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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 그 너머 (잠 1:20~33)

창조절 조회 수 4423 추천 수 0 2021.09.12 20:47:23
설교보기 : https://youtu.be/05xXhc27Ro8 
성경본문 : 잠언 1:20~33 

지혜 & 그 너머

1:20~33, 창조절 둘째 주일, 2021912

 

 

구약성경은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39권으로 구성됩니다. 크게 보면 세 종류로 분류됩니다. 모세 오경, 선지서, 성문서입니다. 성문서는 고대 유대인들의 문학 작품 모음집입니다. 문학 작품이라고 해도 기본에서는 하나님 신앙을 주제로 하기에 구약성경에 포함될 수 있었습니다. 성문서 중에서 잠언과 전도서는 훨씬 특이합니다. 일종의 격언 모음집처럼 읽힙니다. 공자의 논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게 지혜로운 건지를 말합니다.

 

삶의 근본에 관한 가르침

오늘 우리는 잠언에 나오는 구절을 설교 본문으로 선택했습니다. 1:20절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른다거나 광장에서 소리를 높인다는 표현은 문법적으로 의인화입니다. 지혜(wisdom)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하케모우트’(חָ֭כְמוֹת)는 여성 명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영어 성경인 KJV에는 여성 인칭대명사를 써서 ‘her voice’라고 나옵니다. 길거리, 광장, 시끄러운 길목, 성문 어귀, 성중에서 지혜가 소리를 지른다는 말은 지혜가 공기처럼 어떤 장소나 어떤 상황에 제한받지 않으면서 모든 이들에게 필수적으로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 지혜는 무엇일까요? 그게 왜 중요할까요? 우리는 지금 지혜로운 사람일까요?

지혜는 삶의 근본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지혜가 없으면 삶의 근본을 모르는 겁니다. 동물들은 그냥 본능적으로, 그리고 자연적으로 살기만 합니다. 동물 중에서 사람만 삶의 근본을 탐구하면서 삽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혜롭게 사는 게 중요하기에 지혜를 가르치는 스승을 모두가 존경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잠언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오묘한 말을 깨달으라고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그렇게 살아야만 인간다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학교에 다니고 책을 읽는 게 모든 지혜를 얻으려는 노력입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2천 년 전 사람들보다 더 지혜로울까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여러분도 다 인정할 겁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이 2천 년 전 바울보다 믿음이 더 깊다고 말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세월이 흘러서 더 똑똑해졌는데도 지혜로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상해 보이겠으나 이상한 게 아닙니다. 잠언이 기록된 시대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지혜를 찾지 않습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지혜로운 사람은 소수입니다. 오늘날 정치하는 사람도 정치의 근본을 찾지 않습니다. 정치 기술자들이 훨씬 많습니다.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도 교육의 근본을 찾지 않습니다. 교육 기술자가 훨씬 더 많습니다. 법조인들도 법의 근본에 관심이 없습니다. 법을 다루는 기술에만 신경을 씁니다. 목사들도 목회 기술을 연마하는 데만 신경을 씁니다. 이런 현상은 잠언이 기록되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2절 말씀이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실감이 가는 표현입니다.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이어서 24절과 2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멀리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왜 지혜를 거절할까요? 그 답은 간단합니다. 굳이 지혜롭지 않아도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거칠게 말해서 사는 데는 돈만 필요하다고들 생각하고 말합니다. 돈만 있으면 불편하지 않게 살고, 주변에 친구도 많아집니다. 나름의 명성도 얻습니다. 자녀를 둔 부모들도 자녀들에게 지혜보다는 똑똑한 사람이 되어서 돈을 잘 벌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팍팍하고 살벌하게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이런 태도를 무조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지혜롭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 수준에서 행복하게 산다고 말할 수는 있으나, 삶의 근본을 이해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삶의 근본이라는 표현이 무슨 뜻인지 다 알고 계실 겁니다. 비유적으로 여기 산티아고 순례에 나선 두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들은 프랑스 남부의 국경 마을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시작해서 스페인 북서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까지 800를 걸어야 합니다. 그 대성당에는 열두 제자의 한 사람인 야고보의 유골이 안장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한 사람은 산티아고 순례를 마쳤다는 증명서를 얻는 데에 목적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가장 효율적으로 걷는 데만 신경을 썼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걷는 매 순간에 집중했습니다. 산과 강과 숲과 벌판을 보고, 나비와 새를 친구처럼 여겼습니다. 자신이 성 야고보의 신앙 전통을 이어간다는 사실도 마음에 새겼습니다. 누가 순례의 근본을 아는 사람인지는, 그리고 누가 삶의 근본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인지는 분명합니다.


복과 화

잠언이 말하는 지혜의 실제적인 내용은 무엇일까요? 인간 삶의 모든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친구, 재물, 자선, 근면, 성실, 도둑질, 남녀문제 등등에 관련된 가르침입니다. 이를 하나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그 말씀과 규례에 따라서 살면, 즉 지혜롭게 살면 복을 받고, 섬기지 않으면, 즉 어리석게 살면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1:25절 이하를 따르면 하나님의 교훈을 멸시하였기에 인생살이에서 재앙을 만나고 근심과 슬픔이 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3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

 

이런 지혜 전통은 전도서 전체와 일부 시편에도 나옵니다. 7:4~5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37:1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한 것임이로다.” 신명기에도 나옵니다. 4:6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한 마디로, 하나님을 잘 믿고 그 명령대로 살면 생존이 보장될 뿐만 아니라 큰 복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망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게 바로 지혜로운 삶이라는 겁니다.

이런 지혜 신앙이 오늘 한국교회에서는 기복주의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기복(祈福)이라는 말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복을 기도하는 행위는 정당합니다. 문제는 그것을 신앙생활의 근본 목표로 삼는 태도입니다. 더 극단적으로는 기복 신앙이 주술의 차원으로 타락하는 겁니다. 갑절로 보상받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헌금하거나 죽음 이후에 천국에 가려고 보험을 드는 심정으로 교회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왜곡만 없다면 기복은 잘못된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책임지시는 분이라는 점에서 복의 근원임이 틀림없습니다. 예수님도 막 7:9절 이하를 따르면 아들이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 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지혜의 내용을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복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아는 일상의 차원에서 말씀드린다면 사람은 죽는다.”라는 사실에 마음을 두는 삶의 태도입니다(Memento mori!). 죽는다는 말은 우리의 삶이 일시적이라는 뜻입니다. 일시적이라는 말은 삶이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그 사실을 뚫어보는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빚진 마음으로 살지 않겠습니까. 늘 고마운 마음으로 살면서 동시에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야겠지요. 이게 잠언이 말하는 지혜로운 삶의 실제적인 내용입니다. 우리도 이런 지혜로운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실제로 자기 인생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지혜롭게 사는 건 쉽지 않습니다. 앞에서 저는 그런 지혜가 없어도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저는 더 근원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혜의 힘보다는 인간 탐욕의 힘이 훨씬 강력하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비만으로 고생하는 분들이 몸무게를 줄이려면 식탐을 극복해야 합니다. 몸무게를 줄이는 일은 지혜이고, 식탐은 인간의 탐욕입니다. 웬만해서는 식탐을 극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기도로도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식탐만이 아니라 지혜를 무력화하는 근원적인 세력이 우리를 통제합니다. 그것이 곧 기독교 인간론에서 핵심인 죄입니다.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우리의 탐욕을 절제할 수 없게 하는 죄의 세력이 맹위를 떨칩니다. 우리가 사는 문명사회에 온갖 지혜가 난무하는 데도 여전히 유치하고 졸렬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혜만으로는 이런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지혜만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지혜 그 너머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너머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차원

욥기는 구약성경 중에서 이 문제를 가장 예리하게 접근한 성경입니다. 욥은 그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모범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들 일곱에 딸이 셋이었습니다. 양이 칠천 마리, 낙타가 삼천 마리, 소가 오백 겨리,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고, 종도 많습니다. 그는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1:3)였습니다. 그가 졸지에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자식이 모두 천재지변으로 죽고 종들은 도적 떼를 만나서 죽고, 가축도 다 빼앗겼습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욥의 몸은 악성 피부병으로 다 죽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음을 택하라고 욥을 비난합니다. 친구들은 하나님 앞에서 무언가 잘못한 일이 있을 테니 회개하라고, 그러면 하나님이 더 큰 복을 주실 것이라고 욥을 위로한답시고 충고합니다. 욥은 친구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인간 삶과 역사에는 지혜 전통으로 해결할 수 없는 심연이 놓여있다는 뜻입니다. 욥은 친구들과 논쟁을 벌입니다. 자기가 어머니 태 안에 있을 때 죽게 내버려 두지 왜 살려냈냐고 하나님에게 따집니다.

이 긴 논쟁 끝에 하나님이 심판자로 등장하십니다. 욥은 욥 42:1절 이하에서 회개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나님이 재난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습니다. 욥이 실제로 대답을 찾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존재 신비를 느낌으로써 모든 논쟁이 해결되었습니다. 지혜와 논리를 넘어선 것입니다. 하나님 경험은 지혜나 논리와 관계없는 게 아니지만, 거기에 제한받지 않습니다. 그 지혜 너머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곧 어머니나 아버지 품에 안긴 아이에게서 볼 수 있는 전적인 신뢰, 즉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신약성경의 복음서에는 예수님과 대립하는 몇몇 계급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율법 교사와 바리새인입니다. 그들은 구약의 지혜 전통을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지혜의 절대 규범이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지 말아야 합니다. 창녀는 돌에 맞아야 합니다. 식사하기 전에 손을 물로 씻지 않으면 부정한 사람이 됩니다. 안식일에는 어떤 노동도 해서는 안 됩니다. 환자를 고쳐서는 안 되고, 밀이삭을 잘라 먹어도 안 됩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율법을 무시하는 신성 모독자였습니다. 재난당할만한 잘못을 범한 게 없다는 욥을 비난한 그 친구들과 똑같은 전통에 섰습니다.

율법 교사들과 바리새인의 율법과 지혜 전통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그들에 의해서 유대의 정신세계인 지혜 전통이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철학자와 교육학자들이 유대인들의 지혜 전통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 전통에서 나온 현대 교육 철학이나 방법론도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율법을, 즉 유대의 지혜를 폐하려고 오신 게 아니라 완성하려고 오셨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과 지혜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가르침이지만 절대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절대적이지 않은 기준으로 예수님을 재단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을 기준으로 사람을 보셨습니다. 도덕주의와 경건주의 관점으로 판단하지 않으신 겁니다. 높은 수준의 윤리와 도덕이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라 그것으로 인간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만 가능합니다. 욥이 하나님의 창조 신비를 알게 된 뒤에 친구들과의 모든 시시비비에서 벗어났듯이 하나님 앞에(coram Deo) 설 때만 구원의 빛을 찾을 수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서도 시시비비로만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자신이나 상대방이 곧 죽는다는 사실을 직면할 때만, 즉 우리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직면할 때만 모든 시시비비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차원의 인간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거와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지혜가 너를 구원하였다.”가 아니라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말씀하신 게 아닐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들이 지혜롭게만 살아도 다행이긴 하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깊이 나아가십시오. 지혜 너머믿음의 차원으로 용감하게 들어가 보십시오. 구원의 신비와 그 능력이, 그리고 그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의 삶을 불길처럼 감싸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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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September 14, 2021
*.118.77.22

공자의 논어와 비슷하다고 볼 있습니다.-공자의 논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43:1절 이하에서 회개합니다-욥 42:5절 이하에서 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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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September 15, 2021
*.126.124.2

기술자가 아니라, 그 근본을 쫓아가라는 말씀에 다시한번 새겨 봅니다.

조만간에 저도 저만의 산티아고의 길을 걸으려 합니다.

지리산 둘례길 280km를 대략 3구간으로 나누어 걸으려고요,
전에는 속도, 거리를 중요시 여겼는데 이제는 돌고 돌아 우주의 생명을 느꼈으면 합니다.

천천히 걸으며 마음의 부담을 내려 놓고요.

따뜻한 햇빛, 자연의 들판과 산 그리고 바람소리, 시냇물소리, 새소리 등과 함께 걸으려 합니다.
바로 실행에 옮기는 것이 제일 중요하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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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5, 2021
*.182.156.94

280km 둘레길을 걸으려면 두 주간은 족히 걸리겠군요.

멋진 계획입니다. 잘 다녀오세요. 

저도 스페인 산티아고만 꿈꿀게 게 아니라 

우리나라 둘레길을 먼저 생각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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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4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425
973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9152
972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920
971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268
970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326
969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285
968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161
967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662
966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343
965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278
964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360
963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9053
962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415
961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125
960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8933
959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500
958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620
957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640
956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463
955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3026
954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609
953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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