈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셨을 겁니다. 때로는 안수하셨겠지요. 아픈 사람에게 강렬한 연민을 느끼는 이들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 능력으로 환자가 치료될 수 있습니다. 장애인을 위해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리지 않았겠습니까. 심리적인 억압에 묶여서 문제가 된 장애는 기도를 받음으로 치료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치료받지 못한 사람도 물론 있었겠지요. 복음서는 그런 일은 말하지 않습니다.

복음서 기자의 관심은 예수님에게 일어난 신유나 축귀로 묘사된 기적 사건 자체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는 근원적인 어떤 사건이나 사실을 당대 사람들이 이해하기 좋은 방식으로 설명하는 수단이었습니다. 그 근원적인 사건과 사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그에게는 당연히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기적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지닌 분이시니 하나님을 대적하는 귀신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초능력을 행하신 분이기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기에 그에게서 기적적인 사건들이 발생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이런 설명이 모호하게 들리는 분들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고난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아프기도 하고 사람에게 배신당하기도 합니다.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이상한 일도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경험될 수 있습니다. 억울해서 잠이 오지 않는 일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냐고 다른 사람들은 말하겠으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사람은 그들과 생각이 다릅니다. 따라서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는 인생살이의 일들을 일일이 분석하고 대처하기보다는 하나님이 누군지를 아는 데에 전념합니다. 그래서 성경과 기독교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강조합니다. 예수의 축귀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하려는 핵심은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는지 아닌지에 있는 게 아니라 그런 일을 행한 자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걸 구별해서 읽을 때만 치병과 축귀 이야기는 실제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우리의 삶에는 별로 의미 없는 고대인들의 주술신앙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삶의 심연

고대인들에게 재난과 질병은 귀신, 즉 악한 영에 의한 현상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늘 우리가 고대인들의 그런 세계 표상을 유치하다고 보면 안 됩니다. 그들은 인간 삶과 세상의 어두운 심연을 그런 단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귀신과 반대되는 단어는 천사입니다. 천사도 그 심연을 가리키는 은유입니다. 자연과학이 발전하지 않은 시대에 살던 옛날 사람들보다는 물리학과 생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대에 사는 우리는 훨씬 많은 사실을 알지만 그래도 궁극적인 차원은 모릅니다. 빛은 입자이면서도 동시에 파동입니다. 여기까지는 물리학자들이 밝혀냈습니다. 이 사실을 증명한 것만도 대단한 사건이긴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입자와 파동의 성격을 지녀야 하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일종의 마술 같은 전자 도약도 현상으로만 알지 궁극적인 이유는 모릅니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설교에서도 말한 내용인데, 20년 전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당시에 20년이 지나면 여러분 각자가 대구 샘터교회 예배를 드리게 되리라고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의술이 발달했는데도 장애아가 태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 삶의 모든 일이 감춰져 있습니다. 우리의 운명을 파멸하는 어떤 근원적인 세력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세력을 고대인들은 귀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귀신이라는 단어를 보지 말고 그 단어가 가리키는 삶의 심연을 봐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서 귀신 현상을 경험합니까? 그게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다르기에 한 가지 현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크게 묶어서 말하면 생명 파괴가 바로 귀신 현상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언급되는 온갖 질병도 우리의 삶을 파괴하기에 고대인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역시 귀신 현상입니다. 이걸 귀신 현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옛날에 비해서 위생적으로 훨씬 더 청결하게, 의학적으로도 첨단 기술로, 영양 면에서도 풍족하게 삽니다. 이런 정도의 환경이라면 병이 이미 없어졌어야 합니다. 옛날보다는 약간 나을지 모르나 우리가 병으로 고생한다는 근본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평균 수명의 연장은 오히려 노환 시간이 늘어난 것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의술이 모든 병을 해결할 날이 올까요? 답은 아무도 모릅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을 보니 그런 날이 오기는커녕 병이 오히려 우리를 더 강력하게 괴롭힐지 모른다는 걱정이 앞섭니다. 이를 귀신 현상이라고 말하면 잘못일까요?

제가 자주 말하는 자본주의는 경제 이데올로기입니다. 한 마디로 물적 자본이 인류를 구원한다는 이념입니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탁하여 현대 모든 국가와 사람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습니다. 모든 가치가 돈으로 평가됩니다. 직업도 연봉으로만 평가됩니다. 젊은이들이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그게 기준입니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아파트 문제도 돈입니다. 그 광풍은 마치 귀신 현상과 같습니다. 오죽하면 영끌이라는 신조어가 나왔겠습니까. 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 성장주의도 핵심은 헌금입니다. 돈이지요. 자본이 우리 사회 공동체를 위태롭게 합니다. 이게 귀신 현상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시대 속에서 사는 우리는 자신이 귀신 들린 사람인지 아닌지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잘난척 하는 삶의 태도를 보십시오. 어떤 어학 학원 강사가 커피 배달 온 사람을 무시하는 말을 했다고 해서 시끄러웠습니다. 학교 다닐 때 공부 열심히 하지 않았으니까 배달 일밖에 못 한다는 발언이었습니다. 그렇게 발언한 사람만이 아니라 오늘날 교양 있는 많은 사람조차도 그런 의식으로 살아갑니다. 누가 귀신 들린 이들인지 아닌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설교하는 목사도 사실은 귀신 현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언행을 자행합니다. 저도 그렇지 않다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십자가와 부활

오늘 설교 본문에 나오는 세 가지 이야기에서 공통되는 점은 예수님이 귀신을 내쫓았다는 사실입니다. 39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온 갈릴리를 다니면서 회당에서 복음을 설교하고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복음 전파와 귀신 축출은 같은 이야기입니다. 복음을 알아들을 때 우리의 생명을,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미래를 파괴하는 세력에 맞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기자들은 일제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악한 영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살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신약성경 기자들의 주장이 정말 옳은가요? 그들의 주장을 여러분은 실제 삶에서 경험하셨나요? 개인에 따라서 다를 겁니다.

예수의 축귀 능력을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강력한 초능력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늘의 천사를 끌어와서 당장 모든 사람을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만들고 세상을 정의롭게 만드는 식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악을 눈에 보이게 깨부술 수 있는 사람을 기다립니다. 그게 매혹적이기는 합니다. 축귀의 실질적인 표적을 원하는 겁니다. 유대인에게는 모세와 엘리야가 기다림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그런 능력을 기대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몰아내신 예수님에게 사람들이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2:18)이라고 다그쳤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다루는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11:29) 말씀하셨습니다. 요나는 큰 물고기에게 삼켜서 사흘 동안 뱃속에 갇혔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사흘 후의 부활을 가리킵니다.

이 대목에서 오늘 우리의 삶을 가장 광범위하고 철저하게 지배하는 정치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의로운 세상을 우리는 기다립니다. 강력한 힘으로 대한민국을 새롭게 바꿀 정치인을 원합니다. 흔한 말로 적폐를 일소할 수 있는 정치 지도자 말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세요. 그런 정치인은 세상에 없습니다. 역설적으로 적폐 일소는 독재자에게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지난 60~80년대에 그런 독재 시대를 살았습니다. 독재자들은 정의로운 세상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웁니다. 조폭들이 깨끗하게 살자.”라는 문신을 새기는 거와 같습니다. 양심적이고 도덕적이고 민주적 마인드가 강한 정치인이 등장해도 정의가 실현되는 게 아닙니다. 지배 세력이 되면 그들이 다시 부도덕한 집단으로 떨어질 개연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악을 제거하면 세상이 새로워지리라는 생각은 너무 낭만적입니다. 정치와 경제 영역에서도 한 귀신을 쫓아내면 다른 귀신이 자리를 차지합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저는 정치 냉소주의자가 아닙니다. 이런 한계가 있어도 정치가 더 새롭게 더 진보적으로 변할 수 있도록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의 축귀 능력은 이와 전혀 다릅니다. 그는 모세나 엘리야처럼 초능력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이게 말이 안 되는 시츄에이션입니다. 악한 영을 소멸하고 불의를 제거하며 적폐를 일소하고 정의를 굳건히 세워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야 할 하나님의 아들이 모멸스러운 방식으로 죽었으니 말입니다. 십자가 처형은 여러분이 알다시피 반국가 사범에게 내리는 중형입니다. 당시에 누구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인류 구원의 길이라거나 의로운 자의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라면 돌에 맞아 죽을 수는 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시고, 예루살렘 성전을 개혁하였으며,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였고, 죄인과 세리의 친구로 살았던 예수님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죽음이었습니다. 가장 거룩한 자가 가장 수치스럽게 죽는 상황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도 그런 죽음을 극구 뜯어말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그 운명에 순종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축귀 능력과는 전혀 반대의 길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운명이 십자가 처형으로 끝났다면 하나님 나라에 영혼이 사로잡혀 몸부림치던 한 유대인 젊은 선지자의 억울한 죽음이었다고 역사에 기록되었을 겁니다. 실망한 예수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겠지요. 예수의 운명은 바로 이 지점부터 새로운 차원으로 비약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살리셨습니다. 제자들은 역사적 예수를 부활의 그리스도로 경험했습니다. 그를 통해서 생명의 궁극적인 깊이에 들어갔습니다. 생명의 실재(reality of life)를 경험한 것입니다. 이런 경험에서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자신들에게 십자가 죽음이 닥쳐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럴 때만 우리는 귀신 현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악한 세력에서 해방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길게, 또는 짧게 남은 여러분의 인생에 예수의 축귀 능력이 충만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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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February 09, 2021
*.126.124.2

주현절4주 선지자의 운명과 이번주 예수님의 축귀능력의 설교가 연속으로 이어지네요.
우리 삶속에 주님이 한 말씀만 들으면 세상을 다 얻을 것처럼 살지만 과연 그렇까요?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 예수님의 추종자처럼 간절히 한 말씀만이라도 원하지만

들을 귀는 정말 있기는 한지 묻고 싶습니다.


정작 이야기하면 등을 돌리는 것이 요즈음 우리들의 모습이라 봅니다.

내 삶과 반대로 살아가라 하면 할 수있을까요?

예수님이 부자청년 보고 쫓아 오라고 했을때 가지 못했습니다.

선지자, 구원자를 원하기만 할뿐 숫자자판 등만 두드길 뿐입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는 세상이 아닌데, 왜 더욱 예수님 믿기가 더 어렵고 힘들까요?

질문을 던지고 또 던집니다.


나약한 자신만 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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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09, 2021
*.137.91.228

예, 새하늘 님이 짚었듯이 우리의 실존은 비루합니다.

죽는 순간까지 거기서 실제로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저의 일상을 보더라도 그렇더군요.

다만 그 사실을 합리화하거나 체념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앞으로 나아가다보면

그 비루한 실존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지 않을는지요.

복된 설날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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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7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2822
976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702
975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364
974 기타 평화를 위한 분열, 8월29일 [5] 2004-08-30 8434
973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400
972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9113
971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895
970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245
969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297
968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252
967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142
966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643
965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307
964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238
963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338
962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9026
961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395
960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101
959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8905
958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479
957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600
956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624
955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441
954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3001
953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581
952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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