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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의

사순절 조회 수 27906 추천 수 2 2010.02.22 17:3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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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로마서 10:8-13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의

(롬 10:8-13)


신구약성경은 모두 구체적인 삶을 그 배경으로 해서 기록되었습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성경은 하나도 없습니다. 신비한 상징 언어로 진술된 구약의 여러 묵시문학적인 문서들이나 신약의 요한계시록도 역시 구체적인 역사에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평범한 언어로 진술된 바울의 편지는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바울이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 형식의 로마서도 그런 구체적인 삶의 배경에서 집필되었습니다. 가장 큰 배경은 유대교입니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유대교라는 영적인 배경에서 자랐으며,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탓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도 원시 기독교는 유대교를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유대교와 직간접적으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기독교가 유대교와 완전히 다른 종교로 자리를 잡았지만 초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기독교가 유대교와의 관계를 정립해야 할 미묘한 시기에 등장한 인물이 바울입니다. 그는 아주 강력하게 유대교와 전혀 다른 복음의 세계를 제시했습니다. 바울 덕분에 기독교가 유대교의 아류로 떨어지지 않게 된 셈입니다. 바울의 이런 신학적 투쟁을 알려면 유대교의 특징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율법 의, 믿음 의

유대교의 특징은 율법입니다. 유대교는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언어로 말씀을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교는 일종의 언어 종교인 셈입니다. 고대 종교 중에는 언어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종교도 많았습니다. 어떤 종교는 춤을 통해서, 또는 명상을 통해서 신을 만난다고 주장했습니다. 건축을 통해서 그걸 경험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감정과 심리와 열정에 의지하는 종교들입니다. 그런 열광적이고 신비주의적 전통은 오늘의 기독교 안에도 들어 있습니다. 기도와 찬송을 열광적으로 합니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일종의 종교적 엑스타시를 경험합니다. 유대교의 전통은 언어에 있습니다. 그 뿌리는 모세입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비롯해서 많은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 중심 내용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걸 토라라고 합니다. 크게 보면 구약성서 전체가 토라, 즉 율법입니다.

그 율법의 근본의미를 바울은 롬 10:5절에서 정확하게 제시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레위기 18:5절의 인용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가 여기서 중요합니다. 율법을 행하면 의를 얻는다, 또는 의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율법을 행한다는 게 무엇인지 다른 것은 접어두고 십계명만 생각해보십시오.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첫 계명이고,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마지막 계명입니다. 그 사이에 있는 여덟 계명도 모두 이 두 가지에 연관됩니다. 한 부류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고, 다른 부류는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지켜야 할 구체적인 내용이 모세 오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의 소가 이웃집의 밭에 들어가 농사를 망쳤을 경우에 어떻게 배상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도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이 정확하게 준수되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정의가 살아 숨 쉬는 사회가 되겠지요.

율법주의를 요즘 말로 바꾸면 법치주의입니다.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충돌을 법으로 관리하는 제도입니다. 사람은 모이면 시시비비를 따져야 할 일이 늘 일어납니다. 비가 오면 나막신 장사를 하는 아들이 울고, 날이 맑으면 우산 장사를 하는 아들이 우는 부모의 입장과 비슷합니다. 여기서 법이 필요합니다. 법이 없다면 힘으로 자기의 이익을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그런 세상은 카오스입니다. 물론 법이 이현령비현령으로, 또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방식으로 오용될 염려가 없지 않지만 법을 통해서 정의로운 공동체를 세운다는 주장은 인정해야 합니다. 현재까지 인류가 선택한 최선의 길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얻는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정당합니다. 초기 기독교도 역시 이런 생각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을 단순히 법조문에 매달리는 편협한 종교생활이라고 무시하면 곤란합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만을 염두에 두고 율법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율법의 정신을 오해한 것뿐입니다. 원래 율법은 그렇게 인간을 편협하고 독선적이게 만드는 체제가 아닙니다. 율법이라는 문자에만 매달리게 하지 않습니다. 단순한 형식주의, 행동주의, 도덕주의가 아닙니다. 율법은 믿음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가리켜 롬 10:6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고 설명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신 30:14절을 인용해서 설명합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는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입과 마음에 있다고 합니다. 우선 입으로 율법을 읽고 외워야 합니다. 입으로 하나님을 고백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듯이 율법을 입에 달고 살아야 합니다. 율법은 동시에 마음을 요구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게 합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마음에 담아 고백하듯이,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고 기도하듯이 말입니다. 바울이 인용한 신 30:14절은 율법의 실체에 대한 정확하고도 놀라운 진술입니다. 율법은 사람의 존재 전체를 사로잡는 하나님의 힘이라는 뜻입니다.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는 유대교의 전통을 바울도 그대로 인정합니다.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롬 10:9) 이런 전통에서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율법 정신의 전통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바로 초기 기독교가 유대교와 일찌감치 결별하지 않은 이유였습니다. 바울 이외의 사도들과 예수님의 동생이 여전히 유대-기독교라는 절충적 성격의 공동체를 유지한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그런 유대교와, 그리고 유대-기독교와도 선을 그었을까요?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율법의 근본정신을 그렇게도 잘 알고 있던 바울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

그 대답은 바울이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의’의 본질을 정확하게 뚫어보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바울이 볼 때 유대인들의 율법 신앙은 결국 사람의 의에 머물렀습니다. 사람이 의를 세우려고 했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의’를 우습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사람이 잘난 척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는 고상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열정으로부터 시작됩니다.(롬 10: 2)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없으면 말씀을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율법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요즘 신앙생활을 열정적으로 하는 사람들을 여기에 비추어보면 됩니다. 거의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특별한 분들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귀한 일들입니다. 바울이 볼 때 이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올바른 지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데 있었습니다.(롬 10:2b) 뭘 모르고 무조건 헌신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그것을 가리켜 바울은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롬 10:3) 그렇습니다. 보기에 좋은 것이라고 해서 모두 옳은 것은 아닙니다. 사이비 이단들에게도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있습니다. 그들이 뭘 모르고 있다는 게 문제이겠지요. 모른 채 열정적으로 행하기만 하다보면 결국 자기 의에 사로잡히게 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모르고 있는 것은 그들이 입과 마음에 담고 있는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겁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이가 어찌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있다는 말인지요. 그들이 동의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롬 10:9절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예수가 바로 구원의 길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너무나 쉬운 대답이래서 실망이신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는 그게 잘 안 됩니다. 대개는 자기 의에 묶여 있습니다. 자기 의가 힘 드는 일인데도 거기에 매달립니다. 우리가 얼마나 치열하게 자기 의에 매달리는지 우리의 일상에서도 쉽게 나타납니다. 작게는 우리의 자존심이 바로 자기 의입니다. 자존심이 조금만 손상당하는 것 같아도 우리는 격렬하게 반응합니다. 사실 자존심이 없으면 그것도 문제겠지요. 자존심 자체를 부정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결국은 자기 의로 귀결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다른 것들을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자녀를 괜찮은 인간으로 키우려는 것도 역시 엄격하게 말하면 자기 의입니다. 자녀들이 자기 뜻대로 따라주지 않으면 화가 납니다. 사업도 역시 자기 의로 작동됩니다. 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학문적인 업적으로 죽느니 사느니 합니다. 한 국가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도 자기 의가 강할 겁니다. 아무리 옆에서 말려도 자기의 뜻을 밀고 나갑니다. 요즘 정치권에서 세종시 문제로 소위 친이(李)와 친박(朴)의 대결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내가 당신보다 더 옳기’ 때문에 자기 의를 양보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소모적인 논쟁을 그치지 않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자기 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결핍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무지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무지에서 오는 사람의 자기 의를 무효처리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라고 했습니다.(롬 10:4) 하나님의 의를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의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매달릴 필요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 형제끼리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동생과 형은 서로 자기가 옳다는 논리를 댑니다. 증거를 들이밀기도 하고, 자기를 변호할 친구를 불러옵니다. 형은 동생보다 자기가 부모님의 마음을 더 깊이 헤아린다고 주장합니다. 동생도 똑같이 말합니다. 부모가 그들에게 그들의 행위를 모두 용서한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부모의 용서는 바로 하나님의 의와 같습니다. 그 앞에서는 형과 동생의 자기 변론은 무의미합니다. 실제로 누가 더 잘했는지, 또는 더 못했는지 하는 차이는 있겠지만 용서한다는 부모의 말 앞에서는 그 차이가 무의미합니다. 그런데도 그런 차이를 확인하는 일에 매달린다면 부모의 생각을 전혀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녀들이겠지요. 바울은 지금 이런 연민의 심정으로 유대인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왜 이미 끝난 자기 의를 붙잡고 하나님의 의를 외면하느냐, 하고 말입니다.   


만인 구원(?)

자기 의와 하나님의 의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의만 설명하면 자기 의는 저절로 설명이 될 겁니다. 바울은 그것을 롬 10: 11과 13절에서 구약성경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사 28:16)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욜 2:32) ‘누구든지’라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의를 얼마나 실천했는지, 얼마나 교양이 있는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 하는 차별이 없다는 뜻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롬 10:10) 바울은 이어서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셨다고 합니다. 놀라운 고백입니다.

바울은 율법주의의 모순과 한계를 알았습니다. 자기 의가 아무리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구약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뜻과 상충된다는 사실을 꿰뚫어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차별이 없는데 율법은 차별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차별 없이 사람을 보시는 원래의 하나님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누구든지’의 신앙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아무런 차별이 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나 다니지 않는 사람이나 차별이 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구원에 대한 혁명적인 시각의 전환입니다.

물론 여기에도 단서가 있습니다. ‘그를 믿는 자’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만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니냐 하고 생각할 겁니다. 여기에도 차별이 있는 거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결국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 생각이 잘못 된 거는 아니지만 충분한 거는 아닙니다. 왜 그런지 두 가지 방향만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이미 바울이 말한 것인데, 구원자는 한 분이며, 그분이 모든 사람의 구원자라는 사실입니다. 인류와 세계 전체를 구원하실 분은 한 분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가 주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걸 보편적인 진리의 차원에서 변증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런 변증을 위해서라도, 이는 곧 선교 책임인데, 우리는 교회 밖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구원으로부터 밀쳐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은 바로 그들에게도 주님이십니다. 한 분이신 바로 그분이 그들까지 구원하십니다. ‘누구든지’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는 바로 교회 안의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도이십니다. 무슨 말인가요?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은 교회 안의 사람만이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까지 포함한 만인의 구원이 가능한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 모두 사순절 첫 주일에 이 사실을 기뻐 찬양합시다.(사순절 첫째 주일, 2월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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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9]이선영

February 22, 2010
*.164.231.24

설교를 들으며  며칠전 동대구역에서 본 노숙자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자기의에 집중할 수 없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의에 속한 사람들이네요.

우리가 자기의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무지때문이라고요.

그 무지때문에  자기의에 휩싸여 살았지만 조금은 길이 보여요.

자기의에서 벗어나는 길은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의다 '라는 사실이 말하는

깊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이요.

교회밖의 사람들을 포함해 우리가 같은 자리에 있기조차 꺼려 하는 노숙자들과

개미와 낙동강 보 공사로 베여나간 나무들까지도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의는 정말 놀랍습니다.

목사님, 놀라운 복음을 맛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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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3, 2010
*.120.170.243

이선영 선생이 조금의 길이 보인다니,

앞으로 그 길이 더 확연하게 열리게 될 것 같소.

나는 이 대글을 마치고 달성보로 나가야 한다네.

오늘 생명평화 순례 모임이 거기서 시작되거든.

이 선생도 자연과 똑같은 꼬마들을 잘 보살피며

오늘 하루를 잘 살아보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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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3]웃겨

February 22, 2010
*.153.115.91

자기의가 "작게"는 자존심이라고 하셨는데

"작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조금만 자존심이 상해도 삐지고, 불에 덴 것 처럼 펄펄뛰고,

복수의 칼날을 갈고... 

미련한 우리들의 모습이지요.

하느님의 의의 빛에 감싸일수록 나는 작아지고... 내 힘은 빠져야 하는 것을.

근간에 조금씩 조금씩 깨달아지던 터였는데

이번 설교에서 말씀을 해 주셔서 반가왔습니다.

누누히 말씀 하시던 자기집중과도 연결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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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3, 2010
*.120.170.243

ㅎㅎ 김혜란 님은

자존심이 강하신가 보군요.

제 경험으로는

그걸 억지로 뽑아내기는 힘들더라구요.

김혜란 님이 짚은대로

하나님의 빛이 들어온 것만큼

'나'의 영역이 줄어들던데요.

오늘은 오랜 만에 낙동강변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강을 그냥 좀 내버려둘 수 없는건가, 하는

우리 몇몇 목사들의 생각을 모아보는 시간을 갖기로 한 거지요.

좋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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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문경만

February 24, 2010
*.63.219.187

궁금해서 댓글 올립니다.

누구든지.....광의적 표현,

누구든지 예수믿으면.....조건절

이렇게 생각하면 문자적,또는 문자주의 가 돼나요?

아니면,

문법의 틀로인한 어지럼증인가요?

아니면,

2가지 큰 그림를 직관으로 보아야 하나요.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누구든지에게 미치는 넓은 사랑이고,

하나는 예수믿으면 이라는 기독론의 입장을 표현한 것이고,

문자나 문법을 넘어,

조건절을 넘어,

건강하게 해석돼는,

생명의 세계를 경험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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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4, 2010
*.120.170.243

문경만 님,

신학을 문장 구조론으로 재생산하셨네요.

재미 있습니다.

문자, 문법, 조건절을 넘어서

하나님의 큰 긍정의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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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아름드리

February 24, 2010
*.144.103.87

목사님,

귀한 설교 감사합니다.

율법을 통해 자기 의에 빠지게 되고 마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설명에 공감합니다.

 

그런데 설교 끝부분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아무런 차별이 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나 다니지 않는 사람이나 차별이 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라고 하셨는데,

 

유대인과 헬라인을 차별하지 않는 복음의 진리를

교회에 다니는 사람과 아닌 사람도 차별 없이 구원받는다고 하신 것은 본문의 뜻을 넘어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있던 유대 그리스도인이나 이방계 그리스도인에게  편지를 쓰면서,

기독교 신앙공동체(교회)에 속하지 않으려는 자들에게도

복음을 통한 구원을 전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또한 목사님의 표현이 이 시대의 평범한 그리스도 신앙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를 믿는 자",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서 나타난

주님에 대한 신앙과 예수님을 주인이라고 고백하는(삶으로 표현하는) 쪽에

구원의 방점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타종교에 "주"의 다른 이름을 부르거나

그걸 추구하는 다른 전통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여기서 고려하지 않고 질문드렸습니다.

 

매번 좋은 답변에 감사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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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5, 2010
*.120.170.243

아름드리 님,

중요한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군요.

1. 유대인과 헬라인 운운을 교회 밖의 구원으로 확장하는 것은

비약이 아니냐, 하는 질문이시지요?

듣고 보니 그렇게 보입니다.

그래서 저도 설교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배타성을 받아들인다고 말했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도 구원받는다는 말을 한 이유는

한국교회 안에서 교회에 구원의 주도권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석의 차원에서 말씀드린다면

지금 바울은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와 투쟁하는 중이라는 거에요.

율법주의의 근본은 유대인과 헬라인을 차별하는 거구요.

율법주의를 극복한다는 것은 곧 이런 차별을 넘어선다는 거구요.

이걸 강조하는 뜻으로 교회 밖의 구원을 말한 겁니다.

2. 바울이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게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물론 그렇겠지요.

저도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설교를 한 거는 아니에요.

교회 안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의가

얼마나 절대적이고, 우주론적이고, 비차별적인가를 말한 것뿐이지요.

마지막으로, 그렇다 하더라도

교회 밖의 구원을 본문에서 거론하는 것은

평범한 신앙을 추구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옳은 지적입니다.

오해가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좋은 지적과 질문에 감사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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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4 기타 야곱의 하나님 체험 [1] [1] 2004-07-02 12131
1023 기타 종말론적인 삶 (벧전 4:1-11) [1] 2004-07-02 11918
1022 기타 은폐와 노출 [3] 2004-07-02 11632
1021 기타 부자 이야기 [2] 2004-07-02 13968
1020 기타 흔들리지 않는 터전 [1] 2004-07-02 11646
1019 기타 자기 의와 은총 [1] 2004-07-02 11542
1018 기타 언어의 집 [1] 2004-07-02 9323
1017 기타 내면적 삶이란? [1] [1] 2004-07-02 9322
1016 기타 삶으로서의 예배 [1] 2004-07-02 9845
1015 기타 말의 구원론적 능력 [1] 2004-07-02 12009
1014 기타 불평을 넘어서 존재의 기쁨으로 [1] 2004-07-02 9538
1013 기타 주님의 재림과 생명의 완성 [1] 2004-07-02 9538
1012 기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 2004-07-02 10406
1011 기타 세례요한의 질문 [1] 2004-07-02 13806
1010 기타 이사야의 구원신탁 2004-07-02 11523
1009 성탄절 마리아의 노래 (눅 1:46-56) [1] 2004-07-02 12409
1008 기타 삶의 지혜를 넘어서 [1] 2004-07-02 10786
1007 기타 기쁨과 사랑의 역학관계 [1] 2004-07-02 10129
1006 기타 자유를 향한 길에 서서 [1] 2004-07-02 10951
1005 기타 사울의 어리석음 [1] 2004-07-02 12293
1004 기타 막힘에서 열림으로! 2004-07-02 12292
1003 기타 구름 타고 오십니다. 2004-07-02 11399
1002 기타 야훼의 진노와 모세의 기도 [1] 2004-07-02 11574
1001 기타 예수님을 먹다 [1] 2004-07-02 12983
1000 기타 땅을 묵혀라! 2004-07-02 11275
999 기타 마술과 신앙 2004-07-02 10760
998 기타 세계의 토대 2004-07-02 12142
997 기타 야훼의 자기 증거 2004-07-02 11387
996 기타 운명과 자유 2004-07-02 10431
995 기타 본질의 변질 2004-07-02 10495
994 기타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힘 2004-07-02 12073
993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10045
992 기타 노동하는 인간(1) 2004-07-02 9516
991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10018
990 기타 영광의 경험 [3] 2004-07-02 9367
989 기타 노동하는 인간(2) [2] 2004-07-02 8987
988 기타 무엇이 진실한 예배인가? [1] 2004-07-02 9764
987 기타 수행으로서의 신앙생활 [1] [1] 2004-07-02 8595
986 기타 돌무더기에 얽힌 사연 [1] 2004-07-02 9678
985 기타 메시아적 행위와 교회 [1] 2004-07-02 9386
984 기타 사랑이란 무엇인가? [1] 2004-07-02 15451
983 기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1] 2004-07-05 9316
982 기타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1] 2004-07-11 9600
981 기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2004-07-18 9656
980 기타 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2004-07-25 9326
979 기타 말씀 망각의 심판, (8월1일) 2004-08-05 8577
978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2838
977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717
976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392
975 기타 평화를 위한 분열, 8월29일 [5] 2004-08-30 8464
974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428
973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9154
972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921
971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271
970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328
969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288
968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164
967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663
966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347
965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278
964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362
963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9055
962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415
961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125
960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8936
959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502
958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625
957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642
956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465
955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3028
954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609
953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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