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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장이 하나님

성령강림절 조회 수 22934 추천 수 4 2010.09.06 11:3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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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예레미야 18:1-11 

토기장이 하나님

(렘 18:1-11)

 

     흙을 빚어서 그릇을 만드는 사람을 도공이라고 합니다. 옹기장이, 또는 토기장이라고도 합니다. 똑같이 흙을 재료로 한다고 해도 무엇을 첨가하며, 그것을 굽는 온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 질그릇의 명칭이 토기, 도기, 자기로 달라집니다. 자기의 품질이 가장 높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고려청자나 백자가 유명합니다. 일본의 도자기도 유명한데,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백제의 도공들이 시조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공들의 작업은 신기합니다. 빙글 도는 녹로에 진흙을 올려놓고 그릇의 모양을 만드는 작업도 그렇고, 불을 지피는 작업도 그렇습니다.

     예레미야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비유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은 토기장의 손에 있는 진흙처럼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고 합니다.(6절) 예레미야는 실제로 토기장이 집에서 어떻게 토기가 만들어지는지를 보았습니다. 흙이 원한다고 해서 어떤 용도의 그릇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판단의 주체는 토기장이입니다. 토기장이가 마음에 안 들면 그릇을 만들었다가도 부숴버립니다. 예레미야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민족이나 국가를 부수거나 멸하려고 생각했다가 그 민족이 악에서 돌이키면 재앙을 거두신다고 합니다. 거꾸로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지만 악한 것이 보이면 그 뜻을 거둔다는 것입니다.

     토기장이의 작업을 좀더 생각해보십시오. 토기장이는 좋은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 우선 좋은 흙을 찾습니다. 아무리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어도 흙이 나쁘면 만들 수가 없습니다. 좋은 흙이라고 생각해서 물로 반죽을 하고 보았더니 나쁜 것들이 포함되었다면 당연히 포기합니다. 그릇을 만들다가 중간에 부수기도 하고, 불에 구워낸 다음에도 부수기도 합니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흙이 반죽을 할수록 좋은 흙으로 나타난다면 당연히 좋은 작품을 만들겠지요. 중요한 것은 흙이 토기장의 눈에 맞는지 아닌지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거나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원래 내릴 계획이었던 복을 거두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는 물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가 중간에 계획을 바꿔서 질그릇을 깨기도 하고, 다시 좋은 그릇으로 만들듯이 이스라엘의 운명을 당신의 뜻대로 정하신다는 겁니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토기장이에 대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 9:21) 이 구절은 사 29:16, 45:9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이사야, 바울 모두 토기장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절대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성

     이런 성서의 가르침 앞에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별로 아는 것도 없고 문명이 미개하던 옛날 사람들은 하나님을 절대적인 존재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고 말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절대성보다는 인간의 절대성에 신뢰가 갑니다. 인간이 못할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인간의 무의식까지 통제하고, 우주여행도 가능합니다. 경제력과 군사력만 있으면 세계를 지배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미래는 순전히 인간 자신의 손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토기장이와 같이 절대적인 존재로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며칠 전에도 호킹 박사는 이 세상의 창조를 신의 능력이 아니라 중력의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말하는 것은 철없는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절대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논리이겠지요. 유아적인 세계관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의 비판에 일리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간혹 정신적으로 미숙한 사람들의 도피처처럼 생각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하나님은 폭군이나 옥황상제처럼 보입니다. 조금만 잘못을 해도 불호령을 내리는 분입니다. 기독교 영성이 죄책감과 동일시되기도 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외로움이나 허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종교적 욕구와 일치시키려는 것입니다. 어떤 신자들은 영육이원론에 빠져서 자기의 삶을 혐오하기도 합니다. 이런 미숙한 신앙에 대한 반성은 이미 오랜 전에 나왔습니다. 아돌프 히틀러 제거 결사단체에 가입했다가 체포되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에 처형당한 본회퍼는 기독교 신앙이 이제는 성숙한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성숙한 방식으로 대답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철부지 아이들의 요청을 기계적으로 들어주는 신으로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의 주장은 옳습니다. 순전하다는 뜻의 어린아이가 아니라 유치하고 미숙하다는 뜻의 어린아이의 세계관에 머물면 안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숙한 시대에 역사 앞에서 성숙한 자세로 책임 있게 판단하고 살아야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유일한 분이라는 예레미야를 비롯한 성서기자들의 일치된 가르침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의 근거가 무엇일까요?

     진흙과 토기장이의 비유에 대한 예레미야의 말을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보십시오. 토기장이는 녹로 위에 진흙을 올려놓고 그릇을 빚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진흙을 모두 뭉개고 그 진흙으로 다른 그릇을 만듭니다. 진흙의 입장에서는 무엇이 문제인지 모릅니다. 언제 어떻게 뭉개질지 모릅니다. 그 기준은 진흙에게 있는 게 아니라 토기장이에게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사실을 역사에서 발견했습니다. 이스라엘과 주변 여러 나라의 역사가 마치 토기장이의 손에 들린 진흙과 같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잘 나가다가 쉽게 뭉개지는 나라가 있습니다. 형편없던 나라가 강한 나라가 되는 것도 보았습니다. 인간의 계산에 따르면 강한 나라가 계속 강해져야 하고, 약한 나라는 늘 그래야만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역사는 다르게 흘렀습니다. 그 역사에 인간이 계산해낼 수 없는 어떤 힘이 개입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어떤 힘이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이건 그렇게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와 역사를 직면하면 그대로 보이는 것입니다. 지난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나라와 민족이 나타났다 없어졌다 했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미국의 힘이 영원히 세계를 지배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녹로 위에서 돌아가는 진흙과 같습니다. 어느 한 순간에 뭉개질지 모릅니다.

     개인의 운명도 비슷합니다. 여러분들이 계획적으로 인생을 살아가겠지만 계획대로 되는 게 많지 않을 겁니다. 겉으로는 계획대로 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원하는 대학교에 가고,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고, 자녀들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키울 수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실제로 그렇게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원에서 자기의 운명이 자기의 뜻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계획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만나고, 그래서 행복하게도 살고, 또는 불행하게도 삽니다. 행복한 조건 가운데서도 실제로는 불행하게 살고, 불행한 조건 가운데서도 행복하게 살기도 합니다.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선택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우리의 선택을 넘어서는 우연한 힘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이런 것들을 결정하는 어떤 힘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여기까지 동의한다고 해도 인간이 토기장이의 손에 숙명적으로 묶여 있는 진흙이라는 말을 기분 나쁘게 생각할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토기장이 이야기는 우리의 신세가 진흙처럼 보잘 것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잡혀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예술가입니다. 그분의 손에 잡히면 진흙도 예술품이 됩니다. 수채, 유채 등의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분들을 보셨지요? 재료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예술가의 손에 들리면 놀라운 작품이 됩니다. 예술가 앞에서 그 재료는 무기력할수록 좋습니다. 재료가 나서서 잘난 척하면 예술가의 창조행위는 발휘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토기장이라는 예레미야의 가르침은 우리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하나님의 창조성에까지 높이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에 놓인 존재들이라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길을 돌이키고 기다릴 것

     위의 설명으로 모든 질문이 깨끗이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계획과 예상을 뛰어넘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분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진흙인 우리를 하나님이 예술품으로 만들 날만 무조건 기다릴 뿐이냐, 하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골방에 앉아서 신학적인 이론을 전개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실제 삶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들어 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은 구체적인 삶의 문제에 토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연관된 문제를 알려면 예레미야가 처한 삶의 자리가 어떤지를 살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아시리아가 멸망하기 시작한 기원전 627년부터 시작해서 유대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한 기원전 587년 이후 10년까지, 전체적으로 대략 40년 동안 예언활동을 한 사람입니다. 그 시기는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구 제국인 아시리아가 급속하게 몰락하고, 신흥 제국 바벨론이 힘을 뻗치고 있었습니다. 이런 국제 정세 속에서 유대 왕들은 자생의 길을 각가지로 모색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요시아의 개혁 운동입니다. 그 개혁운동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유대 왕들은 이집트의 도움으로 바벨론을 대항하는 외교정책을 택했습니다. 당시 귀족들도 그런 정책을 전적으로 지지했습니다. 하나님의 신탁을 전하는 예언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유대를 지킬 것이라고 낙관적인 예언을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정반대의 예언을 했습니다. 유대는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져 70년 동안 식민지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당시 힘을 갖고 있던 정치인들, 그리고 다른 예언자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였습니다. 왕과 백성들이 누구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을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사람들은 거짓말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거라는 말에 솔깃해하기 마련입니다. 어둡고 불편한 현실을 그대로 전하는 말에 귀를 막고 싶습니다. 아무도 예레미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완전히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어떤 때는 죽음 직전까지 몰린 적도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눈에 유대의 멸망은 분명해보였습니다. 그것이 그의 가슴을 도려내는 것과 같았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유대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약속을 맺으셨습니다.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겠으며, 가나안 땅을 후손들에게 주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백성이, 선택된 민족이 지금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걸까요? 예레미야가 얻은 대답이 오늘 설교 본문입니다. 하나님은 진흙의 운명을 결정하는 토기장이와 같습니다. 진흙인 유대는 뭉개질 운명에 처했습니다. 발버둥 친다고 해서 그 운명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유대 왕, 귀족, 예언자, 백성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신앙을 모두 포기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장들도 많았습니다. 예레미야만이 아니라 수많은 예언자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신앙 형식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문제는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듯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국제 정치적인 위기는 외교력으로 풀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기복신앙과 정치공학으로 문제를 헤쳐 나가려고 했습니다. 오늘도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삶의 내용은 없이 오직 경제만능주의와 꼼수정치학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나름으로 진정성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공허한 담론들입니다. 거짓 예언들입니다.

     예레미야는 그 시대를 향해서 이렇게 외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세워 너희를 치려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하셨다.”(11절) 유대 나라가 토기장이인 하나님이 좋은 그릇을 만들 수 있는 좋은 진흙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입니다. 그릇을 만드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전권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또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채 막연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토기장이고, 우리는 진흙입니다. 우리가 어떤 그릇으로 빚어질까요? 아니면 뭉개지고 말까요? 하나님께로 우리 삶의 방향을 실제로 돌이키고, 그분의 창조 섭리를, 즉 구원 섭리를 기다리십시오. (성령강림절 후 열다섯 주일, 9월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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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방랑자

September 07, 2010
*.109.153.0

"우리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에 놓인 존재들이라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부끄럽기도하고 부럽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영성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수련회때와 이번주 예배후 시간에 목사님께선 자신의 무화에 대해, 마치 이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아무 흔적도 없게 되고 싶다는 말씀을 얼핏 들은것 같습니다.

모두가 일맥상통하는 동일한 영적 깊이에서 나올수 있는 고백인 듯 합니다

근데 전 참 이상하게도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을 생각할때마다 허무하단 생각이 자꾸 듭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고될수 밖에 없는 삶, 억겁의 시간앞에 짧고 흔적없이 사라질 허무한 인생,

차라리 창조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것 같은데 하나님은 왜 우리를 있게 하셨는지...

세상에서 무화되는게 우리의 목표라면 우리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런 이상한 허무함에 사로 잡힌 자에겐 어떤 영적인 문제가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언제간 저의 영성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안에 붙들려 있다는 놀라움으로 변화될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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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7, 2010
*.120.170.243

방랑자 님,

아주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셨어요.

삶은 고해라는 사실을 옳습니다.

실제로 허무하기도 하구요.

이 세상에는 잔인한 일들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사랑을 부정하는 듯한 일들입니다.

신학은 이 주제를 신정론에 다룬다는 것을

지난 수련회 때 설명했습니다.

그걸 다시 듣고 싶은 것은 아니지요?

하나님의 절대능력에 휩싸이는 영성에 대해서 알고 싶은 거지요?

내가 이미 그런 영성에 들어갔다는 뜻으로

위의 설교를 한 건 아니에요.

예레미야의 영성이라고 하는 게 좋겠군요.

그것이 무엇지를 설명한 것뿐이에요.

지난 주일 예배 후 질문 시간에

도도아빠 님이 한 이야기와 연결되는군요.

토기장이가 생명의 완벽한 예술가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냐고 했지요.

내 대답은 그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거였구요.

여기 젊은 엄마 암환자가 있다고 합시다.

가족을 남기고 먼저 죽어야 할 운명이 얼마나 비참하고 절망적입니까?

그런데요.

그 여자가 어느 순간에 놀라운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었어요.

그게 가능하답니다.

착각이 아니라 실제로 가능한 거에요.

35년의 삶만으로도,

이제 남보다 훨씬 먼저 떠나야 할 순간에,

그 35년이 자기의 존재 전체를 규정하게 되는 겁니다.

순간이 영원과 만나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시간이 없어요.

아니 그것 너머에 계시죠.

그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룬다면

우리의 지금 삶은 영원으로 흡수되는 겁니다.

이게 단순히 이론이 아니라 실제라는 것을 기억하세요.

방랑자 님도 한발 한발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빠져들 겁니다.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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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September 08, 2010
*.251.192.155

예전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나의 삶을 주관하신다..라는 생각만 하다가

성숙한 신앙은 역사적 관점, 거시적 관점으로 하나님의 주관하심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여러 신학자들의 시각 앞에서 예전의 개인적인 부분에 대한 신앙을 접어두거나

가책을 느끼며 하나님의 눈은 역시 큰 거라는 인정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어쩌면 역사의 큰 흐름 앞에 무시되다시피 하는 개인의 인생들에 대한 고려를 꺼낼 수 없었습니다.

그릇 이야기가 나와서인데 마치 토기장이라기보다는 식기세척기처럼

나는 그냥 세척되는 기계 안의 한 그릇일 수 있다는 생각.. 뭐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손길에 그릇 하나가 지음을 받는다는 목사님의 설교에 다시 마음을 고쳐 먹네요.

어쩌면 관점의 차이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설교 중에 미미한(?) 한 문장에서인데요.

"예레미야는 이 사실을 역사에서 발견하였습니다...."

이 문장이 참 마음에 듭니다.

"예레미야는 이 사실을 한 인생에서 발견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사실을 들의 풀 한 포기에서 발견하였습니다..."

마음에 많은 위로가 되는군요.

'이 사실'은 하나님이 토기장이라는 것이고, '예레미야'는 이 사실을 볼 수 있는 자라는 거...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이든, 시골의 한 범부의 삶이든...

'이 사실', '예레미야의 눈' 이면  그 분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기다릴 수 있을 겁니다...

주님, 그냥 눈을 좀, 가끔이라도 열어주세요..

볼 수 있으면 주님의 섭리를 기다리고 따르는 것에 힘이 될 겁니다.

우리를 불쌍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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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8, 2010
*.120.170.243

ㅇㅎㅎㅎ

식기 세척기 하나님!

지금 유니스 님은 천천히

하나님에 대한 그림을 그려가고 있는 중이에요.

그림에 조예가 깊은 탓인지

하나님 그림 그리기에도 진도가 빠르네요.

그림은 손으로가 아니라 마음과 눈으로 그릴 겁니다.

우리도 예언자들의 마음과 눈이 필요하겠군요.

사도들의 눈이 필요하구요.

예수 그리스도의 눈도 가능할까요?

그건 아니겠군요.

예수님은 눈 자체니까요.

주님이 유니스 님의 기도를 좀 들어주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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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춰니

September 09, 2010
*.227.99.107

"... 좋은 진흙이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부분은 거기까지 입니다."

 

좋은 진흙이 되기 위한 길들을 많은 설교자들이 선포합니다.

어떤 설교자는 그저 좋은 진흙이 되라고만 하기도 합니다.

 

청중은 좋은 진흙이 되어야 함을 인식합니다.

그런데 좋은 진흙이 되기 위해 각자 자기 나름대로

행동한다는 것에 문제가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마치 사사시대의 평가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행하는 시대가

 제가 속한 시대이고 저도 그러한 청중들의 한명이기도 한것 같습니다.

좋은 진흙이 되기위하여 생명의 영의 인도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목사님이 뵙고싶어지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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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0, 2010
*.120.170.243

춰니 님,

안녕하세요?

혹시 나를 만난 적이 있으신가요?

느낌이 신학생 같은데요.

어쨌든지 반갑습니다.

좋은 진흙에 대한 지적은 옳습니다.

모든 설교자들이 좋은 진흙이 되라고 설교합니다.

때로는 권면하고, 때로는 닦달하고, 때로는 위협합니다.

제 설교도 역시 그런 설교 중의 하나처럼 들릴 수 있어요.

사실은 목사의 설교가 어떤 것이든지 기본만 되어 있으면 큰 차이가 없어요.

하나님의 구원 통치와 그 앞에 있어야 할 우리의 자세를 말하는 거니까요.

두 가지만 설명해도 될까요?

1) 좋은 진흙이 된다는 사실에서 우리의 책임에 방점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전권에 방점이 있는 겁니다.

2) 결국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따라서 궁극적인 판단을 받게 될 겁니다.

결국 문제는 우리의 판단이 옳으냐 하는 거겠지요.

옳게 판단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서와 신학을 공부하는 거겠지요.

춰니 님이 좋은 진흙 이야기를 꺼내니

여러 종류의 밭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가 생각나는군요.

우리가 할만큼 최선을 다 하고,

그리고 그분의 섭리와 심판을 기다려 봅시다.

꿈처럼 단 잠의 세계로 들어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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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춰니

September 10, 2010
*.227.99.107

저는 작년에 목사님을 찾아뵈었던

신학생중 한명입니다.^^

그때는 숫기가 없어서(지금도 그렇지만)

많은 나눔을 갖지 못했었는데,

아쉬운 마음에 그 뒤로 이곳에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주시는 설교들을 통해

하나님의 전권에 방점이 찍혀있다는 사실을

새롭고 기쁘게 알아가고 있습니다.

정말 꿈처럼 단잠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 때문에

소풍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그날이 기다려집니다.

 

올해가 가기전에 샘터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싶은 저의 소망이 꼭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 평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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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0, 2010
*.120.170.243

춰니 님,

그렇군요.

미안하게도 내가 기억을 못합니다.

샘터교회에 한번 들리면

그때 사진이라도 같이 찍읍시다.

신학공부 열심히 하세요.

다른 건 접어두더라도

거기에 인생을 걸만한 어떤 것이 있답니다.

이와 신학공부 하는 거

주변적인 거가 아니라

핵심적인 거를 공부하세요.

세계 신학의 매인 스트림을 따라가라는 거지요.

2천년, 또는 3천년의 역사에

다층적으로 새겨진 신학의 알맹이를 따라가는 거에요.

주변적인 것에 혹 하다가는

길을 잃을 수 있어요.

한국교회는 주변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긴 상태라는 거는 알지요?

책읽기가 좋아지는 계절이 옵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신학책 읽기의 즐거움으로 들어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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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7]paul

September 11, 2010
*.190.43.172

"토기장이인 하나님이 좋은 그릇을 만들 수 있는 좋은 진흙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입니다. 그릇을 만드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전권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또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채 막연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제가 가장 궁금했던 구절인데 그만 마음이 다른데 (면접) 가 있는 바람에 댓글이 늦어졌습니다.


늘 이해가 갈듯하면서도 손에 와 닿지 않는게 토기장이와 질그릇의 비유, 칼빈의 예정설과 자유의지, 죄의 기원, 행함과 믿음, 삶의 의미였습니다.


토기장이가 질 그릇을 굽기 나름이라면 누구는 오강이 되고 누구는 밥그릇이 되나.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셨다면 그 죄는 하나님 것인지 바로의 것인지. 모든것이 하나님 뜻대로 예정되어 있다면 인간이 죄 짓는 것도 예정되어 있는 것인지. 어차피 주님의 때에 부활하여 영생할 텐데 현세의 삶은 왜 필요한지 -- 불교에서처럼 업도 아니고...


목사님의 글을 읽어 보니 모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지만 하나님께 귀히 쓰이기 위해 인간으로써의 의무를 --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 다 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제가 제대로 이해했나요?


목사님 시간 되시면 좀 더 자세한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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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1, 2010
*.120.170.243

Paul 님,

하나님의 절대성과 인간의 자유,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선택에 대한 문제는

아무도 딱 떨어지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선택과 상관없이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사실도 옳고,

그분이 통치할 수 있도록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도 옳습니다.

이 두 가지가 각각으로는 옳는데,

함께 엮어놓으면 딜레마에 빠집니다.

두 가지를 똑같은 무게로 놓고 보면 안 됩니다.

전자에 초점을 놓든지

아니면 후자에 초점을 놓아야 합니다.

큰 흐름으로만 본다면

하나님의 행위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없으나,

하나님의 행위에 우리가 동참할 책임은 있습니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실제 신앙생활에서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라는 빛에 서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보입니다.

우리의 게으름이나 의지박약으로

해야 할 일을 못해서 문제이지

어떤 방향만은 분명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수학 공식처럼 계산해서 생각하지 마세요.

영적인 역동성에 들어가면 저절로 해결이 될 겁니다.

좋은 주일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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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7]paul

September 12, 2010
*.190.43.172

목사님의 설명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설명을 듣고 목사님 말씀처럼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조금 더 뚜렷해 졌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인간의 이성으로 답답한 마음도 남아있네요. 언제 시간 나시면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아님 혹시 제가 몰라서 그렇지 이 부분에 대해서 글이 올라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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