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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는 누군가?

성령강림절 조회 수 18263 추천 수 2 2010.07.19 11:09:11
설교듣기 : mms://wm-001.cafe24.com/dbia/2010/dawp_0718.mp3 
설교보기 : mms://61.111.3.15/pwkvod/dawp/dawp_100718.wmv 
성경본문 : 골로새서 1:12-23 

예수 그리스도는 누군가?

(골 1:12-23)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가요? 이런 질문은 무의미한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 교회생활을 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그렇지만 실제로 아는지 물으면 대답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기껏해야 한 두 마디면 끝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몰라도 신앙생활을 하는 데는 별로 지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단순히 종교 소비자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마치 마트에 가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오는 것으로 만족하듯이 교회에 가서 종교적 기호에 맞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으로 만족해합니다. 이런 종교 소비자들에게는 예수가 누군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소비심리만 충족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일반 종교에서는 이런 것이 가능할지 모릅니다. 불교는 각자의 마음에 있는 부처를 발견하라고 말합니다. 불교신자들에게는 역사적인 실존 인물인 싯다르타는 먼저 깨달은 인물일 뿐이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초기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렇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보느냐, 하고 말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했습니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불성에 집중하는 불교의 예불과는 달리 기독교의 예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체입니다.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그가 누군지를 아는 것이 내가 누군지를 아는 것보다 더, 아니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신약성서는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에 대한 해명이며 신앙고백입니다.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 읽은 골로새서에는 초기 기독교에서 가장 유명한 예수 그리스도 송가(15-20절)가 나옵니다. 일종의 찬송가입니다. 1연인 15-17절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에 관해서 노래하고, 2연인 18-20절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물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즉 화해되었다는 사실에 관해서 노래합니다. 더 줄이면 그리스도 송가는 하나님의 형상과 만물의 화해를 주제로 합니다. 이 양자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자리합니다. 학자들은 이것을 가리켜 우주론적 기독론이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 사실만 정확하게 알아도 우리는 신약성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해서 무엇을 말하려는지 따라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15-17절을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찬송가라고 생각하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이 그리스도 송가는 ‘그’가 누군지를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로서 만물의 근원입니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모두 그를 통해서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설명의 핵심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입니다. 헬라어 성경은 이를 ‘에이콘 투 데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에이콘이라는 헬라어는 요즘 흔하게 사용하는 ‘아이콘’의 어원입니다. 헬라어 사전은 에이콘을 likeness, image, form, appearance, statue라고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이런 단어들의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각각의 단어를 이 시간에 설명하기는 어려우니 그중에서 form이라는 한 가지만 보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특징 개념인 ‘형상과 질료’라는 말을 들어보신 분이 있을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에 따르면 세상은 형상과 질료로 만들어졌습니다. 여기 ‘공간울림’이라는 건물이 있다고 합시다. 여기에 사용된 돌, 나무 등은 질료(matter)이고, 그것을 이용해서 건물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형상(form)이라고 합니다. 질료는 헬라어로 ‘휠레’라 하고, 형상은 ‘에이도스’라고 합니다. 에이도스는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이기도 하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단어 ‘에이콘’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근원적인 힘을 가리킵니다. 이런 설명을 전제하고 15-17절을 다시 읽어보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라고 고백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었고,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만물보다 먼저 있었고, 만물이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에이도스, 폼, 에이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설명이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순하고 명백해서 철학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도 알 수 있는 것이어야 하지 않느냐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예, 신앙이 철학은 아닙니다. 그러나 철학 없이 어떻게 기독교 신앙을 변증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철학에 대한 오해가 자리합니다. 철학은 추상적이고 비실용적인 이론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요즘 노숙자들과 교도소 피수감자들도 철학을, 즉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철학은 삶을 가장 생생하게 경험하는 학문입니다. 신학이 기독교 영성을 가장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게 해 주는 것과 비슷합니다.

     다시 오늘 성경 본문을 보십시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경험하고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다는, 하나님을 본 자는 죽어야 한다는 성서의 가르침도 이것을 가리킵니다. 보이지 않지만 현실적인 것을, 손으로 만질 수는 없지만 참된 것을 알아야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현실적인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이도스라고, 플라톤은 이데아라고, 장자와 노자는 도(道)라고, 하이덱거는 존재라고, 화이트헤드는 과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보이지 않지만 참된 현실인 하나님의 에이콘(형상)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에이콘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골로새서 기자는 그것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송가’는 찬송이며, 시이며,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 중간에 함께 암송한 ‘사도신경’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에 대한 명제를 나열할 뿐이지 논리적인 설명을 부연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그리스도 송가를 부른 사람들은 그 내용을 이미 알고 있다는 걸 전제합니다. 예컨대 부부로 사는 사람이 함께 부부의 사랑에 대한 노래를 부르면 되지, 왜 부부가 되었는지를 매번 마다 논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용을 모르면서도 아는 척 하는 것도 좀 곤란합니다. 그럴 때는 질문해야 하고, 답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지금 묻는 겁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믿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답입니다. 본문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18절)라고 이 질문에 간접적으로 대답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아주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무덤에 묻혔던 예수님을 다시 생명체로 경험한 것입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이 단순히 다시 살아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신문기자가 현장에서 확인하고 보도할 수 있는 성질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은 유일회적인 것입니다. 반복될 수 없었습니다. 종말에 나타날 궁극적인 생명이 예수님에게 선취된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설명할 방법도 없었고, 자신도 없었습니다. 단지 자신들의 경험을 그대로 전할 뿐이었습니다. 아무런 객관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믿으라고 말하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바꿔놓고 생각해보십시오. “언어가 나에게 말을 건다.”는 문장이 있다고 합시다. 그것은 객관적인 증명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말한 사람의 경험이 확실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신약성서의 부활에 대한 진술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는 그 진술에 동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진술이 진리라는 사실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변증해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주님의 명령에 합당한 태도입니다.

 

    만물과의 화목

     골로새서의 ‘그리스도 송영’의 두 번째 연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만물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20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이런 말씀은 우리가 흔하게 들었습니다만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나님을 향해 왜 자기를 버리느냐고 외쳤습니다. 당시에 아무도 십자가의 죽음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왜, 그리고 무슨 근거로 예수의 십자가가 만물을 하나님과 화해시킨다고 믿었을까요?

     19절이 이 대답을 찾아가는 출발점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 충분하게 거하셨다는 이 말은 하나님이 예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당시에 가장 수치스러웠던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이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다니,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깨달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깨닫게 된 데에는 구약의 속죄 개념이 크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인간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제사장은 양이나 소를 희생제물로 바쳤습니다. 속죄를 위한 제사가 반복되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이런 반복된 속죄제사를 끝장내는 구원 사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십자가의 피로 이제 모든 사람들은, 더 나가서 만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 용서 사건이 곧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는 근본적으로 죽음의 극복을 뜻합니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나뉘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그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죽지 않을 수 없듯이 우리가 그 어떤 종교적인 노력을 기울여도, 즉 유대교의 희생제사를 아무리 거룩하게 바쳐도 그것으로 죽음을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거기서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화해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으로는 사람이 결코 의로워질 수 없다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런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하나님과의 일치가 깨져서 죽음의 운명에 떨어진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증거는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부활입니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생명인 부활의 세계에 처음으로 들어가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그의 십자가는 죄의 형벌이 아니라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초기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를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의 ‘그리스도 송가’가 말하는 핵심이며, 동시에 신약성서 전체의 요체이기도 합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요? 정보로 아는 것과 크게 깨우침으로 아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분 자신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만물과의 화해라는 사실이 우리 삶의 능력으로 자리하고 있나요? 먼 나라가 이야기로 떨어져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만물과의 화해는 단지 기독교의 교리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지금 당장 잘 먹고 사는 게 중요하다고 속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과 만물을 하나님과 화해시킨다는 사실은 공허한 교리가 아니라 우리 삶의 참된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극복했으며, 그를 통해서 우리도 이미 죽음 너머의 새로운 생명인 부활에 참여한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 믿음이 우리 삶의 굳은 토대라고 한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세상과 삶을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송가를 인용한 후에 ‘복음의 소망에서’(골 1:23) 흔들리지 말라고 강권했습니다. 이런 새로운 삶의 능력으로 들어가십시오. 아멘.(성령강림절 후 여덟째 주일, 7월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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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19, 2010
*.120.170.243

위 설교 꼭지글에 두 개의 파일이 링크되어 있습니다.

'설교듣기'와 '설교보기'입니다.

원래 설교듣기는 엠피쓰리 소리파일이,

설교보기에는 동영상 설교파일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번의 '설교보기'는

대구샘터교회의 예배 전체를 엠피쓰리 소리로 녹음한 겁니다.

총예배 시간이 1시간 3분입니다.

혹시 관심이 있는 분들이 있을지 몰라서 준비한 겁니다.

'설교듣기'는 서울샘터교회에서 행한 설교이구요.

설교 시간만 36분이 조금 더 되는군요.

설교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설교 원고도 아예 줄였는데,

이상하게 설교시간은 줄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 늘어나네요.

설교를 30분 안으로 끝내기 위해서

앞으로 좀더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렸으니

이제 모두 힘찬 한 주간을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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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방랑자

July 19, 2010
*.109.153.14

"만물과의 화해라는 사실이 우리 삶의 능력으로 자리하고 있나요?"

그 능력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예수가 하나님과 만물과의 화해라는 사실도

잘 모르겠습니다. 화해라는 말은 하나님과 만물의 불화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 불화란

곧 사람이 반생명적이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다는 사실 때문인 것일텐데요

근데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인데 그 피조물이 그런 반생명적 기질을 타고났다면

아니 타고난게 아니라 후천적으로 만들어졌다해도 그 불화의 책임이 온전히 사람에게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수가 속죄양이라는 사실이 감동으로 다가오다가도 늘 마음 한켠에선 딴지를 겁니다

세상에 속해 살면서 스스로 생명적이긴 커녕 쾌락과 타락의 본성을 가진 자신을 발견하면서

이건 결국 죄성을 극복할수 없는 피조물의 한계가 아닌가, 이런 한계를 죄로 규정짓고

그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고 할수있는 건지....(참 어리석죠?)

목사님의 설교말씀은 늘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전엔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넘을수 없는 막다른 길이라고 포기했다면 지금은 스스로 답을 찾아 나가는 여정이라고

생각해봅니다. 많이 헤매지 않도록 성령께서 잘 인도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더위 잘 이겨내시고 한주간 평안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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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19, 2010
*.120.170.243

방랑자 님,

안녕하세요?

어제는 예배에 참석하시고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빨리 가셨나보네요.

오늘 저에게 어떤 설명을 듣으려고

대글을 다신 건 아니겠지요.

본인이 대충 설명을 다 하신 거에요.

'삶의 능력'이 무엇인지, 궁금하시죠?

삶의 능력은 죽음의 능력과 반대되는 말이에요.

우리를 삶으로부터 소외시키는 힘들이 많지요?

제가 열거할 필요가 없습니다.

키에르케골은 <죽음에 이르는 병>을 죄라고 말했다지요?

죄는 생명 창조자이신 하나님과의 분리니까

그 결과가 죽음이라는 건 당연한 논리입니다.

이런 학문적인 설명보다는 실제적인 설명이 더 필요할 겁니다.

삶은 생물학적인 것을 포함해서

자유, 해방, 기쁨, 평화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그 총괄이 영혼의 안식이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만물을 하나님과 화해시킨다는 사실을 깊이 깨우친다면

우리는 위에서 열거한 삶의 능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지 세상이 다르게 보이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분이라는 거지요.

내 말이 반복되는 군요.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불신앙입니다.

기독교는 믿을만 한 걸 믿으라고 말합니다.

뜨거운 여름철,

건강하게 잘 지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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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July 21, 2010
*.51.151.222

목사님, 설교 말씀을 듣다가 궁금해서 몇 가지 여쭤 보겠습니다.
1)사도바울이 예수님을 '에이콘 투 데우'라고 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만 지칭하는 것은 아니지요? 예수님의 인카네이션, 성장, 십자가, 부활까지 다 포함하는 게 아닌가 해서요. 설령,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나서  '에이콘 투 데우' 를 확증했다고 하더라도 잠정적으로 그 모든 사건들이 다 하나님의 에이콘으로서의 역할이 충만했던 건 아니었나 싶어서 입니다. 다만 그 전에는 은폐되었다고 보여지는데요.


2)또한 이 에이콘은 구약에서부터 이미 계시 되어진 건 아닌가 싶은데요. (그때도 은폐형태로 계시되고 있다고 보는데요,-참, 이 말을 드리고 보니, (은폐된 계시, 계시된 은폐 ..말이 안되지만, 제가 쉽게 이해하려고 만들어 봤어요.) 선지자들, 예언자들이 메시아를 대망했었다는 것은 은폐 되었을 뿐이지 어떤 '이미지'라도 존재하지 않았나 싶어서입니다.


3)그에 아울러서 지금 현재도 '에이콘 투 데우'의 증거는 계속되고 있다고 보여지는데요, 우리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는 말씀의 계승자라는 입장에서 보면 지금도 그 '에이콘'은 드러나 있다고 봐야 하지 않나 싶어서입니다. 또한 '에이콘 투 데우'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현실성'이라는 말로 대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삶에서 늘 이 현실성, 리얼리티를 보고(깨닫고) 산다는 의미가 되는 거네요.  이건 또한 우리가 '만물과 화해 되어진 세상에서 살아 갈 수 있는 가장 든든한 토대'라는 의미라고 생각되고요. 

 

목사님, 그 옛날 선조들이 불렀다는 <그리스도의 송가>, 지난 주 저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불렀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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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21, 2010
*.120.170.243

라라 님,

제가 더 보충할 필요 없이

라라 님이 정확하게 말한 겁니다.

1) 부활의 주님을 우리가 말할 때는 공생애 전체를 포함하는 겁니다.

부활 경험을 통해서 공생애의 모든 구원론적 차원의 현실을 인식하게 된 거죠.

2) 에이콘(형상)이 구약에도 계시되었다는 말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약간 도식적인 접근으로 보이는군요.

3) 이것도 역시 틀린 말은 아니지만 도식적으로 보입니다.

지금 골로새서의 '그리스도 송가'는 예수님의 기독론적 정체성을 말하는 중이지

그것의 구약적인 계시와 지금의 변증을 요구하는 건 아닙니다.

'에이콘 투 데우' 개념을 너무 확대하지 말고

일단 그것 자체에 좀더 집중하는 게 좋지 않을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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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July 22, 2010
*.51.151.222

예, 목사님, 잘 알겠습니다.

제가 '에이콘 투 데우' 개념잡기에 너무 열을 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위에서 질문한 내용은 목사님께서 평소에 늘 말씀하시는 내용을 제식으로 이해하려고 나름대로 궁리해 본 것인데요,

이런 작업을 통해서 제 나름대로는 도식적인 접근을 피하려고 용을 쓴 건데.. 애구구..도식적인 접근이라고요?^^

목사님, 조언 감사합니다.

제가 이만큼이라도 눈을 뜨게 된 것은 순전히 목사님의 가르침 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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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July 21, 2010
*.104.196.122

이번 주일 예배 시간에 주보에서 설교 제목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군가?' 라는 것을 알고는

1년 반 전이 생각이 나서 혼자서 피식 웃었습니다.

다비아에 처음 들어왔을 때 (지금도 여전하시지만)

목사님께서 항상 설교에서 케리그마에 집중하는 것을 언급하셨는데

내심, 케리그마의 내용은 당연하고 뻔한건데

언젠가 밑천이 떨어지고 하실 말씀이 없으실텐데, 어쩌누...

왠걸요.

시간이 지날수록 하실 말씀은 산더미같아 보이고

목사님의 설교는 거기에서 한순가락 씩 떠내는 것 같이 보여지는 겁니다.

오늘의 설교제목과같은 뻔한 제목에 옛 생각이 떠올랐고

새 맛으로 설교를 들었습니다.

감사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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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21, 2010
*.120.170.243

윤희수 씨,

늦게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이

윤희수 씨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군요.

겨우 1년 반밖에 안 됐으면서도

다비아의 내외적인 전체 맥락을 다 뚫고 있네요.

다비아와 접목되기 오래 전부터

준비가 되어 있던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분들이 곳곳에 많지만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이런저런 사장이 많지요.

어쨌든지 기독교 2천년 역사의 숨결을 가까이 들으면서

오늘 우리가 당면한 삶의 자리에 투철하고,

종말론적 희망을 놓치지 않는

이 구도의 길을 자-알 가봅시다.

수련회 준비가 수고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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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July 22, 2010
*.157.0.82

에이콘... 그냥 덮어놓고 "형상" 이 아니라 질료형상론의 그 "형상" 이군요...

 

형상에 대한 이해를 다시금 새롭게 하게 됩니다...

 

"형상" 을 보면서 신학과 철학은 함께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를 통해서 바울도 덮어 놓고 복음이 아니라 헬레니즘과 진지한 대화를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까요...

 

좋은 설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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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22, 2010
*.120.170.243

첫날처럼 님,

'에이콘 ...'을 언듯 '에어콘'으로 읽었어요.

형상 개념만이 아니라

성서와 신학의 많은 개념이 철학을 배경으로 둡니다.

삼위일체도 플라톤 철학과 깊이 연대해 있어요.

신학이 무조건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건 아니에요.

필요한 것을 받아들였구요.

때에 따라서는 신학이 철학에게 영향을 끼치고 했답니다.

성서와 신학이 알 수 없는 이 세상의 치열한 '삶의 자리'에서 나왔다면

당연히 철학과의 관계를 뗄 수가 없지요.

철학도 인간과 역사를 보는 눈이니까요.

덮다고 너무 에어콘 많이 틀지 말고,

운동도 하면서 여름을 잘 지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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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July 23, 2010
*.179.74.25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목사님의 설교를 이렇게 터놓고 토론하는 곳이 여기 말고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설령 목사님의 설교가 정말 들어줄 수 없는 설교였다할지라도

무어라 한마디라도 하면

마치 하나님께 대드는 불경한 놈 취급하는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지요.

 

그래서 전 다비아가 좋습니다.

에이콘, 에어콘 왠지 관계가 깊은 것 같습니다.

우릴 시원하게 해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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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23, 2010
*.120.170.243

눈사람 님,

안녕하시겠지요.

다비아의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니

다행입니다.

어디 휴가라도 다녀오셔야지요?

복더위, 건강하게 잘 지내세요.

좋은 주말을 맞으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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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Jordan

July 29, 2010
*.200.198.111

저는 진보와 보수가 대결구도라고 생각했던 꼴통보수입니다. 물론 목사님의 모든 의견에 찬성하지는 않습니다 - 중간에 이해하기 쉽게 화이트헤드와 노자등 예를 드신 부분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복음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드러내는 목사님을 존경합니다. 마이클호튼의 지적대로 지금의 복음주의는 진보, 보수할 것 없이 그리스도없는 기독교가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제대로 드러내는 것이 설교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하는데, 설교에서부터 하나님의 위치가 사라지고 있다는 데에 위기를 느낍니다. 말씀을 진지하게 정보로서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닫고 그 말씀대로 살기를 몸부림쳐 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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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30, 2010
*.120.170.243

조단 님,

오늘 두번이나 제 설교글에 대글을 다셨군요.

목사님이시네요.

케리그마 앞에서는 사실

진보도, 보수도 없습니다.

그렇지요? ㅎㅎ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경험하고 하나 되는 길에

우리 친구처럼 어우러져 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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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은나라

September 22, 2016
*.105.196.251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라는 설교가 있으면 한번 읽어보고 싶어서 뒤지다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군가? 가 비슷한 내용일거 같아서 읽다가 오늘도 보석하나 캤습니다.ㅎ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이해가 안가서 몇년동안이나 책도 보고, 설명도 듣고, 설교도 들어봤지만,

도대체가 이해가 안가서 나중으로 미뤄두었는데..

오늘 이 설교를 통해서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이덱거의 존재에 대한 개념도 덩달아 이해하게 되네요.

물론 다는 아니고, 그냥 겉 껍데기라도 알게 되서 감사할 뿐입니다.

어떤 모양인지 알았으니, 차츰 기회가 되면 그안의 맛도 알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감사드립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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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은나라

September 22, 2016
*.105.196.251

'화이트 헤드의 과정'은 좀더 알고 싶으네요.
그 과정이 어떻게 형상과 연결이 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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