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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DGaJYDby-B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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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엘 2:23~32 |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창조절 여덟째 주일, 2022년 10월23일
수치
만약 시간 여행이 실제로 가능한 순간이 오면 저는 가장 먼저 예수님의 공생애 시절로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다음은 구약의 문서 선지자들이 활동하던 시절입니다. 대략 기원전 8세기부터 3세기까지 이어지는 시절입니다. 당시 고대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와 바벨론과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자연재해도 대재난 급으로 발생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욜 2:25절에 따르면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곡물을 모두 먹어치운 일들이 종종 일어났습니다. 지금이야 흉년이 들면 곡물을 수입할 수 있으나 당시는 형편이 그렇지 못해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엘 선지자는 23절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외쳤고, 앞서 21절과 22절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외쳤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해서 졸지에 실업자가 됐는데도 두려워하지 말고 즐거워하라는 겁니다. 자식 키우기도 벅찬 상황에서 이런 말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몽상이거나 ‘정신승리’로 들립니다. 도대체 요엘 선지자는 무엇을 근거로 현실과 동떨어진 듯한 말을 외치고 있을까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이런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까요? 카를 마르크스가 기독교를 비판했듯이 사람의 역사의식을 무디게 하는 아편에 불과할까요?
요엘이 말하는 기쁨과 즐거움의 근거는 ‘여호와’입니다. 23절입니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이어서 먹을거리를 풍족하게 거두게 될 것이며,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도 복구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안전하게 지켜줄 것입니다. 26절과 27절에 아주 특별한 표현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정말 강력한 힘이 느껴지는 경구입니다. 이런 경구는 여러분이 외워두시는 게 좋습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수치로 여기는지 보십시오. 그걸 이 자리에서 일일이 짚을 필요는 없습니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는 가난이 가장 결정적인 수치라는 사실만 짚어도 되겠지요.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고 돈에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기는 정말 힘듭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높은 연봉을 받고 산다면 마음이 편하고, 평균 이하의 연봉을 받아 근근이 산다면 불안할 겁니다. 예수를 믿어도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억지로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자신은 가난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을 하고, 자기에게 괜찮다고 심리적으로 위로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두려워합니다. 모든 인간의 한계입니다.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신다는 말씀이 우리 삶에서 실제로 어떻게 가능할까요? 세상 사람들이 수치라거나 자랑이라고 생각하는 차원 ‘너머’로 나아갔을 때만 그게 가능합니다. 우리는 주로 다른 이와의 대결에서 이길 때 즐거워하고 졌을 때 수치를 느낍니다. 그게 우리 삶을 끌어가는 동력이기도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수치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예 대결하지 않는 차원으로 가야 합니다. 이게 쉽지 않겠지만 그것 외에는 우리가 수치를, 또는 두려움과 불안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수치와 자랑이라고 생각하는 차원 ‘너머’는 하나님의 통치이고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나라이고, 요한계시록의 표현을 빌리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런 세상을 경험한 사람은 일상에서 부모나 연인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은 사람처럼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지 않아도 크게 불편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엘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라고 반복해서 외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영
여호와로 인한 기쁨이 무엇인지를 28~29절에서 매우 문학적인 문장으로 표현했습니다. 구약 성경 중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에 속합니다. 제가 다시 읽을 테니까 이 문장이 여러분에 어떻게 그려지는지 상상해보십시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 …
‘내 영’을 부어준다고 할 때의 그 영은 ‘여호와의 영’입니다. 신구약 성경에 가장 자주 나오는 단어 중의 하나인 영(spirit)에는 바람, 기, 숨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보이지 않으나 생명을 일으키는 힘을 가리킵니다. 공기의 이동인 바람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바람이 일으키는 현상은 눈에 보입니다. 사랑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사랑이 일으키는 현상은 우리의 감각에 들어옵니다. ‘여호와의 영’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여호와가 곧 영입니다. 그분은 ‘영’이십니다.(요 4:24) 여호와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그가 행하시는 일은 우리가 느낄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을 부어준다는 이 요엘의 말씀을 여러분은 실감하십니까?
이 문장에 특별한 표현이 나옵니다. 영을 ‘만민’에게 부어준다고 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영이 특별한 사람들, 즉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어떤 종교적 카리스마가 강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고 생각했으나 요엘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본 것입니다. 요엘 선지자의 통찰로 인해서 성령의 보편적 지평이 열린 셈입니다. 이런 관점은 마틴 루터의 ‘만인 제사장직’ 개념과 통합니다. 루터는 신부들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사죄를 받을 수 있다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비판하고 모든 신자가 직접 하나님께 사죄 기도를 드리면 사죄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지금도 신부가 있어야만 미사가 가능합니다. 신부가 없는 종교의식은 공소예절이라고 합니다. 루터의 개혁적 사상으로 인해서 우리 개신교회에서는 목사 없이 드리는 예배도 공적인 예배입니다. 목사를 통해서만 사죄가 가능한 게 아니라 직접 사죄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예배 순서에 있는 목사의 ‘사죄 선포’는 주일 공동예배에서 행해지는 상징적인 의미이지 실질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각자 집에서 사죄 기도를 드려도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만민’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한다는 요엘의 가르침으로 이제 영에 대한 당시 종교 엘리트 집단의 특권의식이 무너진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들도 모두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본인들이 영을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28절에서 요엘은 영을 받을 때 나타나는 현상을 세 가지로 말합니다.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하고, 늙은이는 꿈을 꾸며, 젊은이는 이상을 봅니다. 이를 정리하면 예언과 꿈과 이상(vision)입니다. 여기서 자녀와 늙은이와 젊은이는 구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민’ 즉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모든 사람이 예언하고 꿈을 꾸고 이상을 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아주 ‘비상한 세계’를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일상으로 경험하는 것들은 표면적이라서 비상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대충 맛난 거 먹고 즐겁게 사는 겁니다. 이런 일상의 심층에 비상한 세계가 숨어 있습니다.
저는 성찬식을 집행할 때마다 비상한 세계를 느낍니다. 질료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빵과 포도주는 시원적이고 아득한 세계와 닿아있습니다. 밀과 포도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자라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우주 전체의 힘이 압축된 겁니다. 농부의 땀이 거기에 배어 있습니다. 포도의 발효도 신비한 현상입니다. 그런 물리적 현상을 성찬식에서 느낀다면 그는 비상한 세계를 경험하는 겁니다. 우주 전체와 자기가 하나 되었다는 놀라운 경험입니다. 더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찬식에서 빵과 포도주를 주님의 몸과 피라고, 즉 주님이 그 자리에 함께하신다고 믿습니다. 예수의 가르침과 운명이 바로 빵과 포도주를 통해서 우리의 삶과 하나 됩니다. 이처럼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에 숨어 있는 비상한 세계를 안다면 그는 세상일로 수치 당하지 않습니다. 섭섭할 것도 없고, 억울할 것도 사실은 없습니다. 이미 배부른 사람은 진수성찬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그런 차원을 다 놓치면서 세상에 휘둘린다는 데에 문제가 있겠지요.
가을 밤하늘은 우리가 이런 비상한 세계에 눈을 뜨게 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줍니다. 지난 일주일간은 달이 없는 때라서 별빛이 훨씬 더 밝았습니다. 목성은 바로 손에 닿을 듯합니다. 20일과 21일 새벽에 잠시 눈을 떴을 때 아래로 둥근 하현달이 제 침실 동편 창문으로 보였습니다. 보름달은 초저녁에 뜨고 날이 지나면서 위쪽이 찌그러지면서 조금씩 늦게 뜨다가 음력으로 20일에는 아주 깊은 밤에 뜨다가 음력으로 25일이나 26일쯤에는 새벽에 뜹니다. 다른 때도 말씀드렸는지 모르겠으나 그런 순간에는 완전히 다른 세상 안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듭니다. 예언하고 꿈을 꾸고 이상을 본다는 요엘의 표현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경험이 깊어지면 세상일로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요엘 선지자가 말하는 영을 받은 사람은 비상한 세상을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요엘 선지자의 영적 통찰로 인해서 특정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런 영의 사람이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거기에 눈을 뜨느냐에 있습니다. 아니면 눈을 감고 사느냐 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삶과 일상의 비상한 깊이가 종종 경험되나요? 아니면 늘 그렇고 그런 모양으로만 경험되나요? 철학적인 표현으로 지금 ‘존재의 신비’가 충격적으로 경험되나요? 그래서 예언하고 꿈을 꾸고 이상을 보는 중이라고 말할 수 있으신가요? 아니면 그냥 단조로운 삶에 멈춰있으신가요?
여호와의 날
요엘은 이런 일련의 일들과 현상이 ‘여호와의 날’에 일어난다고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요엘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1:15, 2:1, 11, 31, 3:14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날은 우리가 여호와의 영을 받는 날입니다. 삶과 세상과 역사에 대한 우리의 시야가 완전히 새로워지는 날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듯이 요엘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습니다. 오늘 본문 욜 2:31절은 이렇습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
묵시적 느낌이 물씬 풍깁니다.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한다는 건 죽음의 징조입니다. 더는 버텨낼 수 없는 암흑의 순간입니다. 각자 그 경험은 다릅니다. 사람에게 배신당할 수도 있고,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범했을 수도 있고, 치료할 수 없는 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요엘 시대에는 전쟁이나 자연재해와 같은 큰 재난이겠지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한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극한 상황입니다. 요엘은 그런 일이 지나면, 아니 그런 일이 있어야 여호와의 날이 온다고 말했습니다. 이를 아는 사람이라면 해가 어두워져도 괴로워하지 않을 겁니다. 곧 여호와의 날이 오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여러분은 이런 요엘의 표현을 옳다고 믿고, 실제로 그런 경험이 있습니까?
극단적인 예를 들더라도 이해해 주십시오. 저는 종종 치매에 한 번 걸려봐도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누군가는 걸리는 노인 질환이니 저를 비껴가라는 법은 없습니다. 치매 과정에서 제가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살펴볼 수 있겠지요. 치매가 깊어지면 해가 어두워진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겁니다. 가족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자기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기억과 시간과 역사는 모두 사라집니다. 또는 암에 걸려서 수술을 받고, 투병하는 일도 닥치면 한번 부딪혀보고 싶습니다. 제가 너무 경솔하게 말하는지 모릅니다. 제 자녀 중의 하나가 장애로 태어났다면 그런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지요. 무슨 말씀이냐 하면,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하는 거와 같은 대재난의 순간이 지나야 여호와의 날이 온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살았던 유럽 사람들이 묘비에 ‘영원한 안식’이라고 적었는지 모릅니다.
요엘에 따르면 여호와의 날은 ‘크고 두려운 날’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할 수 없기에 크고 두려운 겁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가 상상하고 예상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나 시시할지 모릅니다. 저는 죽은 다음에 최고도의 복지사회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문자적인 의미로 황금 면류관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그곳에서도 다른 사람은 오막살이에 사는데 저만 큰 저택에서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인정받는 위치에서 사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지옥에 떨어진 사람을 고소하게 여기거나 불쌍히 여기면서 천국에서 편안하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다 시시한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그런 세상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는 세상일까요? 씨에서 꽃이 피는 걸까요? 완전히 변화된 그런 세상을 마음에 둘 때만 우리는 예언하고 꿈꾸고 이상을 보는 것이겠지요.
초기 그리스도교는 요엘 선지자의 이 말씀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였습니다. 행 2:16절 이하에서 욜 2:28절 이하를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그 배경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후에 베드로가 설교하는 장면입니다. 베드로는 요엘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었다고 설교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부활 사건을 가리킵니다. 요엘 선지자가 32절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외쳤듯이 베드로는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고 과감하게 설교한 겁니다.(행 2:38) 이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언하고 꿈꾸고 이상을 볼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영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요엘 선지자의 외침으로부터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까지 달려왔습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은 이제 예수에게서 실현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다는 건데, 그게 우리의 이 팍팍한 삶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고 싶으신가요? 앞의 설교에 이미 답과 설명이 들어있습니다. 다시 간략히 요약해보겠습니다. 세상에 대한 비상하고 새로운 요엘의 경험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예수께 일어났던 부활의 영을 받은 사람은 이제 죄와 죽음과 용감하게 대결할 것입니다. 경쟁과 욕망 실현으로 점철되는 세상에서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을 희망하고 노래할 것입니다. 그런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현실에서도, 즉 해가 어두워지는 상황에서도 예언하고 꿈꾸고 이상을 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인생은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아멘!
매 번 목사님의 설교문을 읽을 때마다 다른 어떤 설교에서도 들을 수 없고, 다른 어떤 주석이나 책에도 나오지 않는 저자의 메시지가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그렇군요. 요엘의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은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구원의 기쁘고 놀라운 날'이라는 사실말입니다. 목사님께서 극단적인 예를 드셨지만 전혀 과격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열쇠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