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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무엇인가?

사순절 조회 수 18793 추천 수 131 2008.02.17 15: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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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로마서 4:1-5,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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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17 로마서 4:1-5, 13-17

신구약성서에서 아브라함만큼 유명세를 탄 인물은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님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그 당시 주변의 민족들과 처음부터 달랐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아예 처음부터 그 씨가 다르다고 말입니다. 창세기를 그대로 따른다고 하더라도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유역인 갈대아 우르 출신입니다. 그곳은 바빌로니아 문명의 발생지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데라의 세 아들 중의 하나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그는 북서부 지역인 하란으로 이민을 왔고, 그곳에서 아버지가 죽자 아내 사래와 함께 조카 롯을 데리고 남쪽 지역인 팔레스틴으로 내려와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담과 이브를 통해서 시작된 인류의 여러 후손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해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의 후손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교들이나 이슬람교도들만이 아니라 혈통적으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우리는 오늘 설교의 본문인 로마서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적 정체성을 제시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주장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그 당시의 교회가 처한 상황을 조금 살펴야 합니다.
바울이 편지를 쓰던 당시의 초기 기독교는 유대-기독교와 투쟁 중이었습니다. 유대-기독교는 유대교의 신앙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신앙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동생이 활동하던 예루살렘 공동체가 그 중심입니다. 그들은 예순님을 믿는다는 점에서 기독교인들이긴 하지만 여전히 토라와 할례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대교인들이기도 합니다. 이에 반해서 바울은 토라와 할례가 없는 기독교 신앙을 주창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두 가지 점에서 약간 혼란스러울 겁니다. 첫째는 유대-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면서도 여전히 유대교의 종교적 특성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초기 기독교에서 사도들과 바울 사이에 신앙적 갈등이 심각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이런 초기 기독교의 상황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이런 상황의 연장선상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바울은 초기 기독교 안에 여전히 율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반격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는데 아브라함만큼 적절한 예를 찾기 힘들었을 겁니다.

아브라함의 의
바울은 창세기 15:6절을 이렇게 인용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롬 4:3) 어떤 사람은 이런 성서의 진술을 너무 상투적이고 시시한 이야기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인용한 이 문장은 두 가지 점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첫째,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고대인들에게 이 의로움은 곧 구원이라는 말과 똑같았습니다. 사람은 의롭지 못함으로 인해서, 즉 죄로 인해서 참된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죽음도 바로 죄의 결과입니다. 사람이 생명을 얻으려면, 죽음을 넘어서서 영생에 이르려면 당연히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바로 의로워진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것은 그가 참된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졌다는 뜻입니다.
둘째,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인정받은 이유가 바로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롬 4:1-5절에서 바로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여기서의 믿음은 공로와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의롭다고 인정받을 공로가 없습니다. 그럴 자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대단한 인물처럼 알려져 있지만 그렇게 뛰어난 인물은 아닙니다. 성격적으로 우유부단하고, 소심하기도 했습니다. 아내 사라와 아내의 몸종인 하갈 사이에서 처신을 잘못해서 가정의 평화를 깨기도 했고, 신상이 위태하다고 해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적도 있습니다. 그의 처신만 보면 의롭다고 인정받을 게 별로 없습니다. 물론 그가 조카 롯에게 땅을 양보했다거나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등, 모범적인 면모가 보이긴 했지만, 그런 거야 어느 정도 준비가 된 사람이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행동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을 정도의 공로는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그의 믿음입니다. 창세기 15:6절이 말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무엇일까요? 어느 날 야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어 큰 상을 내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심정은 답답했습니다. 그 당시에 그에게는 가문을 이을 자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소연을 들은 하나님은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면서 자손이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이 말씀에 이어서 곧 아브라함이 야훼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 믿음이 결국은 자손이 많아질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일까요?
아브라함이 살던 고대인들은 후손에 대한 열망이 아주 강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보세요. 그는 아버지 데라를 따라서 오래 전에 고국을 떠나서 이제 팔레스틴 땅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교포와 비교하면 되겠군요. 몇 십 년 동안 고생하면서 돈은 모았지만 자식이 하나도 없습니다. 고국을 떠난 걸 후회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런 상황에서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진다는 말씀을 들었으니, 아브라함이 얼마나 기뻐했을는지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은 아닙니다. 그는 자식을 믿은 게 아니라 야훼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게 그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약속)을 믿는 것은 똑같으니까요. 그러나 조금 엄밀하게 볼 때 아브라함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아브라함은 훗날 얻은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야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만약 자식을 믿었다면 그는 그런 명령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했을 겁니다. 아브라함은 오직 야훼 하나님만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은 근거입니다.
야훼 하나님만을 믿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도대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는다는 것인가요? 우리가 아직 하나님을 다 알지 못하는데, 누구를 믿는다는 건가요? 여기서 자칫하면 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모든 삶의 현실들과 무게를 포기하고 신앙생활에만 몰두하는 광신도가 될 수 있습니다. 성서가 가르치는 믿음은 그것만 따로 떼어놓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거기에는 어떤 상황이 놓여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예로 든 바울의 경우에 그것은 율법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실천하는 것이 곧 하나님과 하나 되는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걸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율법의 실천은 사람을 성실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율법의 알짬인 십계명만 해도 그렇습니다. 십계명대로 따라 살기만 한다면 그건 곧 하나님과 하나 되는 길이라고 생각할 만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한 바로 그 율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누가 옳습니까? 그 당시 기독교의 주류라 할 수 있는 유대-기독교인들이 바울과 대립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 율법은 우리가 극복하기 어려운 실체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아주 실용적이고 구체적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의 주장을 오늘 우리의 삶과 비교해보세요. 오늘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행사들이 바로 이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바울은 오늘 이렇게 말할 겁니다. 교회 성장은 복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 것을 교회의 중요한 목표로 삼는 것은 복음의 왜곡이라고 말입니다. 아마 바울의 이런 주장을 받아들일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이건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은 성공, 부자가 되는 것에만 모든 가치를 걸어두고 있습니다. 아무도 이런 것을 반대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성공은 하나님의 뜻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신앙과 삶의 토대를 전혀 새롭게 설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루는 공로에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관계에 집중하라는 요구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자기공로, 자기업적, 자기집중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집중하는 것이 곧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믿음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람이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하면 높은 점수를 주는 학교 선생님이 아닙니다. 착한 일 하면 사탕 하나 씩 주는 부모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많이 기울여도 그것으로 하나님에게 점수를 딸 방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평가 기준은 우리의 예상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훗날 여러분이 마지막 심판을 받을 때 그 결과를 보고 놀랄 것입니다. 칭찬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책망을 듣고, 책망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칭찬을 듣게 될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에게 점수를 딸 수는 없습니다.

오직 은총
혹시 이런 설명 앞에서, 막막하다, 우리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냐, 하고 불안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렇게 생각했다면 저의 설교를 오해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능력이 있느냐, 공로가 있느냐 하는 방식으로 평가를 받으면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런 방식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무엇을 얼마나 잘해야 하는가?” 하는 그런 생각 자체를 버리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어떻게 하시는가?”에 대해서만 관심을 집중해보세요.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으며, 구원받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공로는 하잘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공로 없이 우리를 인정하고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은총을 베푸시며 ...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들에게 그 약속을 보장해주십니다.”(16절) 이런 점에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sola gratia Dei)이라는 마틴 루터의 가르침도 옳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관계가 얼마나 엄중한지를 생각하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법이 없으면 법을 어기는 일도 없게 됩니다. 법이 있으면 법을 어기게 되어 하느님의 진노를 사게 마렵니다.” 율법을 안고 가면 결국 그 율법으로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어떤 노력과 공로로 생각하는 한 그것으로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이에 반해 바울은 법 자체를 부정합니다. 아주 극단적입니다. 오해는 마세요. 사람이 어떻게 법 없이 살겠습니까? 바울은 영적인 차원을 말하는 중입니다. 몸으로는 여전히 법의 지배를 받지만 영적으로는 거기서 벗어났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생명을 우리의 노력인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완전히 의탁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볼 때 하나님에게 자신의 미래를 온전히 맡긴 최초의 인물이 바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세의 율법이 나오기 훨씬 전에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모세보다 훨씬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일치한 사람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선구자에 불과했지만, 아브라함은 모든 민족의 조상입니다. 심지어 혈통이 다른 우리도 믿음으로 그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창 17:5절 말씀을 인용해서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16b)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기준과는 전혀 다른 기준으로 하나님에게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부활과 창조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로만 인정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만이 부활의 능력자이며, 창조의 능력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바로 그런 하나님이었습니다. 17b절을 보십시오.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아브라함의 칭의와 하나님의 은총을 말하다가 부활과 창조를 거론하는 게 조금 부자연스럽다고 생각되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율법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율법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실천해야 할 규범을 가리킵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선하고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활이나 창조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노력에 속하지만 부활과 창조는 하나님의 행위에 속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부활과 창조가 말하는 생명의 근원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은총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에 완전히 의존하는 삶이 바로 바울이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서 전달하고 있는 믿음입니다.
이런 삶이 무엇인지 아직 손에 확실하게 잡히지 않는 분이 있을 겁니다. 그런 분은 오늘 복음서 말씀인 요 3:1-10절을 되새겨 보십시오.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바리새파 사람으로 유대인의 지도자였습니다. 아무리 학식이 뛰어나고 세상 경험이 많아도 거듭나지 않으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이룬 업적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게 힘들 겁니다. 여러분, 아무 걱정하지 말고, 오직 그분에게만 마음을 두고 살아가십시오. 부활과 창조의 하나님만이 우리의 미래를 온전히 책임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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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은빛그림자

February 18, 2008
*.141.3.64

참.. 감사하다는 말씀 밖에는..ㅠ.ㅠ
공교롭게도 제가 섬기는 교회의 오늘 말씀과 동일한 성경 구절이 언급됐는데..
교회에서 설교를 들으며 답답해서 죽을 것 같던 것들이,
정목사님의 설교를 읽으며 스르륵.. 풀렸습니다.(눈물 찔끔!)
잠을 편히 잘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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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수우

February 18, 2008
*.9.82.15

생수와 같은 성령의 임재를 느낍니다.
가슴에서 맑은 물이 솟아 오릅니다.
놀라운 해방감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올바른 행동, 모범적인 행위, 끝없는 봉사와 헌신을 하지 못해서
행여 주님이 나를 벌내리시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가끔씩
언습해 올때 가 있습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존재론적으로 만나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 오랫동안 길들여지고 쇠뇌가 된 교훈은
하나님은 훌륭한 일을 하는 자에게 사탕 하나 더주는 분으로 입력이 된 까닭입니다.
빛나는 햇빛처럼
말씀이 온 방을 눈부시게 비추입니다.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건강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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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4]임마누엘

February 18, 2008
*.10.141.173

오늘도 우리의 미래를 온전히 책임지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며
살아갈 수 있을것 같습니다
profile

[레벨:6]ldg

February 18, 2008
*.159.80.102

아무 업적도 공로도 없어 늘 초라하게 나 자신을 생각하기를 잘 했는데 하나님은 그런것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말씀,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구원 받는다는 말씀 , 참 진리의 말씀임을 제 온 존재를 다하여 믿고 찬양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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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김민욱

February 18, 2008
*.199.146.185

어제였는데요,
가끔 제 속에서 계속 말을 하지만,
말로 나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랫동안 묵어 있다가 누군가와 대화할 때라든지..
입으로 나오는 때가 있는데요,
제 입으로 나왔지만 당장 제가 소화하지 못하고 천천히 되씹어야 할 고백 내용이 나옵니다.
제가 한 말인데, 다시 대화하면서 되씹어야 했어요.^^

오늘 설교를 들으며 어제 얘기했던 내용이 다시 찬찬히 소화됨을 느낍니다.
(놀랍게도 설교 내용핵심과도 일치하고 말이죠.)
어제 애인과 대화하며, '강렬한 느낌은 아니지만 이런게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아닐까?'
했는데, 맞겠죠?^^

물론, 지난 주 설교와 등등 그동안 배운 내용들이
잠재해있었기 때문에 가끔 이렇게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감사의 표현, 감상을 드러내고 싶어서 적어봤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February 18, 2008
*.150.14.168

미숙한 설교인데도
그걸 통해서 신앙의 교제가 가능할 걸 보니
위의 대글 자들의 영성이 일정한 경지에 오른 것 같습니다.
우리의 노력에 초점을 두지 않은 신앙,
오직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천착하는 신앙,
그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죽을 때까지 그 세계에서 헤엄을 쳐야합니다.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것은
믿음의 내용은 이미 다 아는 것이고,
단지 믿는 자기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믿는 자기 자신도 신뢰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는 바울의 신앙적 신비를,
신비이지만 아주 현실적인 그 세계를 조금씩 알아가는 게
곧 기독교인의 삶이며, 영성이기도 하겠지요.
모든 분들에게 복음의 자유가!!!
profile

[레벨:33]달팽이

February 19, 2008
*.78.245.226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그러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죽음의 냄새가 나고,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향기가 됩니다.
이런 일을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우리는, 저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장사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꾼답게,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합니다.
<고후2:15-17 새번역>

이 척박한 설교현장속에서 늘 단비같은 말씀으로,
때론 폭포수같은 말씀으로 복음의 깊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니 감사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기쁨이 밀려오네요.
진리가 그렇게 우리를 자유케하는 복음의 능력으로 다가오는 같습니다.
profile

[레벨:6]상수리

February 19, 2008
*.99.193.27

좋은 설교 감사합니다. ∧∧
profile

[레벨:5]artfuga

February 21, 2008
*.126.145.239

늘 감사함으로 듣고 있습니다.
아멘!
profile

[레벨:41]새하늘

February 25, 2008
*.126.124.165

설교 본문중에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다비아에서 여러번 언급된 내용이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이삭을 바치는 부분입니다.
이것에 대해 카톨릭 신부님께 물어 보았는데, 신학적으로도 아브라함의 조급함에 온 인신공양이라는
것에 긍정을 하셨습니다.

여하간에 설교의 틀안에서는 문제는 없지만, 그동안 다바아에 다루어진 부분이기에
가재미 눈을 뜨고 자로 재어 보았습니다.
profile

[레벨:1]hikari

March 20, 2008
*.39.113.88

목사님은 다른 분들과 비교할 수 없는 언어구사은사를 받으셨군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표현하는 데 언어의 결핍성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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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 기타 흔들리지 않는 터전 [1] 2004-07-02 11631
1018 기타 자기 의와 은총 [1] 2004-07-02 11518
1017 기타 언어의 집 [1] 2004-07-02 9302
1016 기타 내면적 삶이란? [1] [1] 2004-07-02 9305
1015 기타 삶으로서의 예배 [1] 2004-07-02 9828
1014 기타 말의 구원론적 능력 [1] 2004-07-02 11984
1013 기타 불평을 넘어서 존재의 기쁨으로 [1] 2004-07-02 9512
1012 기타 주님의 재림과 생명의 완성 [1] 2004-07-02 9522
1011 기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 2004-07-02 10381
1010 기타 세례요한의 질문 [1] 2004-07-02 13793
1009 기타 이사야의 구원신탁 2004-07-02 11510
1008 성탄절 마리아의 노래 (눅 1:46-56) [1] 2004-07-02 12383
1007 기타 삶의 지혜를 넘어서 [1] 2004-07-02 10765
1006 기타 기쁨과 사랑의 역학관계 [1] 2004-07-02 10118
1005 기타 자유를 향한 길에 서서 [1] 2004-07-02 10940
1004 기타 사울의 어리석음 [1] 2004-07-02 12281
1003 기타 막힘에서 열림으로! 2004-07-02 12277
1002 기타 구름 타고 오십니다. 2004-07-02 11388
1001 기타 야훼의 진노와 모세의 기도 [1] 2004-07-02 11553
1000 기타 예수님을 먹다 [1] 2004-07-02 12947
999 기타 땅을 묵혀라! 2004-07-02 11260
998 기타 마술과 신앙 2004-07-02 10744
997 기타 세계의 토대 2004-07-02 12128
996 기타 야훼의 자기 증거 2004-07-02 11369
995 기타 운명과 자유 2004-07-02 10408
994 기타 본질의 변질 2004-07-02 10473
993 기타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힘 2004-07-02 12053
992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10025
991 기타 노동하는 인간(1) 2004-07-02 9490
990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9987
989 기타 영광의 경험 [3] 2004-07-02 9344
988 기타 노동하는 인간(2) [2] 2004-07-02 8964
987 기타 무엇이 진실한 예배인가? [1] 2004-07-02 9736
986 기타 수행으로서의 신앙생활 [1] [1] 2004-07-02 8567
985 기타 돌무더기에 얽힌 사연 [1] 2004-07-02 9647
984 기타 메시아적 행위와 교회 [1] 2004-07-02 9370
983 기타 사랑이란 무엇인가? [1] 2004-07-02 15429
982 기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1] 2004-07-05 9292
981 기타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1] 2004-07-11 9578
980 기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2004-07-18 9645
979 기타 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2004-07-25 9301
978 기타 말씀 망각의 심판, (8월1일) 2004-08-05 8559
977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2827
976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707
975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370
974 기타 평화를 위한 분열, 8월29일 [5] 2004-08-30 8443
973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405
972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9125
971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902
970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252
969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310
968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263
967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154
966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647
965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318
964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250
963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343
962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9032
961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400
960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105
959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8916
958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484
957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611
956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629
955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445
954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3009
953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593
952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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