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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LzkLjHeUjT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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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에베소서 4:1~16 |
만물의 충만-그리스도의 충만
엡 4:1~16, 성령강림 후 열째 주일, 2021년 8월8일
우리는 오늘 에베소서 말씀의 한 대목을 설교의 본문으로 읽었습니다. 그 문서는 자그마치 2천 년 전에 기록된 것입니다. 당시와 지금의 세상은 비교가 어려울 정도로 차이가 납니다. 당시 어떤 사람이 시간 여행으로 오늘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에 나타난다면 현실감을 못 느낄 겁니다. 그렇지만 근본에 속한 일들은 2천 넌 전이나 오늘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사람은 숨을 쉬고 먹고 마셔야 합니다. 당시에도 씨를 뿌리지만 지금도 씨를 뿌립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똑같이 붑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은 희로애락을 똑같이 느끼면서 살다가 모두 죽습니다. 2천 년 전 성경에 나오는 인물도 오늘 우리와 똑같은 인격, 정서, 마음으로 살았다는 사실을 바탕에 놓고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그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는 수년 전에 에베소 교회를 설립하고 다른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지금은 감옥에 갇힌 몸으로(엡 3:1)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엡 4:1절이 그 형편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
옥에 갇힌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강조하는 점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우리는 보통 소명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친구를 따라오거나 가족을 따라올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자기가 받은 소명에 합당하게 처신해야 합니다. 그럴 때만 기독교 신앙이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습니다. 소명에 합당하다는 말은 교회 안에서 자기 역할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늘 성찰한다는 뜻입니다. 그 역할을 바울은 11절에서 다음과 같이 다섯 개로 나열합니다.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입니다. 그 외에도 더 있을 겁니다. 교회 행정을 맡은 자, 어려운 일을 돌보는 자 등등입니다. 오늘 교회에도 그런 역할이 있습니다. 자기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는 것이 바로 소명에 합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개인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도 여전히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데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교회 공동체를 세우고 복음이 바르게 전파되는 데에 합당한 것인지보다는 자기가 교회 안에서 인정받느냐 하는 점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겁니다. 유치한 일로 싸우기도 합니다. 세상은 훨씬 더 노골적으로 이렇게 돌아갑니다. 자기 삶을 소명으로 여기지 않는 데서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자신의 역할을 소명으로 여기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을 바울은 12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2절에 따르면 사도, 선지자, 목사, 교사의 소명에는 두 가지 본질이 있습니다. 하나는 봉사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몸(소마 투 그리스투)을 세우는 일입니다. 이를 하나로 묶으면 봉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자신이 이런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는지 아닌지를 성찰해야만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를 위해서 봉사하고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사심 없이 일하기에는 우리의 인격과 품성이 크게 부족합니다.
인격이나 품성을 잘 갖추었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소명 문제는 교양의 차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4:2절에서 바울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라고 썼습니다. 서로 용납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 문제는 결국 신앙의 본질을 얼마나 이해하고 믿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3절에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라고 기술합니다. 성령을 통해서 ‘하나’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의 단일성을 가리킵니다. 4~6a절에는 그 단일성을 일곱 개 항목으로 설명합니다. 몸, 성령, 소망, 주, 믿음, 세례, 하나님이 하나라고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 자체가 하나를 이루어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각자가 맡은 일은 다르나 본질은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을 만물의 아버지라고 표현했습니다. 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한 분 하나님은 만유의 아버지(파테르 판톤)입니다. 만유, 즉 만물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바울은 세 가지 전치사를 사용해서 설명했습니다. 에피(위에), 디아(통하여), 엔(안에)입니다. 해당하는 헬라어 문장을 그대로 따오면 다음과 같습니다. “ἐπὶ πάντων καὶ διὰ πάντων καὶ ἐν πᾶσιν”(만물 위에, 만물을 통해서, 만물 안에). 바울이 증언하는 한 분 하나님은 만물의 아버지로서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통해서 계시며, 만물 안에 계신 분이십니다. 이런 표현이 관념적으로 들릴 겁니다. 하나님은 기독교만의 하나님이 아니며, 어떤 특별한 사람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 모든 것 위에 초월하시면서, 모든 것을 통해서 자기를 나타내시고, 모든 것 안에 존재하는 분이십니다. 만물에 의존하면서 만물을 통치하는 분, 즉 ‘파테르 판톤’이십니다. 우리가 그 만물의 아버지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믿으며 살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8~9절에서 시편을 인용하면서 ‘만물의 아버지’에 대한 설명을 이어갑니다. 바울이 여기서 핵심적으로 말하려는 내용은 만물의 아버지인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물의 충만을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보이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와서 우리와 똑같이 육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성육신입니다. 그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세상에서 살다가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묻히셨으나 부활하시어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분의 승천을 가리킵니다. 10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제가 헬라어 성경을 의역으로 번역했습니다.
이곳에 내려오신 그분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 위로 승천하신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을 충만하게 하실 것입니다.
만물을 충만하게 하신다는 말을 이해하려면 먼저 세상을 바라보는 차원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세상은 똑같아 보이지만 그것에 대한 경험은 다릅니다. 부분만 보는 사람이 있고 전체를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겉 형태만 보는 사람이 있고, 그 본질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충만을 경험하는 사람이 있고 결핍에 묶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은 공기로 충만합니다. 이를 부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우주에는 흑암 에너지와 흑암 물질이 충만합니다. 이를 인정하지 않을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실감하지 못할 뿐입니다. 자기가 실감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실을 부정하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어떤 사람에게 이 세상은 소리로 가득합니다. 늙어 청각 장애를 입은 베토벤의 마지막 운명을 주제로 다룬 영화 <카핑 베토벤>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내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지. 내 귀에는 계속 음악 소리가 들려. 세상은 소리로 충만해.” 베토벤은 세상에 소리가 충만하다고 느끼는데, 보통 사람은 왜 느끼지 못할까요? 소리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 세상은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똑같은 조건에서 사는데도 어떤 사람은 일상에서 존재의 기쁨을 충만하게 느끼고 어떤 사람은 느끼지 못합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요즘 저는 어느 기독교 월간지에 보낼 원고를 작성하는 중입니다. 베르디가 작곡한 <레퀴엠>의 마지막 곡 “리베라 메”를 소개하는 글입니다. 아주 오래전 2001년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베를린필하모니, 스웨덴 라디오 합창단과 연주한 음반인 <레퀴엠> 전곡을 DVD로 들었습니다. 네 명의 독창자도 나옵니다. 마지막 곡은 소프라노가 노래합니다. 그 가수의 이름은 안젤라 게오르규(Angela Gheorghiu)입니다. “리베라 메”는 “날 구하소서”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마지막 가사가 이렇습니다. “그 두려운 날에 하늘과 땅이 흔들리고/ 당신께서 세상을/ 불로 심판하러 오실 때에/ 날 구하소서, 주여./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그 두려운 날에 날 구하소서/ 날 구하소서.” 작곡자 베르디와 지휘자 아바도, 그리고 연주자들과 독창자들은 인간 존재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위로를 노래하였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영혼의 위로가 그들에게 충만한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여러분은 언제 하십니까?
현대인은 충만보다는 결핍을 현실로 느낍니다. 사는 모습이 어딘가 결핍된 것처럼 보입니다. 결핍되어 있으니 불만도 많고 불안도 가시지 않고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끊임없이 분열합니다. 기계적으로 무조건 하나 되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강제적으로 하나 되는 건 분열보다 못합니다. 내면세계의 결핍감으로 인한 분열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지금 얼마나 잘 삽니까. 그런데도 모두 가난이 찌든 사람처럼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어느 정도 먹고살 만해졌으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일은 양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쿨’하게 세련된 감각으로 산다고 자처하는 젊은이들에게도 이런 결핍 현상은 종종 나타납니다. 어떤 남자 청년들은 여자 청년들을 경쟁의 대상으로만 여깁니다. 일부 여성들도 남자들을 경쟁의 대상으로만 여깁니다. 상대로 인해서 자신들이 불이익을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불이익을 당해봤자 얼마 되지 않는데도 거기에 목숨을 건 사람처럼 구차하고 비열하게 말하고 행동합니다. 극단적인 남자들을 일베라고 하고, 극단적인 여성들을 메갈이라고 합니다. 올림픽 궁도 여자 선수가 숏컷 머리를 했다고 해서 ‘페미’라고 공격할 정도니까 무슨 말을 여기서 덧붙이겠습니까. 페미니즘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른 채 그렇게 행동합니다. 정치인들이 이런 점에서는 더 선동적입니다. 무엇이 부족해서 저렇게 분노에 찬 말을 쉽게 내뱉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먹고 살기는 좋아졌는데 현대인의 영혼이 무언가 결핍되었으니 그렇게 사나워질 수밖에 없겠지요. 오늘 우리는 어떨까요? 생명감과 사랑의 능력으로 우리 영혼이 충만하나요?
바울은 10절에서 땅에 내려와 사셨고, 후에 다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물의 충만이라고 말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13절에서는 에베소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충만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13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바울에게는 그리스도가 만물의 충만이기에, 즉 구원이기에 에베소 교인들은 우선 그리스도의 충만이라는 경지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충만’은 ‘플레로마 투 크리스투’의 번역입니다. 여기서 충만이라는 뜻의 플레로마는 10절에 나오는 만물을 충만하게 한다고 할 때의 플레로사와 어원이 같은 단어입니다. 플레로마나 플레로사 모든 충만, 또는 완전함이라고 번역해도 됩니다.
충만을 양적인 차원으로 보지 말고 질적인 차원으로 봐야 합니다. 저는 앞에서 음악 소리를 충만하게 경험하는 음악가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랑을 충만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평화를 영혼 안에 충만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상투적인 표현이긴 하나, 받기보다는 주는 것을 더 즐거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에 이른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이 충만해지는 경지까지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생명 충만을 방해하는 세력은 죄와 죽음입니다. 자기 성취에 대한 열망과 자기 소멸에 대한 불안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죽음에서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이를 가리켜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혹시 이런 말에 실감이 나지 않는 분들이 계신가요?
현실적으로 볼 때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충만에 이르기보다는 세상에서 잘살아야 한다는 욕망이 강렬합니다.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 역시 장난이 아닐 정도로 큽니다. 더구나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분열되어 있습니다. 충만하지 못하기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분열이 크게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크게 작게 느낄 겁니다. 속상할 때도 없지 않을 겁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교우도 눈에 들어올 겁니다. 우리는 교회 현실에서 그리스도의 충만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를 해결할 뾰족한 수단이 따로 있지는 않습니다. 어린아이 신앙에서 어른의 신앙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바울이 13절에 이어서 15절에서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입니다. 그를 통해서 모든 지체가 서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성숙한 공동체로 자랍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마지막 16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교회 공동체의 본래 모습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다른 역할을 감당하고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서 영적으로 성숙한 공동체로 자랍니다. 모든 교우의 영혼이 충만하여 서로에게 공감하고 연민을 느낍니다. 거룩한 연대감으로 하나가 됩니다. 교회가 이런 공동체로 자리를 잡는다면 만물의 충만(플레로마 판톤)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것입니다. 세상은 그런 교회를 새롭게 바라볼 것이며, 교회를 삶의 본보기로 삼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교회는, 그리고 우리 교회는, 여러분 각자는 그리스도의 충만(플레로마 투 크리스투)을 향해서 실제로 성숙해지고 있나요? 이전보다 조금이라도 더 충만해지고 있습니까? 이전보다 조금이라도 더 충만해지고 있습니까?
목사님
풍성(ploutos)과 충만(pleroma)은 어떤 관계입니까?
저는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측량할 수 없이 풍성하신 그리스도를 내가 먹고 배부르면 충만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