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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평화 (골 3:12-17)

성탄절 조회 수 19647 추천 수 0 2012.12.30 22:23:06
설교듣기 : mms://61.111.3.15/pwkvod/dawp/dawp_1230.mp3 
성경본문 : 골로새서 3:12-17 

그리스도의 평화

골로새서 3:12-17, 성탄절후 제1주, 2012년 12월30일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옛 사람과 새 사람

골로새서는 바울의 신학적 영향을 받은 어떤 사람이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단순히 안부를 묻는 편지가 아니라 신앙적인 가르침을 주기 위한 편지입니다. 당시는 기독교 공동체가 시작되던 때였기 때문에 유대교와의 관계도 불분명하고, 전반적으로 아무런 체계가 없었습니다. 성경도 없었고, 노회나 총회도 없고, 교단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와 같은 편지들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아주 중요했습니다. 당시에는 골로새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교회 문서들이 출현했습니다. 골로새서가 신약성경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그것의 영적인 권위를 인정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골로새서 기자는 3장1-17절에서 기독교인을 가리켜 옛 사람과 구별되는 새 사람이라고 규정하면서 새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기독교인은 옷을 입듯이 ‘새 사람을 입은’ 사람입니다(골 3:10). ‘입는다.’는 말을 조심해서 보십시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실제로 새 사람이 되는 건 아닙니다. 새 옷을 입는 겁니다. 옷과 실제 몸은 다릅니다.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일단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게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 옷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이 저절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구도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성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 성화마저도 사실은 믿음에 의한 선물입니다. 여기에 긴장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답게 살아가려고 노력해야하지만, 그 노력마저도 상대화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변화된 삶이라는 게 결정적으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은 또 기독교인다운 최선의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기자는 오늘 설교 본문인 골 3:12-17절에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제가 그 모든 것을 여기서 일일이 나열하지 않겠습니다. 한 가지만 보겠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기독교적인 덕목을 다섯 가지로 말합니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이 그것입니다. 이런 덕목은 신약성서에 자주 거론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의 열매를 아홉 가지로 제시했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갈 5:22,23)가 그것입니다. 이런 덕목들은 순전히 기독교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로마 선생들도 그런 덕목을 가르쳤습니다. 오늘도 이런 덕목을 가르치는 선생들은 많습니다.

 

이 대목에서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덕목들이 당시 로마라는 문명사회가 말하는 덕목들과 차이가 없다면 우리가 굳이 성경을 읽거나 기독교 신앙을 가질 필요가 없는 거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바람직한 삶을 살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 믿고 좀 착하게 살려고 한다는 말은 틀렸습니다. 착한 사람, 도덕적인 사람, 희생적인 사람이 되려면 굳이 기독교인이 되지 않아도 됩니다. 성서기자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세상의 덕목을 제시한 이유는 그것 자체가 결정적인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세상의 가치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기독교적인 삶의 가치가 세상의 보편성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문이 나열한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이라는 다섯 가지 덕목들은 소극적인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소극적이라는 말은 이런 덕목들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덕목들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다섯 항목 중에서 한 가지만이라도 성취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긍휼의 세계에 여러분은 완전히 들어갈 수 있나요? 긍휼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우리가 사죄 기도를 드릴 때 자주 ‘자비와 긍휼이 충만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루터 성경은 긍휼을 ‘herzliches Erbarmen'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상대방을 진심으로 불쌍하게 여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극한의 측은지심입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그런 경험을 하기는 할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잘 모릅니다. 자기 연민이 그렇게 표현되기도 합니다. 측은지심이 설령 들었다고 해도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는 상대방을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오해하면서 자신이 일방적으로 그런 마음을 느끼곤 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긍휼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덕목들로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

그렇다면 성경기자들이 제시하고 있는 것들 중에서 무엇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본질적인 것일까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그 대답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가 신앙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노력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행위로부터만 나옵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숨을 쉬려면 공기 중에 산소가 충분하게 있어야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 하나님의 행위가 무엇인지를 오늘 본문이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여기서 ‘한 몸’은 교회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허공에 떠 있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공동체를 이루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은 바로 이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앞에서 언급된 다섯 가지 덕목과 연관해서 생각해보십시오. 그 덕목들은 인간 사이에서 추구되어야 할 것들입니다. 그 인간 사이의 관계는 바로 교회 공동체에서 확인될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기자는 그것을 그리스도의 평화와 연결해서 설명했습니다. 다섯 가지 덕목들이 실현되어야 할 교회 공동체가 가능할 수 있는 토대가 바로 그리스도의 평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무엇일까요? 우리말 성경은 헬라어 에이레네를 평강으로 번역했습니다. 바울 편지에 나오는 인사말을 번역할 때 주로 그렇습니다. 팔복을 다루는 마 5:9절의 같은 단어 에이레네를 ‘화평’이라고 번역했고, 예수 탄생의 목자 전승을 다룬 눅 2:14절에서는 ‘평화’라고 번역했습니다. 문맥에 따라서 세 가지 다른 말로 번역했는데, 그 뉘앙스가 조금씩 다릅니다. 평강(平康)은 주로 살아가는 게 편안하다는 뜻으로 쓰이고, 화평(和平)은 싸우던 두 사람이 싸우지 않게 되었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평화라는 번역이 가장 간명하면서도 정확한 번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헬라어 에이레네는 라틴어 팍스와 더불어서 훨씬 포괄적인 차원에서 수행되는 평화 사건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팍스 로마나’라는 말은 로마의 제국주의적 평화를 의미합니다. 정치, 경제, 군사적인 강압을 포함합니다. 초기 기독교는 이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팍스 크리스티’(그리스도의 평화)를 외쳤습니다. 이것은 제국주의적 폭력에 저항한다는 뜻을 포함합니다. 라틴어 ‘팍스 크리스티’는 바로 오늘 본문 15절의 헬라어 성경에 나오는 ‘에이레네 투 크리스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단지 우리의 기분을 평안하게, 우리 집을 화평하게 한다는 뜻에 머물지 않고 훨씬 근원적인 차원을 가리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우선 평화가 실제로 가능한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람들은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평화가 아니라 다툼이 우리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평화로운 게 아니라 오히려 불안합니다.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국가적으로 그렇습니다. 먹을 게 부족하기 때문에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소유가 늘어도 그것으로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합니다. 상대방을 적으로 생각합니다. 로마의 평화는 다른 나라를 억압적으로 다룰 때만 성립되었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평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완전한 평화가 실현된 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에이레네 투 크리스투’는 단순히 마음의 평정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더 근원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건져내신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원수 관계에서 친구 관계로 변화되었습니다. 원수 관계라는 것은 죄와 죽음을 가리키고, 친구 관계라는 것은 생명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곧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그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그분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우리는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으며, 생명을 얻고,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이런 말을 여러분이 자주 들어서 너무 뻔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사실이 늘 새롭게 경험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경험이 말처럼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최선은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더 깊이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온 영혼을 다해서 상대방에게 가까이 가려는 것과 같습니다. 신약성서는 모두 그것을 증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영혼을 기울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평화에 들어가는 첩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의 평화가 당신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마음과 영혼을 지배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런 말씀대로 사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거냐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세상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예배의 삶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 사건에 가까이 가는 방법의 하나로, 이것이 가장 핵심적인 것인데, 예배를 말합니다. 16절 말씀은 바로 그 사실을 가리킵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좀더 화끈한 방법을 기대했던 분들이라면 골로새서 기자의 이런 말에 실망했을지 모릅니다. 기독교 영성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좀더 진지하게 생각하십시오. 초기 기독교는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만약에 예배가 없었다면 기독교는 일종의 철학이나 사회운동으로 전락하고 말았을 겁니다. 지금도 그렇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기독교에 그런 요소가 없는 건 아니지만 본질은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배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예배 공동체입니다. 그것이 샘터교회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예배에 대한 몇 가지 오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배 열광주의입니다. 감정을 고조시키면서 어떤 엑스타시를 경험하게 하는 예배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의 말씀 중심적 제사와 대립되는 근동의 우상숭배적인 제사입니다. 또한 예배를 율법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보통 성수주일이라는 말로 일컬어집니다. 율법주의는 인간의 죄책감에 근거한 신앙입니다. 한국교회는 심지어 새벽기도회에 빠진 것으로 불안을 느끼는 분들이 있을 정도로 율법주의에 찌들려 있습니다. 거꾸로 예배 냉소주의자들도 있습니다. 예배를 단순한 종교적 의식이나 습관 정도로 여깁니다. 시간이 나면 예배에 참석하고, 다른 일이 있으면 쉽게 포기합니다.

 

예배를 열광주의, 율법주의, 냉소주의로 접근하면 곤란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생명의 신비인 영광을 돌리는 지고지선의 종교의식입니다. 마르바 던은 <고귀한 시간 낭비>라는 책에서 이 부분을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예배는 돈벌이도 아니고 취미생활도 아니기에 낭비처럼 보이지만, 그 어떤 것보다 고귀한 시간 낭비입니다. 자녀들에게도 바른 예배 참여를 가르쳐야 합니다. 당장은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여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영적으로 큰 차이가 납니다. 예배를 통한 하나님 경험이 그 사람의 영혼을 바르게 키우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새 사람으로 살기 원하십니까?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도록 하십시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 평화를, 즉 구원 사건을 깊이 이해하고 가까이 가십시오. 혹시라도 먹고사는 게 바빠서 그런 것에 마음을 둘 형편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가요? 생각을 바꾸십시오. 그리스도의 평화가 아니면 우리는 참된 삶의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의 평화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길입니다. 단순히 교회에서 모이는 예배 시간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모든 삶에서 골로새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놀라운 방식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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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오명례

January 01, 2013
*.169.251.47

아멘! 아멘! 아멘!

 

지난 한 해 동안도 말씀으로 채워주시어

그리스도께로 향하도록 인도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13년 새 해에도 동일한 은혜가 주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일년 내내 햇볕이 찬란한 태국, 방콕에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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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02, 2013
*.149.31.175

오명례 님,

한번도 직접 뵌적은 없지요?

근데도 친근하게 느껴지는군요.

아, 언젠가 전화 통화는 했던 것 같은데,

맞지요?

한국에 오시면 샘터교회에 한번 들리세요.

'방콕'에 사시니 귀국할 기회가 별로 없으시겠네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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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9]신짱구

January 01, 2013
*.198.41.144

목사님 주안에서 평안하신지요? 

지난 한해 동안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통하여 저의 영과 삶이  감사로 풍성해졌으며,

매순간 깨어있는 삶을 살기 위해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습니다.

설교 말씀, 매일 기도, 디바아의 여러 글들을 읽으면서 정말 많은 것들을 깨닫습니다.

또한 판넨베르크 목사님의 설교집~믿음의 기쁨을 읽으면서 정말 귀한 것들을 제 영혼에 채우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성경공부에도 가고 싶었는데.... 여러가지 사정상 가지 못해서 넘 아쉽습니다.

목사님과 만남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2013년 한해도 목사님을 통해서 주시는

주님의 놀랍고 신비한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길 원합니다.

목사님 새해 소망하시는 모든 일들 주께서 함께하사 도우시길 원하며, 날이 춥습니다.♥ 영육간에 건강유의하세요.

다시 뵐 수 있는 날이 오리라 기대하며.....

그리스도의 평화가 놀라운 방식으로 저의 영혼을 지배하시길 간절히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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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02, 2013
*.149.31.175

신짱구 님,

판넨베르크 설교집을 읽으셨군요.

잘 하셨습니다.

신학 고수의 설교는 달라도 크게 다르지요?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최선의 길은

영적으로 이미 고수가 된 이들을 직접 대하거나

그들의 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대하는 겁니다.

신짱구 님이 깊이 있는 신학책을 읽다면

자신도 모르게 그 내용에 가까이 가 있는 건 발견하게 될 겁니다.

위 대글에서 마지막 기도문을 보니

이미 어떤 단계에 들어가 계시네요.

그리스도의 평화가 놀라운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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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Peace..

January 04, 2013
*.252.98.196

지난 1년도 뒤돌아 보니 예외 없이 우여곡절이 많았지요만,

그럼에도 결국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샘터교회의 일원이되어

매 주일마다 참여했던 예배는

저에게 삶의 원동력이자 큰 기쁨이었습니다.

 

이에 목사님과 샘터 교우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예를 들면, 매주일 설교말씀은

저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타파하면서

새로운 경지를 열어 주었습니다.

 

오늘의 골로새서 본문만 하여도,

제가 수십년 전에 몸담았던 교회공동체에서

모든 교인들이 줄줄히 암송하면서

공동체의 삶을 통하여 실체적으로

그 말씀을 실현한다고 여긴 적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의 평강을

개인적인 마음의 평안 정도로만 협소하게 해석하였지요.

이번 말씀에서

이보다 훨씬  근원적이고 높고 깊은 경지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이슈로

목사님께서는 주일날 형식적인 예배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마지막 결론에서 예배와 삶의 일치를 말씀하셨기에 이론의 여지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전 공동체에서는

진정한 예배란 교인들의 삶으로, 생활로 구현되는 것이 더 큰 본질이기에,

예배형식을 거의 무시하는 수준이었지요.

아마도 골로새서가 기록된 당시에는

예전 형식의 예배가 아직 정착되지는 않았고,

그 이후 교부시대를 거치면서

역사 속에서 세련되고 정형화 되었겠지요?

 

결국 사람은 부족할 수 밖에 없기에,

지나친 형식주의에 매몰되어 본질을 잃어버리거나,

아니면 형식조차 잃어버려 흐지부지 소멸되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하겠지요?

 

샘터교우로서 처음 댓글을 달다보니 조금 길어졌습니다.

샘터 교우님들과 모든 다비안들에게 재삼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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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04, 2013
*.149.31.175

정상모 집사님,

같은 교회 공동체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게

벌써 일년 반은 지났지요?

이미 그 전부터 다비아에서, 또 연합수련회에서

만나뵈곤 했지만 말입니다.

학교 보직으로 바쁘신데도,

그리고 예배에 참석하는 거리가 먼데도

출장 등의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매주일 예배 모임에서 만나뵈는 게

예배를 인도하는 저로서도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샘터교회와 제 설교의 좋은 점만 말씀해주셨는데,

부족한 부분은 앞으로 서로 채워나갔으면 합니다.

2천년 기독교 역사와 전통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도

오늘 이 시대를 향해 열린 교회 공동체로

샘터교회가 자리를 잡아나가야겠습니다.

새해에 주님의 은총이 더욱 풍요로우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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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나무늘보

January 06, 2013
*.152.61.171

새해 첫 예배를 다비아 설교로 시작합니다.. 얼마전 오강남 교수님의 예수는 없다를 읽고... 반가움과 불편함을 동시에 경험하였습니다... 예배 냉소주의쪽으로 더 기울었던 제게 자극이 되는 말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말씀대로 올해는 고귀한 시간낭비인 예배공동체를 좀 더 적극적으로 찾아 보려고 합니다. 목사님과 다비안형제들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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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06, 2013
*.149.31.175

나무늘보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ㅎㅎ

오강남 교수님의 <예수는 없다>는,

제가 이렇게 말씀드려서 어떨지 모르지만, 

별로 추천할만한 책이 못됩니다.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오해받기 쉬운 글이라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적 관점이 빈약하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종교학자들의 글이 그런 것은 아닌데,

오강남 선생님 류의 글이 주로 그렇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흥미거리가 될지 모르지만

기독교 영성의 중심에 들어가려는 사람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이야기이죠.

이에 대해서 아마 제가 어딘가에 썼을 겁니다.

예배공동체에 참여하지 않고

기독교 영성에 들어가기는 어렵습니다.

나무늘보 님이 살고 있는 지역에

좋은 예배 공동체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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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June 05, 2013
*.176.175.67

인간이 느끼기에 가장 연약한 순간이 죽음의 직전이 겠지요.
숨쉴 힘 조차 없으니 연약할 뿐아니라, 위기이자 마지막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을 죽음으로 종료 시키고 죽음을 죽음으로 두지 않고 다시 태어나는 부활할 수 있는 상태, 평화를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 주었습니다.
현재 사람들의  가장 깊은 관심사는 뭐니뭐니 해도 죽음이 아닙니다.  죽음과 비슷 한 것들입니다.
죽게끔하는 그런 행위들이 관심사입니다. 돈 벌려다 죽이고 죽습니다. 인생 전체를 거기에 들이 밀고 쇠작해서 죽습니다.  아, 그 죽음보다 더 다른 죽음, 죽음이 부활이 되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이렇게 내 방식대로 상기 시키려고 써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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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5 부활절 부활의 증인 공동체 [17] 2011-05-01 20690
904 성탄절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2009-12-28 20646
903 성령강림절 모세의 무덤이 없는 이유 [28] 2008-10-19 20245
902 주현절 두려워 말라! (사 43:1-7) [11] [1] 2013-01-13 19877
901 성령강림절 기도와 믿음 file [20] 2010-10-19 19845
900 기타 다윗의 통곡 [1] 2006-08-27 19738
» 성탄절 그리스도의 평화 (골 3:12-17) [9] 2012-12-30 19647
898 기타 성만찬 공동체 [2] [1] 2006-09-10 19608
897 성탄절 영광과 평화의 노래 2010-12-26 19433
896 성령강림절 영적인 사람 [11] 2008-05-11 19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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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0 사순절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 [11] 2010-03-29 18163
889 성령강림절 의인과 죄인에 대한 질문 [3] 2008-06-01 1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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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7 부활절 예수의 기이한 빛 (베드로전서 2:1-10) [16] 2011-05-16 17901
886 성령강림절 나아만과 게하시 (왕하 5:1-14) [6] 2013-07-08 17900
885 주현절 창조의 빛, 인식의 빛 [15] 2009-02-23 17890
884 부활절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의 주 [17] 2011-04-24 17792
883 창조절 하나님과 금송아지 상 (출 32:25-35) [7] 2011-10-17 17761
882 사순절 우리의 생각과 다른 하나님 [2] 2010-03-08 17745
881 성령강림절 그리스도의 가난과 우리의 부요 [23] 2009-07-13 17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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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9 창조절 예수 재림과 영적 각성 (살전 4:13-18) [11] 2011-11-06 17628
878 성령강림절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 [8] 2010-08-09 17421
877 기타 예배로서의 삶 [5] [1] 2006-09-03 17330
876 주현절 포도주 사건의 실체와 의미 [20] 2007-01-14 17265
875 창조절 불행한 부자 이야기 (눅 16:19-31) [10] 2013-09-29 17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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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9 사순절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과 믿음 [27] 2010-03-22 17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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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6 대림절 임마누엘 예수 [17] 2007-12-23 16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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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0 창조절 삭개오 이야기 (눅 19:1-10) [14] 2016-10-30 16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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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6 성령강림절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눅11:5-13) [10] 2013-07-29 16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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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2 기타 하늘생명의 밥 [1] 2006-08-20 16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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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0 주현절 성령 임재와 마술 [21] 2010-01-11 16084
839 성령강림절 요한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 [17] 2009-07-27 16052
838 성령강림절 은혜의 보좌 앞으로! [28] 2009-10-26 16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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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6 성령강림절 천국, 질적인 변화의 세계 [18] 2011-07-24 15988
835 기타 낡은 것과 새것 [2] 2004-07-02 15968
834 주현절 이사야 예언의 성취 (눅 4:14-21) [7] [1] 2013-01-27 15963
833 사순절 “나는 아니지요?” [23] 2011-04-18 15912
832 성령강림절 세례 요한의 죽음 (막 6:14-29) [10] 2015-07-13 15847
831 기타 메시야니즘의 기초 [1] 2008-05-01 15817
830 기타 하나님을 알자 [4] 2004-06-30 15815
829 주현절 가난한 사람들 [23] 2011-02-06 15797
828 기타 신앙적 일상과 재림신앙 [2] 2006-10-15 15751
827 사순절 여호와를 알리라! [16] 2011-04-11 15736
826 성령강림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6] 2008-06-08 15730
825 주현절 영적 자유의 토대 [22] 2011-02-27 15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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