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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xwwq3C5aEF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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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골로새서 3:12~17 |
그리스도의 평화 & 그리스도의 말씀
골 3:12~17, 성탄 후 첫째 주일, 2021년 12월26일
예수 믿으면 사람이 달라질까요?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원칙적인 대답만 한다면 당연 “달라진다.”라고 해야겠으나,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일반적이지 않기에 대답하기 곤란한 겁니다. 이왕 나온 질문이니 몇 가지 더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비교할 때 여러분의 품성이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비슷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이라도 변화되는 것 같습니까, 늘 그 자리에 머뭅니까? 교우들과의 관계는 더 풍성해지나요?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분초를 다투면서 바쁘게 살고 돈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는 세상살이에서 무슨 이유로 시간과 돈을 쓰면서 교회에 다닙니까? 구원의 확신이 있어서, 죽어서 천당 가려고, 외로운 인생살이에서 조금이라도 뭔가 위로를 받고 싶어서, 모태신앙이라서 등등, 여러 가지 대답이 가능하긴 합니다. 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품성의 변화가 없으면 모든 신앙의 내용이 거짓이거나 모래 위의 집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빵을 만드는 밀가루 반죽에 누룩이 들었는지 아닌지가 당장은 아니라도 나중에 발효 결과를 보면 드러나듯이 우리의 신앙이 진짜인지 거짓인지도 언젠가는 드러날 것입니다. 이런 주제를 설교할 때마다 저도 자신이 없어서 불안하기는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그런 삶의 차원을 일단 의무적으로라도 전하기는 해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품성
오늘 설교 본문인 골 3:12~17절은 그 앞에 나오는 골 3:5~11절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골로새서 기자는 앞 대목에서 그리스도인이 버려야 할 품성을 열거하고 오늘 본문에서는 취해야 할 품성을 열거합니다. 버려야 할 품성은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부끄러운 말, 거짓말 등등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그 옛날 옷을 벗고 새 옷이라는 품성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새 품성을 12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
다섯 가지 품성이 열거되었습니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입니다. 이어서 13절에서는 서로 불만이 있더라도 용납하고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했고, 14절에는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라고 하면서 이는 옷을 흘러내리지 않게 하는 띠라고 했습니다.
이런 구절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양심이 찔립니다. 본문이 말하는 품성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서 산다는 사실이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긍휼과 거리가 멉니다. 자비롭지도 못합니다. 겸손과는 반대입니다. 온유하지도 않고 오래 참을 줄도 모릅니다.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긴 합니다. 이런 새 옷이라고 할만한 품성에 조금씩이라도 가까이 가는 사람이 있고, 제자리걸음만 하는 사람도 있고, 안타깝게도 오히려 거꾸로 가는 사람도 없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품성도 다른 운동이나 예술과 같아서 방향이 잘못되면 세월이 흐를수록 더 나쁘게 나타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오해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골로새서가 말하는 그리스도인다운 품성을 갖추는 일에 완성은 없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한 품성을 갖추는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통 성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근본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품성을 갖추려는 노력이 무의미한 게 아닙니다. 그런 노력마저 포기하면 여러분의 영혼은 세상살이에서 찌들거나 매너리즘에 떨어져서 세상 사람과 다를 게 하나도 없게 됩니다. 아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보다 더 못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를 부단히 성찰하면서 ‘삶의 방향’을 정확하게 잡고 수행하듯이 앞으로 나아가는 게 최선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시행착오는 거치겠으나 자신이 골로새서가 말하는 새로운 품성의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느끼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
여기서 그리스도인에게 ‘삶의 방향’이, 혹은 인생의 목표가 무엇일까요? 제가 보기에 오늘 본문은 두 가지를 말합니다. 먼저 골 3:15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평화(호 에이레네 투 크리스투)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라는 말씀이 여러분에게 그렇고 그런 ‘뻔한 말’로 들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10년 동안 지병을 앓다가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되찾은 건강이 여러분의 마음을 오래 지배할 것입니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다른 일들로 인해서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투병 생활 10년에서 벗어난 사건보다 훨씬 강력한 능력인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삶을 지배하면 골로새서가 열거한 다섯 가지 성품이 자연스럽게 나타날 겁니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마음을 주장한다는 말은 곧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평화가 발생했다는, 즉 하나님과 화해했다는 뜻입니다. 지난 12월19일 설교 “평화의 왕이 오신다!”(미 5:2~5a)에서 짚은 내용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바람직한 품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격하게’ 사랑받았다는, 즉 하나님과 단단하게 결속되었다는 경험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긍휼하게 여기고 자비롭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인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비함을 알아야만 자비할 수 있습니다. 겸손하려면 자신의 실존이 하나님 앞에서 ‘키리에 엘레이손’이라는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알아야 하고, 경험해야 하나님과의 평화가 발생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자리를 잡던 시절의 평화는 ‘팍스 로마나’, 즉 로마의 평화가 절대 이데올로기였습니다. 로마는 지중해 지역의 평화를 책임지는 제국을 자처했습니다. 그럴듯한 논리입니다. 로마의 정치, 문화, 예술, 문학, 건축 등은 세계의 평화를 보장할 듯이 보였습니다. 출세하고 싶은 사람들은 모두 로마로 가야 합니다. 로마법을 공부하고, 로마 의학을 배워서 자격증을 따야 합니다. 역설적으로 로마 제국은 자신을 절대화함으로써 세계 평화를 깨뜨렸습니다. 겉으로는 세련되었으나 내용은 탐욕으로 채워졌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파격적으로 로마의 평화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화를 외쳤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하나님과 평화로운 관계로 들어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도 로마의 평화 이데올로기가 지배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길을 잃기가 쉽습니다. 지난 10월20일 문재인 대통령은 ‘서울 국제 항공우주 및 방위산업 전시회’(서울 아덱스 2021) 개막 행사에 참석하여 역대 대통령 중 처음으로 국산 전투기에 탑승하여 영공을 비행했다고 합니다. 축사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 노력들이 모여 지난해 우리는 세계 6위의 방산 수출국으로 도약했습니다. 4년 전보다 네 계단이나 올라선 순위입니다. 방위산업은 대기업과 중견·중소기업, 협력업체까지 550여 개 이상의 기업이 참여합니다. 4만5천여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새로운 성장동력입니다.” 10월22일에는 아덱스 전시관에 전시된 현대로템의 K2 전차에 평화활동가들이 올라가서 “K-방산 살인을 수출하지 말라”라는 펼침막을 들었습니다. 대통령으로서는 방산 산업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었을 겁니다. 평화활동가들은 우리가 개발한 무기가 살인 무기로 악용된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었을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방위산업을 통해서라도 우리나라가 돈을 버는 게 좋을까요? 그런 방식의 돈벌이는 삼가야 할까요? 이 세상은 돈만 되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논리로 돌아갑니다. 언론도 클릭 수 놀이를 합니다. 정작 국민이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보도하지 않거나 축소 보도하고, 몰라도 되는 선정적인 뉴스만 쉽게 만들어서 팝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상품 거래로만 돌아갑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당시의 시대정신인 ‘로마의 평화’가 득세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시대에 오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평화를 여전히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와의 평화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었다는 말, 또는 하나님과 화해했다는 말은 실제로 무슨 뜻일까요? 그것을 성경은 여러 가지로 표현하는데, 그중에서 중요한 한 가지를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인 영생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마 10: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하나님에게만 영생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신 자신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냥 쉽게 생각해보십시오.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것이 완전히 끝장난다는 사실이 명백하다면 오늘의 삶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품성 운운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의 본능에 따르는 것으로, 생물학적인 용어로 바꾸면 유전자의 선택이나 명령에 따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런 삶은 아무리 고상하게 보여도 ‘허무’ 이상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알고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극복되었습니다. 물론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우리도 죽습니다. 죽음을 바울은 잠이라는 메타포로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잠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그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 변화되는 순간이 곧 예수가 재림하는 때입니다.
이런 설교가 어떤 분들에게는 손에 잡히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논리와는 먼 이야기라고 말입니다. 지금 생존경쟁의 악한 질서 안에서 먹고사는 게 급선무인데, 영생은 무슨 영생이냐고 말입니다. 지금 여기서 먹고사는 문제는 각자 역량에 따라서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데만 떨어져 있으면 우리의 삶은 그 중심이 허물어집니다. 더구나 오늘 골로새서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품성과는 거리가 멀게 됩니다. 현실이 치열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그리스도인의 품성과 연관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삶의 방향은 골 3:16절에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와 ‘그리스도의 말씀’은 표현만 다르지 내용은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마음을 주장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풍성하게 된다면 전혀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 겁니다. 삶의 모양이 아니라 질이 달라지는 겁니다. 도박판에서 지내다가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골로새서가 말한 버려야 품성이 제거되고 새로 입어야 할 품성이 우리 삶의 내용으로 자리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호 로고스 투 크리스투)이라는 표현에서 ‘말씀’은 헬라어 ‘로고스’의 번역입니다. 로고스는 단순히 낱말(word)이 아니라 훨씬 포괄적이고 심층적인 개념입니다. 이성이라는 뜻도 포함됩니다. 요 1:1절에는 로고스가 세 번 반복되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로고스는 태초에 있었고, 하나님께 함께했고,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말하는 로고스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로고스’와 맥을 같이 합니다. 그리스도의 로고스는 곧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이면서 동시에 그 말씀에 들어있는 진리이고 구원입니다. 그리스도의 로고스가 우리 안에 풍성해야만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마음을 주장할 수 있고, 이를 기점으로 하나님과의 평화 관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를 더 압축해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구원 사건이 우리의 영혼을 가득 채워야만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말씀 안으로, 즉 그리스도의 로고스 안으로 들어가는 노력이 부족한 그리스도인들이 없지 않습니다. 일단 세상일에 바쁘기도 하지만 그들이 기독교 신앙을 대충 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아는 건 사실 기독교 신앙의 일부입니다. 그것도 교회에 현상으로 나타난 일부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자체를 아는 게 아니라 형식 일부만 아는 겁니다. 세상의 전문 업무나 상식과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관해서는 아는 게 많습니다. 요즘은 모든 정보가 스마트폰에서 해결되니까 지식에 관해서는 아쉬울 것도 없습니다. 성경을 깊이 알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없습니다. 대충 건전하고 모나지 않게 교회 생활하는 것으로 만족하거나 마지못해 흉내를 냅니다. 그의 영혼 안에 그리스도의 로고스가 풍성하게 거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살이가 너무 고단하기에 그리스도의 로고스에 관심을 두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저도 잘 압니다. 일주일에 한 번 드리는 주일 예배도 소홀할 수밖에 없는 형편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무조건 교회 생활에 목을 매면서 사는 게 옳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모를까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영혼에 충만해지는 데까지 나아가는 일을 게을리하면 안 됩니다. 그걸 등한히 한다는 말은 건강하게 살려는 사람이 폭식과 편식과 폭음에 빠진 채 바빠서 운동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악순환에 떨어질 겁니다.
제가 보기에 일용할 양식을 구하지 못할 정도로 물질적으로 궁핍하지 않다면 돈을 버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쉽지 않겠으나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영혼을 충만하게 채울 수 있습니다. 죽을 때 유산을 넉넉하게 남길 정도로 돈은 벌었으나 그의 영혼이 말씀으로 풍성하지 않고 빈곤하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얼마나 불행한 인생이겠습니까. 일전에 이미 은퇴하고 부족한 것 없이 노후를 보내는 어떤 분과 전화 통화한 일이 있었습니다. 수도권에 사는 분이십니다. 제가 잘 모르는 분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남은 인생에서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고 아주 진지하게 말씀하시더군요. 인생살이에서 최고의 선택이라고, 가장 품질 높은 노후의 삶이라고 대답해드렸습니다.
저는 설교 머리에서 예수를 믿으면 우리의 품성이 실제로 바뀌는지를 질문했습니다. 이제 설교가 끝나가는 지금 여러분은 대답을 찾으셨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현재의 품성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마음을 주장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해지도록 일상을 수행하듯이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2021년을 여러분은 살아내셨습니다. 2022년 내년에도 순례자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그런 길을 함께 갑시다.
예, 쿠키 님, 오랜만입니다. 이렇게 한해가 저물어갑니다.
저의 설교를 통해서 힘과 위로를 얻으신다니,
한편으로 제 설교가 부끄럽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말씀이 저에게도 힘이 됩니다.
평생 설교자로 살게 하신 하나님께 늘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설교 작업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제가 조금씩이라도
말씀의 깊이로 들어간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70이라는 나이에 가까이 이르고 보니 이제야 설교다운 설교를,
그러니까 나에게 충분히 소화된 설교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죽을 때가 되어서 철이 든다는 말이 있던가요? ㅎㅎ
거센 파도에 빠져도 구명줄을 붙들면 살아날 수 있듯이
풍파많은 인생살이라 하더라도,
여기서 예외인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우리가 붙들 수 있는 구명줄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요.
겉으로 찡그려져도 속으로는 웃음이 날 겁니다.
복된 2022년을 맞으세요.
사역-사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