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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믿음

성령강림절 조회 수 19845 추천 수 5 2010.10.19 00:2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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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누가복음 18:1-8 

기도와 믿음

(눅 18:1-8), 10월17일, 성령강림절 후 21째 주일

 

    재판장과 과부 이야기

     오늘 설교 본문인 눅 18:1-8절에 나오는 이야기는 누가 읽어도 아무런 혼란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주제가 분명해보입니다. 주제는 첫 구절에 나옵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려고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에 얽힌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과부가 재판관을 찾아가서 원한을 풀어달라고 조르다가 결국은 해결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재판장, 곧 판사와 과부는 사회적 신분에서 천지차이가 납니다. 판사는 명예와 권력을 손에 쥔 사람인 반면에 과부는 고아와 마찬가지로 당시 사회에서 가장 힘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이 판사를 가리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 판사가 이방인이었다는 뜻입니다. 아마 로마에서 파송한 고위관리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을 무시한다는 말은 뇌물을 받거나 권력자의 눈치를 보면서 법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과부는 유대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본문이 그걸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않지만 이방인 여자였다면 그걸 밝혔을 겁니다. 성서에 나오는 과부는 거의 가난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 과부라고 한다면 송사문제를 들고 이방인 판사에게 가기 전에 먼저 유대 랍비나 원로들에게 가야만 했습니다. 가서 허탕을 쳤겠지요. 유대인 과부가 오죽했으면 이방인이면서 평판이 좋지 못한 판사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겠습니까?

     판사는 과부의 요청을 처음 받았을 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에게는 이 과부의 일이 신경쓸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청을 들어주기 시작하면 끝도 없을 것이고, 과부의 원한을 해결해준다 해도 돈 나올 데도 없을 테니 말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바쁘기도 해겠지요. 이 판사는 이런저런 핑계로 과부와 같은 이들의 요구를 못들은 체 하는 우리를 대표합니다. 절대고립무원의 상태였던 과부가 끝장을 보자는 심정으로 자꾸 찾아오자 판사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하나님도 두렵지 않고 사람도 무시했지만 이 과부가 번거롭게 하는 것만은 참기 힘들었다고 합니다.(눅 18:5)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해석하십니다. 불의한 재판장도 생각을 바꾸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고 이르십니다. 재판장이 과부의 끈질긴 호소를 외면할 수 없었듯이 하나님도 택하신 자들의 호소를 들으신다고 하셨다. 7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이런 구절은 소위 ‘강청기도’의 본문으로 사용됩니다. 뜨뜻미지근한 태도가 아니라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태도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눅 11:1-13절에도 나옵니다. 1-4절은 주기도이고, 5-8절은 한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요청을 들어준다는 이야기입니다. 9절에 그 유명한 경구가 나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1-13절은 자식과 부모의 관계를 통해서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모든 구절이 기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런 가르침에 따라서 한국 신자들은 기도를 열정적으로 합니다. 마치 수능시험을 앞둔 학생들처럼 밤새워 기도합니다. 기도 모임도 많고, 기도 훈련도 있고, 각종 기도 프로그램도 제시됩니다. 기도의 응답이 바로 신앙의 척도처럼 받아들여집니다. 더 나가서 기도가 ‘열려라 참깨!’와 같은 주문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일종의 기도 만능주의가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기도 만능주의와 기도 냉소주의

     이와는 반대로 기도를 냉소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장 극단적인 생각은 기도를 심리적인 자기 암시라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에도 일리가 있긴 합니다. 유사 심리치료 훈련에서는 “나는 할 수 있다.”는 구호를 반복해서 외치게 합니다. 그것이 자신감을 키워준다고 합니다. 요즘은 이런 걸 따라가는 교회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잘못된 기도현상을 이유로 기도를 무시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취할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온건한 입장의 사람들은 바쁘다는 핑계를 댑니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기도는 무슨 기도냐, 하는 식입니다. 그냥 열심히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느냐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기도를 하고 싶어도 기도가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티브이 드라마나 슈퍼스타 K2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관심이 있는 것을 많이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원한을 푼 과부에 대한 오늘 설교의 성경 본문이 불편하게 생각됩니다.

     기도 만능주의와 기도 냉소주의가 한국교회에서 충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중간의 한 지점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이쪽으로 치우쳤다가 다른 한때는 저쪽으로 치우치기도 합니다.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기 힘들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대개의 신자들은 기도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인정하면서도 일상에서 별로 절박한 일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절박한 용무가 발생하면 기도하겠지요. 그런 문제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사라지면 다시 기도 없는 삶으로 돌아갑니다.

     기도를 한다는 것이 일정한 시간에 기도를 한다거나 기도 모임에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여건이 된다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습니다만 더 중요한 것은 기도의 영성을 갖추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자기 형편에 맞게 기도를 하게 됩니다. 기도의 영성은 하나님께 자기의 삶을 실제로 맡기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기도의 영성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내면적인 능력입니다. 하나님께 자기의 삶을 온전히 맡기는 사람이 바로 기도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기도를 많이 한다는 자랑 아닌 자랑을 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무엇을 이루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자기의 욕망을 실현해나가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에서 끊임없이 성찰하는 영적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실현하려는 기도는 자기 연민의 배출입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의 전형입니다. 참된 기도의 영성은 하나님의 뜻이 임하기를 바라는 데에 무게가 있습니다. 성서와 주기도가 말하는 기도의 본질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재판장을 졸랐다는 과부 이야기를 다시 보십시오.

     먼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기도한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은 기도라기보다는 철부지의 떼쓰기와 다를 게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과부가 이방인 재판장을 끈질기게 찾아가서 조른 건 분명합니다. 재판장이 그녀의 행동이 귀찮아서 원한을 풀어주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곤란합니다. 재판장은 공권력을 통해서 이 과부를 처리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요즘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억울한 일을 법이 해결해주나요? 그럴 때도 있지만 오히려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헛소리가 아닙니다. 특히 지금처럼 돈으로 변호사를 선임해야 하는 사법 제도 아래서는 이런 현상이 더 강화되고 있습니다. 재판장과 과부 비유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는 뜻은 아닙니다. 현실적이지 않을 뿐입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지만 일반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런 특별한 경우의 일을 근거로 강청기도의 정당성을 조장할 수는 없습니다. 이 비유는 전혀 다른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인자가 올 때

     마지막 8절 후반절은 전체 이야기와 약간 어긋나 보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그것보다는 차라리 8절 전반절인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고 끝나는 게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인자가 올 때라는 구절을 통해서 과부 이야기의 핵심을 전합니다. 인자는 세상의 마지막 때 심판자로 오실 이를 가리키는 묵시문학 용어입니다. 인자는 마지막 때 세상에서 참된 정의를 세우고 새로운 세상을 일으킵니다. 그 세상은 이 세상과 완전히 다릅니다. 판사가 법을 법대로 지켜서 만들 수 있는 세상과도 다릅니다. 예수님이 처음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가 바로 인자가 세울 새로운 세상입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이런 세상에 대한 믿음을 보기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가 안고 있는 영적 긴장감이 있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신앙적 화두는 인자이신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주님이 곧 재림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구성원들이 살아 있을 때 재림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초기 그리스도교가 사유재산을 포기하는 공동체처럼 묘사된 구절도 있습니다. 1992년에 우리나라에서 크게 파장을 일으킨 ‘다미선교회’ 사건처럼 예수님이 실제로 곧 재림하신다면 학교에 갈 필요도 없고, 자기 집을 소유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재림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뭐가 잘못된 것인가 하는 질문이 쏟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로 인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그런 상황을 배경에 놓고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를 전한 겁니다.

     이런 사실을 배경에 놓고 본다면 이 비유가 무엇을 말하는지 분명해집니다. 우선 이것이 어떤 것을 지시하는 비유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십시오. 과부의 원한은 예수의 재림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기다림입니다. 과부는 원한을 풀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우습게 생각하는 재판장을 겁 없이, 또 무모하게 계속해서 찾아갔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의 재림은 존재근거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모든 것이 해체됩니다. 재림은 곧 그리스도인들에게 과부의 원한과 똑같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8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무슨 말인가요? “내가 속히 오리라.”와 똑같은 표현입니다.(계 22:12 참조) 재림은 현실에서 지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속히 올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현실과 약속 사이에 갭이 있습니다. 갭을 넘어서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에서만, 그것으로만 초기 그리스도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 어디에도 호소할 곳이 없었던 과부의 심정으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에서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재림의 지연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영적 긴장을 오늘 우리도 똑같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혹시 그런 경험이 없으신가요?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신앙을 모르면서도 신앙생활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런 게 훨씬 편리합니다. 보십시오. 인자의 때와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간절한 기다림에 대한 과부 이야기를 강청기도로 둔갑시키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해결될 수 있는 요술방망이처럼 오해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종교적이고 세속적인 요구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걸 좋아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영적 문제의식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재림의 지연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대개는 일상에 필요한 것을 채워가라는 세상의 요구와 타협합니다. 그게 그럴듯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의 경쟁력을 키우는 데 모든 삶의 에너지를 쏟습니다. 교회도 개별 교회의 성장에만 교회의 동력을 쏟습니다. 그렇게 모두 경쟁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부의 영적 절박성입니다. 이 세상의 완전한 변화를 향한 열망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인자의 재림이 지체되고 있지만, 그리고 세상이 새로워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우리는 인자가 바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이런 열망이 곧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에서만 우리는 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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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상수리

October 19, 2010
*.99.193.27

믿음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믿음은 커야만 하고, 무릎이 달도록 기도해야만 하는 강박증에서-실제로 그렇지는 않습니다-자유의 기쁨을 맛봅니다.

최근에 목사님 말씀들을 곰씹어 보면서 기독교에 대한 새롭고 놀라운 사실을 배워 나가고 있습니다.

원래 교회생활에 충실하지 못해 갈때마다 새로운 마음을 다지다가 늘 늙은이(?)와 같은 마음으로 돌아오곤 하는데...

정말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다시 알아가야 한다는 기쁨이 생깁니다.

그렇게 놓고보니, 재림에 대한 영적각성이 저의 삶속에서 아직 경험되지 않은 새로운 무엇이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놀라운 말씀에 다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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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19, 2010
*.120.170.243

상수리 님,

믿음의 강박증이라는 표현이

모든 현상을 적나라하게 설명해주고 있군요.

그래도 그게 좋다는 신자들이 많으니 어쩝니까?ㅎㅎ

내가 놀라운 말씀을 전한 거는 아니구요,

그냥 기독교의 중심을 있는 그대로 전한 겁니다.

그 사실이 전달되었다니,

설교를 준비하고 선포한 저도

최소한의 책임을 감당한 것 같아서

마음이 기쁘군요.

매일이 놀라운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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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모퉁이돌

October 19, 2010
*.76.90.157

오랜만에 들려서 설교말씀 읽고 갑니다.

요즘 신학적으로 공부하고 성찰할 기회도 없이 설교만 많이 하다보니 어딘지 모를 공허감을 느끼던  차에

정말 깊이와 영감이 풍부한 설교를 읽고 속이 후련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혼자만 보기 아까운 내용입니다.

좋은 내용이라 살짝 가져가려다가 코멘트 남깁니다.

최근에 여러 목사님들 설교 중에 가장 속이 후련해지고 가슴 뚫리게 만드는 설교였던 것 같습니다.

저도 언젠가는 이런 설교를 할 수 있기를,  또한 마음 껏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과부처럼 기대해봅니다.

한국교회의 갱신을 위해 무엇보다도 강단의 갱신이 절실히 필요함을 더욱 간절히 느낍니다.

강청기도류의 영성이 아니라 진정한 기독교의 종말론적 영성이 강단을 지배하는 날이 속히 오기를....

감사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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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19, 2010
*.120.170.243

모퉁이돌 님이 목사님이시군요.

회원정보 란을 살짝 보니 한창 젊은 시절을 보내고 있네요.

저도 그 시절이 생생하게 기억나네요.

세월은 금새 지나갑니다.

아마 눈깜빡할 사이에

목사님도 내 나이에 이를 겁니다. ㅎㅎ

'종말론적 영성'이라고 목사님이 위 설교를 정리하셨네요.

그렇습니다.

그 사태 안으로 우리가 뛰어들어가야 합니다.

그 종말의 사건이

지금 우리 삶에 어떻게 선취되고 있는지도 눈여겨봐야하구요.

우리에게 맡겨진 말씀 선포의 사명을

무겁게 여기면서 살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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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백수광부

October 20, 2010
*.252.116.56

목사님, 안녕하세요?

기억나시나요?

네 아이를 홈스쿨로 기르는 집입니다.

그 동안 아이가 하나 늘어서 이젠 다섯 아이를 기르고 있습니다.

하하하...

샘터교회에 가보지는 못하고 항상 들어와서 설교만 읽고 갔답니다.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전체의 흐름과 문맥상 어울리지 않아 보이던 8절 마지막 부분이

항상 의문점이었는데

목사님 설교를 읽고 나니 눈이 확~ 뜨이는 기분입니다.

재림에 대한 열망, 믿음의 본질, 기도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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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0, 2010
*.120.170.243

백수광부 님,

오랜 만입니다.

기억하다마다요.

그 귀여운 아이들도 기억하구요.

한명 더 늘어서 다섯이라구요?

부럽습니다.

언제 한번 시간이 나면서 바람을 쐬고 싶을 때

대구샘터교회에 한번 오세요.

올 때는 미리 연락을 주세요.

7명이 한꺼번에 오면

밥도 더 해야하고, 주보도 더 찍어야 하니까요.

재림에 대한 열망이 없으면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한국교회에 지금 재림에 대한 열망이 살아있을까요?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기다리면 살아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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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서영준

October 20, 2010
*.214.133.126

원한 아닌 진정한 원한을 가지며...

그날까지, 주님오시기까지 믿음 변치 않고, 의심치 않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라며....

분명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좋은 말씀에 늘 감동받고 함께 이 사역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제게 힘이 됩니다. 간혹 사랑채에 목사님의 설교비평 다시 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제 나름대로 되지도 않은 소릴 좀 하는데 어쩔지 모르겠네요. 목사님의 관점에 동의하면서 다른 소릴하시는 분들에 대한 저의 소견이고 목사님에 대한 소견이기도 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더불어 오늘 말씀에 대한 저의 소견을 ....

본문에서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은 재판장의 출신에 대한 언급은 다소 의구심이 들게 하는 부분입니다.  

본문은 분명 구조를 가지고 있네요.

재판장이기는 한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으로 그를 불의한 재판장이라 했네요

과부는 말 그래로 아무런 힘도, 권력도 의지할 곳도 없는 말 그래도 그 시대의 과부고요

근데 어째서 그 과부는 그 재판관을 찾아 갔을까요? 그 재판관이 불의한 줄 알면서도.... 달리 방법이 없었겠지요

그가 불의하긴 해도 그가 재판장이니 그에게 가야만 했지요. 가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절박한 무엇이 있었겠지요

그 절박함은 원한이 될 정도로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간절한 것이었겠지요

그래서 그녀는 그놈(?0에게 가야만 했지요.

그런데 그녀가 절박하다고 해서 재판관 조차 절박할필요는 전혀 없지요. 더군다나 그는 불의한 재판관인데 들어줄리가 없지요

근데 왜 들어 주었을까요?

(나도 모르지요? 내가 그 재판관이 아니니)

분명 안들어주면 안될 무엇이 있었겠지요? 그게 뭐냐는 거예요? 자기 이름값도 못하는 재판관이라니요?

불의한 재판관이면 불의한 재판관 답게 행동을 해야 하는데 결국 들어주었단 말이죠.

들어주는 이유가 참 가관입니다. 그녀가 날 번거롭게 하니 .....허걱.....이 정도에 무너지는 재판관이라면 결코 그는 불의한 재판관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를 향하여 불의하다 했습니다. 그를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그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즉 그에게는 법이 없습니다.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습니다. 최소한 재판이란 3가지를 갖추어야 합니다. 객관성, 인간애, 종교성입니다. 객관성은 법입니다. 인간애는 말 그대로 재판에서 사람을 차별하거나 무시하면 안됩니다. 사람을 살리는 재판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종교성은 초월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재판을 잘해도 분명 인간이기에 실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신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초월적인 영역을 인정하는 종교성이 있는 재판을 하자는 것이지요.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분명 그 재판관에게는 위 3가지는 없지요. 그런 그가 과부의 열심에 넘어진다니.....

어이없음입니다.

분명 그가 불의하긴 해도 과부의 청을 들어줄 수 밖에 없는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뭐냐는 거지요?

말씀은 그의 입을 통해 말합니다.

그녀가 날 괴롭게 하니....그녀는 그를 괴롭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를 괴롭게 한 것이 무엇일까요?

단순히 열심히 부르짖고 1인시위하고 외치고 대물의 고현정처럼 했을까요?

위 3가지의 관점에서 보자면 첫째 내용이 그를 괴롭했을 것 같습니다. 과부가 가진 내용이 정당하고 객관적이지 않으면 결코 재판관 즉 불의한 재판관은 그녀을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지속적으로 그녀가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가진 원한이 정당했고 전혀 꺼릴낄 것이 없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내용의 정당성 만큼 부르짖는 자로 하여금 지속성과 용기와 믿음과 소망을 갖게 하는 것이 별로 없지요. 우리네 기도로 말할 것 같으면 그나라와 그의를 구하는 내용의 정당성과 객관성은 어떤 기도보다 훨씬 더 응답이 빠를 것 같고 칭찬듣는 내용이 되겠지요. 우리네 기도는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요. 기독교의 기도라는게 초월적인 부분이 있기에 객관성을 무조건 말하기는 어렵겠요. 하지만 그 초월적인 부분은 세번째 기준이 종교성-신앙부분에서 충분히 다룰 수 있지요.

그녀과 과부라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불의한 재판관을 괴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녀가 지속적으로 부르짖는 것만으로도 재판관의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 재판관은 불의하지 않고 착한 재판관이지요.

불의한 재판관과 비교되는 그녀의 원한의 정당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부르짖는 내가 보아도, 듣는 어떤이가 보아도, 더구나 불의한 재판관이 보아도 그 내용은 아주 객관적이었고 정당했을 것입니다. 사실 객관적이지도 않도 정당하지도 않은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자신의 어떤 무엇을 위한 내용으로 하늘의 하나님을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부르짖기란 여간 어려운게 아닙니다. 스스로가 부끄러워서라도 그렇게는 못합니다. 그런데 너무다도 다들 잘하고 있기에 신기할 뿐입니다. 여하튼 그녀의 내용은 너무나도 인간적이었고 객관적이었으며 정당하기까지 법에도 전혀 저촉되지 않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그녀는 이 한가지 소망, 원한이된 이 일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더이상 물러설 수 없었지요. 그래서 그녀는 그 내용 붙들고 괴롭게 즉 재판장을 부끄럽게 눈탱이가 푸르게되도록 그 재판장을 더 불의하게 만들었지요. 그러니 아무리 불의한 재판장이라도 그녀의 그 부르짖음과 내용앞에 견디기 어려웠지요. 어쩌면 과부의 청을 들어줌으로써 자신이 불의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지요(짐작이지만)... 불의하지만 과부의 청을 들어준 불의한 재판장, 새롭게 사람들에게 보였을 것입니다. 분명 과부는 정당한 내용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기도가 쉬이 무너지는 것은 그 내용성을 점검하게 합니다. 내 기도가 과연 말씀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내용인가?

나는 그 내용을 붙들고 주님어시는 그날까지 주님 믿고 기도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그 내용성이 주님의 재림까지,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좋지요.

우리는 우리의 기도 내용을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그 정당한 내용이 원한이 되어야 합니다.

무임승차라는 말이 있지요. 많은 사람들은 아니지만 사람들 중에는 정당성, 공의, 의를 위해 원한을 갖고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까지 합니다. 그런 일들의 대부분은 그리스도인들이지 않고 비그리스도인들이 많이들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지나고 나면 그 내용성이 옳았고 너무나도 좋아서 이루어진 열매를 고스란히 그리스도인들을 따서 먹고 얻어먹고 합니다. 말 그리대로 무임승차지요. 신학도 그렇고요. 보수주의자들이나 개혁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유주의 자유주의 하지만 학문적 발전이나 신학의 발전이 대부분 그들에게서 나오는데 지나고 나면 무임승차한 예들이 참 많습니다.

설교에서 말씀하신 것 처럼 다시오실 주님, 종말론적 신앙이 우리의 정당한 원한, 객관적 내용이 되어 낙망하지 않고 항상 기도하는 내용이 되어야 겠지요.

그리고 선택하신 자들의 원한은 단순히 재림이라고 직접적인 접근은 어떨지 생각해 봅니다.

분명 기도 본문입니다. 말 그대로 믿음으로 낙망하지 않고 정말 믿음으로 기도해야 할 것을 주님이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종말적 상황에 놓인 성도들이 가져야 할 기도의 자세는 믿음입니다. 종말까지 믿음으로....

그 내용이 재림이든 그 나라의 의이든.....말씀 앞에서 그 내용성을 보장받는 믿음으로 기도하라시네요.

더 좋은 말씀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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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0, 2010
*.120.170.243

서영준 님,

많은 걸 쓰셨네요.

수고 많았습니다.

내 생각에는 조금 축약적으로 글을 쓰시는 게

논지도 분명하게 되고,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잘 읽히게 될겁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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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서영준

October 21, 2010
*.214.133.126

고맙습니다. 좋은 지적에 감사를 드립니다. 더욱 글 읽고 쓰는데 매진하여 좋은 글이 나오도록 해야 겠습니다. 그리고 핵심을 제시하고 촌철살인같은 글,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글이 나오도록 열심을 내야 겠습니다.

 

목사님 몇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1. 본문에서 재판관이 이방인이라는 연결고리는 전혀 없어보이는데....단순히 그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만으로 이방인으로 연결을 시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보입니다.

2. 말씀에서 그 여인이 불의한 재판관으로부터 요청한 바가 해결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3. 원한을 종말적 신앙으로 보시고서 주님의 재림으로 연결하셨는데, 원한의 내용은 말 그대로 원한일것 같습니다. 그 원한의 내용은 개별적으로 다르겠지만 누가공동체가 가진 원한인지, 그 공동체 구성원들 개개인의 삶의 원한인지는 알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굳이 원한이라면 아래에서 언급하겠지만 내용의 진정성과 공정성 및 정당성을 담지한 원한 일수도 있을 텐데, 굳이 재림으로 연결한 것은 너무 많이 나간 것은 아닌지요. 재림이 아니라 할 순 없지만 본문의 구성 흐름상 그러한 것 같아서요.

재림으로 연결을 하고자 한다면 기도를 함에 있어서 믿음으로 그 날을 사모하며 그 날까지(라도) 할 수 있느냐

또는 그렇게 하는 기도가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않는 기도라고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그러해야 한다는 것 같습니다.  즉 기도란 그 내용의 정당성으로 원한을 삼고 인자가 올 때까지 믿음잃지 않고 기도하라는 말씀, 진정한 재판장이신 인자가 와서 판결하도록 원한을 갖고 기도하라는 말씀. 그러니 속히 오시라는 간절함

이러한 내용인것 같은데....

 

그래서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습니다.

어떤 상황을 보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2절은 기준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첫째, 객관성-법-상식-공정성

둘째, 사람사랑

셋째, 하나님 사랑입니다.

위 3가지는 눅18장 1-8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첫째 그가 불의 하였으니 당연히 개관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둘째 그는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셋째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기도에도 나타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과부의 원한이 해결된 것은 그녀가 가진 열심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그녀가 가진 첫째 객관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의 정당성이 재판관을 괴롭게 한 것입니다. 불의한 자를 괴롭게 하는 것은 열정이 아니라 내용성이지요.

그러므로  첫째 우리의 기도에도 내용의 진정성과 정당성이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우리의 기도는 사람을 사랑하는 내용이어야 합니다.

셋째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섬기는 것이어야 합니다. 즉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드러나시도록 해야 합니다.

이 원칙을 갖고 언제까지 기도하느냐?

주님이 오실때 까지 믿음 잃지 않고 기도해야지요. 그 내용에 종말적 신앙이 원한으로 담지되어 마라나타 신앙으로 표현된다면 더할 나위 없지요.

1. 주여 저의 기도에 주님의 나라와 그 의가 있게 하옵소서.

2. 주여 저의 기도에 사람을 사랑함이 있게 하옵소서.

3. 주여 저의 기도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게 하옵소서.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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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초신자의 특권

October 21, 2010
*.244.165.234

목사님 잘지내시죠?

설교는 늘 읽고 있었습니다.

제목이 기도와 믿음이어서

제가 요즘 지난 학기에 보류된 영미시분야에 원서내놓은 이후를 보내고 있어서

더욱더 관심있게 읽었습니다.

일상의 디테일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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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1, 2010
*.120.170.243

권 선생,

잘 지내지요?

어머님도 여전하시구요.

새학기에는 학교 문제가

기대하는 대로 잘 해결되었으면 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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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바람

October 21, 2010
*.158.188.41

목사님께서 나는 단지 성서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말한 것 뿐이라고 하신 말씀이

요즘 저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저도 분명히 성서에 집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목사님의 말씀이 새삼 새롭게 들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텍스트의 영성을 따라간다는 목사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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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1, 2010
*.120.170.243

박재진 목사님,

지금이 중요한 순간이에요.

무언가 손에 잡힐 것 같지요?

눈에 보일 듯 말 듯하지요?

이왕 설교자로 나섰으니

아마추어같이 살지 말고

프로가 되도록 최선을 다 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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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October 23, 2010
*.237.95.2

목사님,저는 과부의 간청이 종말론적인 기다림, 즉 그날에 오실 주님에 대한 열망이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그동안 기도에 대한 분분한 생각들이 하나로 통일되었습니다.

 

기도는 종말을 기다리는 열망이다.

만일 우리가 이 말씀의 의미를 깊이 있게 받아드린다면

우리 삶의 희노애락에 대해서 그리고 생사의 문제에 대해서도 얼마나 초연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성서에 등장하는 과부, 고아등.. 우리가 구제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사람들이

어떤 상징성을 갖고 성서에 등장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억압받는 자들, 소외계층에 대한 시각도 달라지는데요, 

혹시.. 그들에게 나타나는 '결핍'은 채워지지 않은 그 어떤 것의 은유가 아니었을까요?

즉, 과부의 간청처럼 '종말론적인 열망' 이 아닐까 싶은데요, 

 

물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과부, 고아등을 돌봐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도 톨스토이에 대한 말씀을 잠깐 언급하셨지만,

저도 이즘에 와서 생각되는 게,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이런 휴머니티가 너무 많이 강조되어 왔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전에 독일 안 목사님께서 천지창조그림이 '창조신앙'을 왜곡한 것 같다고 하셨는데, 저는 공감했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이 질문을 늘 안고 살게 되지만,

그러나 각자 자신의 형편에 맞는 답만 찾았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거기에는 다분히 나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가장 컸습니다.

말씀하신대로 그래서 기도응답이 관건이었는지도요.

그러나 이제 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기도>가 왜 나의 기도가 되어야 하는지도 알것 같습니다.

목사님, 제 개인적으로는 이번 말씀이 제 삶의 한 획을 긋게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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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3, 2010
*.120.170.243

라라 집사님,

집사님의 영적 그물망이

점점 구체적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군요.

기도 응답으로부터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로 우리의 관심이 옮겨지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응답이 되겠지요.

이런 신앙 안에서 우리의 삶이 가볍지만 무겁게,

무겁지만 가볍게 살아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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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서영준

October 23, 2010
*.214.133.126

목사님 몇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1. 본문에서 재판관이 이방인이라는 연결고리는 전혀 없어보이는데....단순히 그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만으로 이방인으로 연결을 시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보입니다.

2. 말씀에서 그 여인이 불의한 재판관으로부터 요청한 바가 해결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3. 원한을 종말적 신앙으로 보시고서 주님의 재림으로 연결하셨는데, 원한의 내용은 말 그대로 원한일것 같습니다. 그 원한의 내용은 개별적으로 다르겠지만 누가공동체가 가진 원한인지, 그 공동체 구성원들 개개인의 삶의 원한인지는 알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굳이 원한이라면 아래에서 언급하겠지만 내용의 진정성과 공정성 및 정당성을 담지한 원한 일수도 있을 텐데, 굳이 재림으로 연결한 것은 너무 많이 나간 것은 아닌지요. 재림이 아니라 할 순 없지만 본문의 구성 흐름상 그러한 것 같아서요.

재림으로 연결을 하고자 한다면 기도를 함에 있어서 믿음으로 그 날을 사모하며 그 날까지(라도) 할 수 있느냐

또는 그렇게 하는 기도가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않는 기도라고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그러해야 한다는 것 같습니다.  즉 기도란 그 내용의 정당성으로 원한을 삼고 인자가 올 때까지 믿음잃지 않고 기도하라는 말씀, 진정한 재판장이신 인자가 와서 판결하도록 원한을 갖고 기도하라는 말씀. 그러니 속히 오시라는 간절함

이러한 내용인것 같은데....

댓글에 회신을 부탁합니다. 좋은 시간되세요.
많은 분둘이 계속적으로 과부의 원한을 재림, 종말로 보는데 그 원한을 어찌 재판장이 들어줄 수 있는지도 동시에 궁금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분명 비유인데...그 비유에 비교하여 기도를 그 기도의 내용을 그 기도의 방법과 자세와 고백을 가르치시는 것 같은데...전혀 다르지는 않지만 그렇게 계속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잘못 본 것인지.....

제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누가공동체는 이미 이방인들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은 전통적으로 이방인 성도들을 위한 말씀인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인자개념에서 종말을 생각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정말로 그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로서 그들이 가진 원한이 종말론적 재림인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여인이 가진 원한은 무엇일까요? 그 여인은 초기성도로서 그녀가 가진 원한도 종말적 재림이라한다면 너무나도 비약이 심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비유에서 비약이 다소 필요할 수도 있지만 이런 비약은 너무 많이 뛰어버린 형국이라 할수도 있겠는데....

과부의 원한과 초기성도들의 원한이 동일하다는 근거는 없어보입니다. 무엇보다 그 과부의 원한이 재림이라는 근거는 더더욱 그러해 보입니다. 이것을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면 더 이상해 집니다.

분명 비유는 비유입니다. 몇 가지를 의도한 비유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일반적으로 비유가 의도하는 바는 한가지이겠지요.  그렇다면 이 비유가 의도하는 바는 무엇보다 1절때문에 나온 비유입니다. 1절은 기도입니다. 즉 기도하라는 말이지요. 기도하되 낙망하지 말라는 거지요. 근데 그 원한이 뭐냐는 거지요? 원한이 과연 재림일까? 단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저는 원한으로만 보입니다. 그 원한이 어떤 누구에게는 종말일 수 도 있지요. 다른 무엇일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 원한은 분명 응답을 받는 원한이어야 한다는 거지요. 응답받을 수 없는 원한이라면 결코 응답을 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들으실 그 원한을 갖고 종말까지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므로 더더욱 우리에게 말씀되어지는 초점은 믿음입니다. 기도의 핵심은 믿음입니다. 응답하시는 하나님. 그 원한을 풀어주시는 하나님. 믿음으로 기도하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라는 거지요. 결국 기도를 들으시는 그분 하나님이 드러나는 말씀이네요. 그 나라의 주인되시는 결국 왕되실 하나님이 고백되어지는 본문이네요. 그래서 기도의 중심은 예수님인가봅니다.

예수님을 부르고, 예수님을 요청하고 예수님이 들으시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기도를 항상하되 낙망하지 않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좋은 가르침, 좋은 말씀, 좋은 식견-이 모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보는 눈이 행복하다는 말처럼 말씀을 제대로 보는 눈이 행복함을 누리는 인생이 되기 위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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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3, 2010
*.120.170.243

서영준 님의 쪽지에 쪽지도 답을 주었으니

여기서 반복할 필요는 없겠지요?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논쟁적으로 다루지 않는 게 좋습니다.

좋은 주일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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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서영준

October 25, 2010
*.214.133.126

ㅎㅎ

감사합니다. 모든 말들과 행동이 조금 다른 생각이라 하여 논쟁적이지는 않은 것 같은데...그렇게 들려버렸네요. 죄송합니다. 반복이 되었지만 그렇게 한 것은 같이 공유함이 어떨지 하여 다시 올렸습니다. 제가 쪽지를 읽고 다시 의문이 들어서 ....

아무쪼록 말씀과 글을 읽고 좋은 나눔이 있어서 참 좋습니다.

주일을 잘 보내셨는지요. 저는 주일에는 글을 읽지 못해서 이제야 봅니다. 주일에는 누가복음13장 안식일 논쟁을 묵상했습니다. 요즘 누가복음 말씀에 시간을 많이 들이고 있기에 관심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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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주안에

October 30, 2010
*.46.31.69

처음 인사를 올립니다. 정목사님, 그리고 모든 지체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주안에교회에를 섬기는 김기섭입니다. 주로 설교를 즐기고 참조하기 위하여 가끔들어오는 뜨네기입니다.  오늘 글을 쓰게된 동기는 정목사님의 설교와 서영준님의 댓글을 읽고 나름 저의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서영준님의 생각에 일단 동의합니다. 저하고 성경을 보는 시각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서영준님처럼 생각했고 또 그렇게 설교한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정목사님의 설교를 접하면서 1세기 성경 저자가 누가 공동체에 정말 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서영준님의 메시지도 현대에는  기도에 대한 좋은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1세기, 기독교 공동체에 필요한 메시지는  정목사님의 지적처럼 '지연되는 재림과 그에 대한 신앙적 회의에 대한 처방'이었지  않을까 싶네요. 고맙습니다. 다시한번 좋은 메시지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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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30, 2010
*.120.170.243

주안에 님,

안녕하세요?

설교하는 목사님이시군요.

고되면서도 즐거운 설교라는 짐을 함께 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꺼번에 많은 걸 전할 생각을 하지 않고,

청중들의 변화를 너무 신경 쓰지 않으면서

말씀의 중심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면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의 생각을 붙들어주지 않으실까요?

용기를 내고 길을 가봅시다.

좋은 주일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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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4 성령강림절 한 말씀만 하소서 [17] 2010-06-07 16538
853 사순절 여호와는 가까이 계시다 (사 50:4-9) [10] 2013-03-24 16534
852 대림절 주의 길을 준비하라! (눅 3:1-6) [11] 2012-12-09 16528
851 기타 다윗왕조의 존재근거 [1] 2006-08-06 16462
850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이다! [12] 2011-05-22 16410
849 대림절 주의 날과 십일조 [49] 2009-12-07 16382
848 성령강림절 믿음과 행함의 긴장관계 [25] 2009-09-14 16341
847 기타 생명이 죽음을 삼키다, 7월2일 2006-07-02 16335
846 성령강림절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눅11:5-13) [10] 2013-07-29 16310
845 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는 누군가? [16] 2010-07-19 16284
844 성령강림절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삼상 17:32-49) [8] 2015-06-21 16245
843 창조절 제자의 길과 소유의 길 (눅 14:25-33) [10] 2013-09-08 16149
842 기타 하늘생명의 밥 [1] 2006-08-20 16136
841 성령강림절 예수는 생명의 밥이다 [22] 2009-08-10 16095
840 주현절 성령 임재와 마술 [21] 2010-01-11 16084
839 성령강림절 요한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 [17] 2009-07-27 16052
838 성령강림절 은혜의 보좌 앞으로! [28] 2009-10-26 16038
837 주현절 하나님의 ‘선택의 신비’ [10] 2011-01-17 16023
836 성령강림절 천국, 질적인 변화의 세계 [18] 2011-07-24 15987
835 기타 낡은 것과 새것 [2] 2004-07-02 15968
834 주현절 이사야 예언의 성취 (눅 4:14-21) [7] [1] 2013-01-27 15963
833 사순절 “나는 아니지요?” [23] 2011-04-18 15912
832 성령강림절 세례 요한의 죽음 (막 6:14-29) [10] 2015-07-13 15847
831 기타 메시야니즘의 기초 [1] 2008-05-01 15817
830 기타 하나님을 알자 [4] 2004-06-30 15815
829 주현절 가난한 사람들 [23] 2011-02-06 15797
828 기타 신앙적 일상과 재림신앙 [2] 2006-10-15 15750
827 사순절 여호와를 알리라! [16] 2011-04-11 15736
826 성령강림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6] 2008-06-08 15730
825 주현절 영적 자유의 토대 [22] 2011-02-27 15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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