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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 노래꾼 (사 5:1~7)

성령강림절 조회 수 2475 추천 수 0 2022.08.15 09:11:57
설교보기 : https://youtu.be/FvJRpEk3ztc 
성경본문 : 이사야 5:1~7 

포도원 노래꾼

5:1~7, 성령강림 후 열째 주일, 2022814

 

 

우리말 성경 사 5:1~7절 단락에는 포도원 노래라는 소제목이 붙었습니다. 포도원이라는 은유를 사용해서 어떤 사람이 부른 신앙 노래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포도원을 노래한 이 사람의 심정이 어떤지를 안다면 우리는 고대 유대인의 신앙을 맛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이를 통해서 지금 이 시대를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도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사랑의 노래

이 노래꾼은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노래하겠다고 합니다. 일종의 연가입니다. 그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습니다. 포도원은 기름진 산에 있습니다. 산에 있는 이유는 남쪽으로 경사진 땅이 태양 빛을 많이 받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포도원을 정성 다해 가꾸었습니다. 돌을 골라내고 거름도 주었습니다. ‘극상품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짐승들을 막아내려고 망대도 세우고 포도주를 생산하려고 술 틀도 만들었습니다. 이제 포도만 잘 영글면 됩니다. 그런데 들포도만 나왔습니다. 실망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3절부터 이 노래꾼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외칩니다.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이 노래꾼은 하나님이 포도원 주인으로서 최선을 다했기에 더할 수 있는 일이 없고, 포도원을 작파하는 길만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5절과 6절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가지치기하지 않고, 북을 돋우지도 않고, 잡초도 제거하지 않을 것이며, 비를 내리지도 않겠다고 말입니다. 주인에게서 완전히 버림받게 될 포도원과 그 포도나무를 생각하는 노래꾼의 마음이 찢어졌습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못된 짓만 골라 하는 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일지 모릅니다. 이사야만이 아니라 구약의 모든 선지자는 이런 부모의 마음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다는 사실은 아무에게나 느끼지는 게 아닙니다. 그 백성들은 오히려 선지자의 말을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로 들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노래는 포도를 수확하거나 가을 농사가 끝난 다음에 열린 축제에서 불렸다고 합니다. 시기는 대체로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정복당하기 직전입니다. 비교적 안정적으로 살면서 축제를 진행하는 상황에서 들포도만 맺는다고 노래하면 누가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선지자들의 눈높이와 백성들의 눈높이는 달랐습니다. 선지자는 일단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절실하게 다가와서 더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백성들은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런 차이는 하나님을 얼마나 실감하느냐에, 즉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능력을 얼마나 충실하게 경험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은 도박이나 값싼 재미에 빠져서 일상에 깃든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 이후 그들은 광야에서 40년을 지내야만 했습니다. 먹고 사는 어려움이 심각했습니다. 그들은 만나를 발견했습니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 않던 식물이었습니다. 그걸 기본 양식으로 광야 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만나 앞에서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신세 한탄에 떨어졌습니다. 이런 형편없는 것을 먹고 지내려고 우리가 출애굽했냐는 불평입니다.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먹을거리라고 받아들였습니다. 만나마저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귀한 은총이었습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인 겁니다. 선지자들은 후자를 대표합니다. 자신들은 멸절할 수밖에 없었으나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감격한 사람들입니다. 삶을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바라볼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삶에 대한 감수성이 다른 이들보다 더 예민합니다. 더 부끄러워하고, 더 거룩한 분노를 느끼고, 더 인내할 줄 압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그들만이 영적으로 철이 난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어느 시대나 흔치는 않습니다.

 

들 포도

포도원 노래꾼이 들포도만 맺는 포도나무에 불과하다고 비판한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백성들의 잘못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7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들어보십시오. 이사야의 절절한 마음이 묻어납니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이사야 선지자의 이런 선포가 당시 사람들에게 절박하게 들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우리가 잘못한 게 뭐지, 이런 정도로 살면 충분한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사야가 말하는 정의와 공의가 뭐지, 우리가 언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의와 공의를 따르지 않았다는 거지, 우리가 언제 포학을 저지르고 사람들을 울부짖게 했다는 거지,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는 땅을 공평히 나눠서 개간할 수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 사이에 빈부의 격차가 생겼습니다. 흉년이 들어서 땅을 담보로 양식을 빌렸다가 갚지 못해서 결국은 자유농에서 소작농으로 떨어집니다. 더 심하면 남의 집에 종으로 팔립니다.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집니다. 이런 일들은 인류 역사에서 반복되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사건은 요셉 신화와 연결됩니다. 애굽에서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요셉의 대표 치적은 7년 풍년과 7년 흉년을 이용하여 애굽 자유농을 몽땅 소작농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비정규직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선지자들은 그런 사회 현상을 포학이며 불의라고 외쳤습니다. 생존의 위협을 당한 이들의 부르짖음을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외쳤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며 그 부르짖음을 최대한 해원 시켜줘야 합니다. 그런 노력을 성실하게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라고 선지자들이 강력하게 외쳤습니다.

죽겠다고 부르짖는 사람들이 옆에 있으면 아무도 외면하지는 못합니다. 인격이 완전히 왜곡되거나 사이코패스처럼 심리적으로 병든 사람이라면 모르겠으나 평범한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반응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양심이 움직입니다. 문제는 부르짖음이 어디서 일어나는지,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장애인 단체가 왜 지하철 투쟁을 극단적으로 펼치는지를 실감하지 못합니다. 아파트값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염려로 장애인 시설이나 장애인 특수 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일들이 버젓이 일어납니다. 그런 일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태생적으로 한국 사람인 저보다도 한국을 더 잘 아는 러시아계 박노자의 책 당신이 몰랐던 K를 최근에 읽었습니다. “K, 지극히 선진적인 사막이라는 제목을 단 서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비슷한 구석이 많다고 합니다. 그중의 하나가 세계 최악에 가까운 자살률입니다. 2019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하루에 약 38명이 자살하는데, 인구 10만 명당 26.9명이라고 합니다. OECD 가입국 중에서 최고입니다. 비회원국인 러시아는 25명입니다. 세계 평균은 9명입니다. 노인 극빈자층도 많고 노인 자살률도 높습니다. 사람이 단순히 가난해서 자살하는 건 아닙니다. 가난하더라도 존중받으면 자살까지는 가지 않습니다. 가난도 힘든데, 거기다가 존중받지도 못합니다. 선진국 운운하는 대한민국은 왜 이렇게 자살률이 유독 높은가요? 공의를 바라셨으나 도리어 죽겠다고 부르짖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이사야의 외침이 오늘 우리를 향한 게 아닐까요?

 

화가 있으리라.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구절에는(5:8~30) ‘화가 있으리라.’라는 형식의 문장이 여섯 개나 나옵니다. 건너뛰어 10:2절에 한 번 더 나옵니다. 합해서 일곱 번에 걸쳐 화가 임할 것이라는 경고가 나옵니다. 11절은 이렇습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라고 말입니다. 21절은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라고 했습니다. 좋은 집에서 포도주 마시면서 고급스럽게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학력과 신분이 높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겁니다. 이게 맞는 말인가요? 지금 우리가 원하는 삶을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니,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예수님은 마 5장에서 마카리오이’(복이 임하기를)를 여덟 번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가 그들입니다. 우리가 지금 강요받는 삶과는 전혀 방향이 다릅니다. 우리의 삶은 마태복음이 말하는 복이 아니라, 이사야가 경고하는 화에 기울어졌습니다. 주변에 누가 삶이 버거워 부르짖든 않든 상관없이 자기만 고급스럽게 살면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이런 시대정신을 오늘 그리스도인들도 헤쳐나가기 힘듭니다. 대충 그러려니 하고 지나치지만, 마음이 불편하기는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도 딱 떨어지는 답을 모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정의와 공의를 그렇게 강조한 이유는 인간의 삶을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가 무너지면 개인도 무너집니다. 개인이 무너지면 사회도 무너집니다. 개인과 사회가 밀접하게 연결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대다수 사람은 그들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안다고 하더라도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착각입니다. 우리는 모두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반지하에서 월세 30만 원을 내고 사는 사람과 강남 서초구에서 50억짜리 자기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도 연결됩니다. 그걸 느끼는 사람도 있고, 무감각한 사람도 있을 뿐입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도 이해해주십시오. 여러분의 손자나 손녀가 지금 반지하에서 월세 30만 원을 내고 사는 사람의 손자나 손녀와 결혼할지 모릅니다. 조금 더 세대가 내려가면 후손의 위치가 바뀔지도 모릅니다. 존중받지 못하는 이들이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도록 지금 노력하는 게 우리 자신과 우리의 손자와 손녀를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공동체고 뭐고, 후손이고 뭐고 자기는 아무 관심이 없고, 지금 당장 잘 먹고 잘살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선지자의 외침은 헛소리로 들릴 겁니다.

마태복음은(20:1 이하) 포도원 주인을 주제로 하는 비유를 전합니다. 오늘 포도원 노래꾼 비유에 영향을 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 노동시장에 나가서 일당 한 데나리온에 일꾼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오전 9시와 12시와 오후 3시에 나가서 일꾼을 데리고 왔습니다. 오후 5시에도 일자리가 없어 빈둥대던 사람을 불러와서 일을 시켰습니다. 오후 6시에 하루 일이 끝나자 주인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일당을 계산했습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열 시간 일한 사람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노동 능력만큼 일당을 지급하는 것이 세상의 논리로는 합리적이겠으나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는 불의한 겁니다. 이 차이를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가 어떻게 줄여나갈지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맡겨진 숙제입니다. 각자의 일상에서 부르짖는 사람의 숫자가 줄어들도록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존재론적 의로움

저는 이 포도원 노래꾼의 노래를 듣고, 지난 인류 역사와 오늘 우리 삶의 현장을 보면서 인간은 과연 정의와 공의를 실현할 능력이 있는지를 생각했습니다. 마이클 샌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이후 미국은 정의로워졌는지, 정치인들이 서로 공정을 화두로 삼는 대한민국은 조금이라도 공정해졌는지를 보면 부정적인 생각이 더 강하게 듭니다. 인간에게는 아예 정의와 공의에 관심이 없고, 관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럴 능력이 없는 게 아닐는지요. 정의와 공정을 내세우지만 결국은 그걸 이용할 뿐이 아닌지요. 선지자들의 전통이 살아있던 고대 이스라엘이 전체적으로 정의로웠다는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선지자들만 소귀에 경 읽듯이그걸 외쳤을 뿐입니다. 그런 외침은 소수의 목소리로 면면히 이어질 뿐이지 인류 역사에서 대세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저는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그리스도교의 기본 교리를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 교리의 가장 적극적인 표현은 원죄입니다. 원죄가 일종의 죄 숙명주의로 빠질 위험성이 있긴 하지만, 그런 숙명주의적 죄론만 피할 수 있다면 원죄 개념은 아주 정확한 인간 규정이고, 더 나아가서 생명을 얻는 데 더할 데 없이 중요한 교리입니다. 숙명주의라는 말은 인간은 죄인이니까 어쩔 수 없어, 나의 잘못도 내 잘못이 아니라고 자기의 잘못을 합리화하는 겁니다. 원죄 개념은 그게 아니라 인간이 교육이나 계몽을 통해서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교육을 받아봤자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를 높이려고 합니다. 더 교만합니다. 정의와 공의가 필요한 줄 배워서 알지만 자기를 먼저 챙깁니다. 평등을 제도적으로 완벽하게 성취하려던 공산주의 혁명이 실패한 현대 세계 역사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중요한 일은 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죄로부터의 해방은 곧 하나님에게서 존중받는다는 뜻입니다. 그게 속죄이고 칭의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존중받으니 당연히 다른 사람도 존중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롬 1:17절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3:20절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3: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이미 생명 충만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더는 큰돈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부자가 된 것입니다. 존재의 차원에서 의로워진 겁니다.

정의와 공의를 외치기 전에 먼저 자기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는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인지, 더 실질적인 말로 바꾸면 지금 생명 충만감을 실제로, 그리고 제대로 누리는지를 살펴보십시오. 그게 하나님 경험인데, 그게 분명하다면 오늘 포도원 노래꾼처럼 영혼의 깊이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정의와 공의를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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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김사관

August 22, 2022
*.50.22.69

목사님, 오늘 대학원 구약학 강의를 듣는 중 요셉 신화에 대한 '힉소스(Hyksos)' 족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애굽이나 유대나 모두에게 요셉의 치적은 인정받아야 한다는 평가 같은 데, 목사님 설교문 중에 언급하신 내용은 선지자들의 입장에서 '불의'였다는 말씀이 맞는지요? 이 부분에 대한 보충 설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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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22, 2022
*.157.223.46

대학원 공부 하시는군요.

그렇게 꾸준히 공부하고 책 읽는 모습이 보기 좋네요.

힉소스 족 이야기는 말만 들었지 내용은 잘 기억도 안 나요.

요셉의 치적이라는 게 역사적으로 남아있지 않을 걸요?

성경 이야기를 따르면 애굽 주민들의 모든 땅을 요셉이

바로에게 귀속시켰잖아요.

성경 기자가 그걸 비판한 건 아니고,

선지자의 눈에는 문제가 큰 게 아닐까, 하고 제가 생각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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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김사관

August 23, 2022
*.118.110.141

네, 목사님. 요셉의 치적마저도 선지자의 눈으로 해석하신 것에 저 역시 공감합니다. "가장 좋은 해석은 어떤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기 보다 다른 이들과 공감할 수 있는 해석"이라는 목사님 말씀이 늘 생각납니다. 목사님의 설명에 공감이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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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모모

August 27, 2022
*.134.194.22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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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1 기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2004-07-18 9668
980 기타 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2004-07-25 9344
979 기타 말씀 망각의 심판, (8월1일) 2004-08-05 8596
978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2851
977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734
976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411
975 기타 평화를 위한 분열, 8월29일 [5] 2004-08-30 8481
974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446
973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9169
972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934
971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295
970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340
969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306
968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175
967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682
966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361
965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295
964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374
963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9077
962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428
961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134
960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8948
959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515
958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633
957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654
956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479
955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3040
954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620
953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1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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