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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욜 2:2~27)

창조절 조회 수 4275 추천 수 0 2021.11.21 16:58:21
설교보기 : https://youtu.be/KzU_e4914l8 
성경본문 : 요엘 2:21~27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2:21~27, 창조절 열둘째 (추수감사절) 주일, 20211121

 

 

구약 요엘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길이가 석 장밖에 되지 않는 적은 분량의 문서입니다. 요엘이 어떤 상황과 어떤 시대에 무슨 일을 했는지를 암시하는 내용이 본문에 전혀 나오지 않아서 구약학자들은 요엘의 기록 연대를 특정하지 못합니다. 메뚜기떼 재앙이 심했다는 사실만 강조됩니다.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10절과 11절에서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마르고 밭의 소산이 다 없어졌다고 말합니다. 12절입니다. “포도나무가 시들었고 무화과나무가 말랐으며 석류나무와 대추나무와 사과나무와 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이러므로 사람의 즐거움이 말랐도다.” 요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오늘날 코로나19 바이러스 창궐보다 더 엄청난 재난을 당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오늘 설교 본문에 해당하는 구절인 욜 2:21~27절에는 두 가지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는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입니다. 서로 통하는 표현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표현은 21, 22절에 두 번 이어서 나오고,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표현은 26, 27절에 반복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메뚜기 재앙은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 단지 자연재해만이 아니라 국제 정치적인 재난까지 포함합니다. 그들에게 가장 결정적인 정치 재난은 기원전 8세기에 일어난 북이스라엘의 멸망이고, 다른 하나는 기원전 6세기에 일어난 남유다의 멸망입니다. 북이스라엘은 당시 근동의 패권을 잡고 있던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서 멸망했고, 남유다는 역시 신흥 제국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벌어진 홀로코스트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수천 년간 두려움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이게 역사적 진실입니다. 그런데 요엘 선지자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고, 그러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줄기차게 외쳤습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여러분은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현실 감각이 전혀 없는 몽상가의 헛소리에 불과한가요? 그들의 외침에는 어떤 명백한 근거가 있나요? 더구나 유대인이 아니라 오늘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우리가 요엘 선지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요?

신약 행 2:16절 이하에는 놀랍게도 욜 2:28절 이하의 말씀이 인용됩니다. 초기 기독교가 요엘 선지자의 외침이 자신들의 오순절 성령 체험에서 실현되었다고 믿었다는 의미입니다. 오순절 성령 체험만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 요엘 선지자의 외침에 직결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말씀과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씀이 바로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에 토대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 이런 종류의 말씀이 종종 나옵니다. 일단 오늘 설교 본문의 마지막 절인 욜 2:27절 말씀을 제가 다시 천천히 읽을 테니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이 주어로 나오는 이 문장은 네 단락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요엘 선지자의 신탁(oracle)이 여기에 압축되었습니다. 1)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을 것이다. 2) 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될 것이다. 3) 다른 이가 없는 줄 너희가 알 것이다. 4)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 네 가지는 서로 통합니다. 하나님 여호와가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면, 이게 바로 임마누엘 신앙인데, 그들은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여호와가 자신들 가운데 계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믿을 수 있다면 그 외의 다른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는 곧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십계명의 첫 항목인데, 절감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네 가지 내용만 충실하게 알아도 신구약 성경 전체의 핵심 메시지를 아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알고 계시겠으나 제가 조금만 보충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있다는 사실이 누구의 눈에나 선명하게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분이기도 하고,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에는 하나님이 안 계신 듯이 보이는 일들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사회와 국가와 전 인류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의 인생이 꼬이는 수도 있고, 세상이 공정하지 않게 돌아가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을 일일이 짚으려면 끝도 없습니다. 요엘 시대에 벌어졌던 메뚜기떼의 공격과 비슷한 일들이 지금도 일어납니다. 천재지변도 있고, 인간의 악행으로 인한 사건도 있고, 우리 스스로 만든 문제도 수두룩합니다. 이렇게 삶이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을까요? 이런 말은 요즘 말로 정신승리는 아닐까요?

 

리얼리티와 허상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려면 하나님이 누군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능력은 사람의 자연과학으로 대체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과학은 모양을 바꿀 뿐이지 본질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우 중에 어떤 가정은 텃밭 농사를 통해서 들깨 기름을 상당하게 얻었다고 합니다. 들깨 기름은 세상의 모든 물질이 그렇듯이 일정한 원소로 구성됩니다. 한 컵 들깨 기름에 해당하는 숫자의 원소를 기계 안에 넣고 가열한다고 해서 들깨 기름이 나오는 게 아닙니다. 깨 모종이 땅에서 자라고 꽃이 피고 깨가 맺히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인간 몸에 해당하는 원소 무더기에 아무리 물리 화학적인 힘을 가해도 인간이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각자가 이 순간에 고유한 인격체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거의 무한에 가까운 우연한 일들이 겹쳤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창조의 신비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지금처럼 존재한다는 사실과 우리가 한 인간 생명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심층적으로 느낄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이 여기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면서 동시에 해방의 능력자입니다.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했고, 바벨론에서 해방했습니다. 더 먼저는 아브라함 가족을 갈대아 우르에서 끌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유무형의 억압으로부터 해방하는 분이십니다. 그 해방의 능력을 느끼는 사람이 있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걸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에 있어라는 말씀에 동의할 겁니다. 오늘날 여러분을 억압하는 세력이 무엇인지 돌아보십시오. 가장 먼저는 돈일 겁니다. 돈의 힘이 얼마나 강압적인지는 천민자본주의의 막장과 같은 오늘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매일 절감합니다. 이 문제가 오늘 설교의 핵심이 아니라서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이 기독교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면서 돈으로부터의 해방을 얼마나 실제로 느끼는지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오늘 요엘 선지자의 외침과 직결된다는 사실만은 기억해두십시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속성은 창조의 능력자와 해방의 능력자라는 범주만이 아니라 훨씬 더 많으나 이 두 가지만이라도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안다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넘치게 많은 걸 누린다는 사실을 절감할 겁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배운 조건을 절대 기준으로 생각하니까 늘 불편하고 아쉽고, 더 나아가서 약오르는 겁니다.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해방 능력 안에 실제로 들어가면 불만스러울 게 없고, 더 나아가 다른 이들과 공연하고 과도하게 경쟁할 필요도 없습니다. 요엘이 오늘 본문에서 반복해서 선포했듯이 두려워하지 않고, 기뻐하면서 즐거워합니다. 메뚜기 재난 가운데서도 찬양합니다. 하나님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리셨기에 마당에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친다는 사실에 눈에 들어옵니다. 지금 여러분의 눈에는 세상이 어떻게 보입니까. 우리 양식을 먹어치우는 메뚜기 떼만 보입니까? 그래서 걱정이 태산 같습니까? 아니면 이미 하나님이 내려주신 것이 차고 넘쳐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사실을 기뻐 노래하고 싶으십니까?

교회 밖의 어떤 분들은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라고 저에게 항의하실 겁니다. 그분들의 항의를 저는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합니다. 생존 자체가 힘든 분들이 있습니다. 상대적인 박탈감이 삶의 의욕을 꺾기도 합니다. 문제는 삶에 대한 관점의 차이입니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크게 보는 사람이 있고, 자기에게 있는 것을 크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집값이 다른 사람의 집에 비해서 싸다가는 걸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싼 집이지만 가족이 함께 지낼 수 있는 집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또는 전세나 월세를 살아도 비바람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놀라운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 욕망을 무한정 부추기는 방식으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요엘은 메뚜기 재난 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에 있다.”라는 사실을 외쳤습니다. 그 사실을 기억해두십시오. 하나님을 통해서 이미 충분히 받아서 누리고 있다는 선지자의 이런 영적 안목을 빼놓고 우리는 성서의 세계 안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준으로 한 번뿐인 인생을 살고 있으며, 한 번뿐인 인생을 끝낼 작정이신가요?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라는 문장이 재미있습니다. 앞에서 이 문장은 십계명 첫 항목에 해당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다른 이가 없다는 말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만 알면 인생살이에서 더는 부러워할 게 없다는 뜻입니다. 부러워할 게 없으니 당연히 두려워할 대상도 없습니다. 우리 삶을 흔드는 다른 이들, 다른 신들, 다른 세력들, 다른 욕망, 다른 가치들, 다른 이데올로기들은 모두 허상입니다. 없는 겁니다. ()존재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잠시 나타나서 우리를 혼란에 떨어뜨릴 뿐입니다. 성경 용어로 그런 세력은 사탄이고 마귀이고, 바알입니다. 그런 세력은 하나님이 없을 때만 활개를 칩니다. 선지자들이 바알 숭배를 강력하게 비판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허상을 실체로 믿는 것, 즉 우상을 절대자로 받들고 사는 것이니까요.

우리 인생살이에서 무엇이 허상이고 무엇이 리얼리티인지를 살펴보십시오. 바울의 설명을 빌리면 사랑만이 리얼리티입니다. 사랑만이 하나님의 존재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젊은 교우들은 인생의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고 그걸 달성하려고 노력할 겁니다. 열심히 살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걸 이루기 바랍니다. 그렇게 자기 삶을 성취하면서 사람들에게 칭찬도 받기 바랍니다. 그렇게 살다가 칠십 살이 되었다고 합시다. 아니 죽음 직전의 구십 살이 되었다고 합시다. 그동안 다른 사람에게 들었던 칭찬과 인생살이에서 이룬 모든 업적은 다 사라집니다. 젊었을 때 그렇게 열정적으로 추구했던 일들도 기억에서 사라집니다. 사랑만 남습니다. 조금 더 넓히면 믿음과 희망만 남습니다.(고전 13:13) 그 외의 것들은 궁극적인 차원에서 보면 허상입니다. 만약 젊은 시절부터 이를 확실하게 알았다면 무슨 일을 하면서 살든지 사랑의 능력에 기댔을 겁니다. 창조주이며 해방자이신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집중하면서 살았을 겁니다. 세속적인 기준에 매달린 채 자기 운명이 어떻게 될지 조바심을 느끼면서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삶 자체를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했을 겁니다.

 

수치와 품위

지금까지의 설명은 요엘의 마지막 문장에서 완성됩니다.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해방자이시니 그를 온전히 섬기는 백성들은 당연히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수치를 당한다면 하나님은 창조주도 아니고 해방자도 아니고, 선한 목자도 아니고, 과부와 고아를 지키는 정의로운 분도 아닐 겁니다. 요엘은 여호와의 날이 이르면 메뚜기 재앙도 없고, 흉년도 없고 가뭄도 없어서 풍족하게 먹을 수 있다고 외쳤습니다. 인생살이가 멋지게 펼쳐진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이스라엘 대중들이 알아듣기 쉽게 하려면 요엘은 이런 방식으로 전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메뚜기 재앙이나 가뭄이 안 든다는 말은 핵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힘든 일을 겪지 않는다거나 가난해지지 않는다거나 나라를 잃는 일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요엘 선지자의 선포 이후에도 수많은 어려운 일을 겪었습니다. 수치스러운 일을 당했습니다. 수치는 수치를 느낄 때만 수치가 됩니다. 가난을 수치로 여기지 않으면 가난이 수치가 아닙니다. 장애를 수치로 여기지 않으면 장애가 수치가 아닙니다. 다만 불편할 뿐입니다. 요즘 표현으로 갑질을 당하는 처지에 있더라고 전혀 수치를 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정신병자의 말에 수치를 느낀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말을 적극적인 문장으로 바꾸면 품위를 지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내 백성은 언제까지나 당당하리라.”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치라는 말이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를 말하면 순교자들의 운명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품위를 지키면서 순교한 이들이 기독교 역사에 많았습니다.

제가 설교는 그럴듯하게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품위를 지키면서 사느냐, 그런 태도로 순교할 수 있느냐고 저에게 묻는다면 즉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순교는커녕 조금만 기분 나쁜 말을 들으면 얼굴빛이 변하는 게 저와 여러분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저나 여러분에게 순교 시대는 지난 것 같습니다. 문자 그대로의 순교는 아니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품위를 지켜야 할 오늘 우리의 일상은 순교 영성과 맥을 같이 합니다. 그 품위 있는 삶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제가 정확한 기준을 여러분에게 제시할 수 없습니다. 각각 삶의 형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에 가까이 가는 길만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방식으로 죽었던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게 유일한 길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 모두 수치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를 외치고 그가 아빠 아버지라고 불렀던 하나님께 자신의 운명을 맡긴 채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십자가 죽음 이후로 그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은 죽는 순간에 수치를 당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사렛 예수에게 가까이 가서 그와 하나 되는 경험 안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인생살이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언지가 여러분 눈에 확실하게 들어올 것입니다. 이것은 2021년 추수감사절을 맞아 설교자로서 제가 믿음의 길을 함께 가는 여러분에게 드리는 약속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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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November 2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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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원전 6세기에 일어난 남유대의 멸망입니다. - 기원전 6세기에 일어난 남유다의 멸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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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4 기타 평화를 위한 분열, 8월29일 [5] 2004-08-30 8448
973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411
972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9133
971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908
970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253
969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312
968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267
967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155
966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648
965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327
964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257
963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350
962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9040
961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406
960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110
959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8922
958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489
957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615
956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631
955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451
954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3016
953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601
952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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