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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재림과 영적 각성 (살전 4:13-18)

창조절 조회 수 20144 추천 수 0 2011.11.06 23: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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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4:13-18 

예수 재림과 영적 각성

데살로니가전서 4:13-18, 창조절 열 번째 주일, 2011년 11월6일

 

     오늘 설교 본문인 살전 4:13-18절에는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와 내용이 나옵니다. 특히 16절과 17절이 낯섭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의 재림과 믿는 자들의 휴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현대인들에게 낯설고, 우리에게도 궁금한 게 많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신다면 지금은 하늘에 계시다는 뜻인데, 그 하늘이 어디일까요? 우주 공간 어디를 가리키는 건 아닐 텐데, 그렇다면 어디인가요? 예수님의 재림 때에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고 하는데, 흙으로 변했던 원소가 다시 결합해서 사람이 된다는 뜻인가요? 휴거가 실제 상황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몸이 풍선처럼 공중부양을 한다는 뜻인가요?

     이런 재림 표상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한쪽은 그것을 사실적인 진술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구름을 타고 오시고, 자신들도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올라갈 것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계 전체 교회에서 보면 소수이지만, 한국교회에서는 이상하게도 다수를 차지합니다. 1992년에 한국교회와 사회를 크게 흔들었던 ‘다미선교회’ 추종자들이 대표자들입니다. 다른 한쪽은 재림과 휴거 사상을 냉소적으로 생각합니다. 성서의 재림 표상을 고대인의 신화로 간주하고 아예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들은 주로 지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양쪽 모두 성서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전자에 속한 이들은 문자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고, 후자에 속한 사람들은 동일한 이유로 배척합니다. 성서와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근본을 놓치게 될 경우에 이런 일은 흔히 벌어집니다. 이런 잘못을 피하려면 성서본문이 말하려는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재림 지연

     초기 그리스도교는 일종의 재림 공동체였습니다. 부할 승천하신 주님이 곧 지상에 다시 오신다는 믿음에 근거한 공동체였습니다. 예수 재림은 복음서와 서신에 다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 14:3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 진술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이 실제로 다시 오겠다고 말씀하셨는지, 말씀하셨다면 무슨 뜻으로 그러셨는지, 궁금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겠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교가 그렇게 받아들였다는 것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메시아 사명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초림으로 구원이 완성되었다면 재림 운운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명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외치셨다는 것은 자기 사명의 실패에 대한 토로였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은 승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오늘 우리는 이 부활에 근거해서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명이 실패한 게 아니라 승리했다고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근거해서 우리가 부활 생명을 희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부활 생명이 이 역사에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을 역사에서 직접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 역사에서 우리는 여전히 배가 고프고, 외롭고, 두려워합니다. 물을 아무리 마셔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목마른 것처럼 우리의 생명 경험은 부분적이고 일시적입니다. 우리에게 부활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은 종말에 실현됩니다. 종말이 오면 그 모든 비밀을 알게 될 것입니다. 모든 불완전한 것들이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부분적인 인식이 완전한 인식에 도달할 것입니다. 궁극적인 생명이 완전하게 드러나게 될 그 종말론적 사건이 바로 예수의 재림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사실에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 기다림이 얼마나 긴박했던지 자신들이 살아있을 동안에 재림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신앙으로 그들은 재산도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바꿔놓고 생각해보십시오. 몇 년 안에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게 분명하다면 오늘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사유재산을 소유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결혼할 필요도 없고, 학교에 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심정으로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그들의 기대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일상이 반복될 뿐이었습니다. 재림을 기다리던 신자들이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상황이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당혹스러웠을지 상상이 갑니다.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야 예수 재림을 기다릴 수 있지만 죽은 사람에게는 모든 게 끝나버린 겁니다. 살아있는 사람도 곧 죽을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은 부활 신앙으로 극복될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 부활신앙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신앙은 유대교인들에게도 있었고, 다른 종교에도 부분적으로 있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 예수님의 재림을 맞는 것입니다. 재림이 지연되면서 신자들이 죽어간다는 사실은 이런 신앙의 근본을 위태롭게 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이런 신앙적 위기를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바울이 제시한 논리는 먼저 죽은 자나 나중에 죽은 자나, 또는 여전히 살아있는 자나 똑같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들이 죽은 자로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마지막 때 예수의 재림과 함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죽은 자를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자는 자’라고 했습니다. 특히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잔다는 것은 일종의 종교적 메타포입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메타포로 표현하는 게 최선입니다. 복음서에는 그런 표현들이 자주 나옵니다. 마지막 때를 혼인잔치로, 예수님을 신랑으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잔다는 말은 생명이 일시적으로 멈춰있다는 뜻입니다. 표면적인 생명은 물론 죽은 겁니다. 숨도 끊어지고 모든 형체도 먼지가 됩니다. 그런 것만 본다면 사람은 죽음으로 끝장입니다. 그러나 심층적인 생명은 죽은 게 아닙니다. 그 심층적인 생명은 자연적인 생명까지 뛰어넘는 생명입니다. 무(無)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고유한 생명 사건입니다. 표면적인 생명은 죽지만 심층적인 생명은 죽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 빠진 이들을 가리켜 자는 자들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자는 자들이나 여전히 살아있는 자들이나 똑같습니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밤새도록 기도를 했고, 다른 한 사람은 잠을 잤습니다. 아침밥 먹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밤새 기도한 사람이나 잠을 잔 사람이나 똑같이 밥상 앞에 앉아있습니다. 잠을 잤다고 해서 아침밥을 못 먹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잠에서 깨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도, 즉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마지막 때 재림의 주님과 함께 데리고 오신다는 바울의 설명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16절과 17절에서 유대인들의 고유한 사상인 묵시문학적인 방식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납니다. 잠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이후에 살아남은 자들도 잠에서 깬 이들과 더불어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공중으로 올라간다는 말은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항상’ 주와 함께 있게 될 것이라는 말도 똑같은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 재림 시에, 즉 이 세상의 생명 형식이 끝나는 종말에 예수님에게 선취된 부활체로 변화될 것입니다. 먼저 죽은 자나, 나중에 죽은 자나, 여전히 살아있는 자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이런 진술을 실질적으로 이해하려면 우리의 연대기적인 시간 개념을 넘어서야 합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기계적으로 절대적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1년보다 10년이 더 길다고 봅니다. 2011년 다음에는 2012년이 온다고 믿습니다. 그게 틀린 것은 아니지만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닙니다.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시간도 피조물입니다. 시간도 하나님이 허락하는 조건에서만 자기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한계 안에서만 시간이 절대적이지 그것을 넘어설 때는 상대적입니다. 이것은 현대 물리학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빛의 속도 안에서만 시간이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것처럼 흐릅니다. 예수 재림은 이 세상이 새롭게 구성되는 사건이며, 순간입니다. 물리적인 빛이 더 이상 절대적인 구성 요소가 되지 못하는 순간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제 밑으로 들어오는 사건입니다. 그때가 되면 먼저 죽은 자나 나중에 죽은 자나, 여전히 살아있는 자나 시간의 차이가 전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듯이 살아 있는 자도 죽은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합니다.

 

     삶의 진정성과 영적 각성

     재림과 휴거에 대한 바울의 진술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실제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앞 구절인 살전 4:1-12절을 보십시오.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11, 12절) 일상의 진정성에 대한 충고입니다. 이런 충고에 이어서 갑자기 재림과 휴거를 언급했습니다. 흐름이 이상해 보입니다. 이상한 게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일상의 진정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이유가 재림 신앙을 불안하게 생각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재림이 없다면, 죽는 것으로 끝장이라면 삶의 진정성은 확보될 수 없습니다. 서로 위로하라는 18절도 그것을 가리킵니다. 참된 위로를 받지 못한 사람은 삶의 진정성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서 바울은 재림의 순간이 ‘도둑 같이’ 임한다고 지적하면서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리라고 말합니다. 이것도 일상의 진정성에 대한 충고입니다. 결국 바울이 전하려는 것은 삶의 진정성이 재림 신앙에 놓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거꾸로, 재림 신앙의 오해에서 삶의 진정성이 훼손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예수 재림에 대한 영적 각성입니다.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는 이것이 부족했습니다. 영적 각성은 일상의 매너리즘과 대립되는 삶의 태도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대개는 이런 매너리즘에 빠져 있습니다. 거기서 벗어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을 끌어가는 요소가 그런 방식으로 작동되기 때문입니다. 돈, 살림살이, 취미생활, 건강, 정치 등등, 이런 것들이 우리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삶의 구성 요소들입니다. 소위 강남의 잘 나가는 교회의 신자들도 거의 이런 데만 모든 삶을 집중시킬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삶의 토대가 되면, 즉 이런 것에 우리가 길들여지면 우리의 영혼은 훼손됩니다. 무뎌집니다. 바울이 말하는 영적 각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아무리 종교적 열정이 뜨거워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진정성, 즉 생명의 진정성을 안고 살기 원하시나요? 그렇다면 생명이 질적으로 변화되고 완성될 주의 재림이 가까이 이르렀다는 사실에, 또한 재림이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임한다는 사실에 여러분의 영혼을 집중시키십시오. 그 사실만이 여러분의 영혼을 위로해줄 수 있습니다. 그 사실만이 여러분의 영혼을 실질적으로 깨어있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사실만이 우리에게 삶의 진정성을 제공해줄 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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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November 07, 2011
*.239.93.193

예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들은 말이었습니다. 몇년안에, 아니 누구 누구가 죽기 전쯤에는 주님 오실 것 같다...

그런 구체적인 시간을 제시하는 위선자들을 보면서 반론을 제기 하고 싶었지만 그게 사실일까봐 입 다물었습니다. 그 정보는 성경에서 많은 예를 들었다면서 역설을 하고 있읍니다. 노아의 방주, 불의 심판, 666 외 제시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정보의 제시가 일상의 삶을 혼란하게 흔들었다가는 발언자들에게 예속되어감을 봅니다. 구원자의 대리인으로 자신들이 격상되어 갑니다. 누가 그들에게 그 자격과 계급장을 주었습니까? . -  오늘은 글 폭력 여기까지.

새 옷은 헌 옷이되고, 뿌려진 씨앗은 추수가 되어 가듯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세상도 때가 되면 또 사랑하시겠지요.

오늘은 주제가 너무 크고 중요해서 쉽사리 생각이 정리 안됩니다.

주님이 와 가까이 와계심을 아느 것이 때로는 내가 믿음이 작은 삶을 살아 왔는데 드디어 정죄의 순간이 다가 왔나보다라고 느낄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순간을 아는 것보다 주신다는 사실에 우선적으로 감사드리는 삶도 기쁜 삶이라고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목사님 말씀속에서  주님께서 오시는 순간과  나의 지금 이순간  사이에는 깨어있음이 들어있어야 함을 잘 알았습니다. 말씀을 듣고 생각해보니, 깨어 있음속에서 지속되는 긴장감이 내가 느끼는 행복을 더 벅차게 합니다.  깨어있는 삶이 나를 매너리즘에서 건져내고 나를 새롭게 합니다. 그렇게 깨어있는 삶만이 주시는 생명을 받을 자격이 있겠죠. 오늘 말씀으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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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07, 2011
*.185.31.7

진인택 님,

한국교회의 온갖 신앙행태를 다 경험하셨군요.

종말표상이 협박의 수단이 되는 적이 많았지요.

재림이 임박했다고 말은 하면서도

교회는 왜 그리 크게 만들려고 하는지요. ㅎㅎ

우리의 삶이 질적으로 변화될 그 순간에 대한 각성이

오늘 매너리즘의 함정에 빠져 있는 우리를 건져낼 수 있겠지요.

한 마디만 더 드린다면

이 재림 신앙은 구원이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또는 인간이 생산해낼 수 있는 게 아니라,

밖에서, 즉 창조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좋은 한 주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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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 은혜

November 12, 2011
*.55.65.42

진인택님

마가복음 매일묵상을 하고 있다고 올리셨는데

매일묵상을 클릭하여도 마가복음을 찾을수 가 없군요.

어디로 들어가야 마가복음 매일묵상을 만날수가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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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은빛그림자

November 08, 2011
*.141.3.121

어느 때에는 너무나 분명해서

이것을 "진리"가 아니라고 한다는 것은

미쳐도 한참 미친 것이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 설교를 홀린 듯 빠져서 들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제 시야에 펼쳐진 풍경이 선명해 지는 듯한 느낌이랄까..

제 느낌을 언어가 미처 따라오지 못하는데요.. 암튼 그랬습니다.

모든 촉이 무뎌지고 녹슨 요즘, "깨어있는 일"이 피곤하고 귀찮아

그냥 되는 대로 편안하게 아무렇게나 살면서 스스로 괜찮다.. 괜찮다.. 하는데

실상은 육체의 피곤함을 압도할 만큼 영혼의 피곤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위 설교 본문에는 없지만 설교하실 때

분명히 "다른 것으로는 안 된다"고 하셨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른 것"에 골몰하고 마음주면서 지칠 대로 지친 저에게

큰 위안과 기쁨이 되는 설교였음을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제가 정말 사... 사.... 에이.. 아닙니다.

그럼 전 이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사실에 제 영혼을 집중시키기 바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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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웃음

November 08, 2011
*.228.35.13

은빛그림자님께서 멋진 고백을 하셨군요...

사...사...   ㅋㅋㅋ

목사님께서 혹시 못알아 들으시는건 아니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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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08, 2011
*.185.31.7

은빛 님,

정말 설교를 한 문장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고 있소이다.

'다른 것으로는....'은 원고에는 없지만 오디오에는 있소.

그게 중요한 대목이오.

사실은 설교 때 그걸 강조할 경우가 많긴 하오.

그게 왜 중요한지를 따라갈 수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교 영성 안으로 한걸음 더 들어간 것이오.

큰 위안과 기쁨이 되었다고? ㅎㅎ

성령의 선물이오.

사랑합니다. 은빛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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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November 08, 2011
*.115.225.156

예수가 과연 종말론적 사상가였을까?

중요한것은 예수와 무관하게 종교적 성향과 선민의식이 짙은 유대인들의 대부분의 공동체 운동은

기원전  세기부터 이미 종말론적 이었다는것을 알 수가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쿰란 공동체의 성격이 초대교회 운동으로 그대로 연결 되었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예수는 유대인의 선민 의식을 거부한 갈릴리 사람이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외치는 그에게는 철저한 인간평등 사상이 있었다.   

그리고 이 세계에 대한 저주 아닌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주신다." (마5:45 )

 

이것이 바로 지혜 담론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의 핵심사상 이었다.

묵시담론은 후대 기독교 공동체의 성격에서 발생한 것이다.

예수는 오히려 묵시담론을 거부한 사상가였다.

 

종말론이라는 것은 선택 되었다고 생각하는 어떤 그룹의 인간들을 지배하게 되는

의식체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어찌 12명만 있으리오?

마가의 이야기에 12제자가 등장했다는 사실은 곧 이스라엘 민족의 종말론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도래하는 천국에서 이스라엘의 12지파를 12제자가 각기 맡아 다스리게 되리라는 종말론적

선포가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에게는 12제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 사후의 초기 공동체의 한 창작에 불과한 것이라고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입을 모은다.

 

예수는 결코 천당(天堂)을 이야기 하지도 않았다.

다만 천국(天國)을 이야기 했을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천국이란  장소를 가르키는 곳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가 지배하는 나라를  의미한다.

예수가 선포한 것은 로마의 지배나 율법의 지배나, 대제사장과,바리새인의 지배가 아닌

하나님의 직접적,무매개적 지배였다.

그것은 "이 땅위에서의 하나님의 지배"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위에 임할 그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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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오랫만에 들어 왔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문은 언제나 나태하고 매너리즘에 빠진 죽은 신앙을

깨어있는 신앙으로 인도함을 느끼고 갑니다.

근래에 읽은 책에서 몇자 저의 생각을 옮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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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08, 2011
*.185.31.7

별달 님,

오랜만입니다.

어머님도 건강하시구요?

서울의 형님 댁 가족들도 잘 지내시겠지요.

무슨 책을 읽고 인용하셨나요?

초기 그리스도교 현상에 대해서

부분적으로는 옳은 말을 하고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렇지 못한 책인 것 같습니다.

가능하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에 서 있는 책을 읽는 게 좋습니다.

어쨌든지 꾸준히 책을 읽으신다니 보기에 좋군요.

가을날씨가 오락가락하네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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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November 09, 2011
*.115.225.156

목사님, 저희 가족 모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인용한 글은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1> 에서

도올 선생의 글을 조금 인용 하였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옳은 말을 하고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렇지 못한 책인 것 같으시다는 목사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그리고 다비아의 깨어있는 영성 여행.. 계속 따라가 보겠습니다..

목사님,늘 평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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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November 09, 2011
*.220.104.49

목사님, 몇일 전부터 마가복음 매일 묵상집 2011년 7~9월 97호를 다시 읽고 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성경의 내용을 시험기간 지난 시험범위의 책을 보듯이  일회성으로 읽고 장식으로 모셔놓는  것은 마치 앉아서 무심하게 연못에 보석을 돌인줄 알고 던지는 것과 같다는 걸 알았습니다.

어제와 그제 읽었던 마가복음 8:36,37 "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온 천하와 목숨의 의미를 인간적인 사고 방식으로 ,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입으로만 전달하고 코와목으로 들이키는 목숨이 중하다고 자꾸 외쳐 대니 어쩐지 뭔가 계속 이상했습니다.

환자에게 압축산소 대신 압축 질소를 들이밀어서 병원에서 죽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할머니께서 젖먹이에게 분유를 타서 입에 꼭지를 대주었는데 자꾸 입밖으로 분유를 뱉어 내길래 왜그런가 했더니 소주에 분유를 타서 먹인 것입니다.

왜곡된 전달에 그저 따라가면 언젠가 알게 되겠지..

왜곡된 전달도 문제지만 그대로 받아들여서 더이상 생각하지 않고 전체주의에 종속을 주장하는 쭉정이 기독교 인이 문제입니다. 아름답지만 한심한 마가린들 입니다. (마가린 - 맛은 있지만 별로 영양가도 없고 먹어봤자 본전도 주지 못하는 음식, 저만 사용하는 욕입니다.)

저도 지금도 직장에서 직원들에게 교육을하고 있지만 틀린것을 전달 했을 땐 직접적으로 수업시작과 동시에 즉시 수정 발표합니다.

자기 목숨, 내가 마음을 열었을 때 주어지는 기쁨과 평화의 선물...

꿍꿍이 속에서 남에게 희생과 봉사하지 말고 하나님을 향한 자기 자신에게 희생과 봉사를 함이 깨끗하고 머리 맑게 해주는 일이라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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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09, 2011
*.185.31.7

진인택 님의 공부가 나날이 깊어지는군요.

그동안 교회에서 일어난 시행착오는

인격적인 문제도 아니고 진정성의 문제도 아니고,

성서과 신앙의 본질에 대한 무관심에 이유가 있겠지요.

모르면서도 문제의식이 없고,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고,

영적으로 공허하면서도 은혜가 있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거지요.

진인택 님의 구도정진이 더 빛을 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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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5 기타 숨겨진 미래를 기다림 2004-06-30 12071
1044 기타 빛과 어두움 [3] 2004-06-30 15279
1043 기타 영적인 삶과 이성적인 예배 (롬 12:1, 2) [2] 2004-06-30 15504
1042 기타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막 9:14-29) [2] 2004-06-30 14383
1041 기타 세계, 계시, 하나님 (겔 39:25-29) [1] 2004-07-02 11426
1040 기타 종교와 철학을 넘어서 (고전 1:22-25) 2004-07-02 10578
1039 기타 예수의 권위 (막 1:21~28), 2003.6.1 2004-07-02 13535
1038 기타 언어의 한계와 존재론적 능력 (행 2:1-13) [8] 2004-07-02 10642
1037 기타 삶의 중심 2004-07-02 13102
1036 기타 용서의 능력 [1] 2004-07-02 17727
1035 기타 영적인 인식론 [2] [1] 2004-07-02 12723
1034 기타 두려움을 넘어서 [3] [2] 2004-07-02 11667
1033 기타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 [1] 2004-07-02 12396
1032 기타 우상과 귀걸이 [1] 2004-07-02 16271
1031 기타 평화와 두려움 [1] 2004-07-02 14036
1030 기타 하나님 나라의 통치방식 [1] 2004-07-02 14958
1029 기타 낡은 것과 새것 (고후 5:16-21) [2] 2004-07-02 18446
1028 기타 이스라엘의 고집 [1] 2004-07-02 13729
1027 기타 자유로움의 세계로! [2] [1] 2004-07-02 12638
1026 기타 비뚤게 보기와 바로 보기 [1] [1] 2004-07-02 12456
1025 기타 하나님의 나라와 영의 나라 [4] [1] 2004-07-02 13000
1024 기타 생명을 얻는 길 [1] [1] 2004-07-02 13276
1023 기타 야곱의 하나님 체험 [1] [1] 2004-07-02 12115
1022 기타 종말론적인 삶 (벧전 4:1-11) [1] 2004-07-02 11902
1021 기타 은폐와 노출 [3] 2004-07-02 11622
1020 기타 부자 이야기 [2] 2004-07-02 13954
1019 기타 흔들리지 않는 터전 [1] 2004-07-02 11635
1018 기타 자기 의와 은총 [1] 2004-07-02 11524
1017 기타 언어의 집 [1] 2004-07-02 9308
1016 기타 내면적 삶이란? [1] [1] 2004-07-02 9307
1015 기타 삶으로서의 예배 [1] 2004-07-02 9833
1014 기타 말의 구원론적 능력 [1] 2004-07-02 11989
1013 기타 불평을 넘어서 존재의 기쁨으로 [1] 2004-07-02 9517
1012 기타 주님의 재림과 생명의 완성 [1] 2004-07-02 9525
1011 기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 2004-07-02 10390
1010 기타 세례요한의 질문 [1] 2004-07-02 13796
1009 기타 이사야의 구원신탁 2004-07-02 11516
1008 성탄절 마리아의 노래 (눅 1:46-56) [1] 2004-07-02 12388
1007 기타 삶의 지혜를 넘어서 [1] 2004-07-02 10771
1006 기타 기쁨과 사랑의 역학관계 [1] 2004-07-02 10121
1005 기타 자유를 향한 길에 서서 [1] 2004-07-02 10948
1004 기타 사울의 어리석음 [1] 2004-07-02 12287
1003 기타 막힘에서 열림으로! 2004-07-02 12283
1002 기타 구름 타고 오십니다. 2004-07-02 11393
1001 기타 야훼의 진노와 모세의 기도 [1] 2004-07-02 11556
1000 기타 예수님을 먹다 [1] 2004-07-02 12962
999 기타 땅을 묵혀라! 2004-07-02 11263
998 기타 마술과 신앙 2004-07-02 10747
997 기타 세계의 토대 2004-07-02 12132
996 기타 야훼의 자기 증거 2004-07-02 11373
995 기타 운명과 자유 2004-07-02 10411
994 기타 본질의 변질 2004-07-02 10480
993 기타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힘 2004-07-02 12054
992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10027
991 기타 노동하는 인간(1) 2004-07-02 9494
990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9995
989 기타 영광의 경험 [3] 2004-07-02 9350
988 기타 노동하는 인간(2) [2] 2004-07-02 8971
987 기타 무엇이 진실한 예배인가? [1] 2004-07-02 9746
986 기타 수행으로서의 신앙생활 [1] [1] 2004-07-02 8570
985 기타 돌무더기에 얽힌 사연 [1] 2004-07-02 9656
984 기타 메시아적 행위와 교회 [1] 2004-07-02 9373
983 기타 사랑이란 무엇인가? [1] 2004-07-02 15431
982 기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1] 2004-07-05 9294
981 기타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1] 2004-07-11 9588
980 기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2004-07-18 9648
979 기타 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2004-07-25 9310
978 기타 말씀 망각의 심판, (8월1일) 2004-08-05 8561
977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2828
976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710
975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376
974 기타 평화를 위한 분열, 8월29일 [5] 2004-08-30 8449
973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411
972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9133
971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908
970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254
969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312
968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267
967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155
966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648
965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327
964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257
963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350
962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9040
961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408
960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112
959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8922
958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490
957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615
956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631
955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451
954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3016
953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601
952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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