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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gYQ5Xlg5-p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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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에베소서 5:15-20 |
성령 충만의 길
엡 5:15-20, 성령강림 후 13주, 2024년 8월 18일
지금의 튀르키예 서남부 지역에 있는 에베소(에페수스)의 역사는 기원전 10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당시에는 로마의 대표적 직할 도시로 인구가 자그마치 20만 명가량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 제국의 침략과 지진 등의 이유로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되었습니다. 다만 2만5천 명을 수용하는 원형 경기장을 비롯한 그리스와 로마 건축물 및 유물은 어느 고대 도시 못지않게 많습니다. 바울의 에베소 선교 활동은 행 19장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2년에 걸쳐서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서 매일 설교했다고 합니다. 아데미 신전 모형을 만들어 팔던 상인들이 에베소 시민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협박했습니다. 군중들은 군중 집회에서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구호를 외쳤습니다. 에베소 지역의 치안 책임자가 중재하여 바울은 그 위기를 모면하고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 훗날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그게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 읽은 에베소서입니다.
바울은 오늘 설교 본문 엡 5:15절에서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라고 말합니다. 지혜(소피아)는 그리스 철학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개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자부했습니다. 물론 로마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을 지혜 없다고 하는 바울의 말을 당시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았을 겁니다. 비유적으로 오늘 미국의 실리콘 밸리를 중심으로 한 세계 굴지의 디지털 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지혜 없다고 말하는 거와 비슷하니까요. 마르쿠스 가브리엘이라는 독일의 한 젊은 철학자는 GAFA를 가리켜서 트릭이라고 비판합니다. ‘가파’는 Google, Amazon, Facebook, Apple의 이니셜 모음입니다. 21세기 첨단의 지혜가 집대성된 기업들입니다. 그들 기업을 향해서 ‘트릭’이라고 말하는 마르쿠스 가브리엘이나 에베소 문명을 지혜 없다고 말하는 바울이나 관점이 일단은 비슷합니다. 무엇이 지혜인지, 무엇이 인간을 살리는 길인지,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그들이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무엇이 지혜롭게 사는 것인지를 바울은 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우리말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각주가 달렸습니다. “기회를 사라. 날들이 악하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의 시대정신이 부패했으니까 정신을 차리라는 뜻입니다. 로마 제국의 근본정신은 ‘팍스 로마나’입니다. 로마의 평화가, 즉 로마의 번영이 절대 이념이자 가치입니다. 그런 세계를 그들은 성취했습니다. 지중해 연안의 여러 나라를 식민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곡식과 여러 특산물을 값싸게 들여올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로마 사람들의 삶이 풍족해졌습니다. 향락 문화가 꽃피웠습니다. 1세기 말에는 콜로세움을 건축했습니다. 그곳에서 검투사의 진검 승부가 벌어졌고, 맹수와의 싸움도 벌어졌습니다. 어떤 때는 그리스도인들이 맹수 앞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광경을 보고 로마 귀족과 귀부인과 시민들은 환호성을 올렸습니다. 황제는 그런 삶의 재미를 로마 시민들에게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습니다. 오늘 21세기 문명과 당시 로마 문명의 근본 속성은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런 로마의 시대정신에 휘둘리지 말고 새로운 삶을 살아내야 한다고 에베소 교인들에게 호소하는 중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바울의 호소를 제대로 알아듣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로마 문명이 나쁜 이유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고, 거기에 적응하지 않으면 소외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로마 문명이 사실은 무척 세련된 겁니다. 뭔가 ‘있어’ 보이고, 고급스러워 보입니다. 실제로 탁월한 점도 많습니다. 그들의 법 체제와 건축과 예술과 문학과 군사력은 지금도 모범적입니다. 바울은 지혜 없다고 말하나 로마 문명은 지혜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자본주의 체제에 문제가 있기는 하나 좋은 점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의 40-50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 우리는 모두 귀족처럼 삽니다. 우리나라에 온 동남아 외국인 노동자들은 우리나라를 천국처럼 생각할지 모릅니다. 우리나라 드라마와 노래와 춤과 먹을거리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가 지금 우리의 자본주의는 악하고, 지금의 삶은 지혜롭지 못한 거니까 지혜롭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 교회 밖의 사람은 물론이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도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어느 정도 생각이 있는 그리스도인은 ‘이게 우리의 현실인데 어쩌라고!’ 말할 겁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걸 부정하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가능한 한 세상에서 사람들과 잘 어울려서 살아야 합니다. 돈벌이도 하고 즐거운 놀이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마인드)으로, 다른 영혼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밖’이 아니라 ‘안’에서의 구별된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것을 말하는 것이지 세상과 담을 쌓고 교회당이나 골방에 처박혀서 살아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른 영혼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울은 18절에서 아주 생생한 문장으로 표현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바울은 18절에서 명령형 문장으로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술 취하지 말라.’는 문장입니다. 술에 취해본 분들이 계시는지요. 술 취하면 술기운이 그 사람을 완전히 지배합니다. 어느 정도냐에 따라서 차이가 있기는 하나 전반적으로 볼 때 이성이 마비됩니다. 저의 어릴 때 기억으로 술 취하신 아버지 모습이 생생합니다. 보통 때는 말이 별로 없으신 분인데, 술만 취하면 독불장군처럼 큰소리를 치십니다. 술이 어떤 경우에는 건강에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바울도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 술을 조금씩 마시는 게 문제는 아니겠지요. 방탕할 정도로 술에 의존적으로 되는 게 문제입니다.
여기서 술 취하지 말라는 말을 단순히 술에만 한정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술 취하는 거와 비슷한 상태로 어딘가에 자기의 영혼을 빼앗기는 현상 전반의 문제로 넓혀서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총체적으로 술에 취한 것은 아닐까요? 이번 올림픽 기간에 배드민턴 협회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금메달을 딴 안세영 선수가 일종의 내부 고발을 했습니다. 대표팀 선수들이 마치 군대 조직 같은 방식으로 생활했다는 게 알려졌습니다. 중 3 시절부터 국가 대표 선수로 선발된 안 선수는 선배들의 세탁과 잔심부름까지 했다고 합니다. 당국자들은 올림픽 메달을 따야 한다는 목표를 달성하려면 군대 조직처럼 운영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런 군대 문화가 우리나라 전반에 깔려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초등학교부터 의과대학에 들어갈 목표로 사교육을 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술에 취한 거 아니고 무엇입니까? 부동산 문제가 매일 뉴스에 오르내리는 현상도 술 취하는 거와 비슷합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 현상도 술에 취한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할 말 못 할 말을 배설하듯이 쏟아냅니다.
18절이 가리키는 다른 하나는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라는 문장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고만 해도 충분한데 왜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는 걸까요? 사람은 무엇인가로 충만해지지 않으면 무료한 삶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코올중독에서 벗어나기가 힘든 겁니다. 제가 속한 영천 시니어 테니스 동호회 한 회원이 종아리 근육을 다쳐서 한 달 가까이 구장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집안에만 있으니까 무료해서 견디지 못하겠더라고 말하더군요. 그게 이해가 됩니다. 사람은 무언가에 자극을 받아야만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테니스 구장에 나와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산행도 다니고, 춤도 추고, 노래 모임에도 나가고, 여행도 다닙니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자전거를 탑니다. 좋은 취미 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노후와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취미 생활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만으로는 우리의 영혼이 풍요로워지지 않습니다. 무료하지 않다고 해서, 그리고 재미있는 일이 많다고 해서 우리의 영혼이 풍요로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한 겁니다. 바울의 가르침이 정말 옳은가요? 뭔가를 착각하는 건 아닐까요? 인생을 다른 사람보다 더 즐겁고 유쾌하게 살면 충분하지 않냐, 그런 삶을 살아내는 일만으로도 정신없이 바쁜데 무슨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인가,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질문에 딱 떨어지는 대답을 저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경험과 비슷해서 실증적으로나 통계적으로가 아니라 영혼으로 경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여러분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먼저 즐겁고 유쾌하게 사는 데에 머물지 않고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할 이유를 저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간략하게 설명해보겠습니다. 바로 앞에서 어느 정도 설명은 나왔을 겁니다. 저는 평생 테니스 운동을 했습니다. 일흔 살 넘어서도 운이 좋은지 어떤지 상당한 정도로 건강을 유지하면서 일주일에 세 번 구장에 나가서 테니스 운동을 즐겁고 유쾌하게 합니다. 이런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겁니다. 그 외에 저의 일주일은 즐겁고 유쾌한 일들로 채워집니다. 주보 작성과 설교 준비는 제쳐두더라도, 텃밭과 집 안팎 관리, 책 읽기와 출판, 유튜브 강독과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 관리, 아주 가끔 목사 대상으로 하는 특강 등등으로 무료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것 자체로 즐겁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일들이 곧 끝장난다는 사실을 늘 생각합니다. 아무리 즐겁고 유쾌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아침 안개가 곧 걷히듯이 사라집니다. 그런 것에만 매달려서 살면 그것이 끝나는 순간에 내 삶도 의미를 잃을 겁니다. 아무리 유쾌하고 즐거운 일이라도 그것 자체가 저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는 게 분명합니다. 성경이 성령이라고 부르는 영을 통해서만 저의 영혼이 충만해진다고 저는 믿습니다. 대답이 되었나요?
저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19절과 20절에서 바울이 성령 충만에 이르는 길을 제시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19절입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이 문장은 예배를 가리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은 모여서 구약의 시편을 돌아가면서 읽고, 지도자가 설명하고, 유대인들의 전통적 기도문으로 기도하고, 성찬식을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예배 모임을 정기적으로 열었습니다. 그게 주일 공동예배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모든 그리스도교는 예배공동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세속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예배 모임을 탐탁지 않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간 낭비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교인들이 늘어가는지 모릅니다. 마르마 던이라는 신학자는 『거룩한 시간 낭비』라는 책에서 예배가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낭비라 할 수 있으나 생명의 깊이로 들어가는 데서는 가장 분명한 거룩한 사건이라고 말했습니다. 과연 그런가요?
사람의 영혼은 무엇과 관계를 맺고 사느냐에 따라서 천박하거나 유치해질 수가 있고, 반대로 거룩해질 수도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여기 ‘무찌르자 공산당’ 같은 군가만 부르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의 영혼은 그런 적개심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내 나이가 어때서’ 같은 뽕짝 노래에만 심취해서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의 영혼은 귀엽기는 하나 유치한 감정으로 요동치게 될 것입니다. 여기 술꾼들과만 어울려서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노름꾼들과만 어울릴 수도 있겠지요. 그의 영혼이 그런 일들로 충만해집니다.
시편과 찬양과 복음 찬송과 하나님 말씀과 성찬식으로 진행되는 예배에서 우리는 앞에서 말한 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어떤 대상을 경험합니다. 거룩한 존재 앞에 섭니다. 그 거룩한 존재는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지금도 고유한 능력으로 통치하시고 종말에 완성하실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사죄를 선포하십니다. 아버지 유산을 받아 멀리 떠나서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거룩한 존재, 절대 타자, 미래에 이미 가 계신 분,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 율법과 로마 실정법에서 우리를 해방한 분,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판넨베르크), 궁극적인 토대이자 존재의 깊이(폴 틸리히), 세계의 비밀(융엘)이십니다. 이런 분에게 가까이 가고 그를 가까이 느끼고 가까이 경험한다면 우리 영혼이 거룩한 영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시나요? 여러분의 자녀가 이런 사람으로 살기를 바라지 않으시나요?
평생 예배를 드렸으나 그런 경험이 별로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긴 합니다. 예배 시간에 잡생각이 든다거나 예배에 집중하더라도 그게 자신의 영혼 성장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더 비판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예배는 종교적 히스테리이거나 자아 투사이며, 유전자가 뇌에 작용하여 빚어낸 종교적 광기이자 유희라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예배 영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지 못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물론 예배를 예배답게 드렸다고 해서 눈에 뜨일 정도로 분명하게 우리가 변화하는 건 아닙니다. 예술가들이 바이올린이나 그림을 꾸준히 수행하듯 연습하는 것처럼 우리가 예배에 진정성 있게 천착한다면 자기도 모르는 순간에 성령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한 가지를 더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예배가 아무리 중요해도 출가 수도승으로 살지 않는 한 매일 예배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상을 예배의 영성으로 살아야겠지요. 그것을 바울은 20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시편과 찬양과 영적인 노래로 서로 화답하고 주님을 찬송하는 사람은 당연히 모든 일상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들 겁니다. 일상이 감사 찬송으로 충만해지는 겁니다. 거꾸로 일상을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당연히 예배를 드리고 싶어질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직접 만나고 싶어지듯이 말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짚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라고 말입니다. ‘그의 이름’이 감사하는 마음의 토대이고 예배의 원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죽는 자리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하신다는 사실보다 더 기쁜 일이 무엇이며, 더 감사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가 우리에게 ‘임마누엘’이라는 희망으로 사는 것보다 더 거룩한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로마 문명이 완벽하게 지배하던 에베소 못지않게 권력과 돈과 재미로 가득한 21세기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 함께 바울이 말하는 성령 충만의 길로 나아갑시다.
제 생각에는 목사님의 표현중에 이런 것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것이 필요하기는 하나...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말하는 것이긴 하나.
이런 표현들이 때론 저를 많이 힘들게 합니다.
"어쩌란 말인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속 시원한 대답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서 그런지
뭔가 어정쩡해 보이기도 합니다.
오늘 설교에도 있네요...
"물론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걸 부정하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가능한 한 세상에서 사람들과 잘 어울려서 살아야 합니다. 돈벌이도 하고 즐거운 놀이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마인드)으로, 다른 영혼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밖’이 아니라 ‘안’에서의 구별된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런 요구 앞에 나 스스로는 어떤 포즈를 취해야 할 지를 고민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