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1

흔들리지 않는 터전

기타 조회 수 11634 추천 수 38 2004.07.02 15:39:48
성경본문 : 시편 93:1-5 



흔들리지 않는 터전

시 93:1-5

오늘 시편 기자는 시인으로서의 특성을 여지없이 보여줍니다. 1절만
보더라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야훼께서 위엄을 옷으로 입으시고
왕위에 오르셨다. 야훼께서 그 위엄 위에 능력을 띠삼아 동이셨다." 만약
이런 표현을 보고 하나님을 어떤 나라의 왕처럼 생각한다면 크게 오해하
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권위를 이런 방식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고대인들에게는 왕
의 제관식이 가장 권위 있는 행사였으니까요. 시편기자는 하나님이 '위
엄'을 옷으로 입으셨다고 합니다. 위엄이 있는 분 앞에 가면 모든 사람들
은 자기를 낮추어야만 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
야만 합니다. 그런데 야훼 하나님은 위엄이라는 옷 위에 '능력'이라는 띠
를 동이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위엄'과 '능력'을 동시에 갖고 있
는 분으로서 절대적인 권위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 장면이 그림처럼
우리 머리 속에 그려집니다. 그런데 위엄과 능력으로 옷과 띠를 삼은 존
재는 실제로 어떤 분일까요?

세상과 하나님
시편 기자는 우선 위엄과 능력의 하나님이 이 세상을 흔들리지 않게
세우셨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토대가 아주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이렇
듯 흔들리지 않는 세상은 "처음부터 당신은 야훼시옵니다"는 명제와 맞
물려 있습니다. 이 세상의 흔들리지 않는 토대를 곧 하나님의 능력으로
본 것입니다.
성서 기자들은 이 세상을 하나님과 깊은 연관성 가운데서 바라보았
습니다. 이 세상의 깊이를 보면서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
입니다. 물론 다른 종교나 철학도 역시 이 세상에 대한 이해를 그 바탕에
놓고 자신들의 사유체계를 세워나갔습니다. 과연 이 세상은 무엇일까
요? 이 세상의 토대는 무엇일까요? 우선 오늘 성서 본문이 기록된 고대
인들의 시각으로 이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
달하고 문명이 발전했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은 변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3천년 전 고대인들이나 오늘 우리나 세상을 보는 직관은 크게 다르지 않
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약간 철학적인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
러나 철학이라는 게 별 대단한 학문이 아니라 이 세상과 자기를 있는 그
대로 바라보는 데부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세상'이
라는 성서 기자의 설명도 역시 철학적 사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크게는 우주가 있고, 작게는 이 지
구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생명현상과 어떤 사물들이 있습니다. 민들레,
사슴, 모기가 있습니다. 안개가 있고 구름이 있고 바람이 있습니다. 아주
가깝게는 인간이 있고 친구가 있고, 교회도 있고, 학교도 있습니다. 이런
'있는' 것들을 크게 구분하면 생명과 비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는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으로 구분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있
다'고 하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왜 나무가 이 지구에 있어
야만 하는 것일까요? 더 나아가서 우리는 이렇게도 질문해야 합니다. 왜
어떤 것들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고 어떤 것들은 새롭게 등장하는 걸까
요? 지금도 하루에 수십 종의 종들이 지구에서 사라진다고 합니다. 왜
그런 것들은 그렇게 잠시 있다가 없어져야만 하는 걸까요? 잠시 동안 이
땅에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것들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실
이런 질문은 끝없이 이어집니다. 질문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말은 이
에 대한 실증적인 대답이 아직 없다는 뜻입니다.
만약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믿는다면
이 세상에 대해서 좀더 근본적으로 성실한 질문을 파고들어야 합니다.
예컨대 아주 뛰어난 도공을 알려고 한다면 그가 만든 질그릇을 연구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은 어떤 사
물로 존재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만든 세상을 깊이 인식하는 것
은 하나님을 아는 가장 핵심적인 길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기독교인
들은 단순히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사실만 주장할 뿐이지 세상 자
체에 대한 관심은 없습니다. 이런 현상은 기독교 안에서 두 극단으로 나
타납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입장입니다. 가시적
인 이 세상보다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 치우쳐서 살아가는 태도를
말합니다. 한국의 기독교에는 이런 신앙적 특성이 뿌리깊습니다. 다른
하나는 세상을 이용하는 입장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 세상을 다스
릴 권한을 주셨기 때문에 이 세상을 이용해서 행복하게 살아보겠다는 생
각입니다. 오늘의 기술문명은 이런 사고방식에서 출발했다고 보아야 합
니다. 최근 우리 한국교회 안에 점차 큰 세력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신앙
형태도 이와 비슷합니다. 소위 '청부론'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런 신앙유
형은 외면적으로는 깨끗한 재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
다고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철저하게 자본중심의 이 세계사적 흐름에 편
승해서 즐겁게 살아가려는 현대인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도피하거나, 아니면 적당한 윤리적 체계를 통해서 세상을 이
용하겠다는 양자 모두 바른 길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을
우리가 외면한다면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다는 말이 되고, 이 세상을 이
용하는 데만 마음을 둔다면 하나님의 행위를 천박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당신의 왕좌는 처음부터 요지부동이오니"(2절)라는 구절과 연결시켜본
다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왕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바로 하나
님 자체는 아니지만 하나님이 거하는, 즉 위엄과 능력으로 이 세상에 토
대를 놓으시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을 삶의 근거로 믿고 사는 사
람들이라면 마땅히 세상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흔들리는 자연
오늘 시편기자는 왜 "세상을 흔들리지 않게 든든히 세우셨다"고 노래
하는 걸까요? 이 사실이 누구에게나 명확하다면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
습니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세상의 토대가 흔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3절이 이렇게 이어집니다. "물결소리 높습니다! 야훼여, 강물소
리 술렁댑니다. 서로 부딪치며 광란합니다."
시편 기자는 무슨 현상을 보고 이렇게 노래합니까? 4절에는 '몸부림
치는 바다소리'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홍수나 화산폭발 현상
앞에서 큰 두려움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런 자연현상을 훤히 내다보고
있는 현대인들도 뜻하지 않는 자연재해 앞에서 두려워하는 데 하물며 3
천년 전이야 오죽했겠습니까? 이런 두려움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신화 형식을 통해서 자
주 등장했습니다. 창세기의 노아 홍수도 역시 이런 신화에 영향을 받았
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지 않고 지나기 때문에 그렇지 지구를 중심으
로 한 자연 현상을 진지하게 들어야본다면 오늘 시편기자가 고백하듯이
그것들이 "서로 부딪치며 광란한다"는 묘사에 동감할 것입니다. 한 두가
만 지적해 볼까요? 지구에는 정기적으로 빙하기가 찾아오는데, 지금은
다행히 간빙기에 해당됩니다. 빙하기가 시작되면 지구 표면의 대부분이
얼음으로 뒤덮이게 될 것입니다. 운이 좋으면 적도 부근만 겨우 추위에
강한 생명체가 살아남을 수 있겠지요. 뿐만 아니라 지구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혜성이 지구와 충돌하는 경우에는 비록 지구가 반조각이 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는 땅이 되고 말 것입
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재앙만이 우리 삶의 토대를 위협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 스스로 이 지구를 흔들고 있다는 사실
이 실제적으로 훨씬 위험합니다. 지금의 속도로 자동차가 계속 늘어난다
면 당연히 대기권 안의 산소가 줄어들겠지요. 현재까지는 그래도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있는 대기의 가스 분포 상황이 허물어진다면 가장
먼저 인간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오
존층 붕괴가 먼저 일어날 것 같습니다. 태양 빛이 오존층에 의해서 일단
걸러지지 않고 몽땅 지표에까지 도달하게 된다면 인간을 중심으로 한 이
생명계가 어떤 위험에 노출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습니다.

흔들리는 삶의 질서
시편기자는 위에서 말한 자연의 소용돌이만 두렵게 생각한 게 아닙
니다. 고대시대는 정치권력이 인간의 생사여탈권을 완전히 소유하고 있
었는데, 그런 힘들은 과연 두려운 존재들이었습니다. 지금 시편기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집단을 '많고 많은 물결소리'라고 표현하는지는 정확하
게 알 수 없습니다. 다윗이 활동하고 있는 그 시대의 일인지 아니면 북이
스라엘과 남유다가 앗시리아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던 그 시대의
일인지 말입니다. 또는 남북이스라엘 모두를 포함해서 민중들을 포악하
게 대했던 왕들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시편 94편을 93편과 연장성 속에
서 읽어야만 할 필요는 없지만 시편기자들의 상황과 생각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참고로 삼을 수는 있습니다. 94편 1,2절은 이렇습니다. "복수의
하느님, 야훼여, 복수의 하느님, 나타나소서. 일어나소서, 세상을 재판하
시오 교만한 자에게 마땅한 벌을 내리소서." 교만한 자는 자연적 재앙처
럼 사람들의 삶을 파괴합니다. 성서시대는 이런 교만한 왕과 제국들이
패권을 마음대로 행사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성서기자들은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간접적으로 그들을 비판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
했습니다. 이런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순식간에 파괴해버리는 자연재앙과 비슷했습니다. 예언자와 시편기자들
은 그들의 악한 힘을 명확하게 보았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역사인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서는 인간의 역사를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
가든지 자기의 신앙만 올바로 이끌어 가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
다. 이 세상이 교만한 자들에 의해서 훼손당하도록 방치하지 않습니다.
간혹 기독교 신자들 중에서는 개인 신앙에만 치우쳐서 세상이 어떻게 되
든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역사에 참여하는
것은 사회 운동가들이 해야 할 일이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기독교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역사를 변혁시킬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일종의 역사 낙관주의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한쪽
은 정치투쟁을 통해서 이 사회를 명실상부하게 민주화시켜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옳은 말이긴 하지만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이렇게 정
의와 평화를 일으키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한쪽은 기독교인들의 도덕성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
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적인 사회
가 되었다고 해서 이 역사가 완성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역사는 종말
론적으로 완결될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이전까지 우리가 하는 일들은 아
무리 철저했다고 하더라도 잠정적인 성격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터전
시편기자는 자연적 재앙과 정치 권력의 횡포가 아무리 두려움의 대
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세상의 터전이 결코 흔들리지 않는
다고 믿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세상을 흔들리지 않게 든든히 세
우셨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왕좌는 처음부터 '요지부동'입니다(2절).
또한 "높은 데 계신 야훼는 더 세십니다. 몸부림치는 바다소리보다 세시
고 많고 많은 물결소리보다 더 세십니다."(4절). 이게 곧 우리가 시편기
자에게서 배워야할 신앙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의 악한 힘들이 요동친다
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세상의 기초이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입
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오늘의 극단적인 생태론자들과 상당한 부분에서
생각을 같이 하면서도 동시에 그들과 다르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은 비교적 비관론에 기울어져 있지만 나는 궁극적으로 낙관론자이기 때
문입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별은 이 우
주 가운데서 이 지구뿐입니다. 태양처럼 위성을 갖고 있는 별이 없을뿐
더러 설령 위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구와 같은 환경이 주어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지구와 똑같은 환경을 가진 위성이 있다고 하
더라도 실제로 유기물의 생성 자체가 거의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현재
지구에서 벌어지는 정도의 생명현상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합니
다. 왜냐하면 과학적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이 생명현상은 우연과 우연의
결합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지 이렇게
귀중한 지구가 생태적으로 위기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
로 바꿔나가야 한다는 데에는 생태학자들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비록 인간이 그런 과잉생산과 과잉소비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근본적으로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지는 때가 온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알
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 생명현상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십
년 동안 서울시민의 쓰레기를 모았던 난지도가 쓰레기 투입이 끝나고 나
니까 몇 년 후에 생태적으로 되살아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지
구는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놀라운 생명 복원력을 갖고 있
는 것 같습니다. 극단적으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짐승들이 멸종당한다
고 하더라도, 다시 미생물로부터 새로운 진화의 과정이 전개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상태까지 이르지 않도록 우리가 이 지구의 생태적
조건을 보호하고 유지시켜야 마땅하지만, 인간의 욕심이 그것을 감당하
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하나님은 이 세상의 터전을 지켜내십니다.
"세상을 흔들리지 않게 든든히 세우셨다"는 시편기자의 주장을 나는 받
아들입니다.

역사의 주인
이런 신앙은 인간의 역사에까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서로 부딪치
며 광란하는' 이 세상의 교만한 권력은 아무리 요동친다고 하더라도 하
나님이 세우신 이 세상, 그리고 그 역사를 허물지 못합니다. 이런 시편기
자의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저는 역사 낙관주의자입니다. 단지 이
세상의 역사를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 유토피아로 건설할 수 있다는 차원
이 아니라 세상의 터전을 세우신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점에서 낙관주의
자입니다.
1990년 대 초 동구의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된 다음에 세계질서가 훨
씬 정의롭지 못한 쪽으로 발전해나가는 것 같아서 심기가 편치 않습니
다. 경제 문제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국가 사이에, 개인과 개인 사이에
빈부격차는 심해집니다. 모든 사람들이 경제적 이익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이런 현상의 표본이라는 점에서 더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이렇게 흔들리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역사
의 주인이라고 한다면 이런 부끄러운 역사를 그대로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경제의 바른 질서가 세워질 것입니
다.
요즘 미국의 행태를 보면서 오늘 시편에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물결
소리, 강물소리, 광란을 보고 듣는 것 같습니다. 이라크 땅을 아무리 뒤
져도 대량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처음 이라크 전쟁을
일으킬 때에 내세웠던 명분이 헛것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면 마땅
히 국제사회 앞에서 용서를 구하고 물러서야 하는데, 추후적으로 국제사
회의 공인을 얻어내는 데만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유엔의
안보리가 미국에게 밉보이기 싫다는 생각인지, 아니면 이미 엎지르진 물
이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피해를 최소화해야겠다는 생각인지 이라크 전
후복구 계획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세계사의 한 페이
지는 정리될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미국의 이런 힘이 먹혀든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흔들리지 않게 든든히 세우신 하
나님은 다른 방식으로 이 역사를 바르게 세워나가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몸부림치는 바다소리보다' 세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너무 막연한 것 아니냐,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
다. 모든 문제를 하나님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무
책임한 발언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은 역사를 방기하는 게 아니
라 철저한 참여를 전제합니다. 모두가 두려워하고 무력감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이 바로 세워나가시는 역사를 뚜렷하게 인식하고 희망하고 거
기에 참여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흔들리지 않게 든든히 세우신
다'는 시편기자의 고백은 역사를 외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철저하게
참여하는 자의 외침입니다. 또한 역사의 궁극적인 승리자는 교만한, 몇
몇 권력자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호소이자 예언입니다.
오늘 시편기자는 하나님이 위엄과 능력으로 옷을 입으셨다고 설명합
니다. 그 위엄과 능력은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힘입니다. 베들레
헴 말구유의 한 아기를 메시아로 일으켜 세운 힘입니다. 십자가에 처형
당한 분을 죽은 자로부터 부활시킨 그 능력입니다. 바로 이런 분이 우리
삶을 지켜주십니다. 우리 삶의 터전은 결국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2003.10.19>


profile

[레벨:13]토토

May 21, 2007
*.158.162.38

MP3로 인한 가요시장 위축이 좋은 점도 있는것 같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sort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9663
1051 기타 무엇을 기다리는가? [3] [2] 2004-06-14 19924
1050 기타 기도와 말씀 선포 [6] [2] 2004-06-30 15168
1049 기타 신앙의 외면과 내면 (빌 2:14~18) [1] 2004-06-30 14405
1048 기타 하나님을 알자 [4] 2004-06-30 18111
1047 기타 낯섬의 출처 2004-06-30 12722
1046 기타 수군대는 사람들 2004-06-30 13968
1045 기타 숨겨진 미래를 기다림 2004-06-30 12063
1044 기타 빛과 어두움 [3] 2004-06-30 15278
1043 기타 영적인 삶과 이성적인 예배 (롬 12:1, 2) [2] 2004-06-30 15498
1042 기타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막 9:14-29) [2] 2004-06-30 14380
1041 기타 세계, 계시, 하나님 (겔 39:25-29) [1] 2004-07-02 11424
1040 기타 종교와 철학을 넘어서 (고전 1:22-25) 2004-07-02 10573
1039 기타 예수의 권위 (막 1:21~28), 2003.6.1 2004-07-02 13528
1038 기타 언어의 한계와 존재론적 능력 (행 2:1-13) [8] 2004-07-02 10637
1037 기타 삶의 중심 2004-07-02 13100
1036 기타 용서의 능력 [1] 2004-07-02 17725
1035 기타 영적인 인식론 [2] [1] 2004-07-02 12718
1034 기타 두려움을 넘어서 [3] [2] 2004-07-02 11665
1033 기타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 [1] 2004-07-02 12392
1032 기타 우상과 귀걸이 [1] 2004-07-02 16265
1031 기타 평화와 두려움 [1] 2004-07-02 14030
1030 기타 하나님 나라의 통치방식 [1] 2004-07-02 14955
1029 기타 낡은 것과 새것 (고후 5:16-21) [2] 2004-07-02 18440
1028 기타 이스라엘의 고집 [1] 2004-07-02 13727
1027 기타 자유로움의 세계로! [2] [1] 2004-07-02 12637
1026 기타 비뚤게 보기와 바로 보기 [1] [1] 2004-07-02 12450
1025 기타 하나님의 나라와 영의 나라 [4] [1] 2004-07-02 12995
1024 기타 생명을 얻는 길 [1] [1] 2004-07-02 13273
1023 기타 야곱의 하나님 체험 [1] [1] 2004-07-02 12115
1022 기타 종말론적인 삶 (벧전 4:1-11) [1] 2004-07-02 11897
1021 기타 은폐와 노출 [3] 2004-07-02 11616
1020 기타 부자 이야기 [2] 2004-07-02 13950
» 기타 흔들리지 않는 터전 [1] 2004-07-02 11634
1018 기타 자기 의와 은총 [1] 2004-07-02 11521
1017 기타 언어의 집 [1] 2004-07-02 9304
1016 기타 내면적 삶이란? [1] [1] 2004-07-02 9305
1015 기타 삶으로서의 예배 [1] 2004-07-02 9828
1014 기타 말의 구원론적 능력 [1] 2004-07-02 11986
1013 기타 불평을 넘어서 존재의 기쁨으로 [1] 2004-07-02 9512
1012 기타 주님의 재림과 생명의 완성 [1] 2004-07-02 9524
1011 기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 2004-07-02 10383
1010 기타 세례요한의 질문 [1] 2004-07-02 13795
1009 기타 이사야의 구원신탁 2004-07-02 11511
1008 성탄절 마리아의 노래 (눅 1:46-56) [1] 2004-07-02 12383
1007 기타 삶의 지혜를 넘어서 [1] 2004-07-02 10768
1006 기타 기쁨과 사랑의 역학관계 [1] 2004-07-02 10118
1005 기타 자유를 향한 길에 서서 [1] 2004-07-02 10940
1004 기타 사울의 어리석음 [1] 2004-07-02 12281
1003 기타 막힘에서 열림으로! 2004-07-02 12279
1002 기타 구름 타고 오십니다. 2004-07-02 11388
1001 기타 야훼의 진노와 모세의 기도 [1] 2004-07-02 11554
1000 기타 예수님을 먹다 [1] 2004-07-02 12954
999 기타 땅을 묵혀라! 2004-07-02 11262
998 기타 마술과 신앙 2004-07-02 10745
997 기타 세계의 토대 2004-07-02 12128
996 기타 야훼의 자기 증거 2004-07-02 11370
995 기타 운명과 자유 2004-07-02 10408
994 기타 본질의 변질 2004-07-02 10474
993 기타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힘 2004-07-02 12053
992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10025
991 기타 노동하는 인간(1) 2004-07-02 9492
990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9988
989 기타 영광의 경험 [3] 2004-07-02 9345
988 기타 노동하는 인간(2) [2] 2004-07-02 8966
987 기타 무엇이 진실한 예배인가? [1] 2004-07-02 9738
986 기타 수행으로서의 신앙생활 [1] [1] 2004-07-02 8569
985 기타 돌무더기에 얽힌 사연 [1] 2004-07-02 9652
984 기타 메시아적 행위와 교회 [1] 2004-07-02 9370
983 기타 사랑이란 무엇인가? [1] 2004-07-02 15429
982 기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1] 2004-07-05 9293
981 기타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1] 2004-07-11 9585
980 기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2004-07-18 9646
979 기타 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2004-07-25 9306
978 기타 말씀 망각의 심판, (8월1일) 2004-08-05 8559
977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2828
976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708
975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371
974 기타 평화를 위한 분열, 8월29일 [5] 2004-08-30 8446
973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407
972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9127
971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902
970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253
969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310
968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264
967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155
966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647
965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318
964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250
963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346
962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9035
961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401
960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106
959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8920
958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484
957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611
956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629
955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445
954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3011
953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593
952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1045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