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2

사랑이란 무엇인가?

기타 조회 수 15454 추천 수 23 2004.07.02 16:40:34
성경본문 : 요한일서 4:7-12 

사랑이란 무엇인가?
요일 4:7-12

오늘 우리와 마찬가지로 요한 공동체도 역시 자체적으로 풀어야할 많은 숙제들을 안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신학적으로 여러 의견들이 분분한 상태인데 아직 기독교 교리가 확실한 체계를 갖추지 못한 초
기 기독교에서 충돌이 일어났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중심적인 논란거리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완전한 신이라고 한다면 인간성은 포
기되어야 하며, 인간성을 강조하면 신성이 약화될 수 있었습니다. 이 문제는 4세기 니케아-콘스탄티노
플 종교회의에서 "예수는 완전한 신이며, 완전한 인간"이라는 명제로 정리되었고, 그 과정에서 예수님
의 신성만 강조하는 이들과 반대로 인성만 강조하는 이들은 결국 이단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러나 요한
서신을 비롯해서 신약성서가 기록되던 시기에는 그들이 매우 큰 세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
면 예수님이 신이며 동시에 인간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이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을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인간 예수님에게 계시되었다는 사실을 해명함으로써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간접적으로 증명
합니다. 그 매개는 '사랑'입니다. 요한이 정의하는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중심으로 한
초기 기독교의 논란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랑을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한은 8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했습니다. 16절에도 똑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이런 말
은 매우 아름답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추상적일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 신앙을 위태
롭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 명제가 추상적인 이유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그냥 좋아하는 것, 보고싶은 것, 그래서 소유하고 싶은 것
이 사랑일까요? 사랑에 대한 개념 정리도 천차만별이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도 역시 천차만
별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추상적일 수 있습니다.
이 명제가 기독교 신앙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이유는 자칫 하나님을 인간 관계 안으로 축소시킬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미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7절)라는 말씀이나, 뒷 부
분으로 가면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은 걸 보면 이렇게 사람끼리 사랑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라
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조금 조심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 사이의 사랑
으로 나타난다는 말은 옳지만 그 역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형제 사랑은 하나님이 나타나는 여러
계시 중의 하나이지 유일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사랑'을 규범적 윤리로 받아들입니다. 아무리 힘이 들고, 억울하게 생각되
더라도 사랑하자고 말합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이대면서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오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과 십리를 함께 가고, 겉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속옷까지 주라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요구 앞에서 우리는 몇 가지로 반응합니다. 첫째는 이런 말씀을
단지 비유로만 간주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 말씀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늘 마음의 부담
으로 느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셋째는 약간씩 사랑을 실천하면서 흡사 이 말씀에 충실한 것처럼 착각
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실제로 자기의 모든 삶을 부정하고 희생하면서 자학적으로 이 말씀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네 가지 반응에서 우리가 선택할만한 것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실제로 마더 데레사 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불행한 사람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런 태도로는 기업을
운영할 수도 없고, 예술에 참여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적당하게 자선을 베풀면서 자위하거나
또는 끊임없이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도 기독교 신앙이 근본적으로 자유와 해방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별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런 여러 태도는 흡사 충효사상처럼 '사랑'을 규범으로 간주하는 데서 벌
어지는 삶의 왜곡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사랑은 생명이다
요한은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는 그분
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생명을 얻게 하는 게 곧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욕망대로 행동하면서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어린 소녀가 첫사랑에 빠질 때 느끼는 것 같은 열망 말입니다. 그런
욕망과 열망은 강하면 강할수록 인간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기보다는 파괴하는 쪽으로 나가기 쉽습니다.
간혹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동반 자살하는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욕망이 자식을 파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안타깝지만 교회의 신앙생활도 그런 경향을 보
입니다. 자기의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어떤 목사님은 교회 때문에
눈물을 흘려보았는가, 하고 감정적으로 접근합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에서 사랑이 감상주의적 차원으로 다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성의 특징이라 할 '한'에 이런 '센티멘털리즘'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정치,
사회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신앙생활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문제를 감상적 차원에서만 접근하고 있습
니다. 이런 경향을 좋게 보면 '신바람'이라거나 '흥'이 난다고 볼 수 있지만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면
'냄비근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늘 합리성과 이성에 의해서 냉정하게 행동하는 게 무조건 좋
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무리 감정과 낭만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그런 요소도 결국 이성과 합리의 바탕
에서 추구되어야만 삶이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요한을 비롯해서 신약성서는 기독교 신앙을 감정을 중심으로 한 열광주의 범주에서 다루지 않고, 다
룬다고 하더라도 아주 부분적으로만 다루고, 근본적으로 매우 논리적으로 제시합니다. 즉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가 말하려는 모든 교리의 핵심이
놓여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졌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곧 하나
님의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이 주어졌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생명은 산다, 살아있다는 뜻입니
다. 그 반대는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떤 숭고한 인간의 행위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당
장 내일 죽는 사람에게 이 세상의 모든 재물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재물이 그를 살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서로 아픔을 나누고 실제로 서
로 도우면 살아가야 하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를 죽음의 운명에서 건져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죽을 운명에서 살리신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그를 믿는 자들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죽는다고 하더라도 다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믿습니다. 그를 통한 생명이야말로 참된 사랑입니다. 인간들의 달콤하고, 그러나 추상적인 사랑이 아니
라 구체적이고 확실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이야말로 사랑의 리얼리티라고 한다면 사랑은 곧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행위이며 그분의 능력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외아들이시며 하나님으로부
터 보냄을 받을 분이기 때문에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발생한 생명과 사랑은 곧 하나님의 능력이라
는 말씀입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
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결국 요한이 말하는 사랑은 인간의 소유이거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
님의 능력이며, 바로 그 하나님의 존재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억지로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먹은 대
로 다룰 수 없듯이 사랑도 역시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우리가 처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기
독교인들에게서 보인 일종의 도덕적 불안감은, 또한 그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자기를 합리화하는
위선은 사랑을 자신의 능력인 것처럼 착각하는 데서 야기됩니다. 본인에게는 근본적으로 사랑할만한 능
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명제를 감당해야 할 책임감으로 여기는 데서 오는 일종의 정
신 분열적 현상입니다.  

사랑의 통로
그렇다면 우리의 무능력에 안주해도 괜찮다는 말입니까? 요한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합니
다."(11절). 이런 구절 자체는 우리에게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일단 그 말은 옳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은 우리는 그 생명의 열매로서 사랑을 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양자, 즉
생명과 사랑에는 미묘한 긴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는 자는 당연히 생명의 원
리에 따라서 그 생명을 나누게 되지만, 그 생명의 열매인 사랑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는 흡사 자녀들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이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철부지 아들을 무조
건 감싸는 게 사랑이 아니듯이 우리의 구체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
다. 따라서 이러한 구체적인 삶에 대한 통찰력이 우리에게 갖추어질 때만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경우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를 들었듯이, 그리고 모세와 여호수아가 자기
백성들을 엄하게 다스렸듯이 사랑은 단지 달콤함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인 생명의 확산입니다.  
기독교적인 사랑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어느 정도로 깊이 생명의 세계에 참여하
게 되었는가에 의해서 확인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
는 중에 생명의 충만을 느끼게 되고, 그 생명의 충만을 주변과 나누고 싶어집니다. 그것이 곧 영성이
며, 사랑입니다. 피리를 통해서 소리가 나가면 아름다운 음악이 되는 것처럼,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이 나가면 사랑의 노래가 울려 퍼질 것입니다. 우리는 소리 자체가 아니라 피리이기 때문에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울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소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소리가 우리를 통과할 수 있도록 준비하기만 하면 소리가 음악을 만듭니다. 좋은 피리는 공명을 잘 시
키는 것처럼 우리의 영성이 좋게 준비되어 있으면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소리가 울릴 것입니다. 그 음악
이 곧 우리 삶에서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끝으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
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
다."(12절). 아무도 하나님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생명의 충만이 자기의 삶을 통해서 주변으로 퍼지는
것을 느끼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런 경험을 하고 있습니까? 이 난폭한
시대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갑니까?    2004. 6.27.                
profile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sort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9917
1052 기타 무엇을 기다리는가? [3] [2] 2004-06-14 19945
1051 기타 기도와 말씀 선포 [6] [2] 2004-06-30 15181
1050 기타 신앙의 외면과 내면 (빌 2:14~18) [1] 2004-06-30 14439
1049 기타 하나님을 알자 [4] 2004-06-30 18130
1048 기타 낯섬의 출처 2004-06-30 12741
1047 기타 수군대는 사람들 2004-06-30 13993
1046 기타 숨겨진 미래를 기다림 2004-06-30 12084
1045 기타 빛과 어두움 [3] 2004-06-30 15302
1044 기타 영적인 삶과 이성적인 예배 (롬 12:1, 2) [2] 2004-06-30 15523
1043 기타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막 9:14-29) [2] 2004-06-30 14407
1042 기타 세계, 계시, 하나님 (겔 39:25-29) [1] 2004-07-02 11446
1041 기타 종교와 철학을 넘어서 (고전 1:22-25) 2004-07-02 10593
1040 기타 예수의 권위 (막 1:21~28), 2003.6.1 2004-07-02 13557
1039 기타 언어의 한계와 존재론적 능력 (행 2:1-13) [8] 2004-07-02 10659
1038 기타 삶의 중심 2004-07-02 13111
1037 기타 용서의 능력 [1] 2004-07-02 17741
1036 기타 영적인 인식론 [2] [1] 2004-07-02 12743
1035 기타 두려움을 넘어서 [3] [2] 2004-07-02 11691
1034 기타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 [1] 2004-07-02 12413
1033 기타 우상과 귀걸이 [1] 2004-07-02 16290
1032 기타 평화와 두려움 [1] 2004-07-02 14051
1031 기타 하나님 나라의 통치방식 [1] 2004-07-02 14971
1030 기타 낡은 것과 새것 (고후 5:16-21) [2] 2004-07-02 18465
1029 기타 이스라엘의 고집 [1] 2004-07-02 13738
1028 기타 자유로움의 세계로! [2] [1] 2004-07-02 12660
1027 기타 비뚤게 보기와 바로 보기 [1] [1] 2004-07-02 12470
1026 기타 하나님의 나라와 영의 나라 [4] [1] 2004-07-02 13017
1025 기타 생명을 얻는 길 [1] [1] 2004-07-02 13298
1024 기타 야곱의 하나님 체험 [1] [1] 2004-07-02 12135
1023 기타 종말론적인 삶 (벧전 4:1-11) [1] 2004-07-02 11920
1022 기타 은폐와 노출 [3] 2004-07-02 11634
1021 기타 부자 이야기 [2] 2004-07-02 13968
1020 기타 흔들리지 않는 터전 [1] 2004-07-02 11648
1019 기타 자기 의와 은총 [1] 2004-07-02 11542
1018 기타 언어의 집 [1] 2004-07-02 9327
1017 기타 내면적 삶이란? [1] [1] 2004-07-02 9323
1016 기타 삶으로서의 예배 [1] 2004-07-02 9848
1015 기타 말의 구원론적 능력 [1] 2004-07-02 12011
1014 기타 불평을 넘어서 존재의 기쁨으로 [1] 2004-07-02 9540
1013 기타 주님의 재림과 생명의 완성 [1] 2004-07-02 9538
1012 기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 2004-07-02 10407
1011 기타 세례요한의 질문 [1] 2004-07-02 13806
1010 기타 이사야의 구원신탁 2004-07-02 11525
1009 성탄절 마리아의 노래 (눅 1:46-56) [1] 2004-07-02 12409
1008 기타 삶의 지혜를 넘어서 [1] 2004-07-02 10788
1007 기타 기쁨과 사랑의 역학관계 [1] 2004-07-02 10130
1006 기타 자유를 향한 길에 서서 [1] 2004-07-02 10952
1005 기타 사울의 어리석음 [1] 2004-07-02 12293
1004 기타 막힘에서 열림으로! 2004-07-02 12293
1003 기타 구름 타고 오십니다. 2004-07-02 11401
1002 기타 야훼의 진노와 모세의 기도 [1] 2004-07-02 11574
1001 기타 예수님을 먹다 [1] 2004-07-02 12984
1000 기타 땅을 묵혀라! 2004-07-02 11277
999 기타 마술과 신앙 2004-07-02 10761
998 기타 세계의 토대 2004-07-02 12142
997 기타 야훼의 자기 증거 2004-07-02 11387
996 기타 운명과 자유 2004-07-02 10433
995 기타 본질의 변질 2004-07-02 10496
994 기타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힘 2004-07-02 12074
993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10046
992 기타 노동하는 인간(1) 2004-07-02 9516
991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10020
990 기타 영광의 경험 [3] 2004-07-02 9368
989 기타 노동하는 인간(2) [2] 2004-07-02 8988
988 기타 무엇이 진실한 예배인가? [1] 2004-07-02 9765
987 기타 수행으로서의 신앙생활 [1] [1] 2004-07-02 8596
986 기타 돌무더기에 얽힌 사연 [1] 2004-07-02 9678
985 기타 메시아적 행위와 교회 [1] 2004-07-02 9387
» 기타 사랑이란 무엇인가? [1] 2004-07-02 15454
983 기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1] 2004-07-05 9316
982 기타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1] 2004-07-11 9600
981 기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2004-07-18 9656
980 기타 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2004-07-25 9333
979 기타 말씀 망각의 심판, (8월1일) 2004-08-05 8580
978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2839
977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720
976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396
975 기타 평화를 위한 분열, 8월29일 [5] 2004-08-30 8467
974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429
973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9155
972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924
971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273
970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330
969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289
968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165
967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666
966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348
965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279
964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363
963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9056
962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417
961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128
960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8937
959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503
958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625
957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642
956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465
955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3029
954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610
953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1055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