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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uT8CUxfv5v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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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한일서 5:1-6 |
믿음과 사랑
요일 5:1-6, 부활절 6주, 2024년 5월 5일
지난 두 달 넘게 의대생 증원 문제로 인해서 대한민국이 연일 시끄럽습니다. 정부는 2천 명을 늘리겠다고 합니다. 의사를 대표하는 쪽 사람들은 모든 걸 백지화하고 처음부터 논의하자고 주장합니다. 정부가 중차대한 일을 졸속으로 강행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의사들의 밥그릇 챙기기 때문일까요. 제가 속속들이 알지 못하기에 어느 쪽의 책임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으나 우리나라가 어떤 중요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합의를 만들어가는 데에 대단히 서툴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이유도 여럿이겠지요. 협상해야 할 주체들 사이에서 주장과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다 보면 상대방을 굴복시켜야겠다는 감정까지 끼어듭니다. 인간의 본성이라 할 경쟁심이 작동하는 겁니다. 대한민국만큼 경쟁이 심한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서바이벌 게임을 주제로 하는 영화 <오징어 게임>이 그 현상을 바로 보여줍니다. 경쟁에서 이기는 쾌감은 본능에 가깝기에 그런 상황에 들어가면 그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게 합니다. 부부 사이에서 벌어지는 ‘밀당’도 일종의 경쟁심입니다. 문제는 그로 인한 쾌감이 지속적이지 못하고, 더 근본에서는 우리 삶을 고양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경쟁을 통한 짜릿한 승리감 말고 이 세상을 만족스럽게 살아갈 방법이 있기나 할까요?
이기는 삶
오늘 설교 본문인 요일 5:1-6은 2천 년 전에 기록된 말씀인데도 21세기 현대인들보다 훨씬 근원적인 깊이에서 삶의 길을 제시합니다. 4절을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이 한 구절만 우리가 영혼의 양식으로 삼을 수 있다면 삶의 차원이 근본에서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어떻습니까?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주장을 헛소리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을 굴복시켜야만 이기는 것으로 여깁니다. 이기면 행복해하고 지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그게 아주 분명합니다. 며칠 전에 저는 군위 종합 테니스장에서 열린 시니어 단식 테니스대회에 다녀왔습니다. 60세 이상이 출전할 수 있는 대회입니다. 예선은 통과했으나 16강에서 탈락했습니다. 전체 전적은 2승 2패입니다. 여기서 이길 때의 기분과 질 때의 기분이 분명하게 다릅니다. 그런데요. 테니스에서도 이겨야만 이기는 게 아닙니다. 지더라도 테니스를 멋있게 쳤고, 상대방과 운동을 즐겼다면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상대방을 굴복시켜야만 이기는 게 아닙니다. 참된 승리는 오히려 자기를 이기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중심적이기에 자기를 이기는 게 힘들어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 밖에서 싸워 이길 대상을 찾습니다. 그게 극단적으로 흐를 때 마녀사냥이 일어납니다.
본문이 세상을 이긴다고 할 때의 이 믿음은 자기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을 굴복시키거나 자기 뜻에 맞도록 고치려고 하지 않고 자기를 고치는 겁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부처의 눈에 모든 사람이 부처로 보인다는 말처럼 세상을 믿음의 눈으로 보기에 승패에 매달리지 않고 삶의 중심을 붙들고 용맹정진하듯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반복해서 믿음을 강조합니다. 신구약 전체에서 하나님 신앙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의 위대한 점도 할례나 선행이나 재물이 아니라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생명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건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한 바울도 믿음만이 우리가 궁극적인 차원에서 의로워지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믿음을 오해하는 일도 있습니다. 율법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성수 주일, 밤샘 기도, 넘치는 헌금, 교회 봉사에 열정을 보이면 믿음이 좋다고 여깁니다. 교회가 꾸려지려면 그런 열정도 필요하나 거기에 매달리면 방식으로 형성된 믿음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義), 즉 율법이 됩니다. 간혹 믿음이 하늘을 찌를 듯이 보이는 사람이 기고만장한 태도를 보이고, 삶이 어려운 젊은 신자가 어려움을 호소하면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뻔한 답을 주고, 동성애자들을 혐오하고, 다른 종교를 무시합니다. 믿음이 좋은 게 아니라 종교적 독단에 빠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이긴다는 그 믿음은 무엇일까요? 교리적인 답은 우리가 다 압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입니다. 교리가 말하려는 실제 삶의 내용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믿는다는 게 실제로 무엇인지를 오늘 본문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구절도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낳아주신 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 그분이 낳으신 이도 사랑합니다.
이 문장을 압축하면 ‘믿는 자는 사랑합니다.’입니다. 믿음과 사랑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고 싶으면 여러분에게 사랑의 능력이 얼마나 나타나는지를 보면 됩니다. 그 사랑의 능력이 곧 세상을 이기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4월10일에 있었던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도 있고 떨어진 사람도 있습니다. 당선자만이 승리자가 아닙니다. 당선자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잘난체한다면 그는 이기는 게 아니라 진 사람입니다. 당선자가 되었으니 국민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지요. 그게 세상을 이기는 겁니다. 총선에서 떨어진 사람도 크게 실망하지 않고 이웃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면 승리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런 설명은 ‘공자 가라사대’처럼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는 현실성이 없을까요? 여러분은 이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
1절은 두 문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첫 문장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물론 부모 덕분이나 그리스도인은 영혼의 깊이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세례받을 때 그걸 고백합니다. 이전의 자신은 예수 십자가로 죽고 예수 부활로 다시 태어났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출가 수도자로 살았습니다.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축자영감설에 갇혀서 지내다가 이에 관한 좋은 신학책을 읽고 거기서 자유를 얻었다고 합시다. 그것도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관계를 통해서 자기 인생과 세상을 새롭게 보는 사람이기에 오늘 본문이 묘사했듯이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1절에서 둘째 문장은 ‘낳아주신 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 그분이 낳으신 이도 사랑합니다.’입니다. 자기를 낳아주신 부모를 사랑하듯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본문은 정말 중요한 말을 합니다. ‘그분이 낳으신 이를 사랑한다.’라고 말입니다. 그분이 낳으신 이는 옆에 있는 교우들이자 모든 이웃이기도 합니다. 같은 부모에게서 나온 자녀들을 형제와 자매라고 부르듯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형제와 자매들입니다. 그 형제와 자매들이 마음이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사랑합니다. 그 사람이 마음에 꼭 들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 눈에는 사람만 보이지 그들을 만드신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를 극복하려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산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올해도 5월이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계절과 모든 달이 다 멋집니다만 5월은 녹음이 짙어지고 과일나무에 열매가 조금씩 달리기 시작하는 달이라서 더 생명 충만하게 다가옵니다. 인생으로 본다면 5월은 청년에 해당하겠지요. 지금 우리는 모두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5월의 생명 충만을 느낍니다. 태양 빛과 하늘과 구름과 비를 봅니다. 땅에 두 발을 딛고, 꽃향기를 느끼고 새소리도 듣습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도 지구와 우주가 제공하는 값진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게 너무 크고 놀랍기에 사람 사이에 놓인 차이는 미미합니다. 지금 가장 잘 나가는 가수나 배우만이 아니라 슈퍼마켓 계산대에서 일하는 점원들도 지구와 우주의 차원에서는 똑같이 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로 보며, 모든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벌어진 구원의 빛 안에서 보기에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우리나라가 우승하면 그 순간 응원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평소에는 서로 감정이 좋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멋져 보이듯이 말입니다. 그런 생명의 축제를 일상에서 살아내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개인의 일상에 과몰입된 사람은 이런 삶을 살아내기가 만만치는 않을 겁니다. 아주 쉽게 짜증과 걱정에 휩싸여 일희일비할 수도 있습니다. 큰 세계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개인의 손익 계산만 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깨어서 기도하라고 충고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삶을 축제처럼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를 사랑하면 그가 원하는 일을 기꺼이 하고 싶어집니다. 연인들이 그렇게 살지 않습니까. 반대로 가는 커플도 없지는 않습니다. 3절에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계명, 즉 사랑이 무거운 짐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새번역>으로 3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이웃 사랑이 부담스럽지 않다는 이 말에 동의가 되나요? 작은 마당에서 야생화를 키우는 일에 정성을 쏟는 교우가 있습니다. 온종일 야생화를 힘들게 가꿔도 전혀 힘들거나 지루한 줄 모릅니다. 야생화를 사랑하니까 돌보는 일이 부담이 안 되는 겁니다. 그렇지만 실제의 삶에서 가치관과 품성과 태도가 다른 사람과 친밀하게 지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를 사랑하라는 말은 더더욱 부담됩니다. 이는 곧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한다는 뜻이겠지요. 하나님을 영혼의 깊이에서 경험하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하고요. 설교하는 저도 남에게 나설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사랑하라는 계명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지는 못합니다. 다만 방향이 무엇인지는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그에게 가까이 가려고 애를 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의 계명이 부담스럽지 않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한 달 후에 죽는 게 분명하다고 합시다.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다면 자기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겠지요.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까지 사랑하겠지요. 죽음이 너무 극단적이라면 단 한 번뿐인 이 ‘순간’(carpe diem!)을 생각해봅시다. 어떤 우주인이 달에 한 번 다녀오듯이 말입니다. 그 사실을 안다면 그 순간이 얼마나 애틋하겠습니까. 예배를 드리는 이 순간이 한 번뿐이라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이 순간이 얼마나 새롭고 신비로운지를 절감합니다. 자기 앞에 놓인 모든 시간과 공간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일회적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이라면 모든 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책과 연필과 꽃과 흙과 커피와 과자와 밥을 새로운 깊이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모든 존재의 근원을 알면 그 신비로움에 눈을 뜨게 되고, 눈을 뜨면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교는 이런 삶의 깊이에서 만나는 존재(Sein)를 가리켜서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존재와 삶의 신비로운 깊이로 들어갔기에 이웃 사랑에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동의가 됩니까?
물과 피
본문은 6절에서 전체 문맥과 결이 다른 이상한 말을 덧붙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물과 피로 임하신 이’라고 말입니다. 물과 피는 구체적인 인간의 속성을 가리킵니다. 당시 요한일서 공동체에서 일어난 어떤 잘못된 가르침을 배경에 둔 언급입니다. 그 잘못된 가르침을 주장하던 이들은 영지주의자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께서 우리와 똑같은 몸으로 살았다는 사실을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는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잠시 나타난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예수의 신비로운 깨달음만이 중요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깨달음을 구원의 본질로 삼았습니다. 자신들의 고상한 영적 지식에 매몰되어서 구체적인 교우들과의 관계는 소홀히 여겼습니다. 이런 영지주의 신앙은 매력적이어서 초기 그리스도교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골치 아프게 다른 교우들과 엮이지 않고 홀로 깊은 사색과 사유를 통해서 놀라운 깨달음을 얻기만 하면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에도 이런 영지주의 흔적이 많다는 사실을 저는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정교분리라는 원칙에 충실하겠다는 말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아무 상관하지 않고 교회 생활에만 매몰되는 태도가 그것입니다. 단적으로 기후위기에 대해서 무관심하면서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자본주의도 일종의 영지주의입니다. 자본이라는 이념과 그 메커니즘만 두드러지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구체적인 사람과 그 사람의 삶이 그림자 취급을 받습니다. 최근 시사주간지 <한겨레21>에 실린 글에서 읽은 다음과 같은 글귀가 기억에 남습니다. “개인이 효율성을 극대화하면 사회의 효율성도 극대화할까. 그러면 좋을 텐데 현실은 정반대다 1분1초를 아끼며 비효율적 대학 입학 교육 경쟁에서 살아남은 MZ들은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한국 기업에 입사해 비효율적 노동에 매달려야 한다. 결혼한 뒤에는 가사와 육아 노동으로 자유 시간은 꿈도 못 꾼다. 효율적 인간과 비효율적 사회, 대한민국은 극단적으로 효율성을 추구하는, 가장 비효율적인 나라다.”(한창석 한겨레엔 교육부문 대표)
그리스도교는 이런 영지주의를 교회에서 축출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영지주의로 인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고급스러운 지성이나 현학적인 영성 안에 갇힐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초기 그리스도교가 그런 과감한 결단을 내리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는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을지 모릅니다. 무슨 말입니까? 교회는 잘났던 못났던 구체적인 사람과 그 사람의 삶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구체적인 사람과 관계를 맺고 그를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더 나아가서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 구체적인 사회 구조를 바꾸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스도교 믿음은 인간 삶과 역사에서 구체적인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믿음은 곧 사랑’이라는 문장을 기억해두시고, 나아가서 여러분의 믿음이 실제 사랑으로 채워졌는지, 지금도 채워지고 있는지 질문해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