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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창조절 조회 수 2602 추천 수 0 2022.11.14 09:50:49
설교보기 : https://youtu.be/Rw9CCspyT-Y 
성경본문 : 누가복음 21:10~19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21:10~19, 창조절 열한째 주일, 20221016

 

 

구약성경에는 대재난(catastrophe)에 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는 이야기가 그 출발입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이는 이야기도 끔찍한 재난입니다. 노아 홍수는 전 인류에 미치는 대재난이었습니다. 소돔 성은 유황불에 의해서 초토화되었습니다. 욥 이야기는 개인이 당한 대재난의 극치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대재난의 역사적 기원은 기원전 587년에 일어난 바벨론 유수(포로로 잡혀감) 사건입니다. 예루살렘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집으로 여겼던 성전이 무너졌고, 가옥은 불에 탔으며, 많은 이들이 종으로 잡히거나 먼 나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이 끝장난 셈입니다. 악한 세력에 속절없이 무너진 자신들의 운명 앞에서 더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든지, 아니면 하나님이 무능력한 존재이든지, 둘 중의 하나였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행스럽게 하나님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음과 같이 새로운 관점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정의로우심을 받아들였습니다. 세상은 악한 세력이 지배하기에 선한 이들은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악한 세상은 스스로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그런 세상을 하나님은 묵과하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직접 심판하실 겁니다. 세상이 파멸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시작하는 겁니다. 사람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권능으로 그런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이런 생각을 가리켜서 묵시 사상이라고 합니다. 그들 묵시 사상가들은 자신들의 그런 생각을 드러나게 말할 수 없어서 상징 언어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일종의 암호 같은 언어들입니다. 구약 다니엘서나 에스겔서에 이런 표현이 주로 나옵니다.

고대 후기 유대교의 묵시 사상이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가장 전형적인 신약성경은 요한계시록입니다. 여기에는 구약의 묵시적 상징 언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상한 숫자도 나오고, 이상한 형상의 동물도 나오고, 하늘이 종잇장처럼 말린다는 묘사도 나옵니다. 그런 상징 언어를 통해서 말하려는 핵심은 하나님께서 로마로 대표되는 악한 제국을 심판하고 새로운 세상을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 읽은 눅 21:10~19절도 묵시적 성격이 강한 텍스트입니다. 21장 전체가 묵시적 내용입니다.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대재난이 발생합니다. 기존의 모든 체제가 무너집니다. 오늘 본문에 앞서 눅 21:5절 이하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21:6) 당시 사람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서울의 롯데월드 같은 건물이 무너지리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뭐라 말하겠습니까? 정신 나갔다고 하겠지요. 제자들은 예수께 다시 어느 때에이런 일이 일어나겠냐고 묻습니다. 난리 소문이 들려도 그것이 마지막은 아니라고 대답하시고, 오늘 설교 본문 10절부터 19절까지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10~12절에 세 가지 현상이 나옵니다. 10절에서는 전쟁이, 11절에는 자연재해가, 그리고 12절에는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끔찍한 박해가 나옵니다. 모두 마지막에 관한 묵시적 조짐들입니다. 전쟁은 세상 마지막을 현실에서 경험하는 사건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고대 이스라엘이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 포로를 경험했듯이 기원후 70년에 로마 제국에 의한 예루살렘 패망을 경험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전쟁은 인류 역사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실제로 무기를 사용하는 전쟁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세속의 삶 자체가 전쟁일지 모릅니다. 우리나라 정치권은 그야말로 전쟁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재해를 통한 대재난도 역시 고대인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마지막을 경험하게 하는 현상입니다. 그걸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무감각한 사람도 있습니다. 11절을 읽겠습니다.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고대인들에게 자연재해는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두려운 현상이었습니다. 가뭄, 홍수, 지진, 화산폭발, 메뚜기떼 습격, 전염병의 창궐 앞에서 그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일종의 천문학이라 할 점성술을 통해서 자신들의 미래를 점치기도 했습니다. 현대인은 자연에 관한 고대인들의 생각을 비과학적이라고 무시합니다. 21세기 자연과학으로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기는 거지요. 2천 년 전보다 오늘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아는 게 많다고 해서 자연을 실제로 많이 아는 게 아닙니다. 과학철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자연과학 지식이 늘어난다는 말은 자연에 관해서 모르는 영역이 더 많아진다는 의미입니다.

지난 화요일 밤, 그러니까 118일 밤에 몇 시간에 걸친 월식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저도 처음 시작하던 저녁 6시 직후부터 끝나가던 밤 9시까지 그 놀라운 광경을 지켜보았습니다. 월식 현상은 태양과 지구와 달이 일직선으로 놓일 때 일어납니다. 달이 중간에 있으면 일식 현상이 일어납니다. 지구에서 태양까지 거리는 대략 15천만 킬로미터입니다. 초속 30만 킬로미터인 빛의 속도로 820초 걸립니다. 지구에서 달까지는 대략 38만 킬로미터인데, 빛의 속도로 대략 1.3초 걸립니다. 지구에서 태양까지 거리는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보다 대략 4백 배 멉니다. 태양의 지름은 지구의 109배이고, 표면적은 11,900배이고, 크기는 1,300,000배라고 합니다. 상상하기 어려운 크기입니다. 거기서 오는 빛으로 지구에는 생명 현상이 가능해졌습니다. 다른 행성에도 태양 빛이 오지만 너무 가깝거나 너무 멀어서 생명 출현이 어렵습니다. 지구가 최적의 거리에 놓여있습니다. 태양 빛을 조금 더 많이 받거나 조금 덜 받으면 지구에 생명은 사라질 겁니다. 태양은 우주의 여러 별과 똑같은 별입니다. 별은 생겼다가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사라집니다. 태양은 45억 살 정도 되었고, 앞으로 그런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붉은 거성으로 변했다가 불꽃놀이에서 보듯이 조금 후에 사라집니다. 사이 시간동안 우리 인간은 지구에서, 아주 아슬아슬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실존을 생각하면 두려워해야 마땅한데도 현대인은 그것에 대해서 별로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아예 피합니다. 태양이 끝나기까지는 45억 년이라는 시간이 남았으며, 걱정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현대과학이 인류가 살아갈 수 있는 지구 외의 장소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우주과학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이게 실제로 가능하다고 믿는 과학자들은 별로 없을 겁니다. 지구와 비슷한 행성을 찾는 일 자체가 힘들 뿐만 아니라 설령 찾았다고 하더라도 그곳까지 옮겨갈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또 하나의 태양까지의 거리는 최소 2광년입니다. 영화에서는 우주여행이 가능한 지름길인 웜홀이 언급되지만 현실적이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무한 에너지와 무한 질량의 물질이 있어야만 빛 속도를 낼 수 있는 비행체를 만들 수 있는데, 지구에는 그런 물질이 없습니다. 제가 우주과학 전문가도 아니면서 상식적인 우주과학에 관해서 말씀드린 이유는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있는 이 지구와 우주 전체가 절대적이지도 않고 영원무궁하지 않다는, 언젠가는 무너진다는 묵시 사상의 관점이 팩트라는 데에 있습니다.

본문 눅 21:12절은 제자들이 받을 박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0절이 말하는 전쟁, 11절이 말하는 자연과 우주의 붕괴와 마찬가지로 12절이 말하는 박해 역시 마지막에 대한 경험입니다. 예수 제자들에게는 박해 문제가 가장 시급하고 절실했습니다. 1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여러분의 머리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지를 보십시오.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당한 박해를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비유적으로 공산주의 이념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상상해보십시오. 대한민국 안에서 그들은 모두 범법자로 처벌받습니다. 대한민국 체제는 사상범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무역 거래를 가장 많이 하는 중국은 공산주의 체제입니다. 베트남이나 쿠바도 그렇습니다. 유럽의 대다수 나라는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공산당은 합법입니다. 공산주의를 제가 지지한다는 뜻이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가 로마 체제 안에서 얼마나 큰 박해를 받았는지를 비유적으로 말씀드린 것이니 오해는 마십시오. 그들이 받은 박해는 예수의 운명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느 시점부터 회당에서 축출당하기 시작했고, 제사장들과 율법 학자들을 비롯한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위험인물로 낙인찍혔습니다. 자신들이 세워놓은 기존의 체제를 예수께서 흔든다는 판단에서 그랬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죽었습니다. 로마 정치범에게만 해당하는 십자가에 처형당한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버림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도 버림받았다고 볼 수밖에 없었던 예수를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이 로마 체제에서 얼마나 피곤했을지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하늘에서 불을 쏟아부어 세상의 악을 멸하시는 묵시적 종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묵시적 종말이 닥쳐도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합니다. 구약의 묵시 사상은 파멸과 심판이 핵심이지만 그리스도교의 종말 이해는 오히려 묵시적 위로와 희망이 핵심입니다. 임금과 집권자들에게 끌려가도 무슨 말로 변명할지 미리 머리를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15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그뿐만이 아닙니다. 가족에게 배신당하고, 순교 당할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미움받을 수도 있으나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18절과 19절입니다.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10절이 말하는 전쟁이 벌어져도, 11절이 말하는 자연재해가 일어나도, 12절이 말하는 박해를 당해도 그리스도인들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그렇게 많은 순교의 피를 흘렸는데, 어떻게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는다는 겁니까?

이 말씀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온갖 재난을 다 당합니다. 정말 알 수 없는 대재난도 일어납니다. ‘이태원 참사같은 일이 발생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습니까. 기후변화로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묵시적 파멸이 지구에서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지구가 되는 겁니다. 3차 세계전쟁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앞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밝히면 취업하지 못하는 세상이 올 수도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비교적 똑똑한 자기 친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알면 아니 너 같은 애가 어떻게 교회에 다니냐?’ 하고 의아하게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늙거나 병들거나 각종 사고로 인한 우리 각자의 개별적인 죽음은 묵시적 대재난의 결정판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걱정하지 말라는 오늘 말씀은 유효한가요? 우리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실제로 믿으십니까? 그 이유와 근거를 친구나 가족에게 말할 수 있으신가요?

오늘 본문 문장에서 특징적인 게 하나 나옵니다. ‘너희라는 인칭대명사가 반복됩니다. 13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 14너희는 변명한 것을’, 15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16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의 몇을’, 17너희가 내 이름으로’, 18너희 머리털 하나도’, 19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너희는 지금 예수 말씀을 듣는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훗날 제자로 살게 될 모든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은 예수와 특별한 관계를 맺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와 특별한 결속 관계 통해서 묵시적 대재난 가운데서도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은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경험하셨습니까?

우리는 세상 사람과 마찬가지로 대재난 앞에서 쉽게, 그리고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머리카락이 아니라 우리의 몸 전체와 인격이 허물어집니다. 죽음이나 죽음과 비슷한 상황에 떨어지면 우리가 얼마나 약한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런 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우리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는다는 말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겪어야 할 고난과 시련을 사뿐히 건너뛸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건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 육체적 고통을 견디기도 쉽지 않습니다. 외로움도 힘든 문제입니다. 가난 앞에서 우리의 인격이 흔들립니다. 그런 건 오늘 본문 눅 21:19절이 말하듯이 너희의 인내로 버텨야 합니다. 다만 그런 재난 앞에서 무너지지는 말아야 합니다. 인내하면 영혼, 각주에 나오는 대로 목숨을 얻습니다.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세상에서 건강하게 살고 부자로 살고 높은 명예로 사는 걸 가리키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이 주시는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종말론적입니다. 마지막 때 완성되는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누군지는 종말에 드러나듯이 생명의 본질도 종말에 드러납니다. 남의 눈에 아무리 멋지게 산 사람들의 생명도 완전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무상하게 삽니다. 그럴듯해 보여도 잠정적입니다. 생명이 종말에 완성되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그가 다시 오셔서 생명을 완성하신다고 믿는 겁니다. 예수를 재림할 주님으로 믿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특정한 인물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믿어지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삶에서 절망하지 않는 이유는 생명이 완성될 미래를 희망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미래가 없다면 오늘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시련은 헛수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결속된 이들은, 그분이 너희라고 부르는 그런 관계를 맺은 이들은 고통과 재난 앞에서도 힘들어하기는 하겠으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인내합니다. 예수의 부활에서 선취(先取) 된 하나님의 생명을 갈망하며 간절히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주의 마지막, 인류의 마지막, 개인의 마지막을 인내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그분의 참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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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0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253
969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311
968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266
967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155
966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648
965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321
964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253
963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348
962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9036
961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404
960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108
959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8920
958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484
957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612
956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629
955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449
954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3011
953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597
952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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