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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재앙 앞에서

성령강림절 조회 수 18238 추천 수 56 2008.05.25 15: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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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누가복음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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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5.25. (눅 13:1-5)

5월은 여러모로 활기차고 희망이 넘치는 달입니다. 말 그대로 생명이 약동하는 청소년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일반적으로 5월에는 가정을 중심으로 한 행사를 많이 엽니다. 태양이 4월에 비해서 5월에는 훨씬 강한 힘을 보내주는 덕분으로 숲과 들판이 녹음이 짙어가고 있습니다. 모든 점에서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런데 금년의 5월은 참으로 마음이 그렇게 편안하지만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이 이미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지난 5월 초에 싸이클론(폭풍)이 덮친 미얀마와 일주일 쯤 뒤에 지진이 일어난 중국에서 엄청난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미얀마에서는 십 수만 명의 희생자가 났으며, 중국에서도 역시 죽은 사람이 4만 명 이상에다가 행불자가 그에 버금간다고 합니다. 이런 건 공식적인 통계인데, 통계에 잡히지 않은 희생자까지 합하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쓰촨성을 진원지로 하는 중국의 이번 지진으로 인해서 초, 중고등학교가 많이 붕괴되었습니다. 청소년의 달에 청소년들의 희생이 가장 컸습니다. 저의 둘째 딸 지은이 또래의 십대 소녀 소년들이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미국 쇠고기 수입이야, 조류독감이야 해서 우리나라 문제만 해도 정신이 하나도 없는 마당에 미얀마와 중국의 대재앙까지 우리가 골머리를 앓아야 하느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제 코가 석자인 사람은 남의 고통에 참여할 여유가 없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웃 나라의 끔찍한 재앙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몇 천 명이 아니라 수만 명, 아니 각각 십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불구가 된 사람들은 또 얼마나 될는지, 고아가 된 아이들이 얼마나 될는지, 자식과 손자손녀를 몽땅 잃은 노인들은 또 얼마나 될는지, 그들의 운명을 생각하면 남의 일이라고 모른척할 수만은 없습니다. 남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는 기초인 휴머니즘입니다. 이건 누가 가르쳐 줘서 아는 게 아니라 인간이기에 갖게 되는 자연발생적인 본성입니다.
저는 지금 이 문제를 단순히 휴머니즘 차원에서만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 바로 그의 구원행위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이런 참혹한 현실을 하나님께 아뢰고, 그분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이렇게 질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습니까? 하나님, 당신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십니까? 만약 하나님이 세상의 창조자이고, 이 세상의 생명을 유지하며, 결국 완성하실 분이라고 한다면 이런 대 참사에 대해서 무언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아닐까요?
한편으로 우리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이지 이 세상이 돌아가는 건 자연원리에 일임하셨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질서와 인간의 역사에 더 이상 간섭하지 않으신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요. 과연 그런가요? 하나님의 섭리는 없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이 세상이 돌아가는 걸 보면 이런 주장이 옳은 것 같습니다. 이번 자연재해를 통해서 일어난 엄청난 참상도 그렇고, 군사독재자들에 의해서 끔찍하게 희생당하는 독재국가의 민중들의 운명도 역시 그렇습니다. 거기까지 가지 말고 우리의 일상을 보아도 이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착한 사람이라고 해서 잘 되는 것도 아니고, 악한 사람이라고 해서 벌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은 마치 하나님과 상관없이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은 구약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향해서 이렇게 하소연을 합니다. “야훼여, 어찌하여 멀리 계십니까? 이토록 곤경에 빠졌는데 모르는 체 하십니까?”(시 10:1) 이 시편 기자의 하소연을 오늘 우리도 똑같이 하나님에게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왜 모른 척 하십니까? 왜 숨어 계십니까? 오늘 우리는 이런 질문에 대한 성서의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여, 저희를 도와주소서.

실로암 탑 붕괴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3:1-5절도 끔찍한 사건을 보도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소식을 전했습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했다고 말입니다. 그 갈릴리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동물을 잡아 바치는 희생제를 드리는 중이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반로마적인 기질이 아주 강했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반로마 무장투쟁을 획책하고 있었던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그 첩보를 전해들은 빌라도가 희생제를 드리고 있는 그들을 체포해서 일벌백계의 방식으로 공개처형했을 수도 있습니다.
블린쯜러(J. Blinzler)라는 신약학자는 이 사건의 가능성을 몇 가지 역사적 사실과 연관해서 설명합니다. 1) 요세푸스의 역사책에 보도된 살해 사건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은 26년에 가이사랴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2) 예루살렘 수로 건설과 관련된 소요에서 벌어진 사건도 있는데, 그것은 유대인들이 몽둥이로 맞아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3) 사마리아 사람들을 향한 공격일 가능성도 있는데, 그것은 36년에 일어났다고 합니다. 4) 아켈라우스가 유월절 제물을 드리는 유대인 3천명을 살해한 사건도 있다고 합니다. 이 끔찍한 살해사건은 기원전 4년에 일어난 것입니다. 성서본문이 보도하는 빌라도의 살해사건이 역사적으로 어떤 사건과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대 로마 식민지로 박해를 받던 유대인 사회에서 이런 사건의 개연성은 높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전해준 빌라도의 살해사건을 접한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변을 당한 줄로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두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눅 13:2,3) 이어서 예수님은 실로암 탑 사건을 거론하셨습니다. 실로암 탑이 무너져 열여덟 명이 죽은 사건입니다. 실로암은 기혼에서 예루살렘으로 공급된 물을 저장한 저수지 이름인데, 예루살렘 남쪽과 동쪽 성벽에 접해 있다고 합니다. 이 지역의 경비를 위해서 세운 탑이 무너져서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입니다. 미얀마와 중국의 자연재해와 비교할 때 사소한 것이지만 무고한 인명이 살상 당했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끔찍한 사건입니다.
고대인들은 이런 재앙을 죄의 탓이라고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각으로 본다면 이상하겠지만 고대인들에게는 그게 아주 자연스러웠습니다. 죄가 아니라면 그런 재앙을 설명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9:1절 이하에는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된 것은 자기의 죄인가, 아니면 부모의 죄인가 하고 말이지요. 구약성서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아마 노아 홍수이겠지요. 창세기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세상이 사람들의 죄악으로 가득 차는 걸 보신 야훼 하나님이 사람을 몰살시키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다만 그 당시 흠이 없고 올바르며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노아만은 제외였습니다. 이 노아 홍수의 원인도 결국 죄와 연결됩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혹독한 현실로 추방당한 이유도 역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죄에 놓여 있습니다.
성서가 인간 불행의 원인을 무조건 죄라고만 보는 건 아닙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을 주셨습니다. “자기의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요 9:3) 그리고 그를 고치셨습니다. 욥기서의 욥이 당한 운명보다 더 비극적인 운명을 인류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그는 졸지에 모든 재산과 가족과 건강과 친구들까지 잃었습니다. 욥기서 기자는 이런 욥의 운명을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사탄의 시험이라고 말합니다. 사탄의 시험으로 죽은 욥의 자식들은 얼마나 억울한가, 하고 욥기 이야기의 논리적 모순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서 기자는 개인과 공동체와 민족이 감당해야 할 저주스러운 불행의 원인을 지적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를, 즉 그 이유를 우리가 모른다는 엄중한 사실을, 원인을 따지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태도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요나서는 인간의 죄를 말하고, 욥기서는 사탄의 시험을 말합니다. 서로 다른 대답 같지만 실제로는 같은 대답입니다. 죄와 시험은 실증적인 대답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벌어지는 불행, 고난, 저주, 재난의 근본적인 이유를 모른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종교적 언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박완서 선생은 남편을 여윈지 몇 년 지나지 않아 한창 나이였던 아들마저 저승으로 보낸 뒤에 쓴 일기형식의 고백문인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참척(慘慽)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표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도 섞여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따져봐도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도 십자가 처형을 당하면서 “엘리 엘리 라마사막다니!” 하고 외치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미얀만와 중국의 지진으로 인한 대 참사를 우리 한국에서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요? 너무 먼 데서 일어난 일이라고 강 건너 불구경만 해도 되는 건지요? 또는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보호해주셨다는 사실을 감사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건지요. 미얀마는 불교국가이고, 중국은 공산국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징벌을 내리신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이 있다면, 큰 잘못입니다. 수년전 인도네시아 해안 지역에 해일이 일어 큰 피해가 있어났을 때 서울의 어느 목사는 설교 시간에 우상숭배 하는 지역에 내린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아주 일부이기는 하지만 이런 얄팍하고 천박하고 독단적이며 세계관을 복음인양 선전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이 무엇인지 전혀 모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은 남의 불행을 하나님의 징벌로 주장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회심
우리는 우리 자신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무죄한 자의 고난이 왜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이해하기에 우리의 생각은 너무 부족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두 손을 놓고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씀하셨으며, 지금도 말씀하고 계실 겁니다. 최선을 기울여 그분의 뜻을 찾아가는 수밖에 다른 수가 없습니다. 그걸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하겠지요. 본문 말씀을 조금 더 살펴보세요.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살해당한 갈릴리 사람이나 실로암 탑에 깔려 죽은 예루살렘 사람들이나 모두 다른 이들보다 죄가 많아서 그런 일을 당한 게 아니라고 대답하신 뒤에, “당신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망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도 역시 살해당하고 재앙을 당한다는 말이냐, 하고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이 말씀은 기본적으로 종말에 일어날 최후의 심판을 가리킵니다.
본문의 앞 대목인 눅 12장에는 이런 종말론적인 표상이 많이 거론됩니다. 두려워해야 할 분,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하늘에 쌓아두어야 할 재물,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 이 시대의 뜻을 알아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재판정에 가기 전에 고소한 사람과 화해하라는 비유(눅 12:57-59)에 이어서 바로 오늘 본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본문은 이런 전체적인 연장선상에 놓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준비하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 준비는 바로 회개입니다.
우리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 참혹한 재앙이 죄의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과 마지막을 준비하기 위한 회개가 요청된다는 사실은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이 두 사실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아주 깊은 상관이 있습니다. 우선 회개가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보십시오. 성서가 말하는 ‘메타노이아’는 단순히 도덕적인 변화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관적 이해타산에 따라서 다른 사람과 다른 생명체를 도구화하는 태도로부터 하나님의 숨어 있는 뜻이 임하기를 바라는 태도로 방향을 선회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우리 인간의 생각을 넘어서 이루어집니다. 돈과 건강이 있어야만 행복하다는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 그분은 고유한 방식으로 참된 삶과 행복을 허락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일어났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삶의 방향을 바꾼 사람은 대재앙을 죄의 탓으로, 또는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절망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그 기다림은 곧 희망입니다. 종말론적 희망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생명을 완성하신다는 희망입니다. 그런 희망을 삶의 근거로 삼는 삶의 태도가 바로 회개입니다.
이제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입니다. 종말론적 희망으로 회심한 우리는 지금 여기서 일어난 대재앙 앞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요? 구체적인 결단과 참여 문제는 여러분이 찾아나서야 할 문제입니다. 의사나 간호사들은 미얀마와 중국의 현지로 가서 부상자를 돌볼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모든 이들이 그렇게 할 수는 없겠지요. 구호단체에서는 기금을 모금해서 긴급구호 활동을 펼칠 수도 있겠지요. 미얀마의 군사독재 정권은 외부의 구호활동까지 억압한다고 합니다. 국제 정치력이 있는 사람들은 미얀마 군사정부의 마음을 돌려서 외부의 도움을 받아들이게 해야겠지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각자가 처한 형편에 따라서 다릅니다. 다만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와 주변에서 일어나는 대재앙을 죄의 탓으로 돌리는 숙명주의를 극복하고, 종말론적 심판과 희망의 지평에서 최선으로 이런 대재앙과 싸우는 것입니다.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허락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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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2]자유의꿈

May 26, 2008
*.126.179.235

"돈과 건강이 있어야만 행복하다는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
그분은 고유한 방식으로 참된 삶과 행복을 허락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일어났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생명을 완성하신다는 희망을 삶의 근거로 삼는 삶의 태도가 바로 회개입니다."
주님! 우리로 진실로 회개케하셔서 회개의 열매가 맺히도록 은총을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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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26, 2008
*.181.51.93

자유의꿈 님,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회심이 가능할까요?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회심인데,
바리새인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우리처럼 전문적인 종교적인 예수쟁이들에게서
그 회심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니,
어찌 하면 좋은지요.
회심마저 그분의 긍휼이 아니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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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2]자유의꿈

May 28, 2008
*.126.179.235

그렇군요. 자기 집중의 한거풀을 벗겨내면 또다른 자기집중이 도사리고 있는 우리에게
회심은 커녕 진정한 기도도 쉽지 않은 일이네요.
겹겹이 쌓인 휘장 뒤에 숨은 나의 내면의 모습을 느낄 때마다 두려움마저 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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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킴스

May 28, 2008
*.10.197.101

본문에서 말하시고자 하는바와는 좀 동떨어진 말이지만, 욥기에서 죽은 자식들은 본문 1절 4~5절에서 잔치하기를 즐기기로 늘 욥이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는 모습에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므로 욥이 늘 걱정하던 자식들로 볼수 있습니다. 사탄의 시험이 끝나고 욥은 다시 일곱아들과 세딸들을 두었는데 그 딸들은 전국에서 가장 아리따웠더라라고 말하는것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녀들로 생각할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더 큰 복으로 채워주신다는 말씀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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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함께

May 29, 2008
*.7.13.27

오랫만에 목사님의 설교에 집중할 수있어서 좋습니다
회개역시 우리의 의지와 작정으로는 가능하지 않는 영역이라고 이해를 합니다
"회심마저 그분의 긍휼이 아니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정말 주님이 회개할 수 있도록
은혜를 부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부족한 제가 이 부분에서는 조금 걸리는데요
"예수님도 십자가 처형을 당하면서 “엘리 엘리 라마사막다니!” 하고 외치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목사님께서 인용하신 의도는 짐작이 갑니다만
그냥 개인적인 느낌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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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03, 2008
*.181.51.93

킴스 님,
욥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다는 생각은
정확하지 않은 것 같군요.
그리고 그런 문제는 본문에서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구요.
욥기서 앞 부분은 욥이 얼마나 의롭고 신중한 사람이었는가, 하는 걸 말할 뿐이지
그 자녀들이 욥의 걱정거리였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아무리 착해도 늘 걱정을 하는 법이지요.
시험이 끝난 뒤에 얻는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죄하는 자녀였다는 주장도
정확한 게 아니랍니다.
킴스 님의 성서읽기는,
조금 노골적으로 말해서 조금 위험합니다.
어떤 성서를 읽든지 그것의 중심 주제에서 너무 멀리 나가지 마세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ne 03, 2008
*.181.51.93

주님과함께 님,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외치신 그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를 가리킵니다.
물론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다는 점에서
십자가는 무죄한 자의 고난에 대한 항거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섭리라고 할 수 있긴 합니다.
저는 십자가와 거기서 보이신 예수님의 행동에
여러가지 의미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에 대한
질문, 또는 외침이었다고 본 거지요.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라기보다는 신학의 기초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평신도들은 기독교 신앙을
그저 구구단처럼 받아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로 본다는 게
이상하겠지만,
조금더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세상의 구원을 이루시는 거랍니다.
감사.
profile

[레벨:6]유희탁

June 07, 2008
*.85.191.232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회심의 역사가 있어...미래를 준비할 수 있기를...오늘을 살아갈 수 있기를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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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 기타 불평을 넘어서 존재의 기쁨으로 [1] 2004-07-02 9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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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 기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 2004-07-02 10312
1007 기타 세례요한의 질문 [1] 2004-07-02 13731
1006 기타 이사야의 구원신탁 2004-07-02 11455
1005 성탄절 마리아의 노래 (눅 1:46-56) [1] 2004-07-02 12274
1004 기타 삶의 지혜를 넘어서 [1] 2004-07-02 10679
1003 기타 기쁨과 사랑의 역학관계 [1] 2004-07-02 10043
1002 기타 자유를 향한 길에 서서 [1] 2004-07-02 10879
1001 기타 사울의 어리석음 [1] 2004-07-02 12222
1000 기타 막힘에서 열림으로! 2004-07-02 12214
999 기타 구름 타고 오십니다. 2004-07-02 11325
998 기타 야훼의 진노와 모세의 기도 [1] 2004-07-02 11468
997 기타 예수님을 먹다 [1] 2004-07-02 12784
996 기타 땅을 묵혀라! 2004-07-02 11183
995 기타 마술과 신앙 2004-07-02 10677
994 기타 세계의 토대 2004-07-02 12059
993 기타 야훼의 자기 증거 2004-07-02 11291
992 기타 운명과 자유 2004-07-02 10323
991 기타 본질의 변질 2004-07-02 10399
990 기타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힘 2004-07-02 11978
989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9957
988 기타 노동하는 인간(1) 2004-07-02 9394
987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9893
986 기타 영광의 경험 [3] 2004-07-02 9269
985 기타 노동하는 인간(2) [2] 2004-07-02 8837
984 기타 무엇이 진실한 예배인가? [1] 2004-07-02 9648
983 기타 수행으로서의 신앙생활 [1] [1] 2004-07-02 8432
982 기타 돌무더기에 얽힌 사연 [1] 2004-07-02 9572
981 기타 메시아적 행위와 교회 [1] 2004-07-02 9286
980 기타 사랑이란 무엇인가? [1] 2004-07-02 15329
979 기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1] 2004-07-05 9172
978 기타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1] 2004-07-11 9455
977 기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2004-07-18 9544
976 기타 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2004-07-25 9178
975 기타 말씀 망각의 심판, (8월1일) 2004-08-05 8420
974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2758
973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630
972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310
971 기타 평화를 위한 분열, 8월29일 [5] 2004-08-30 8324
970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328
969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8990
968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824
967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125
966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185
965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125
964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071
963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546
962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188
961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128
960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269
959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8928
958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332
957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047
956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8800
955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403
954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520
953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549
952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357
951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2921
950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500
949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0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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