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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2Z6Ke4cpAZ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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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편 71:1~6 |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 71:1~6, 주현 후 넷째 주일, 2022년 1월30일
시 71:6b에는 우리에게 아주 친근한 문장이 나옵니다.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이 구절이 가리키듯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인생 전체를 찬송의 과정으로 여깁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찬송을 부를 때는 자기의 이해타산이 아니라 오직 찬송의 대상인 하나님만을 생각합니다. 그분이 행하신 선한 일만 생각합니다. 이런 찬송의 깊이로 들어간 사람들은 요즘 흔한 증상인 우울증과는 완전히 반대 현상인 기쁨에 사로잡힙니다. 마치 사랑에 빠진 연인처럼 혼자서 남몰래 미소짓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행동도 합니다. 여러분은 시편 71편을 노래한 시인처럼 주를 항상 기뻐 찬송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그렇게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인생살이에 좋은 일이 있어야 하나님을 찬송할 게 아니냐,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은 대학교 입학, 연봉 높은 직장 취업, 원하는 결혼, 집 마련, 건강 회복 등등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누구나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 기자는 좋은 일이 있어서 찬송한다는 게 아니라 ‘항상’(타미드) 주를 찬송하리라고 말했습니다.
탄원
시 71편은 원래 탄원(歎願) 시로 분류됩니다.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하나님께 탄원하는 기도문입니다. 그가 처한 형편이 어떤지를, 그리고 그가 하나님께 어떤 탄원 기도를 드리는지 보겠습니다.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
그는 지금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 수치의 내용은 본문에 나오지 않습니다. 억울하게 집과 밭을 빼앗겼을 수도 있고, 심한 병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자식이 없는 경우도 수치의 대상입니다. 4절에서 그는 악인의 손, 곧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에서 피하게 해달라고 호소합니다. 10절과 11절에는 더 노골적인 표현이 나옵니다.
내 원수들이 내게 대하여 말하며 내 영혼을 엿보는 자들이 서로 꾀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은즉 따라 잡으라 건질 자가 없다 하오니
시편 기자는 삶이 조금 불편한 게 아니라 삶이 모두 무너질 정도로 악한 대상에게서 박해받는 중입니다. 이런 일은 지금도 벌어집니다. 가장 극단적인 예를 들면 2차 세계대전 중에 벌어진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입니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 색출 작업이 벌어졌습니다.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가스실에서 죽었고, 생체 실험을 당했고, 재산과 직업을 잃고 거처를 빼앗겼습니다. 그런 일을 벌인 당시 나치 간부들은 교양과 품위를 갖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은 어떤 시대정신에 휩쓸리면 자기도 모르게 만행을 저지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시 71편으로 기도드렸을 겁니다. 악인의 손과 흉악한 자의 장중에서 피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요즘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비슷한 일들은 벌어집니다. 직장에서 팀장이 아래 팀원 중에서 만만한 대상을 골라 알게 모르게 괴롭히는 일이 종종 벌어집니다. 거기에 도저히 상대할 수 없어서 직장을 포기하거나 자살에 이르는 일도 있습니다. 그 팀장도 나름으로 할 말은 있겠지요. 자신들도 그런 시절을 거쳤다고 말입니다. 인간은 순식간에 악인이 되고 흉악한 자가 됩니다.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간 사람은 견뎌낼 수가 없습니다. 가장 정의로워야 할 법조계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제가 신학대학을 다니던 1970년대 전후에는 간첩 조작 사건이 종종 일어났습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쓴 신영복 선생은 20대 후반 육군사관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중 독서 모임에 연루되어 무기 징역을 선고받아 20년간 징역을 살다가 풀려났습니다. 간첩 만들기는 최근에도 벌어졌습니다. 소위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입니다. 검찰은 조선족 출신 유 아무개 씨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국정원 직원들이 유 아무개 씨 여동생을 회유하고 협박해서 허위 진술을 받아냈다는 사실이 밝혀져 2015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났습니다. 이번에는 다행스럽게 무죄였으나 그 이전에는 대법원의 유죄판결도 적지 않았습니다. 법도 죄 많은 인간이 만든 것이고, 그 법을 다루는 이도 죄 많은 인간이기에 오용과 남용, 왜곡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저도 설교하는 사람이지만, 설교자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든지 거짓을 설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의 삶이 무너집니다. 수치를 당합니다. 따돌림을 당합니다. 악인의 손에 붙들린 신세가 됩니다.
시편 71편 시인은 올무에 걸린 새의 신세가 되었으니, 그래서 그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 없어서 아이가 엄마에게 달려가듯이 주께로 피한다고 합니다. 그가 주에게 피하는 이유가 2절과 3절에 나옵니다. 주가 그를 의로 건지시고, 그에게 귀를 기울이시며, 주가 그에게 숨을 바위이고, 반석이며 요새이기 때문입니다. 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러분도 가능하면 이 구절을 외워두십시오. 어느 순간에 여러분에게 큰 위로로 다가올 것입니다.
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심이니이다.
이 시인은 극심한 시련과 고통과 수치를 당하는 중에 하나님을 ‘숨을 바위’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반석과 요새라면 이제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항상 주를 찬송하겠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요즘 식으로 바꾸면 가난한데도 자기 인생을 항상 기뻐 노래하겠다는 뜻입니다. 정말 놀라운 영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네요. 그가 무언가 허황한 미몽에 사로잡힌 것인지, 아니면 영적으로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것인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전자라면 그 사람은 정신 치료를 받아야 할 것이고, 후자라면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사람이겠지요. 저는 이 사람이 어떤 내공을 지닌 사람인지에 관해서 여러분에게 조금 더 설명하겠습니다.
모태
5절과 6절에는 특별한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주 오래되었다는 점을 짚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주 여호와를 신뢰했고,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아가 어머니 배에서부터 주께서 자신을 선택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이 시인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가 얼마나 돈독한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어쩌다가 한순간 황홀한 경험에 떨어져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평생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면서 살았습니다. 저는 이 사람이 정말 부럽습니다. 세 가지로 표현된 그의 고백 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야겠습니다.
1) 그는 어릴 때부터 주를 신뢰했다고 합니다. 어릴 때는 아직 철이 없습니다. 세상살이의 이치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는 주를 의지했다고 합니다. 그는 아마 믿음이 좋은 부모 밑에서 자란 듯합니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말씀을 읽어주고 기도해주었겠지요. 그런 신앙 습관이 어릴 때부터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을 겁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부모의 꿈이 바로 자녀들이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게 쉽지 않기는 합니다. 억지로 되는 일도 아닙니다. 요즘처럼 철저하게 세속적인 가치가 지배하는 시대에는 자녀들에게 신앙적인 습관을 키워주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 습관 키우기가 역효과가 날 수도 있습니다. 결과는 그분에게 맡기고, 어릴 때부터 신앙적인 훈련과 습관을 키우는 문제는 중요합니다. 이 아이가 나중에 자라서 이 시편 71편 기자처럼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라고 고백하기를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2) 이 사람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태는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의지가 시원적이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자신의 존재 전체가 하나님과 결속되었다는 사실을 경험한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게 고백합니다. 요즘도 모태신앙이라는 말을 하듯이 말입니다. 모태까지 언급할 정도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 시인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3) 이 사람은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자신을 택하셨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런 통찰과 깨달음에 도달했는지, 놀랍습니다. 자신에게 옮고 그름의 판단 능력이 생기기도 전에 하나님이 자신을 선택했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자신이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롭고 특별하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태를 수학 공식으로 계산해낼 수 없습니다. 그걸 느끼는 사람이 있고, 무덤덤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직업에도 천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직업을 통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의미를 발견한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깊고 신비로운지를 안다면 모두 시편 기자처럼 어머니 배에서부터 그분이 나를 선택하셨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주를 찬송하겠다고 고백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를 바꿔 말하면,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경험이 없다면, 즉 시원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지 않으면 찬송하는 삶은 가능하지 않겠지요.
구약성경에는 시편 71편 기자의 고백이 여러 다른 하나님 표상으로 나옵니다. 대표적인 표상은 목자입니다. 목자는 자기가 키우는 양에 관한 모든 일을 압니다. 태어날 때부터 양을 보살핍니다. 양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도 압니다. 양은 선한 목자와의 관계에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유목 생활을 오래 했기에 고대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목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시 23: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렇게 이어집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목자 표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목자 개념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목자와 아빠 표상은 일치합니다. 눅 15:3절 이하를 따르면, 예수님은 양 백 마리 중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을 들에 버려두고 잃은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는 분이 곧 하나님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목자만 있으면 양은 어떤 일을 만날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길을 잃어도 목자가 그를 찾아낼 테니까요. 누가복음은 이어서 15:11절 이하에서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를 전합니다. 노숙자 신세에 떨어진 아들은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아버지를 기억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그는 아들로 인정받았습니다. 큰 잔치가 열렸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삶은 축제가 됩니다. 우리 삶을 축제로 만드는 분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실을 안다면 우리가 어찌 찬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기쁨
지금까지의 설교는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실제 인생살이에서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항상 찬송하듯이 살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엄청나게 어려운 문제만이 아니라 사소한 일에도 영향을 받습니다. 제가 가끔 챙겨보는 운동시합은 테니스입니다. 세계 대회에서 제가 응원하는 선수가 승리하면 그날 하루 기분이 좋고, 지면 하루가 언짢아서 찬송을 부르고 싶은 기분이 안 납니다. 교회에 오다가 아내와 말다툼이 벌어질 때는 기분이 나빠서 목사만 아니라면 예배에 빠진 적이 생겼을지 모릅니다. 요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경이 예민해지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가 낙선할까 불안해하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나라는 정치 과잉입니다. 정치 외면도 문제이지만, 과몰입도 우리의 영혼을 훼손시킵니다. 정치인과 언론이 대중을 과몰입하도록 선동하는 게 아닐는지요. 어쨌든지 우리는 일상에서 크고 작은 일들로 일희일비하면서 삽니다. 더구나 자신이나 가족에게 결정적으로 큰 어려움이 생기면 삶 자체가 무너지는 듯합니다. 이렇게 혼란스럽게 돌아가는 일상에서도 우리는 항상 주를 찬송하듯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 시편 71편을 기록한 사람은 세상살이에 전혀 흔들리지 않고 콧노래를 부르면 생명 충만하게 살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서 제 경우를 말씀드렸듯이 모두가 기분이 처질 때도 있고 어수선하기도 하고 피곤해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그런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삶에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렇게 보일 뿐이지 실제로는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존재론적인 기쁨이 삶의 바닥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일시적으로 흔들려도 어느 순간에 기쁨이 샘물처럼 솟아납니다. 이건 큰 차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인생살이를 경험하고 난 뒤에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이 별거 있나, 거기서 거기니까 욕심내지 말고 주어진 분량대로 살다가 죽음을 받아들이면 되지, 하고 말입니다. 굉장히 의연하게 보이는 삶의 태도이지만, 그 심연에는 허무가 자리합니다. 현재 삶도 별거 아니고, 죽음 이후도 별거 아니라면 결국은 허무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재미있게 살아도 저 밑바닥에 놓인 허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 이후에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린다고 믿습니다. 마치 방탕했던 둘째 아들이 아버지 집에 돌아갈 마음을 먹듯이 우리도 아버지의 집에 돌아간다고 믿습니다. 이를 믿기에 지금 잠시 흔들려도 기쁨 충만한 삶으로 다시 돌아와서 찬송할 수 있습니다. 체스터턴의 『정통』(ORTHODOXY)의 마지막 단락 중에서 한 구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는 삶의 비극과 우울을 바탕으로 둔 세상의 합리주의나 불가지론과 달리 그리스도교는 기쁨을 기본으로 한다고 말합니다.
대다수 사람은 작은 일에는 즐거움을 느끼고 커다란 일에는 슬픔을 느끼도록 강요를 받아 왔다. 그렇게 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에 맞지 않는다. 사람은 기쁨을 기본으로 깔고 슬픔을 표면적으로 느낄 때 훨씬 더 본연의 모습을 갖게 되고 뒤에도 훨씬 더 사람다운 면모를 갖추는 법이다. 우울은 간주곡과 같이 막간에 생기는 일시적인 마음 상태여야 한다. 반면에 찬양은 영구적인 영혼의 맥박이 되어야 한다. 비관주의는 기껏해야 감정적인 반쪽짜리 휴일일 뿐이다. 기쁨은 모든 것을 살아 숨 쉬게 하는 소란한 노동과 같다.(342쪽)
저는 시편 71편 기자의 탄원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믿습니다. 예수야말로 수치 당한 이, 흉악한 자의 장중에 걸린 이,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이의 운명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있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예수 안에서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요 11:25, 26) 이 사실을 알고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잠시 불안하거나 우울해도 삶의 저 심연에서는 시편 71편을 노래한 그 사람처럼 항상 기쁨으로 주를 찬송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