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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공의의 하나님

성령강림절 조회 수 18699 추천 수 0 2010.11.22 23:4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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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예레미야 23:1-8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

(렘 23:1-8), 11월21일, 성령강림절 후 26째 주일

 

     오늘은 교회력 마지막 주일인 성령강림절 후 26째 주일입니다. 다음 주일은 교회력 첫 주일인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587년에 유대가 멸망하는 순간을 직접 목도한 예언자였습니다. 나라가 완전히 몰락하는 순간을 보는 것만큼 비통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일제에 합병되던 것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심각한 파멸이었었습니다. 유다가 역사에 실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예루살렘 성과 예루살렘 성전은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었고, 성전의 값진 기물은 모두 약탈당했고, 마을의 모든 집은 불타버렸습니다. 당시 유다의 왕은 시드기야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이 함락되던 날 밤에 몇몇의 군사를 데리고 도망쳤다가 포로 신세가 되었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처형시키고 시드기야의 눈을 뽑아 장님으로 만들어서 쇠사슬로 묶어 바벨론으로 끌어갔습니다. 시드기야는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전쟁 중에 많은 사람들이 굶거나 질병에 걸려 죽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또다시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습니다. 남은 왕족과 귀족, 그리고 지식인과 기술자들은 모두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유다 지역에는 주로 하층민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그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현실에 대한 인식

     조국의 몰락만이 예레미야를 힘들게 한 건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기 싫어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도살당하러 가는 어린 양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렘 11:19) 예레미야의 고향 아나돗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렘 11:21)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자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크게 들고 일어났습니다. “네가 반드시 죽어야 하리라.(렘 26:8b) 그들은 유다 고관들에게 예레미야를 죽여야 한다고 압력을 행사했습니다. 빌라도 총독 앞에서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려야 한다고 외친 제사장들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다행히 예레미야는 그를 지지하는 일부 백성들과 유다 고관들의 올바른 판단으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를 비판한 대표 인물은 선지자 하나냐입니다. 그와 예레미야가 성전에 공개 논쟁을 벌였습니다. 일종의 신학 논쟁입니다. 하나냐가 먼저 예레미야에게 말합니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벨론 왕느부갓네살이 유다 민족에게 씌운 멍에를 하나님께서 꺾을 것이며,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에서 빼앗아간 성전의 모든 기구를 2년 안에 찾아올 것이라고 합니다. 유다가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에게 완전히 멸망당하기 10 여 년 전에 이미 일부가 포로로 잡혀가기도 하고 성전 기물도 강탈당했었습니다. 그것을 원상회복시키겠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의 반론이 이어집니다. 하나냐의 예언이 이뤄지기를 바라지만 그것보다 먼저 전쟁과 재앙과 전염병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전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냐의 말은 현실을 무시하는 발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냐가 앞에서 한 자기의 이야기를 다시 강조합니다. 여호와께서 2년 안에 나무 멍에를 꺾듯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을 꺾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반대의 예언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나무 멍에가 아니라 쇠 멍에를 메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냐에게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렘 28:16)

     예레미야 당시의 사람들은 바벨론의 위협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했고, 총체적으로 불안해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냐와 예레미야가 똑같이 선지자이면서 서로 다른 말을 했습니다. 하나냐는 모든 문제가 속히 해결된다고 주장했고, 예레미야는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심지어 포로로 잡혀간 이들에게 돌아올 꿈을 꾸지 말고 바벨론 왕을 잘 섬기면서 살아남으라고 편지를 쓴 일도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비관적이었습니다. 그런 말을 듣고 싶은 사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레미야가 당시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고, 따돌림을 당했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중들과 현실유지를 바라는 이들은 모든 게 잘 된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해주신다는 말을 해주는 선지자를, 그런 설교자를 원합니다. 그런 기대는 사람의 기본 심리입니다.

     예레미야도 유다 백성들이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달콤한 말로 위로해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신탁(神託)의 담지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람들입니다. 청중들의 요구를 외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기는 간단한 게 아닙니다. 우선 일단 청중들의 압력을 거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부모들이 철없는 자녀들의 요구를 물리치기 힘들어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자녀들이 너무 귀엽기 때문에 ‘오냐’ 하는 심정으로 따라갑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신탁 담지자가 선지자라는 건 옳지만 모든 선지자가 신탁 담지자라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준비가 안 된 선지자들도 많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신탁은 점쟁이의 일처럼 마술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역사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옵니다. 사람과 그 시대를 읽는 눈이 필요합니다. 선지자들은 신앙의 눈을 가진 역사학자라고 보면 됩니다. 예레미야는 그 시대를 뚫어보았습니다. 유다는 바벨론 제국을 거스를 수 있는 힘이 없었습니다. 군사적인 힘도 없었고, 신앙적인 힘도 없었습니다. 바벨론에 의한 멸망은 필연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욕을 먹고, 살해의 위협을 받으면서까지 유다의 멸망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의로운 세상

     예레미야가 조국 유다의 멸망을 바란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 것도 아닙니다. 일정한 기간을 버림받은 것처럼 지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간이 바로 바벨론 포로 시대입니다. 바벨론 포로 시대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예레미야가 말하려는 핵심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멸망당하고 포로로 잡혀갈 유다 백성들을 구원하실 거라고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본문 렘 23:3절에서 “내가 내 양 떼의 남은 것을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분명히 하나님의 구원을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당장 오늘의 사건이 아닙니다. 지금의 현실은 절망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절망적인 시간이 지난 뒤에 옵니다. 그는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안고 살았던 선지자입니다. 절망적인 현실을 외치지만 동시에 희망의 미래를 외칩니다. 청중들은 이런 미래에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역할은 이런 청중들의 영적 안목을 하나님이 행하실 미래의 구원으로 열어가는 것입니다. 절망이 깊을수록 이런 희망의 노래를 더 간절하게 불러야 합니다. 단순히 현실의 고통을 잊어버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구원에 대한 희망에서 오늘의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유를 알아야 앞으로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로 그것을 유다 백성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다윗의 후손 중에서 한 왕이 나올 때가 온다고 말했습니다.(5절) 그 왕은 그 나라를 지혜롭게 다스리고,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합니다. 이때 유다는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입니다. 그때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고 불릴 것입니다.(6절) 구약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여기서 ‘여호와 우리의 공의’의 원어는 ‘야웨시드기누’인데, 이는 ‘여호와는 나의 변호’라는 뜻의 ‘야웨시드기아’와 똑같은 뜻입니다. 일종의 언어유희입니다. 시드기아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유다가 바벨론 제국 앞에서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결국 멸망당하는 길을 자초한 왕입니다. 이런 시드기아 왕과 발음으로는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유다를 구원할 참된 왕이 역사에 등장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에 속한 메시아사상을 따라서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 메시아 이름은 ‘야웨시드기누’이고, 그가 행할 일은 정의와 공의입니다.

     정의와 공의가 무엇일까요? 불의와 반대되는 단어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없게 하는 질서입니다. 예레미야만이 아니라 구약의 선지자들은 예외 없이 모두 정의와 공의를 외쳤습니다. 마지막 선지자이며,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선구자로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세례 요한의 설교를 보십시오. 그는 당시 광야로 몰려나온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정의와 공의를 따라서 살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부른 찬송도 마찬가지입니다.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다.”(눅 1:52, 53)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예수님은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열 시간 일한 사람이나 누구나 똑같이 일당을 주는 포도원주인과 같다고 가르치신 적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경쟁력과 상관없이 최소한 먹고 입고 잠잘 권리는 주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최소한의 정의에 대한 개념입니다.

    정의로운 세상, 요즘 우리나라 정치계에 화두로 등장한 ‘공정한 사회’는 쉬운 목표가 아닙니다. 지난 인류 역사에서 그런 사회에 도달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지가 최고로 보장되는 북유럽에도 완전한 정의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아귀다툼처럼 경쟁에만 몰두합니다.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이 최고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당시의 유다도 정의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유다가 망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야김 왕에게 한 경고를 보십시다.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 진저”(렘 22:13) 이게 인간사회의 딜레마입니다. 정의를 실현해야만 사람과 세상이 삽니다. 그러나 정의롭게만 살면 결국 경쟁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의를 실천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정의를 실현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사랑해야만 살 수 있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여러분도 스스로에게서 그런 모순, 그런 한계를 느끼실 겁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일 년 동안의 먹을거리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린다는 것으로 이 절기를 끝낸다면 바른 신앙의 모습은 아닙니다. 공정한 먹을거리에 대한 생각이 필요합니다. 한쪽에는 먹을 것이 넘쳐나고, 다른 한쪽은 최소한의 생존에 필요한 먹을거리마저 없다면 이건 메시아의 정의와 공의에 완전히 위배되는 일입니다. 이런 현상을 그리스도인들이 동조하거나 묵인할 수는 없습니다. 잊지 말고 기억해 두십시오. 정의는 근본적으로 메시아의 일입니다. 메시아만이 정의를 세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기다린다면 당연히 그가 행하실 일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럴 때만 우리는 메시아가 오셨을 때 그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레미야가 말한 다윗의 한 의로운 가지이며, 왕이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메시아입니다. 이런 말이 너무 도식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그 사실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정의와 완전히 반대되는 불법한 세력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이것으로 예수님의 운명이 끝났다면 세상은 여전히 불의가 지배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와 악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이 바로 궁극적인 정의입니다. 죽음의 극복보다 더 큰 정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질적으로 새로운 정의를 이 세상에서 실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이미 승리했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불의가 판을 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입니다. 그 사실을 실제로 믿는다면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현장에서 정의와 공의의 빛을 반사해야만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스스로 생각해보십시오. 각자의 영적인 분량만큼 감당할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신자들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profile

[레벨:11]더럼

November 23, 2010
*.17.45.235

정목사님

안녕하세요.

지금껏 30여년 동안

교회에 출석했지만

정의와 공의라는 주제로 설교를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부활이 곧 정의라는 말씀도 목사님에게 처음 듣는 말씀 입니다.

영국에서 복지를 공부하면서 정의는 늘 복지와 함께 등장하는 개념이었지만

한국 복지에서는 정의이라는 말이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듯 한 인상을 공부하면서 알았습니다.

최근 이명박 정부가 공정 사회라는 정책 슬로건을 내걸었는데

글쎄요 지난 2년반동안 행적을 보면 앞으로 남은 2년 동안 어떻게

공정한 사회를 향해 흔적을 남길지 궁금하군요

공정한 사회를 향해 평가 틀이 없는데서 구호만 외치고 있는 것 같은데

영국 사람들이 말하는 레토릭이거나 실속없는 (tokenistic) 정치구호로 끝나지 않을지...

영국 노동당 정부가 내서운 구호가 공정한 사회 였는데 13년동안 그 슬로건을 향해

노력했지만 삶의 평등지수를 개선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정목사님

정의 실현을 위해 각자가 분량만큼이나 할수있는 무엇을 생각하고하고 한발짝 실행에 옮겨야 겠지만

가능하다면 혼자 힘 보다는 여러사람의힘 함께 하는 지혜 혹은 영성을 갖는다는 더욱 좋겠지요.

 

목사님

아마 한해가 다 가기전에

목사님을 찾아 뵙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건강하세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November 23, 2010
*.120.170.250

더럼 님,

반가운 소식이군요.

금년 안에 귀국하신다는 말이지요?

한국교회야 뭐

매일 세속적인 차원의 축복에 목을 매고 있고,

수능 특새에 혼신을 다 바치고 있으니

공의와 정의가 메시아 사건이라는

선지자들의 영성을,

그들의 뜨거운 목마름에 관심도 없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고 봐야겠지요.

기분이 말이 아니지요?

그래도 엘리야 시대를 비롯해서

구약성서 전체가 말하고 있듯이

남겨놓은 자들이 곳곳에 많으니

희망을 안고 귀국하세요.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사회과학적인 차원과 접목해보세요.

기대하겠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profile

[레벨:5]희락당

November 24, 2010
*.15.92.44

조그만 실수인듯한데요.. 둘 째 줄의 "이사야"를 "예레미야"로 고쳐야 하는 것 아닌지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November 24, 2010
*.120.170.250

희락당 님, 고맙습니다.

내 정신 머리하고는, 음

교정을 보다가 실수를 했네요.

당장 예레미야로 고치겠습니다.

profile

[레벨:3]거북도사

November 24, 2010
*.35.210.40

여기 울산에서도 현대자동차 회사와 비정규직 노동자들 관에 이해관계가 좁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안에서도 관리직과 정규직 그리고 비정규직이 함께 있는데  모두 자기들 입장에서 이해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본인들의 입장이 서로 다른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현장에서 정의와 빛을 반사해야 하는데 자기를 죽이지 않으면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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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25, 2010
*.120.170.250

거북도사 님,

인간 세상이 참으로 요지경이지요?

정글의 법칙이 거의 원색적으로 적용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노동현장의 규직과 비정규직,

대학사회의 전임교수와 시간강사,

교회의 담임목사와 부교역자 사이에

정의로운 질서가 언제가 세워질는지요.

이를 위해서 우리가 치열하게 투쟁하되

메시아의 오심을 대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힘을 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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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방랑자

November 25, 2010
*.109.153.6

그렇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세상은 참 불의한 것 뿐입니다.

불의한 세상을 보면 도대체 하나님은 계시는지 의심할 수 밖에 없는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세상의 이치가 단지

불의함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진 이땅에서의 진정한 정의와 공의는 이루어질수 없겠지만

우리 모두는 죽어야 할 운명입니다. 아무리 불의한 사람도 그 운명을 피해갈 순 없죠

여기에 정의와 공의가 있는 듯 합니다. 물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너무나도 길고

불공평한 삶이라고 생각되겠지만 영원에 대한 기대를 품고 살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살아갈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이말조차 그분들에겐 배부른 자의 거짓 위로가 되겠지만....

목사님 말씀을 보며 실천하진 못하면서 개인적으로 어떻게 정의를 세워야하는지

생각만 하는 위선적인 자신을 보며 조금씩 낳아지길 소망해봅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November 26, 2010
*.120.170.250

방랑자 님,

공의와 정의를 메시아적 차원에서 행동을 못하고

생각만 하더라도 대단한 겁니다.

그 생각이 결국은 때가 되면

행동으로 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런 생각의 싹을 아예 잘나버리는 거지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은

우리의 생각까지 지배하시는 분이니

그분에게 우리의 약함을 맡기고

생각과 행동이 영적으로 하나가 되는 쪽으로

죽 길을 가 봅시다.

주의 은총이... 

 

profile

[레벨:5]낙타

November 28, 2010
*.197.136.243

공의와 진리를 외쳐도 모자랄 30년 묵은 신자지만 도덕의 기준에도 못미치는 자신을 발견할때가 많습니다.

한심한 수준이지만 혹 누가 알지 못할 공정한 일(선한일)을 하면 스스로 뿌듯한걸 보면 제 안에 성령님이 계시는 것 같습니다. 연약함으로 당장의 불의를 받아드리기도하지만 언젠간 찝찝한건 못할 성숙한 신자가 되겠죠.

 

불의를 저지른 정치인, 경제인들이 죄값을 받는 일들을 보면서... 또 그것을 당연히 받아드리는 사람(저를 포함)들이

모든 일에 정직과 공의로 하루를 보람차게 산다면 목사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발견하지 않을까요?

 

목사님 말씀 읽으면서 바벨론에 흡수된 예루살렘이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는 예레미아의 진짜 예언을 믿어 하루하루

회사에 존속된 종처럼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월급이라도 나오잖아요.^^

 

북한의 도발로 전쟁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밤입니다. 전쟁나면(죽으면) 쌓아둔 통장의 잔고와 내가 좋아하는 자전거.

이거 다 어떻게 되는거지? 란 성경의 말씀으로 실감나게 QT 합니다. 말세에 결혼하지 말란 말씀도 오늘따라 달콤하네요.

 

목사님의 설교에 조금씩 회복되는 모습이 좋습니다. 성장통도 있지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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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28, 2010
*.120.170.250

낙타 님,

미혼이에요?

그런 방식의 삶도 괜찮습니다.

내 설교가 낙타 님의 영성 훈련에 도움이 되는 듯하니

다행이고, 기분도 좋군요.

허물 건 허물고,

세울 건 세워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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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주님의평화

November 28, 2010
*.215.155.235

절기상 한 해의 끝을 정의와 공의 그리고 부활로 마감하는 것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한가지 약간 아쉬운 부분은, 부활로부터 '평화' 라는 메시지 까지 연결되어, 그리스도안에서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장면까지 도출되었더라면,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흥분되는 설교가 되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죄송합니다. 본의아니게 비평을..-_-; 공자님 앞에서 문자를 썼습니다.)

좋은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먼곳에서 항상 좋은 내용의 설교문들과 비평들을 보며 많은 자극과 도전을 받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내일이면(한국은 오늘) 바로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절기상 분위기는 우울하지만, 반면에 희망이 더욱더 커지는 절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두움이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빛에 대한 갈망은 더 커져가는 것이겠죠.

희망 가득한 대림절을 맞이하시길 기원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November 28, 2010
*.120.170.250

주님이평화 님,

저자 서명이 필요한 경우에

제가 사용하는 문구가 바로 "주님의 평화"랍니다.

오늘부터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게 얼마나 혁명적인 사건인지를

세상에 알리는 게 바로 우리의 사명이겠지요.

성공회 사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주님이 인도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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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9 성령강림절 성령을 받으라! [13] 2011-06-12 21331
908 주현절 은사와 성령 (고전 12:1-11) [6] 2013-01-21 20958
907 사순절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 (겔 37:1-14) 2017-04-02 20770
906 창조절 마지막 심판과 생명 완성 (마 25:31-46) [15] 2011-11-13 20723
905 부활절 부활의 증인 공동체 [17] 2011-05-01 20690
904 성탄절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2009-12-28 20646
903 성령강림절 모세의 무덤이 없는 이유 [28] 2008-10-19 20246
902 주현절 두려워 말라! (사 43:1-7) [11] [1] 2013-01-13 19877
901 성령강림절 기도와 믿음 file [20] 2010-10-19 19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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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9 성탄절 그리스도의 평화 (골 3:12-17) [9] 2012-12-30 19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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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4 성령강림절 믿음과 구원 file [4] 2010-10-31 19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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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9 창조절 예수 재림과 영적 각성 (살전 4:13-18) [11] 2011-11-06 17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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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5 창조절 불행한 부자 이야기 (눅 16:19-31) [10] 2013-09-29 17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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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0 창조절 삭개오 이야기 (눅 19:1-10) [14] 2016-10-30 16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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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6 성령강림절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눅11:5-13) [10] 2013-07-29 16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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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4 성령강림절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삼상 17:32-49) [8] 2015-06-21 16245
843 창조절 제자의 길과 소유의 길 (눅 14:25-33) [10] 2013-09-08 16150
842 기타 하늘생명의 밥 [1] 2006-08-20 16136
841 성령강림절 예수는 생명의 밥이다 [22] 2009-08-10 16096
840 주현절 성령 임재와 마술 [21] 2010-01-11 16084
839 성령강림절 요한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 [17] 2009-07-27 16052
838 성령강림절 은혜의 보좌 앞으로! [28] 2009-10-26 16038
837 주현절 하나님의 ‘선택의 신비’ [10] 2011-01-17 16024
836 성령강림절 천국, 질적인 변화의 세계 [18] 2011-07-24 15989
835 기타 낡은 것과 새것 [2] 2004-07-02 15968
834 주현절 이사야 예언의 성취 (눅 4:14-21) [7] [1] 2013-01-27 15963
833 사순절 “나는 아니지요?” [23] 2011-04-18 15912
832 성령강림절 세례 요한의 죽음 (막 6:14-29) [10] 2015-07-13 15847
831 기타 메시야니즘의 기초 [1] 2008-05-01 15817
830 기타 하나님을 알자 [4] 2004-06-30 15815
829 주현절 가난한 사람들 [23] 2011-02-06 15797
828 기타 신앙적 일상과 재림신앙 [2] 2006-10-15 15751
827 사순절 여호와를 알리라! [16] 2011-04-11 15736
826 성령강림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6] 2008-06-08 15730
825 주현절 영적 자유의 토대 [22] 2011-02-27 15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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