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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체적 구원의 길, 7월10일

기타 조회 수 10295 추천 수 35 2005.07.10 23:27:39
성경본문 : 로마서 8:1-11 
http://wms.kehc.org/d/dabia/ENCO-006.MP3http://wms.kehc.org/d/dabia/ENCO-006.MP32005. 7.10.          
롬 8:1-11
총체적 구원의 길

율법의 요구
바울은 롬 7장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인간 안에서 두 세계가 다투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마음 속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 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롬 7:21-23).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이며 신비주의자인 사도 바울이 자기의 내면적 삶에서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좀 의외입니다. 우리가 예상하고 있는 바울이라고 한다면 도덕적인 면과 영적인 면에서 완전한 통일성을 이루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의 진술만 놓고 본다면 그는 평범한 우리와 다를 게 하나도 없는 사람 같습니다. 우리의 삶은 양쪽 바퀴의 크기가 다른 마차처럼 늘 뒤뚱거리고 있습니다. 어떤 날은 그럴듯한 모양을 갖추지만 어느 순간에 그런 게 허물어집니다. 마음의 평화가 어느 정도 주어지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에 불안에 휩싸입니다. 어떤 때는 친구나 이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 같지만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크고 작은 갈등 속으로 빠져듭니다. 바울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런 삶의 갈등을 지적하고 있는 걸까요?
여러분, 바울의 가르침을 우리의 교양이나 도덕심 정도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바울은 율법 문제와 투쟁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제시되고 있는 그런 법이 과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는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바울을 비롯해서 모든 유대인들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율법이 인간을 구원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가장 모범적인 인간으로 만들어가는 율법에 전력투구 했지만 거기에는 서로 다른 정신세계의 대립이 계속될 뿐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상황입니다. 이런 한계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줄 것입니까?”(롬 7:24).
지금 우리의 삶도 역시 이런 율법과 밀착되어 있습니다. 즉 모범생 만들기에 모든 것을 걸어두는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게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는 내가 여기서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분명합니다. 모든 삶의 형식들이 다른 사람보다 잘난 사람을 만드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공부 잘하는 것도 좋고, 돈 잘 버는 것도 좋고, 착한 사람 되는 것도 좋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우리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단지 죽은 다음에 하늘나라에 간다, 못 간다 하는 차원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삶과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해볼까요? 우리나라 학생들은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3등을 한 학생은 2등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중압감이 있고, 1등을 한 학생은 앞으로 계속해서 그 1등을 유지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있습니다. 1등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학생을 이겨야 한다는 욕심을 버릴 수 없습니다. 자기와 경쟁하는 학생이 실수하는 게 자기에게 유리하다고 한다면 겉으로는 체면을 살려서 점잖게 말할지 모르겠지만 속으로는 그 학생이 실수하기를 바랄 겁니다. 이런 자기의 중심을 예민하게 생각하는 학생이라고 한다면 스스로 괴로워할 것이고, 무딘 학생이라고 한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훨씬 심각하게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고 말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세상일에 관심을 버리고 예수님을 잘 믿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율법적인 상태에서는 세상일이나 교회일이나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하게 마련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무언가 잘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까? 교회끼리 경쟁하고, 신자들끼리 경쟁합니다. 한국에서 제일 큰 교회당을 건축하기 위해서 비정상적인 방법이 동원되기도 하고, 세상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월등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자기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위선에 치우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율법을 성취하기 위한 몸부림인데, 이런 몸부림은 아무리 좋은 결과를 낳는다고 하더라도 바울처럼 자기 내부의 충돌이 일어날 뿐입니다. 우리의 선한 의지에는 늘 악한 의지가 따라다니기 때문입니다.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려고 한다면 결국 자기 삶을 파괴하거나 자기 착각에 빠지게 된다는 건 불을 보듯 뻔한 결과입니다. 이 말은 곧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성취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율법의 성취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서 전력투구했던 바울마저 두 손 들었다고 한다면,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야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영적 실존이 비참하다는 사실을 인식했지만 우리는 그런 사실도 눈치 채지 못하고, 저 잘난 것처럼 살아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는 바울의 그런 영적인 고민을 모른 채 정상적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무슨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진술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약하기 때문에 율법이 이룩할 수 없었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룩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어 그 육체를 죽이심으로써 이 세상의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 속에서 율법의 요구가 모두 이루어졌습니다.”(롬 8:3,4).
바울의 논리는 아주 분명합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를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 일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바로 율법의 성취입니다. 우리가 자주 들었던 이 말씀이 무슨 의미입니까? 여러분은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의미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게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좀더 실질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서 사셨던 예수님은 율법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인간을 구원해야 할 율법이 인간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법인 율법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인간의 삶에서 이제는 율법이 더 이상 하나님의 법으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모든 게 끝났다고 한다면 결국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영원히 막혀버리고 말았을 겁니다. 예수님까지 죽음에 이르게 한 율법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율법에 의해서 죽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제 전혀 새로운 구원의 빛이 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너무 교리적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너무 뻔한 소리로 들리든지, 아니면 너무 낯설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풀어서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구원은 인간이 성취해야 할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옵니다. 구원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일으키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이미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서 이제 인간이 할 수 없었던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졌습니다.

율법 해체
바울이 말하고 있는 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있는 우리에게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졌을까요? 이 말은 곧 우리가 실제로 모범적인 인간으로 변화되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고, 이제 더 이상 남과 경쟁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본이 될 정도로 괜찮은, 아니 완벽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율법의 요구가 바로 그런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삶이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실제로는 우리가 그렇게 변화되지 못했다는 데에 고민이 따릅니다. 우리는 여전히 세속적인 이해타산에 빠릅니다. 아무리 정의로운 일이라고 하더라도 나에게 손해가 올지 모른다고 판단되면 그런 일에 잘 나서지 못합니다. 이런 마당에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성취되었다는 말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여러분, 바울이 이 문제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좀더 정확하게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 속에서 율법의 요구가 모두 이루어졌다.”고 했습니다.(4절). 여기서 율법의 요구가 모두 이루어졌다는 것은 율법이 더 이상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생활태도와 마음이 완전히 율법이 요구하는 수준에 올라서는 게 아니라 아예 율법 자체가 소멸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컨대 군인들이 제대하면 군법과 아무런 상관없는 것이나, 옛날에 노예에서 해방되면 더 이상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아도 되는 것과 같습니다. 율법의 요구로부터 자유롭게 된 사람들이 바로 성령을 따라 사는 기독교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바울의 가르침을 듣고 있지만 여전히 율법의 요구에 귀를 기울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위해서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하다못해 기도라도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지기 일쑤입니다. 실제로 교회가 그런 것을 많이 요구합니다. 헌금으로부터 전도와 여러 봉사활동에 이르기까지 율법의 요구가 여전히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율법 이후의 세계에 살면서도 여전히 율법의 요구를 따르는 이유는 율법 자체가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따라가다 보면 누구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성취감도 발생합니다. 평생 노예로 살아온 사람은 해방되었어도 여전히 노예근성이 남아있듯이 율법의 요구가 해체되었지만 우리는 그 근성 자체를 포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완전하게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이런 요구는 영원히 우리를 놓아주지 않을 겁니다.  

성령을 따르는 삶
여기서 말하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는 곧 육체적인 삶으로부터 영적인 삶으로 옮기는 데서 주어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4절 이하에서 육체를 따르는 삶과 성령을 따르는 삶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은 하느님의 율법에 복종하지도 않고 또 복종할 수도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원수가 됩니다.”(6,7절). 바울은 8,9절에서도 계속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삶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바울의 이런 설명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설교자들이 술, 담배 하지 말고, 정직하게 살고, 교회에 열심히 나오는 게 바로 성령을 따르는 삶이라고 가르칩니다. 기독교인이 건전하게 사는 것은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성서는 이런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육체를 따르는 삶은 그가 앞서서 설명했던 율법을 통해서 의로움을 얻으려는 태도이고, 성령을 따르는 삶은 그것이 해체되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8절)는 바울의 진술에서 “육체를 따라”는 곧 “율법을 따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이 구절을 자칫 육체적 본능을 따라 부도덕하게 사는 것에 관한 충고로 해석하게 되면 ‘영육이원론’에 빠져듭니다. 육체는 천하지만 영은 귀하고, 우리의 몸은 세속적이지만 영은 거룩하다고 보는 생각은 결코 성서적이지 못합니다. 인간은 영과 육이 신비한 방석으로 완전히 하나로 결합된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영이 거룩하다면 육도 거룩하며, 육이 타락했다면 영도 타락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1b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준다고 진술합니다. 우리의 현실적인 삶 전체를 다시 살리신다니,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그는 결코 인간의 육체와 영을 이분법적으로 구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우리의 몸을 포함한 우리의 인격 전체가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 그럴듯한 것을 달성하지 못해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런 모든 그럴듯한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 그 효력을 상실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생명의 세계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몸과 영혼이 포함된 총체적인 구원이 일어납니다.



profile

[레벨:3]김경태

July 17, 2005
*.151.73.176

안녕하세요. 저는 통합측 목사입니다.
목사님의 설교 비평 잘 듣고 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고 자신을 많이 돌아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점이 있는데
설교비평은 잘 읽히지만 설교 자체는 잘 안읽혀진다는 점입니다.

집중해서 읽으려고 해도 -사무실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
중간정도에서 너무나 논리적이고
교리적인(조직신학적인) 주제들이 전개된듯해서
머리가 복잡해지면서 결국 읽기를 포기하게 됩니다
(이런 현상이 너무나 그동안 제대로 된 설교를 듣거나 읽지 않았기 때문이라면
앞으로 목사님의 설교를 읽으려고 노력해야겠죠!).
최근(2000년대)에 번역된 책들 중에는(크레독, 위어스비 등등)
설교/설교자에 대해 강조하기를
- 말씀의 '통로(하수관)'가 아니라 '예술'로서 그림그리 듯,
개념 설명이나 설득보다는 참여와 경험을,
조직과 주제에 맞추기 보다는 사건의 흐름에 대해
많은 말들을 하고 있는데
목사님의 설교나 설교비평에서는 이런 부분들
- '귀납적' 또는 '이야기체'설교가 무시되는 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소개된 크레독의 귀납법적 설교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실지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 목사님의 성실하신 답글들을 보면서 저도 답글 받을 희망으로 가득해서
이글을 올립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ly 18, 2005
*.249.178.21

김경태 목사님,
대구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함께하고 있는 통합측 후배 목사님 중에서
똑같은 이름이 있습니다.
혹시 그분이 그분은 아니겠지요?
김 목사님이 정확한 걸 짚어주셨군요.
설교비평은 그냥 읽히는데, 설교는 읽히지 않는다구요.
기본적으로는 그게 나의 한계라는 것 말고는 다른 설명은 없습니다.
남의 설교는 곧잘 그럴듯하게 비평하는 데
설교는 그에 따르지 못한다는 건
내가 그만큼 청중들을 끌어갈만한 역량이 부족한 것이죠.
약간 변명 비슷한 쪽으로 설명한다면,
설교비평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 생각을 일관되게 끌어나가는 글이지만
설교는 내 생각을 가능한대로 줄이고 텍스트 자체에 집중해 나가는 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설교에서도 역시 부분적으로 내 생각이 들어가게 마련입니다.
내 생각을 늘 뛰어넘은 텍스트와 내 생각이 정확하게 일치하면 괜찮지만
그게 그렇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설교의 흐름이 그렇게 매끄럽지 못합니다.
또 한가지는 내가 생각하는 설교론이 다음과 같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청중으로부터 텍스트로!"
물론 텍스트는 민중의 삶과 그 역사에서 형성된 것이지만
일단 정경화 이후에는 그것이 늘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거든요.
아직도 나는 그 경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텍스트와 청중의 삶 사이의 경계입니다.
지금 공연히 내가 고상한 척하면서 말하는 게 아니라
그게 바로 설교자로서의 내 실존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텍스트를 따라가기에도 벅차다는 것입니다.
청중을 뒤돌아볼 겨를이 없다고 보아야지요.
아마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길을 가야갈 것 같습니다.
텍스트와 청중의 소통이 설교의 핵심이기는 하지만
내 경우에는 텍스트 따라가기가 핵심입니다.
목사님이 중요한 점을 지적하셨네요.
개념설명보다는 참여와 경험이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참여와 경험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건 각각의 청중들에게 맡겨두자는 것이죠.
왜냐하면 청중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경험을 구체적으로 말하기에는
나의 하나님 경험이 너무 일천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나의 작은 경험을 말할 뿐이지
그것을 따라오라고 감히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귀납적 설교'라구요?
연역적이거나 귀납적이거나 이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설교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물론 전달 방법론으로서 '귀납적 설교'는 나름으로 타당성이 있을 겁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인지 나는 잘 모릅니다.
현재 설교를 듣는 사람의 상황에서 출발하는 설교,
청중들의 종교적, 영적 요구에 부응하는 설교라는 정도로 윤곽을 잡고 있을 뿐입니다.
결국 이 말은 내가 청중들과 소통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뜻이겠지요.
실제로 그렇습니다.
아마 설교자로서 자격이 부족한 건지 모르겠지만
텍스트가 나를 엄습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군요.
이왕에 말이 나온 김에,
설교와 연관해서 나의 관심은 '언어존재론'입니다.
하이덱거와 장자가 여기서 내 스승들입니다.
대충 할말이 정리된 걸까요?
혹시 내가 더 설명할 부분이 있으면 나중에라도 말씀해주십시요.
좋은 지적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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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2023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2251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1848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1823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1796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2799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208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156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648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541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389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358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421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513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482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130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030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2889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145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3716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165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920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536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476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180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574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066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05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727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459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194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406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312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847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502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401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645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546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555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154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05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396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653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361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439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714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3914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496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851
952 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2] 2022-05-08 3594
951 부활절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의 삶 (계 5:11~14) [1] 2022-05-01 2754
950 부활절 예수를 '믿는 자' (요 20:19~31) [1] 2022-04-24 4637
949 부활절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 (행 10:34~43) [1] 2022-04-17 2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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