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5

부활은 죽음의 죽음이다! (고전 15:19-26)

부활절 조회 수 2485 추천 수 0 2025.04.20 19:42:52
설교보기 : https://youtu.be/QF0X1r1aFFU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5:19-26 

부활은 죽음의 죽음이다!

고전 15:19-26, 부활주일, 2025420

 

 

부활의 노래, 고전 15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그리스도교의 부활 신앙이 설득력 있게 들릴까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로 들릴까요? 이보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당신은 부활을 실제로 믿습니까?’라거나 부활을 믿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라는 설문을 돌린다는 어떤 대답이 나올지가 궁금합니다.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부활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놓여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부활을 가장 깊이 있게 다루는 신약 본문은 고전 15장입니다. 고전 15장을 부활 장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부활 신앙이 없으면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가 무너집니다. 고전 15:14절에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라고 했고, 17절에서 다시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부활 신앙 없이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성립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매우 성실하게 교회 생활을 하고 세상에서도 모범적으로 사는 사람이라도 부활을 모르거나 소홀하게 여긴다면 그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되는 겁니다. 부활까지는 잘 모르겠고, 예수를 믿어서 마음의 평화를 얻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수준의 교회 생활이 바울에게는 헛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놓치고 겉모양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 첫 구절인 고전 15:19절에서 이를 다시 이렇게 강조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러라.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고, 죽음 이후의 삶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왜 잘못인지를 19절에서 짚은 겁니다. 그리스도인이 더 불쌍한 이유는 세상 사람들보다 인생을 재미없게 살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 명품을 몸에 지닌다고 해서 인생이 행복한 거는 아니니까요.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더 불쌍한 이유는 부활 신앙이 없을 때 그리스도교 신앙이 가짜가 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삶으로 모든 게 끝장난다면 부활 신앙은 가짜가 되니까요. 가짜를 믿고 사는 사람은 인생을 재미있게 살았나, 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과격하게 말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인 부활 신앙을 우회하지 말고 직면하라는 것입니다. 본질이 아니라 겉모양에 머물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체력이 약해지고, 그런 약한 상태가 이어지면 병듭니다. 만약 부활 신앙이 영혼의 중심에 자리 잡는다면 교인들끼리의 작은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부활 신앙을 영적인 화두로 삼는 이들이 얼마나 될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교의 부활 신앙이 분명한 진리라는 바울의 자신감입니다. 그런 자신감이 없으면 믿음이 헛것이라거나 그리스도인이 불쌍한 자라는 식으로 과격하게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바울이 말하는 부활은 무엇일까요?

부활을 그림처럼 묘사하는 내용은 복음서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후 안식일 다음 날 새벽에 몇몇 여성들이 예수 시신에 바를 향유를 들고 무덤에 찾아갔다가 무덤 안에 시신이 없는 걸 확인하고 제자들에게 와서 그 사실을 전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고 어떤 이들은 예수께서 실제로 죽지 않고 임사 상태에 떨어졌다가 목숨이 돌아온 거로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과 바울을 비롯한 초기 제자들과 교부들은 예수께서 실제로 죽었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었다가 처음의 육신으로 회귀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죽기 전의 상태로 돌아왔다면 그는 다시 죽어야 합니다. 신약성경이 일관되게 말하는 핵심은 예수께서 앞으로 우리가 모두 맞게 될 죽음을 우리와 똑같이 당했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제자들 앞에 살아있는 자로 현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바울은 오늘 설교 본문 고전 15:20절에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 그리스도는 잠자는 자들이 얻게 될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그 이전에는 인류 역사에 부활은 그림자처럼 인식되었으나 예수님에게서 부활은 실체가 되었습니다. 종말에 완성될 부활이 예수님의 운명에 선취(先取)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가르침이 신학적인 교언영색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부활한 예수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따지고 싶겠지요. 부활한 예수를 제자들과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이유를 설명해 보라고 다그치고 싶을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인의 삶과 비그리스도인의 삶이 나뉩니다. 우리는 인과율에 근거한 자연과학적인 방식으로 증명할 수 없어도 믿음으로 예수의 부활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런 근거가 없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사도들의 경험이 옳다는 사실과 예수께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 그 하나님을 우리도 믿는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받아들입니다. 그 하나님은 창조 능력이 있는 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하나님과 하나가 된 분이시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게 분명하다고 말입니다.

 

모든 사람의 부활

이와 관련해서 바울은 오늘 설교 본문에서 매우 중요한 관점을 짚었습니다. 저도 의외라고 생각한 관점입니다. 21-22절을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니, 또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의 부활도 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써 낙원을 쫓겨난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아담은 죽을 운명의 인류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게 된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난다.’고 합니다. 죽음에서 살아나는게 부활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이 부활하는 게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만 부활한다고 생각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영원히 고통당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구원과 부활이 보편적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한 건가요? 혹시 바울의 이 진술에 다른 뜻이 있는 걸까요?

이 대목에서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살아난다면 굳이 지금 예수 믿고 교회에 다닐 필요가 없다고 말입니다. 정말 유치한 생각입니다. 구원에서 배척되는 사람이 있어야만 자신의 구원이 빛을 발하는 듯이 생각하는 겁니다. 저는 평소에도 구원 이기주의가 그리스도교 신앙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씀을 여러 번 드렸습니다. 구원의 확신 가운데서 사는 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나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왜 자기만 구원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를 저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는 오히려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께서 우리와 다른 종교 전통에 서 있는 사람과 무신론자들과 공산주의자들까지 모두를 우리가 모르는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속된 표현으로 그들이 우리처럼 구원받는다고 해서 우리가 손해나는 거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예수 믿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탕자였던 둘째 아들까지 사랑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첫째 아들과 다를 게 없습니다.

바울은 무엇을 근거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걸까요? 대답은 간단명료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죽음의 세력이 파멸되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서 그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십자가에 처형당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은 살아있는 자로 경험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무덤에 머물러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살아있는 자로 경험했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자 세상과 일상이 제대로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리얼하게느낄 수 있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생각하기 전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유는 무슨 이유가 따로 있느냐, 죽음은 그것 자체로 공포요 두려움인데, 하고 말할 수도 있긴 합니다. 우리는 매일 잠을 잡니다. 잠은 죽음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잠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잠에서 깨어나는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깨어날지 아닐지가 확실하지 않다면 잠은 두려움의 대상이겠지요.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잠에서 깨어난다는 건 우리의 운명이 죽음으로 끝장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삶으로 변화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 받아들여지는 겁니다.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게 무엇인지를 절감했습니다. 그들은 다음날 깨어나는 게 분명하니까 두려움이 아니라 편안하게 잠들 듯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에 죽음의 세력이 더는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 세상에서는 종종 오해됩니다. 현대에 널리 퍼진 생명 경시 사상이 그것입니다. 얼마 전에 사업 실패로 늙은 부모와 아내와 두 자녀를 약물로 죽이고, 자기도 죽으려고 하다가 실패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에도 그런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 제가 잘 모르겠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일이 너무 흔합니다.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욕망의 실패로 절망한 겁니다. 얼마 전에는 유명 정치인이 10년 전 자기 비서에게 행한 성폭력이 사회 문제로 확대되자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는 행위에 대해서 제삼자가 말하기가 정말 조심스럽기는 하나 명예심의 손상이 생명 경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만은 짚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음의 죽음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은 생명 경시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 속합니다. 오히려 생명의 심연과 충만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그 생명의 심연과 충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는 사실을 경험함으로써 죽음까지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여기 결혼을 앞둔 두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들은 soul mate입니다. 그들은 소박한 한 끼 식사를 함께하면서 무한한 기쁨을 경험합니다. 함께 먹는 밥 냄새가 생명의 감수성을 자극합니다. 된장찌개가 옛날 어머니 손맛을 기억나게 합니다. 김치만으로도 침샘이 솟구칩니다. 그들은 이제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소박한 한 끼 식사를 영혼의 깊이에서 서로 느낄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생명의 심연과 충만을 경험했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아주 강렬한 문장으로 26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는 죽음입니다.

 

죽음(ὁ θάνατος)이 죽는 순간이 곧 이 세상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시작하는 종말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는 영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의 세상에서는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서 모든 것들이 낡고 늙고 병들고 결국에는 죽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우리의 삶을 철저하게 지배합니다. 바울은 그런 세력을 가리켜서 24절에서 통치와 권세와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세력입니다. 그런 세력의 눈치를 봐야 합니다. 그 두려움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서 자기 욕망에 매달립니다. 부자 되는 게 인생살이의 목표이고, 더 맛있게 먹고 더 즐겁게 살려고 애를 씁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무조건 잘못은 아닙니다. 문제는 거기에 예속되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주어지는 삶을 거부하고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런 죽음의 세력들이 폐기되는 때를 생각합니다. 세속 정치와 경제 권력이 가소로워지는 때입니다. 죽음이 죽는 때입니다. 죽음이 파멸하는 순간이 오면 모든 사람이 죽음의 숙명을 벗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22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난다고, 즉 부활한다고 진술한 겁니다.

이게 실감이 되시나요? 우리의 현실에서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인가요? 어떤 이들은 베르디의 <레퀴엠>에 나오는 진노의 날이라는 대목을 들어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선 인간의 영적 실존을 실감하지 못하듯이 죽음과 부활 문제도 실감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다음의 사실을 생각하시라고 말씀드릴 뿐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근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사랑할 때만 그를 통해서 일어난 죽음의 죽음이 무엇인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환원주의처럼 느껴질 정도로 반복해서 예수를 믿으라고, 예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를 사랑하면 예수에 관해서 알게 되고, 그를 아는 것만큼의 깊이에서 죽음의 폐기가 느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2025년도 부활절입니다. 첨단 과학 기술이 우상의 자리를 차지했고, 정치와 경제 권력이 우리의 삶을 점점 더 강력하게 옥죄는 시대를 우리는 삽니다. 기술과 권력의 묵시적 왕국입니다. 현대인은 그런 묵시적 왕국 안에서 죽음과 허무라는 늪에 빠진 형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저와 여러분은 부활 신앙으로 죽음의 두려움을 벗어났으며, 죽음의 충동(프로이트, 타나토스)에서도 벗어났습니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죽음이 끝장나는 그 마지막 때를 일상에서 삶의 능력으로 살아내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멘


profile

[레벨:25]브니엘남

April 23, 2025
*.182.114.132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5:28-29)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는 심판의 부활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는 생명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2:5-6)라고 말한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읽는 것이 보편 구원보다 더 문맥에 맞는 것이 아닐까요?

 

아담 안에서 우리는 죽음 가운데서 태어났고 또 죽도록 태어났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죽은 것이다(2;1, 5). 그러니 심판의 부활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즉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생명 안에서 거듭났고 또 부활하여 살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소생되어 살게 되었다(2:5-6). 저는 이때까지 이 구절을 이렇게 읽었습니다. 그래서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고전 15:23-25)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직까지 저는 이렇게 읽는 것이 더 마음에 와 닿는데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April 23, 2025
*.45.99.73

보편 부활보다는 심판 부활과 생명 부활이라는 이중 부활 개념이,

마치 칼뱅의 이중예정처럼 더 옳다는 뜻이죠?

그렇게 생각해도 됩니다.

다만 종말론적인 심판과 구원과 부활과 영생과 천년왕국 등등은 

여전히 하나님의 비밀에 감춰진 것이라서 그 누구도 단정적으로 말하지 못합니다.

신약성경은 그것을 각각 교회의 여러 상황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대개는 은유의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과 십자가와 부활이 일부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즉 그분에게서 일어난 구원 사건은 우주론적인 차원의 능력이기에

만인 구원, 보편 부활이 옳다고 말하는 겁니다.

심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구원을 위한 심판일 뿐이죠.

실제로 나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부분을 제거(심판)해주시는 방식으로 구원하시겠지요.

유대인들의 율법 신앙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났기에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라고 말하는 겁니다.

브니엘남 님이 인용한 성경 구절은 모두 메타포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sort 조회 수
1115 성령강림절 임박한 하나님 나라 (눅 10:1-11) 2025-07-06 481
1114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긴박성 (눅 9:51-62) [1] 2025-06-29 959
1113 성령강림절 "내가 벌하리라!" (사 65:1-9) [2] 2025-06-22 1214
1112 성령강림절 구원의 능력인 하나님의 사랑 (롬 5:1-5) 2025-06-15 1394
1111 성령강림절 종의 영 vs 자녀의 영 (롬 8:14-17) [5] 2025-06-08 2104
1110 부활절 예수께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요 17:20-26) 2025-06-02 1421
1109 부활절 바울의 거룩한 비전 (행 16:9-15) 2025-05-25 1560
1108 부활절 여호와를 찬양하라 '할렐루야'! (시 148:1-14) 2025-05-18 1839
1107 부활절 예수의 아버지 (요 10:22-30) 2025-05-11 1585
1106 부활절 예수 '따름'이 답이다! (요 21:15-19) 2025-05-05 2319
1105 부활절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에 관해서 (요 20:19-31) [2] 2025-04-27 2683
» 부활절 부활은 죽음의 죽음이다! (고전 15:19-26) [2] 2025-04-20 2485
1103 사순절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처형 (눅 23:1-49) [2] 2025-04-13 2688
1102 사순절 택함 받은 증거 (사 43:16-21) 2025-04-07 2733
1101 사순절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고후 5:16-21) 2025-03-30 3060
1100 사순절 하나님은 심판하시나? (눅 13:1-9) [2] 2025-03-23 5672
1099 사순절 큰 흑암과 두려움에서 (창 15:1-12, 17-18) [8] 2025-03-16 7079
1098 사순절 믿음이 구원이다! (롬 10:8b-13) 2025-03-10 5776
1097 주현절 오직 예수! (눅 9:28-36) [1] 2025-03-02 7052
1096 주현절 "나는 부활을 믿습니다." (고전 15:35-38, 42-50) 2025-02-23 7215
1095 주현절 복과 화의 역설 (눅 6:17-26) [2] 2025-02-16 6876
1094 주현절 생명의 그루터기 (사 6:9-13) 2025-02-09 6877
1093 주현절 나사렛 사람들 (눅 4:21-30) [2] 2025-02-03 7438
1092 주현절 기쁨의 근원 (느 8:1-3, 5-6, 8-10) [2] 2025-01-26 8020
1091 주현절 혼례와 포도주 이야기 (요 2:1-11) [2] 2025-01-19 7292
1090 주현절 세례와 성령 (행 8:14-17) [2] 2025-01-12 7436
1089 성탄절 성육신의 신비 (요 1:10-18) 2025-01-06 8682
1088 성탄절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 (골 3:12-17) [2] 2024-12-29 9354
1087 대림절 미래의 통치자 (미 5:2-5a) [2] 2024-12-22 11202
1086 대림절 성령과 불 세례 (눅 3:7-18) [5] 2024-12-15 11437
1085 대림절 충만한 '의로움의 열매' (빌 1:3-11) 2024-12-08 11625
1084 대림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시 25:1-10) [2] 2024-12-03 12689
1083 창조절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 18:33-38) 2024-11-24 12408
1082 창조절 성소에 들어갈 담력 (히 10:11-14, 19-25) [3] 2024-11-17 11840
1081 창조절 영혼이 갈급한 사람 (막 12:38-44) [2] 2024-11-10 12569
1080 창조절 전심전력 귀 기울임 (신 6:1-9) [4] 2024-11-04 13547
1079 창조절 시각 장애인 바디매오 이야기 (막 10:46-52) 2024-10-27 14243
1078 창조절 세계의 비밀이신 하나님 (욥 38:1-7) 2024-10-20 16890
1077 창조절 십계명 '너머' (막 10:17-22) [4] 2024-10-13 16615
1076 창조절 모든 사람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히 1:1-4, 2:5-10) [4] 2024-10-07 17054
1075 창조절 지옥 이야기 (막 9:38-48) [2] 2024-09-29 16876
1074 창조절 하늘의 지혜 (약 3:13-18) [2] 2024-09-23 16646
1073 창조절 의로움의 원천 (사 50:4-9a) [5] 2024-09-15 17336
1072 창조절 무엇이 '놀라운 일'인가? (막 7:31-37) [2] 2024-09-08 17616
1071 창조절 생명의 길 (신 4:1-2, 6-9) 2024-09-02 17605
1070 성령강림절 영원한 생명의 말씀 (요 6:60-69) 2024-08-25 17912
1069 성령강림절 성령 충만의 길 (엡 5:15-20) [4] 2024-08-18 17077
1068 성령강림절 영혼의 깊이 (시 130:1-8) [2] 2024-08-11 17781
1067 성령강림절 생명의 양식 (요 6:24-35) 2024-08-05 17083
1066 성령강림절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충만하심 (엡 3:14-21) 2024-07-28 16858
1065 성령강림절 메시아 대망 (렘 23:1-6) 2024-07-21 17928
1064 성령강림절 선지자 '너머' (막 6:14-29) [2] 2024-07-14 17540
1063 성령강림절 제자들의 축귀 능력 (막 6:1-13) [2] 2024-07-08 17821
1062 성령강림절 공평한 세상을 향하여! (고후 8:7-15) 2024-06-30 18195
1061 성령강림절 "그는 누군가?" (막 4:35-41) [2] 2024-06-23 17965
1060 성령강림절 사람의 외모와 중심 (삼상 16:1-13) 2024-06-16 17697
1059 성령강림절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고후 4:13-5:1) [4] 2024-06-09 18319
1058 성령강림절 안식일 문제 (막 2:23-3:6) [2] 2024-06-03 22081
1057 성령강림절 이사야의 '충만' 경험 (사 6:1-8) [2] 2024-05-26 23614
1056 성령강림절 파라클레토스 (요 16:4-15) [2] 2024-05-19 23658
1055 부활절 믿음과 영생 (요 3:1-15) 2024-05-13 22455
1054 부활절 믿음과 사랑 (요일 5:1-6) 2024-05-05 22505
1053 부활절 상호내주의 신비 (요 15:1-8) [4] 2024-04-28 25414
1052 부활절 부족함 없는 삶, 가능한가? (시 23:1-6) 2024-04-21 28387
1051 부활절 죽은 자 가운데서 (눅 24:36b-48) [2] 2024-04-14 27553
1050 부활절 생명의 로고스 (요일 1:1-10) [5] 2024-04-08 29569
1049 부활절 예수 부활의 첫 증인들 (막 16:1-8) [4] 2024-03-31 25322
1048 사순절 향유를 손에 든 여자 (막 14:1-11) [4] 2024-03-24 25591
1047 사순절 새 언약의 날 (렘 31:31-34) [2] 2024-03-17 24849
1046 사순절 죽임에서 살림으로! (엡 2:1-10) [6] 2024-03-10 25371
1045 사순절 십자가의 길과 하나님의 능력 (고전 1:18-25) [2] 2024-03-04 24767
1044 사순절 예수 승천과 하나님 우편 (벧전 3:18-22) [9] 2024-02-18 26615
1043 주현절 예수의 변모 사건 (막 9:2-9) [5] 2024-02-11 25216
1042 주현절 여호와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 (사 40:21-31) [6] 2024-02-05 24686
1041 주현절 예수의 배타적 권위 (막 1:21-28) [4] 2024-01-28 26331
1040 주현절 부름-버림-따름 (막 1:14-20) [2] 2024-01-21 26173
1039 주현절 사무엘의 하나님 경험 (삼상 3:1-10) [2] 2024-01-14 26263
1038 주현절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 (행 19:1-7) [5] 2024-01-07 26007
1037 성탄절 만물의 찬양 (시 148:1-14) [2] 2023-12-31 28066
1036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2] 2023-12-24 33150
1035 대림절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 (사 61:1-4, 8-11) [2] 2023-12-17 32168
1034 대림절 하나님의 날: 새 하늘과 새 땅 (벧후 3:8-13) [2] 2023-12-10 31916
1033 대림절 깨어있음이란? (막 13:24-37) [2] 2023-12-04 31976
1032 창조절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다! (엡 1:15-23) [2] 2023-11-26 25990
1031 창조절 은혜를 갈망하는 시인 (시 123:1-4) [4] 2023-11-19 25876
1030 창조절 외면당한 사람들 (마 25:1-13) [5] 2023-11-12 26722
1029 창조절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의 역설 (마 23:1-12) [2] 2023-11-07 26322
102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마 22:41-46) [7] 2023-10-29 25702
1027 창조절 재림신앙 (살전 1:1-10) [4] 2023-10-22 25875
1026 창조절 금송아지 이야기 (출 32:1-14) 2023-10-15 25850
1025 창조절 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 (마 21:33-46) 2023-10-09 27315
1024 창조절 과정으로서의 구원 (빌 2:1-13) 2023-10-01 28960
1023 창조절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마 20:1-16) [2] 2023-09-24 26652
1022 창조절 홍해 이야기 (출 14:21-31) 2023-09-17 25989
1021 창조절 도반 공동체 (마 18:15-20) [4] 2023-09-10 27059
1020 창조절 '악' 앞에서 (롬 12:14-21) [4] 2023-09-04 26197
1019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2023-08-27 27980
1018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6] 2023-08-20 27089
101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2023-08-08 26928
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28843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