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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https://youtu.be/JzMuQEOKdL0 
성경본문 : 누가복음 9:57~62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9:57~62, 성령강림 후 셋째 주일, 2022626

 

 

예수 따름의 문제

오늘 설교 본문인 눅 9:57~62절에는 단답형 대화가 세 가지 나옵니다. 첫 번째는 57~58절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라고 말합니다. 바로 앞 구절인 눅 9:51~56절에는 예수 일행이 사마리아에 들어갔을 때 벌어진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지역 사람들이 예수님을 반기지 않자 화가 난 제자들은 예수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이런 일 직후에 예수를 따르겠다는 말을 들었으니 반가운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런 맥락에 어울리지 않는 말씀을 58절에서 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예수를 따르겠다는 그 사람을 인정한다는 말씀인지 아닌지는 이 말씀에서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 당신은 오갈 데 없는 사람이니 따라올 생각을 아예 말라는 뜻일까요? 아니면 따라오겠다는 그 사람의 말에 진정성이 없다는 뜻일까요? 예수께서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선 자신의 실존을 한탄하신 걸까요? 이어지는 나머지 두 가지 대화를 보면 그 답이 나오겠지요.

둘째 대화는 59~60절입니다. 예수께서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실 때 늘 하던 말씀입니다. 이 사람은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대답합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면 당연히 먼저 장례를 지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다른 어떤 이가 우연히 이런 대화를 들었으면 예수라는 인물은 인정사정없는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여겼을지 모릅니다. 이 이야기는 비유로 읽는 게 맞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야말로 절대적으로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가르침에 대한 비유 말입니다. 이와 비슷한 비유를 여러분은 기억하실 겁니다. 14:15절 이하를 따르면 어떤 사람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약속된 날짜에 아랫사람을 보냈습니다. 초대받았던 사람들은 바빴습니다. 밭을 샀다는 이유, 소를 샀다는 이유, 장가간다는 이유로 잔치에 오는 걸 거절했습니다. 일상에 마음을 빼앗겨서 잔치의 기쁨을 외면한 것입니다. 이 둘째 대화에 나오는 이 사람 역시 장사지내는 일로 인해서 예수를 따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긴박성을 이해하지 못한 겁니다. 머리 둘 곳이 없다는 예수의 한탄이 이해됩니다.

셋째 대화는 61~62절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예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앞으로 출가 전도자로 살기 위해서 먼저 가족과 작별하겠다는 말은 자연스럽습니다. 아무도 그를 탓할 수 없습니다. 가족에게 말하지 않고 야반도주하듯이 예수의 제자가 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이번에도 예수께서는 예상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62절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손에 쟁기를 든 사람이라는 비유는 그림처럼 선명합니다. 앞에서 끄는 소의 힘이 이 사람의 온몸에 전달됩니다. 그는 방향을 정확하게 정하고 쟁기를 제어해야 합니다. 그가 뒤를 돌아본다면 소의 힘을 쟁기에 전달하기 어렵고, 밭의 골을 똑바로 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가족과의 작별 인사도 생략할 정도로 하나님 나라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진 가르침으로 들립니다. 아버지 장사지내는 일과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나누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집중해야 할 일이니까요.

하나님 나라를 쓰나미나 대지진처럼 강력한 힘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가재도구를 챙길 겨를이 없습니다. 이웃에게 인사를 나눌 여유도 없습니다. 무조건 안전지대로 피하는 게 우선입니다. 쓰나미나 대지진이 앞에 닥쳤는데도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능이 크게 밑돌거나 마약이나 술에 취한 사람입니다. 또는 쓰나미나 대지진의 전조를 무시하는 사람도 생명을 구하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이 살던 소돔성 사람들도(19) 그랬습니다. ‘기후위기를 맞는 21세기 현대인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도대체 무엇인가요? 그걸 우리가 어떻게 경험할 수 있나요? 쓰나미나 대지진은 일단 눈에 보이기라도 하는데, 하나님 나라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걸 어떻게 전파하라는 말인가요? 대다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거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거나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 앞에서 당혹스러워합니다. 좋은 뜻으로 전도하라는 말씀이라거나, 또는 교회에 충성하라는 말씀 정도로 받아들입니다. 나름으로 열심히 충성 봉사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시들해지기도 합니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는 관심이 멀어지고, 조직으로서의 교회와 직책만 남습니다. 저와 같은 전업 목사도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없고 순전히 목사라는 직책과 교회 부흥이라는 구체적 성과에만 목을 맵니다. 직책과 목회 성과도 필요하나 이로 인해서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줄어드는 게 문제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아버지 장례까지 포기하고 가족과의 작별 인사도 사소하게 여길 정도로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고 있습니까? 지난 신앙의 여정에서 그런 갈망을 경험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습니까?

이 질문은 결국 하나님 나라를 인식하고 실감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사랑해보지 못한 사람은 사랑의 능력을 실감하지 못하는 거 아닙니까. 오늘 본문 60절과 6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헬라어 성경에 나오는 βασιλεία τοΘεοῦ’의 번역입니다. 바실레이아는 reign, rule, kingdom, domain 등을 가리킵니다. 핵심적인 의미는 다스림입니다. 세상 권력도 다스림입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대한민국 영토 안에서 다스리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원칙적으로는 입법 사법 행정 권력 중에서 행정 권력을 행사하나 대통령제의 특징으로 인해서 대통령의 권력이 다른 권력을 압도합니다. 이런 정치와 경제의 다스리는 권력은 쉽게 눈에 들어오는 반면에 하나님의 다스림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 문제를 거칠지만 간략하게 알아보려면 여러분의 삶에서 대통령의 권력이 영향을 끼치는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을 나눠보십시오. 우리의 삶에서 정작 중요한 부분은 대통령이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숨쉬기, 밥 먹기, 걷기, 하늘과 구름 보기, 빗소리 듣기, 노래 부르기, 책 읽기, 사랑하기, 차 마시기, 예배드리기 등등,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들은 대통령의 권력이 건들지 못합니다. 물론 삶에 대한 이해 수준이 크게 떨어지거나 독재 유형의 대통령이 나라를 다스리면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대한민국 정도의 수준에 올라선 나라에서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세상의 정치과 경제 권력이 좌지우지 못 하는 그 생명의 리얼리티가 곧 하나님의 다스림, 즉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가 경제정의를 세우려고 투쟁하는 이유는 모든 이들이 이런 생명의 리얼리티를 보다 더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가려는 데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도가 조금 부족해도 하나님은 다른 방식과 다른 깊이에서 우리의 생명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으로 삽니다.

그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누군데, 그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날 수 있는데, 하는 질문이 나오겠지요. 그 질문에 한 마디로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경험한 사람들의 보도인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조금씩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뿐입니다. 그 보도를 전체적으로 압축한다면 이렇게 세 가지 명제로 말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은 배타적 능력자이다. 2) 하나님은 승리자다. 3) 하나님은 선하시다. 이런 명제도 하나님을 눈에 보이도록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각자가 눈을 뜨지 않으면 바로 앞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져도 인식하지 못합니다. 쓰나미나 대지진의 전조가 있어도 한눈을 팔면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저는 이 세 가지 명제를 여기서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으로 대체하겠습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성경이 말하는 세 가지 명제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을 가리킨다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배타적 능력과 그 승리와 선하심을 실질적으로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악한 세력이 더 기승을 부리기도 하고, 하나님이 무기력하듯이 보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이 의심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악한 자들이 심판받지 않고, 선한 사람들이 고난을 겪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시고 전능하신 존재라고 한다면 전쟁과 직접 관련이 없는 어린이들과 부녀자들이 당하는 참상을 그냥 보고 계실 수는 없습니다. 선천성 장애를 지닌 채 태어나는 아이들도 여전히 많습니다. 이런 일을 일일이 거론하면 도대체 하나님이 선하신 거 맞나, 하나님이 전능하신 거 맞나, 하는 의심이 듭니다. 그 사실을 성경 기자들도 다 압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이고, 신약의 사람들은 로마 제국에 의해서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이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승리가 실현될 그 미래의 세상을 가리켜서 유대인들은 새로운 세상(new aeon)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새로운 세상이 오면 어두움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악이 완전히 척결됩니다. 그런 세상을 이룰 이가 바로 메시아이며, 인자(人子)입니다. 이런 점에서 유대는 묵시적 메시아 공동체입니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

유대인들의 신앙 전통에서 태어나고 그런 전통을 배우신 예수님은 그 새로운 세상이 먼 미래에 머무는 게 아니라 이미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습니다. 1:14~15절이 이렇게 보도합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믿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이 한 가지 사실에 영혼을 불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배타적 능력자이시며 승리자이시고 선한 분이라는 사실을 여기서 지금(here and now) 생생하게 인식하고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새로운 에온이 이미 우리의 삶 중심에 들어와서 발생했다고 말입니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살펴봐도 이미 발생했다는 그것이 무엇인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생각할 분들이 많을 겁니다. 여러분이 인내심을 발휘해서 저의 설명에 귀를 조금만 더 기울여 주기 바랍니다.

여기 여섯 달 후에 결혼하기로 약속한 커플이 있다고 합시다. 결혼 준비로 바쁩니다. 서로 의견이 갈릴 수도 있습니다. 점점 더 사이가 벌어져서 결혼을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갈등으로 계속 힘들어하는 커플이 있는 반면에 똑같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전혀 다른 관계를 맺는 커플도 있습니다. 이들은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으나 이미 결혼한 거나 마찬가지의 마음을 서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결혼이라는 결정적인 순간이 자신들에게 온다는 사실에만 마음을 두고 현실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결혼이라는 사건이 그들에게서 이미 발생한 겁니다.

이 이야기에서 핵심은 전혀 새로운 미래가 자신들에게 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자 경험입니다. 이 미래는 결혼 전에는 예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열린 미래입니다. 그 열린 미래에 영혼의 촉수가 닿아있으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아버지 장사하는 일이나 가족을 작별하는 일에 매달리지 않게 됩니다. 둘이 함께 꾸려갈 미래에 가슴이 부풀어 있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작은 실수나 연봉의 크기에 마음 상해하지 않습니다. 쓰나미가 몰려드는데 명품 가방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데 직장 동료에게서 들은 잔소리가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을, 즉 그의 다스림이 얼마나 새로운지를 전혀 실감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아는 것만을, 자기가 경험한 것만을 확대 재생산 하는 것에 목을 맬 수 있습니다. 쉬운 표현으로 돈이 최고야, 예쁜 게 최고야,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게 최고야,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정치 권력을 잡는 게 최고야, 하는 식입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그런 것밖에 배우지 못했습니다. 서편제 소리를 배우는 사람이 그 소리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청중들의 박수 소리에만 마음을 두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그런 사람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람도 만나야 하고, 저 사람도 만나야 합니다. 여기서도 인정받고 저기서도 인정받아야 겨우 값싼 위로를 받습니다. 빛이 없으니 빛 비슷한 것에 미련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라도 만족하고 살면 다행이겠으나, 사이비 빛으로 우리가 어떻게 참된 구원을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잊지 마시라고, 한 번 더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미래는 비슷한 일의 반복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일의 발생입니다. 여러분은 10년 후에 어떤 인생을 맞고 싶으신가요? 20년 후에는, 죽음 후에는 어떤 일이 여러분에게 일어나기를 바라십니까? 지금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도 전혀 아쉬울 게 없을 정도로 하나님이 행하실 그 새로운 미래가 기다려집니까? 저는 기다려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상상할 수 있는 세상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미래를 준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알이 새가 되듯이!

이런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바울의 표현대로(고후 5:17) 이미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 것은 다 지나갔습니다. 지금 소유한 모든 것은 잃어도 아쉬울 게 없기에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3:13) 달려갑니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땀 흘리는 쟁기질을 쉬지는 않습니다. 야곱이 얍복강 나루터에서 천사와 씨름하다 허벅지 관절을 다쳐 절뚝거리면서도 떠오르는 태양 빛을 받으며 고향을 향해서 발걸음을 내디뎠듯이(32:31) 하나님이 예비하신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구도자처럼 자신의 길을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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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June 29, 2022
*.118.81.203

 

눅 9:57~62 절의 말씀을 항상 제자의 도 (discipleship)에 관한 말씀으로 듣고 전하다가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보니 신선합니다. 결국 두 가지가 서로 연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는 먼저 ‘아직 ’과 ‘이미 ’ 사이의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이니, 아버지 장사하는 일이나 가족을 작별하는 일에 매달리지 않고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제자의 도이다.
 
제자는 서편제 소리를 배우는 사람과 같아서 그 소리의 세계, 즉 새 에온의 세계, 곧 새 예루살렘인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사람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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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9, 2022
*.137.91.155

로이드 존스처럼 평신도 설교자 역할을 감당하셔도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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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2788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033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3619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046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885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501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457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157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557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042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183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703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432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173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385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291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829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466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387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616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527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532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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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372
»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639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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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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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464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820
952 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2] 2022-05-08 3568
951 부활절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의 삶 (계 5:11~14) [1] 2022-05-01 2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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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9 부활절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 (행 10:34~43) [1] 2022-04-17 2625
948 사순절 유월절 마지막 식사 (눅 22:14~23) [2] 2022-04-10 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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