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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이레’의 믿음

부활절 조회 수 25270 추천 수 0 2009.05.11 17:3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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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세기 22:1-14 
 

‘여호와 이레’의 믿음

(창 22:1-14)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가타부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말씀을 수행했습니다. 모리아 산까지 삼일이 걸렸습니다. 모리아 산에 가까이 이르자 동행했던 종들은 남겨두고 아들만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삭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로 드릴 양은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다고 대답합니다.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은 뒤 이삭을 결박해서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칼로 목을 따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에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불러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했습니다. 외아들도 아끼지 않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이 확인하셨다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린 아브라함은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을 발견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쳤습니다. 

모리아 산 이야기는 읽기가 불편합니다. 아들을 하나님에게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을 우리가 직접 들었다고 합시다. 그 명령을 수행할 자신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뭔가 우리의 신앙적 약점이 탄로 날 것 같습니다. 간혹 기독교 소종파 중에서 자식들이 큰 병에 걸렸는데도 기도로 치료하겠다거나 또는 수혈을 거부함으로써 병을 키웠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들은 현대 의학기술보다는 하나님의 치료능력을, 자식의 생명보다도 하나님의 명령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들의 행위는 기독교 신앙을 모르는 데서 나오는 어처구니없는 일인 게 분명합니다. 그러나 자식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우리는 한 번도 대립적인 것으로 생각해보지 않은 우리의 신앙이 무조건 건강한 것도 아닙니다.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이 말씀이 우리에게 불편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불편하다고 해서 대충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 말씀을 직면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시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린 명령의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명령을 내리게 되는 동기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그것을 분명하게 언급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시험 치고는 그 내용이 너무 끔찍합니다. 성경을 백독 하라든지, 재산의 반을 바치라든지, 수도승이 되라는 거라면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니요. 이게 말이 되나요?

인신제물은 흔하지는 않지만 고대 종교에 실제로 행해지던 종교행태였습니다.  왕하 21:6, 겔 16:20, 렘 7:31 레 20:3 등등, 구약성서에서도 이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있습니다. 고대 유대인들 주변에는 ‘몰록’ 신에게 자식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인신제사를 오늘의 눈으로 보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고대인들이 처한 상황을 감안해야 합니다. 그들은 그런 방법이 아니면 씨족이나 부족 전체가 전멸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힐 때가 많았습니다. ‘심청’ 이야기도 그런 이야기 중의 하나입니다. 일본이 미국 태평양 함대를 공격할 때 가미가제 특공대가 출격했습니다. 그들은 바로 국가를 위해 바쳐진 제물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모양만 세련되게 바뀌었을 뿐이지 오늘 현대사회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청소년들의 삶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 실상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는 인신제사를 철저하게 막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찾아서 죽여야 한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그런 명령을 내리셨다고 합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시험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이런 명령까지 내리시는 걸까요?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면 이런 시험을 거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참되게 경외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소박하게 이렇게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단련시키기 위한 학습이 바로 시험이라고 말입니다. 일리가 있는 대답입니다. 어려움을 만나서 극복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우리의 신앙도 성장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고 한다면 그런 학습 없이 우리의 신앙을 단번에 강하게 만드실 수 있어야만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을, 그리고 우리를 시험하시는 걸까요?

여기서 ‘왜’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습니다. 질문을 할 수는 있지만 질문으로 끝날 뿐이지 해결책은 아닙니다. 고대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시험’이라고 해석될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삶의 현실이 있을 뿐입니다. 인간이 직면하고 있는 삶의 시련과 위기를, 예컨대 무죄한 이들의 고난을 ‘왜’라는 식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남편을 암으로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참척(慘慽)의 슬픔에 빠진 박완서 선생님은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나는 내 아들이 이 세상에 없다는 무서운 사실을 견디기 위해서 왜 그런 벌을 받아야 하는지 영문을 알아야만 했다. 아들을 잃은 것과 동시에 내 교만도 무너졌다. 재기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그러나 교만이 꺾인 자리는 겸손이 아니라 황폐였다.” 왜라는 질문으로는 자신이 허물어질 뿐이었습니다. 박 선생님이 결국 얻은 대답은 “한 말씀만 하소서”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유럽에서 대량학살을 당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향해서 “왜?” 하고 물었지만,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시험이었다는 대답 이외에 다른 대답은 없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인 거지를 보고 제자들이 누구의 잘못이냐, 하고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도 시험으로부터 시작해서 시험으로 끝났습니다. 공생애가 시작될 때 예수님은 마귀에서 세 가지 시험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악령의 시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방식이어야만 하는지, 왜 내가 당해야만 하는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주님은 왜라고 묻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왜?”라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치 기계처럼 그 명령을 수행할 뿐이었습니다. “인간이 좀 심하다.”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겠지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에게 번민이 왜 없었겠습니까? 논리적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말문이 막힐 수도 있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후손을 많이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지만 후처를 통해서 낳은 이스마엘 밖에 없어서 그 아이로 만족하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이삭을 허락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달라고 조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마당에 백세에 얻은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는 건 언어도단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참혹한 명령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는 어떻게 이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을까요?


여호와 이레

그 답을 여러분은 알고 있을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그 대답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습니다. 그는 그 믿음으로 메소포타미아를 떠날 수 있었고, 그 믿음으로 이삭을 번제로 바칠 결단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브라함의 이런 생각과 행동은 자신의 신앙적 확신에 따라서 자식을 제 때 치료해주지 않은 광신자의 그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와 인간적인 광신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비슷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냥 다른 정도가 아니라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다릅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전적인 신뢰라고 한다면, 광신은 신뢰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에 불과합니다. 사이비 이단들에게 나타나는 현상들이 바로 후자에 속합니다. 믿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열광적으로 집착하는 현상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그 하나님의 선하심에 자신의 전체 운명을 걸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어떻게 신뢰하고 있었는지 본문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삭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번제에 필요한 불과 나무는 있는데 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어디에 있나요? 아버지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22:8) 아브라함이 왜 이런 대답을 했는지 성서기자는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 흐름에서 볼 때 번제물은 바로 이삭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걸 각오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이 친히 준비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건 이삭을 속이려는 말이 아닙니다. 아들을 바쳐야 할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는 말도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신뢰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신뢰가 없었다면 이런 말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 신뢰에 근거해서 그는 아들의 목에 칼을 들이밀 수 있었습니다.

“내 아들아!” 운운하는 아브라함의 진술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얼마나 독특한지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위해서 어린 양을 준비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자기를 위해서 준비하신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에게 이 말은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서 유대인들의 생존을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이 특별히 도덕적이거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해서 그들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존을 책임지십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한 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했다는 말은 곧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지를 확인했다는 뜻입니다. 그것만 보장된다면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미래는 보장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 백성들의 생존 조건을 준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여호와 이레’의 믿음입니다.

‘여호와 이레’의 믿음은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아득한 경지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번제로 드리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아들만이 아니라 자기도 그 자리에서 죽는 사건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아들을 살리고 자기가 대신 죽고 싶었겠지요. 이삭은 그에게 난파선의 생명줄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 이삭이 죽는다면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도 모두 수포로 돌아갑니다. 모든 인간적인 모든 꿈과 계획과 희망이 사라집니다. 이런 상황에 되면 사람들은 자포자기 심정이 되거나 하나님을 거부하기 마련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의 모리아 전승이 말하는 ‘여호와 이레’의 믿음이 없습니다. 자기 의지와 자기 신뢰만 범람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성취하려는 욕망만이 우리의 영혹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을 향한 인간의 원초적 에너지, 즉 에로스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강렬한지, 그래서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훼손시키고, 더 나아가서 우리의 생명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주식 값과 달러 환율에 따라서 천당과 지옥을 오갑니다. 학교를 점수로 서열화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요동치고 있는 경제 위기는 바로 현대인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 만든 결과입니다. 그들은 불안한 미래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가시적인 안전장치가 없으면 한 순간도 편안하게 지내지 못합니다. 집이 없고 직장이 없고 돈이 없으면, 그것도 충분할 정도로 소유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도저히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아무도 이를 부인하기 힘듭니다. 평생 동안 신앙생활에 매진한 사람들도 이런 고정관념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서가 말하는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기보다는 그것을 이용해서 자신이 계획한 삶을 확대할 뿐입니다. 이런 일들이 본문을 해석할 때도 일어납니다.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믿음을 확인받은 뒤에 정신을 차린 아브라함은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을 발견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만 있으면 이렇게 하나님이 모든 걸 초자연적으로 준비시켜주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특별한 방식으로 많은 재물을 허락하신다고 말입니다. 노골적으로 부자가 된다고도 말합니다. 그런 건 모두 속임수입니다. 하나님을 아무리 잘 믿어도 사업에 실패할 수도 있고, 죽을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성서기자는 숫양의 출현이 초자연적인 사건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암시도 없습니다.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양인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이 새로운 눈으로 그것을 발견할 것이었겠지요. 여기서 핵심은 숫양을 얻었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자신의 미래를 온전히 하나님에게 맡겼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이 모리아 산에서 확인된 까닭에 고대 유대인들은 그곳 이름을 ‘여호와 이레’로 지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미래를 온전히 하나님에게 맡긴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깊이 생각하십시오. 이를 위해서 여호와 이레의 믿음이 언제 어떻게 시작됐는지 기억하면 됩니다. 아브라함의 삶이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을 때입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자리로 내려가지 않으면 우리는 ‘여호와 이레’의 믿음을, 그 믿음의 신비를, 거기서 오는 참된 은혜와 축복을 알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결정적인 절망의 순간은 죽음입니다. 그 순간이 쏜살같이 옵니다. 이 죽음은 마치 아브라함의 칼날이 이삭의 목을 겨누고 있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놀라지 마십시오. 두려워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의 생명을 준비해놓으셨습니다. 그것이 궁극적인 의미에서 ‘여호와 이레’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는 우리가 도대체 이 세상에서 그 무엇을 두려워하리오. (2009.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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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나이스윤

May 11, 2009
*.148.138.103

어제 예배 후 서둘러 해지기전 집에 돌아와 아이(5살)와 함께 탄천산책길에서

공놀이하며 노는데 이녀석은 언제나 한곳으로만 완전히 지칠때 까지

계속 걷고 뛰어놀고는 돌아올 때는 제가 항상 업어주거나 안아서

데리고 집에 들어옵니다.

실컷 놀고난 그 뒤는 온전히 저에게 맡기는거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대해서는 조금의 고민이나 걱정이 없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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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May 11, 2009
*.229.154.97

나이스윤님, 묵상이 잔잔한 감동을 주는 군요.

그리고, 깊이 공감 가네요.

피곤한 몸을 아빠에게 온전히 맡기고 편안한 안식을 취하는 수혁이..

우리 삶의 여정이 그런거 아닐까,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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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3]우디

May 11, 2009
*.141.21.47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22:8)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3)

설교시간에 "자기를 위하여"를 언급하실 때에 시편23편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중심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준비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에 대한 전적 신뢰에서

아브라함의 신앙과 다윗의 신앙은 서로 닿아있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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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12, 2009
*.139.165.36

창 22:8절과 시 23:3절을 연결해서 생각했다니,

내가 한 수 배웠소.

고대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강도가

얼마나 강렬한지를 보여주는 구절이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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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May 11, 2009
*.217.40.91

목사님, 설교 마지막 대목,

인간의 죽음 앞에서 궁극적인 '여호와 이레'는

그리스도를 통한 부활의 생명이다..라고 하실 때

좀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렇구나' 하는 것과 '왜 그렇게 생각을 해보지 못했을까?'

하는 두가지 생각이 겹치더군요.

그간의 묵상 혹은 가르침에서는 본문의 상황에서

이삭 혹은 숫양의 희생제물의 본체는 예수라는 것에 머무르는 것에 그쳤는데요,

창세기에서,

그리스도의 부활, 성도의 죽음과 부활을 향하여

화살을 쏘는 느낌이었습니다.

목사님, 이것이 관통인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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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3]우디

May 12, 2009
*.141.21.47

저도요, 어제 그 대목에서 속으로 '헉....' 했드랬습니다. 놀라움이기도 하고요 기쁨이기도 하고요.

한편으로는 '와! 정말 뭐든지 부활과 연결시키는데 도가 텃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아, 이거 너무 솔직히 다 말하고 있는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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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은빛그림자

May 12, 2009
*.141.3.64

아는 것과 믿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삶의 자리로 가져오는 것.

이것들에 대하여 요즘 생각이 많습니다.

하루를 사는 만큼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이고

종말은 성경에서가 아닌 현실(그 모양과 형태는 모르겠으나)로 다가오고 있을 터인데

이것에 대한 긴박감, 위기 의식.. 이러한 것들이 제게 없습니다.

그러니 본질을 자꾸 놓치고 필요없는 것들에 골몰할 밖에요.

보통은 여호와 이레라 하면 네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다 채워주신다.. 믿어라..

이런 스타일의 설교들을 많이 하시는데요,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위의 설교에 의하면 그것은 본질이 아니겠지요.

여호와 이레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와우~ 완벽하군..과, 에이~ 저게 다야..하는 묘한 양가 감정이 생기기도 합니다만..-_-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활의 생명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믿고 있었으나 그것이 왜 삶의 자리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지 조금 답답한 마음입니다.

그리하여 계속해서 요즘 과연 나는 하나님을 아는가? 하나님을 믿는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무엇을 믿는 것일까?

너무 많은 질문이 쏟아져서 회피하게 되기도 합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알고" 그 밭을 산 농부라면 오늘의 배고픔이 위협적이지는 않을텐데...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나는 왜 아직도 실존의 두려움에 때로 질식할 것 같은지...

제 믿음은 가짜인 걸까요..? 가짜는 정말 싫은데요..

정 목사님의 목소리가 꿈결같이 들려오네요.. 은빛~ 자기 닦달에서 벗어나시게~ 천천히 길을 가시게나~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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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12, 2009
*.139.165.36

실존적 두려움에 완전히 벗어난 사람은 없다오.

그걸 안고 그 너머의 세계로 한발 한발 내딛을 뿐이라오.

그 발걸음이 경쾌해지면서

우리는 나비처럼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지 않겠소.

그 경지가 아득하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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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May 12, 2009
*.229.154.97

목사님, 저는 어제 설교 들으면서,

너무 감격스러웠습니다. '기독교의 정수'를 만났다고 해야 할까요?

살면서, 이렇게 귀한 만남이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우리는 비움, 낮음의 영성을 사모하지만,

정작, 예수님의 비움과, 낮아짐을 '우리를 위해서'라는 해석으로

기독교의 본질,진의를 파묻어 버리진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엘리위젤의 <깊은밤>을 읽으며)

가장 고통이 있는곳, 죽음의 자리에, 왜 하나님은 나타나셨는가,

저는 이' 하나님 현존'의 현장으로부터 '기독교의 본질'이 시작 되는 거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부활의 생명'을 풍성히 누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부활의 생명이 선취되었다는 거, 저는 이래서 더 믿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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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시와그림

May 12, 2009
*.109.57.60

값싼 감정이 아닐까 조심스럽지만 ...

내 영혼이 행복합니다!

'예수를 통한 부활생명이 궁극적 여호와이레' 라는 경이로움 앞에

우리의 모든 조야한 질문과  육안으로 쌓아가는 옹벽들이 사그라집니다

내 영혼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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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히로

May 12, 2009
*.11.176.122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 효자손으로 등을 긁는 느낌이 듭니다.

평소에 제가 했던 고민들을 설교를 통해서 심도있게 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주 목사님의 설교가 기다려 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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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0]새하늘

May 12, 2009
*.126.124.163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친히 준비하신다는 본문의 말씀에 생각의 여운을 가집니다.

모리아산에서 숫양이 나뭇가지에 걸린 것은 하나님 스스로가 준비하신 제물이라는 설교에서

이것또한 하나님의 배타적인 우리에게 향하신 사건으로 봅니다.

우리 인간의 어떠한 종교적 행위, 업적이 따라서 하나님에게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친히 준비하신 예물인 예수님을 통해 죄에서 해방되고 구원받는 '칭의'의 하나님 그 절대적인 역사의 연속성을 배웁니다.

우리가 할 수있는 행위는 오로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 할수 없음을 또한번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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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7]paul

May 12, 2009
*.32.174.125

사랑채에서 목사님 수술하신다는 글을 읽고 이 글을 읽었을때 목사님의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글에서 목사님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자식에 대한 사랑을 느끼는것 같습니다.

부디 수술이 성공적으로 잘 이루어 지도록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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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12, 2009
*.139.165.36

바울 님, 오늘 수술을 받으시는 분은 내(정용섭)가 아니라

정병선 목사님이시랍니다.

목사님이 지금 마지막 단계를 거치고 계시겠군요.

주님의 각별한 도우심이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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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beginner

May 12, 2009
*.106.156.126

결석생이라 여러 번 설교를 읽어보았습니다.

보석을 발견한 듯 마음이 환해집니다.

오늘은 무식한 질문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자식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우리는 한 번도 대립적인 것으로 생각해보지 않은 우리의 신앙이 무조건 건강한 것도 아닙니다. 라고 하셨는데 이 대목을  좀 더 설명해 주실수 있으세요?

너무 어리석은 질문인가요?

자식을 너무 사랑하는 것도 우상을 섬기는 거라던 어느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나서요.

다음 주 설교 말씀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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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12, 2009
*.139.165.36

beginner 님,

주신 질문은 이미 beginner 님이 기억하는 어느 목사님의 말씀으로 대답이 된 것 같군요.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듯이

자식과 하나님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자식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분명히 아니지요.

이건 근본적으로 생명의 주체가 누군가 하는 질문과 연결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식을 소유물로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는 곧 자식의 생명을 부모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생명의 주체가 오직 하나님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에 따르면

자식의 생명(삶)도 우리가 손을 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식을 우리의 책임으로 여기지 말고

하나님에게 온전히 맡겨야겠지요.

이런 점에서 '대립적'이라고 말한 것이지

자식 사랑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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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희망봉

May 12, 2009
*.82.136.189

절망으로 바라 볼 수 밖에 없는

아브라함의 칼날

 

쏜살처럼 다가 오는 죽음 앞에

작디 작은 존재 

 

예수를 통한 부활생명이 궁극적

`여호와 이레'임을 알게 하시니

 

긴장된 기쁨, 희망을 간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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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12, 2009
*.139.165.36

위의 대글자 님들은 모두

구도적 영성을 추구하고 있군요.

피아노 음악도 남이 억지로 주입시킬 수 없듯이

기독교 영성도 억지로 받아낼 수는 없습니다.

각자 홀로 고독하게 자신의 영적 오솔길을 내야 한답니다.

처음부터 그런 오솔길이 확 드러나지는 않겠지만

꾸준히 길을 가다보면

천천히 그 윤곽이 드러날 겁니다.

위의 대글들을 통해서 제가 많이 배웠으니

모두 저의 선생님들이군요.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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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데이비

May 13, 2009
*.133.34.186

목사님 설교 글을 읽고,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게됩니다.

 아브라함처럼 주님을 깊이있게 신뢰하는것은 아브라함처럼 그런 철저한 자기고독과 자아의 죽음에 직면했을때에야 일어났는데... 그런 일이 나에게는 오기는 할까, 세상살이 아둥바둥 살다가 영적인것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될까봐 걱정도 되고, 마음이 많이 무거워집니다. 나이가 들수록 고집만 늘고...

 보이지 않는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아득하게만 느껴집니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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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14, 2009
*.139.165.36

데이비 님,

자신의 삶 앞에서 무척 진솔한 분이시군요.

일단 자기의 영적 실존에 눈에 보인다는 것은

영적 성장의 길로 들어섰다는 증거입니다.

성서의 스승들로부터 영적인 삶을 조금씨 배워가면서

한계가 많은 우리의 삶의 전체를 주님에게 맡기면 사는 게

최선이 아닐까요?

저나 데이비 님이나 똑같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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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삶에서..

May 14, 2009
*.140.185.26

여기서 핵심은 숫양을 얻었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자신의 미래를 온전히 하나님에게 맡겼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이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도

저를 비롯해 우리들은 핵심을 놓치고 있을 때가 참 많네요

왜 그리도 숫양을 얻었다는 사실에 제 마음이 움직이는 걸까요..

그저 오늘도 한숨을 백번쯤 쉬고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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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14, 2009
*.139.165.36

삶에서 님,

한숨의 숫자와 우리의 성숙은 정비례하겠지요.

그 한숨이 자기 성찰의 표현이라고 하면요.

젊은 시절에 창조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만복의 근원이랍니다.

그 젊은 시절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마저 가물가물한 순간이 속히 온답니다.

신앙의 길을 성실하게 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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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만남과나눔

May 14, 2009
*.208.2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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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문맥에서의 아브라함의 시험

우선 왜 22장에 아브라함의 시험이 나오는가?

근접문맥으로는

21장의 이삭을 낳았다는 것과 아비멜렉에게서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는 고백을 들으며 화평의 언약을 맺음을 말한 이후에 나온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23장의 사라가 죽어 막벨라 굴을 산 일을 생각해야 한다.

 

좀 더 먼 문맥으로는

창 11장의 데라의 후예부터 계속 생각해 보아야 한다. 데라의 후예인 아브라함의 생애는 상속자 문제이다. 이삭이냐, 이스마엘이냐 하는 문제이고 이것이 21장의 아브라함의 몸에서 나는 씨인 이삭을 얻으므로 성취되었다.

12장의 아브라함의 복의 근원으로서의 언약이 주어지고 14장의 가나안 땅 전쟁에서 승리한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속한 나라를 세운다. 이 나라는 15장의 후사 문제를 이야기하며 여호와 홀로 일방 언약을 쪼갠 짐승 사이로 횃불이 지나감으로 맹세하셨다. 15장에서 상속자 문제는 집에서 길리운 자도 아니며 오직 아브라함의 몸에서 나는 자를 씨로 삼을 것임을 언약하신 것이다.

이러한 15장의 언약에 아브라함 쪽에서는 온전히 동행하지 못하여 16장의 이스마엘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같은 아브라함의 몸에서 나기는 하지만 종인 하갈의 몸에서 난 이스마엘은 상속자가 되지 못함을 말한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17장에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언약이 완전케 된다. 아브라함도 할례를 받음으로 언약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쌍방 언약이 체결되자 하나님의 천사들이 아브라함의 장막에 찾아와 함께 먹고 마시며 사라의 몸에서 날 아들을 확증하였다.

이러한 언약을 따라 이삭을 죽은 것과 방불한 늙은 사라와 아브라함의 몸에서 나게 하심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아비멜렉에게 보인 것이다. 이 후에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아브라함의 시험 문제가 22장에 나온다.

 

왜 시험하시는가? 아니 어떤 시험인가? 22:12절이 그 해답이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고로 이 시험은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여 하나님을 경외함을 알게 한 시험이다. 이 시험의 결과는 16-18절이다. 아브라함이 복을 얻어 아브라함의 씨로 번성하여 대적의 문을 얻고 천하만민이 복을 얻게 하였다.

 

이 시험의 일차적 선취는 이제 아브라함이 자기 소유로 막벨라 굴을 헷 족속에게서 산 것이다. 비로서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을 자기 소유 삼았다. 여호와의 언약이 이루어 진것이다.

 

이러한 창세기 문맥에서 우리는 22장을 해석해야 한다. 그럼 시험은 무엇인가? 가나안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시조로써 아브라함은 이 시험을 통과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함을 나타내었다. 그는 이미 죽은 몸에서 나는 아들을 얻은 후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경배하려고'(5절) 모리아 산에 올랐다. 그 경배는 번제이다. 이는 출애굽기의 번제를 생각하면 된다.

 

즉 하나님께 독자라도 아끼지 않고 드리는 경배인 번제를 통하여 아브라함은 이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레위기의 5대 제사는 항상 번제가 그 토대이다. 여호와가 계신 성전에 나아가 경배하는 자는 전부를 드리는 번제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뜰에서 먹고 마시는 교제를 누린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제사는 모리아 산의 이삭 번제가 그 근본이다. 아브라함이 시험을 통과하여 여호와께서 예비하신 어린 양을 통하여 이삭과 그의 후손이 여호와의 전에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의 복을 얻은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이레'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모든 앞날을 미리 예견하여 마련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시험을 통과한 자에게 내리시는 '예비하신' 상이다. 그 상은 이삭 대신에 어린 양을 드려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대를 가져온 것이다. 이것은 마치 국가의 장수가 왕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충성함으로 왕을 경외함을 나타내었을 때 왕께서 그를 더 가까이 불러 교제하는 모습과 같다.

 

이 일에 대한 기독론적인 해석이 이제 필요하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비취는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가 알고 그 앞에 경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삭은 죽은 몸과 방불한 아이를 생산할 수 없는 늙은 몸에서 났고 모리아산에 번제로 드려졌어도 죽었다가 다시 돌려 받은 아들은 아니다. 아브라함의 시험으로 아브라함의 자손 곧 이스라엘이 얻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교제는 짐승을 드려 짐승의 살과 피로 성전에 들어가 교제하는 생명 뿐이다.

 

이 일을 성취하사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 아들 곧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죄인을 위하여 내어주시고 우리를 구속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린 양으로 대신한 제사로 여호와를 경외하여 땅의 성소에 나아가 짐승의 고기로 먹고 마시는 교제를 누림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교제하는 생명을 얻었다.

이삭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구약의 하나님 나라는 망하고 말았지만,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하심 안에서 죽음을 이긴 생명을 상속하여 하늘 성소에 나아가는 생명의 교제를 얻었다.

 

히브리서 5:6-10절이다. '또한 이와 같이 다른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받으신 고난(시험)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케 되셨다. 이처럼 시험은 우리를 온전케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함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며 아들로서의 생명을 누리게 된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이 하나님 아들 안에서 성취되어 이제 교회는 아버지와 아들이 교제하는 생명을 얻었고 천하만민이 이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 앞에 올무를 놓아 함정에 빠지게 하는 시험을 하시지 않는다. 아들도 받으신 고난으로 온전케 되신 것처럼 우리도 시험을 당할 때 인내로써 온전케 하려는 것이다. 그 후에 예비된 상을 주실 것이다.

 

야고보서 1:2-4절이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이어서 야고보서 1:12절이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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