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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왕권 (롬 5:12~19)

사순절 조회 수 6306 추천 수 0 2023.02.26 18:16:21
설교보기 : https://youtu.be/dQBlEC0DeHM 
성경본문 : 로마서 5:12~19 

생명 왕권

5:12~19, 사순절 첫째 주일, 2023226

 

 

오늘 우리는 신구약 성경 본문 중에서 이해하기 가장 까다로운 것 중의 한 대목을 설교 본문으로 삼았습니다. 첫 구절인 롬 5:12부터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이 구절을 네 문장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 사람으로 인해서 죄(μαρτία)가 시작되었다. 죄로 인해 죽게(θάνατος) 되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 모든 사람이 죽음의 운명에 떨어졌다. 여기서 한 사람은 아담입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진다는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이 유혹은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거부하고 신이 되려는 인간의 영속적인 갈망을 가리킵니다. 결과적으로 쳇지피티(Chat GPT)에서 보듯이 눈이 밝아지긴 했으나 그로 인해서 하나님과 거리가 더 멀어졌습니다. 생명을 잃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가 곧 구약성경이 말하는 죄의 기원입니다.

 

아담의 운명

바울은 아담의 운명이 모든사람의 운명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죄와 죽음의 보편성을 가리킵니다. 이 세상 누구도 죄와 죽음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볼 때 생물학적인 현상인 죽음을 죄의 결과로 보는 성경의 이런 가르침이 못마땅할 겁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인간의 윤리와 도덕만을 다루지 않습니다. 훨씬 깊은 인간 내면의 부패성을 가리킵니다. 죄는 자기 중심성이고 자기 연민이며 자기 사랑입니다. 그걸 통칭해서 교만(휘브리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만은 삶의 중심에 자기를 놓고 자기를 높이려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자기의 삶을 자기가 완성하겠다는 강렬한 의지이자 욕망입니다. 가능하지 않은 것에 대한 욕망이기에 이를 통해서 삶이 파괴됩니다. 개구리가 새처럼 날아야겠다고 바위 언덕에서 계속 뛰어내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우리가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죽자사자 돈을 버는 이유는 돈이 많아야만 행복한 인생이 보장된다는 확신에 있습니다. 실제로는 아무도 재산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지 못합니다. 안 되는 일에 올인하니까 삶이 파괴되는 겁니다. 영혼이 병들고 죽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인류의 보편적 죽음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쓰던 당시 로마 제국에서 사는 사람들은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겁니다. 거부하거나 냉소적으로 보았겠지요. 아담의 죄를 왜 자기들에게 돌리느냐고, 아담은 아담이고, 자신들을 자신들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바울도 그들의 주장을 모르지 않았으나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아주 강력한 말씀을 그들에게 들이댑니다. 14절입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다.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모세 이후로 유대인들은 율법을 기준으로 자신들이 의로운지 아닌지를 구분했습니다. 율법대로 살지 못하면, 즉 오늘날의 실정법대로 살지 못하면 죄인이고, 제대로 살면 의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다르게 말합니다. 율법 이전에도 죄가 있었다고 말입니다.. 율법과 규칙과 규범으로 인간의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일상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인정받고 존경받는 일들을 열거해보십시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기도 합니다. 학생들을 성실하게 잘 가르치기도 합니다. 환자를 치료합니다. 세상을 바꾸려고 애쓰는 정치인들도 있습니다. 존경받은 목사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그런 일들로 세상이 조금씩이라도 좋아집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삶의 방식으로는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내면은 여전히 위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교만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이를 가리켜서 바울은 아담과 똑같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죄와 죽음의 지배를 받는다고 말한 겁니다.

 

왕권

바울이 죄와 죽음에 숙명적으로 묶인 인간 실존의 비극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아담을 가리켜서 오실 자의 모형이라는 바울의 표현을 보십시오. 우리말 성경에는 모형예표라는 각주가 달렸습니다. ‘모형’(τύπος)은 영어로 type, figure 등등의 뜻입니다. 루터 성경은 Bild(그림, 상징)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아담은 역사적 실존 인물이 아니라 오실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처럼 상징하는 모형입니다. 오실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아담에게서 일어난 일과 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죄와 죽음이 아니라 의와 생명입니다. 1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교 복음이 무엇인지를 인류 전체의 운명과 연결해서 설명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왕 노릇이라는 표현이 두 번 나옵니다. 이미 14절에도 나오고, 21절에도 두 번 반복해서 나오는 표현입니다. 헬라어로는 과거형과 현재형 동사로 구별되는데, 어근은 바실레이아입니다. 하나님 나라(바실레이아 투 데우)라고 할 때의 그 나라가 곧 왕 노릇입니다. 그 바실레이아는 지배이고 통치입니다. 아담 이후에는 죽음이 왕처럼 통치하는 시대였으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생명이 왕처럼 통치하는 시대가 왔다고 바울은 설명합니다. 이 표현을 줄이면 생명 왕권이 됩니다. 그 대목만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넘치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더 확실합니다.

 

생명 왕권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15절에서 이미 그 대목을 바울은 짚었습니다. 두 가지 은혜가 나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로 사람들은 복된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의롭다 하심(16)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죄가 아니라 생명에 이르는 ()의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의롭다 하심에 해당하는 사람은 당연히 생명 왕권을 누립니다. 죽음의 두려움과 절망이 아니라 생명의 기쁨과 희망을 누립니다. 그래서 바울은 18()에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많은(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는 말이 가능한가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기에, 그가 어떤 일을 했기에 모든 인류가 아담의 죄에서 해방되어 의에 이른다는 말인가요? 여기에 어떤 근거가 있나요?

 

에온

바울 신학이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로 나눠서 본다는 사실을 아는 게 여기서 중요합니다. 이렇게 세상을 구분해서 보는 관점은 묵시 사상에서 왔습니다. 묵시 사상이 가리키는 세상은 그리스 철학이 말하는 코스모스가 아니라 에온’(세상)입니다. 옛 에온이 있고 새로운 에온이 있습니다. 옛 에온은 죄의 세상입니다. 아주 폭력적입니다. 부자와 제국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새로운 에온이 시작하면 옛 에온은 끝장납니다. 그런 일을 행하는 이가 인자, 즉 사람의 아들(휘오스 투 안트로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오실 자로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새로운 세상에서는 죄와 죽음이 왕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의와 생명이 왕권을 행사합니다. 세상이 완전히 다른 겁니다. 2차원에서 3차원과 4차원으로, 평면에서 공간으로, 뉴턴의 기계적 역학에서 하이젠베르크의 양자 역학적 차원으로,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는 거와 같습니다.

얼마 전에 저는 존 카디너의 미움받는 식물들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부제는 아직 쓸모를 발견하지 못한 꽃과 풀에 대하여입니다. 우리가 보통 잡초라고 부르는 식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원래부터 잡초가 따로 있었던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작물을 재배하면서 방해가 된다고 여기는 풀에 붙인 이름입니다. 잡초는 사람에게 크게 해를 입히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경운이나 제초제로 그것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잡초는 점점 더 작물에 치명적인 해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카디너에 따르면 사람은 그 어떤 방식으로도 잡초를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고 합니다. 잡초가 인간의 행동에 대응해서 끊임없이 진화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코로나19 판데믹 현상도 결국은 인간 스스로에 의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에필로그 마지막 대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결국 잡초를 당해내지 못했다. 어쩌면 생물을 건드리는 일에 대한 자만을 조금 내려놓고 눈부신 기술로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기대치를 조금 낮추어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자연이 지금까지 해준 일과 앞으로 해줄 수 있는 일에 조금 더 감사를 표해야 한다. 한편, 알려진 방식과 아직 알려지지 않는 방식으로 진화를 계속하는 이 특별한 녹색 생명체의 적응력에 대해서는 조금 더 존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책을 통해서 잡초에 대한 저의 생각이 더 분명하게 바뀌었습니다. 잡초에 관한 옛 에온은 지나가고 새로운 에온이 저에게 시작한 겁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사람도 이런 경험이 무엇인지를 실감하실 겁니다. 소유 관점에서 존재 관점으로 달라지듯이 세상이 완전히 달라지는 겁니다. 이런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생명관에서만 바울이 말하는 생명 왕권이 이해됩니다.

바울은 원래 유대교 골수분자였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율법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이해했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경험한 뒤로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그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여섯 달 시한부 선고를 받아서 절망하던 사람이 오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에 경험하는 벅찬 심정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당시 유대교 전문가들은 바울의 이런 경험을 무시했습니다. 정말 이상한 일은 새로운 에온은 경험한 사람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과를 직접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사과 맛에 대한 설명만 듣고는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이 지금 말하는 생명 왕권도 그와 같습니다.

지난 월요일(20) 오전 서울에 사는 대구성서아카데미회원이 예수 변모 주일인 19일 예배 때 전한 저의 설교 예수는 빛이다를 듣고 다음과 같은 전자메일을 주셨습니다. “23년 동안 그 어디에서도 답을 얻지 못했었답니다. 그 누구에게 물어도 이건 답이 아닌데 라는 메아리만 들었거든요. 예수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 본질적 실체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성서(주석)적 의미만은 정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더불어서 요 1:14절도 아주 조금은. 너무 가슴이 벅차서 글을 올렸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을 이전에는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다가 이제 종교적 메타포로 정확하게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 성경이 새롭게 보이겠지요. 이런 경험도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다른 에온 경험입니다.

 

간절함

다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 왕권을 경험하는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똑같이 신앙생활을 했는데, 왜 어떤 사람은 그런 경험에 이르고 또 다른 사람은 이르지 못하는 것일까요? 똑같이 겨울 밤하늘의 별을 보고, 똑같이 늦겨울의 햇살을 받으면서 어떤 사람은 무한한 존재 신비와 행복을 느끼지만 어떤 사람은 아무런 감동이 없지 않습니까. 똑같이 예배를 드리는데 한 사람은 영혼의 평화를 만끽하지만 어떤 사람은 여전히 구경꾼으로 머물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넘치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는 사람들이 생명 왕권을 누린다고 표현한 겁니다. 생명 왕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생명 왕권을 누릴 수 있는 은사와 은혜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비유를 예로 드릴 테니까 답을 찾아보십시오.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받아 먼 곳에 가서 탕진한 뒤에 거지꼴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둘째를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큰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세계에 갇혀서, 옳고 그름으로 따지지 않고 무조건 받아들이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 겁니다. 그게 은혜를 받지 못하는 핵심 이유입니다. 왜 자기에게 은혜가 오지 않느냐 하는 질문보다는 자기가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되어있느냐 하는 질문이 더 우선적입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13:1)라는 시편 기자의 간절함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없다는 말은 은혜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은혜를 받지 못하는 책임은 결국 자신에게 있는 겁니다.

요즘 저는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 일흔 살에 다시 읽는 요한계시록이라는 제목으로 묵상 글을 연재하는 중입니다. 3:14절 이하에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는 글이 나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라는 책망을 들은 이유는 그 교회 신자들이 부자라서 부족할 게 없다는 생각에 묶였기 때문입니다. 남부럽지 않게 살만하니까 그것으로 대충 만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지 않았습니다. 목마르지 않은 사람은 물을 달고 시원하게 마시지 못하듯이 은혜를 갈망하지 않으니까 생명 왕권을 누릴 수 없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인생살이에서 다른 건 부족해도 오늘 바울이 선포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 왕권만은 정말 실질적으로, 그리고 아주 풍성하게 누렸으면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이전에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차원에서 영혼이 자유로워지고, 평화로워지고, 영으로 충만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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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7354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7387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7517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8780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8406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8832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6958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6693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6595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7244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6685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8156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7309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6746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7524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7274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7411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7342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7852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7661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6586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7672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7627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8659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8274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6709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7402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6610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7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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