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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예언의 성취 (눅 4:14-21)

주현절 조회 수 19030 추천 수 1 2013.01.27 22:13:44
설교듣기 : mms://61.111.3.15/pwkvod/dawp/dawp_0127.mp3 
성경본문 : 누가복음 4:14-21 

이사야 예언의 성취

누가복음 4:14-21, 주현절후 제3주, 2013년 1월27일

 

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랍비 예수의 설교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랍비, 즉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유랑 랍비들이 많았는데, 예수님도 그런 분들 중의 한 분이었습니다. 랍비들은 회당에서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회당에서 자주 말씀을 전했습니다. 나중에 유대교 고위층으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힌 뒤에는 회당에 들어가지 못하셨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눅 1:15절과 16절에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는 사실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특히 16절의 이야기는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벌어진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맞아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요즘 우리가 주일날 교회에 나오듯이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회당 예배 전통이 기독교 예배에도 부분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성경읽기와 설교와 찬송입니다. 기독교 예배는 이런 회당 전통과 성찬식이 결합된 겁니다. 회당예배는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사람들은 회당에 들어가면 먼저 개인적인 기도를 드리고, 다음에는 쉐마(신 6:4-9)를 공동으로 고백하고, 테필라(Tephillah)와 쉐모네 에스레(Shemoneh Esreh)라는 유대인들의 기도문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이어서 성서일과에 따라서 성경을 읽습니다. 성경은 주로 오경을 가리킵니다. 훗날 선지서도 성서일과에 포함되었습니다. 성경은 여러 사람이 돌아가면서 읽습니다. 성경읽기가 끝나면 다시 기도를 드리고, 이어서 랍비 같은 사람들이 설교를 합니다. 마지막으로 카디쉬(Qaddish)라는 기도문을 함께 외웁니다.

 

예수님은 성경 맡은 사람에게서 전달받은 이사야의 한 부분을 펼쳤습니다. 이사야 61:1,2절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두루마리로 된 이사야서를 덮어 그걸 맡은 사람에게 건넨 뒤에 회당에 앉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

 

이것으로 회당 이야기가 끝났다면 좋았을 텐데, 뒤로 가면서 이야기가 꼬이게 됩니다.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22절) 자신들과 똑같이 평범한 사람이 대단한 사람 흉내를 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십니다. 옥신각신 끝에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면서 낭떠러지로 밀어버리려고 했습니다. 이런 폭동이 예정대로 계속 진행되었다면 그 다음에는 돌을 던지게 될 겁니다. 예수님은 그들 사이를 빠져나와 피하셨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험악하게 끝났습니다. 회당예배로부터 종교재판으로 뒤바뀐 겁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예수님의 설교를 듣던 청중들은 왜 돌변해서 예수님을 배척한 것일까요?

 

문제의 핵심은 예수님을 누구로 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나사렛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랍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회당에서 설교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자기 고향에서 훌륭한 랍비가 나왔다는 자부심도 있었겠지요. 예수님도 그런 정도의 역할만 했으면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자신에게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이 사실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를 사칭한다고 본 것입니다. 메시아를 사칭하는 자는 용서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훗날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신성 모독죄로 고발당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도 유대교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늘 다른 종교나 세상 사람들도 똑같습니다. 지금 우리 기독교인들만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습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논쟁거리로 남을 겁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겁니까? 아무런 근거도 없이, 단순히 습관적으로 믿는 건 아닐까요? 우리는 믿음으로 선택을 받았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사렛 고향 사람들은 선택받지 못했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일까요? 무조건 믿는다는 말로 이 문제가 해결될까요?

 

이사야의 예언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21절)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응하였다는 말은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아무도 시비를 걸지 못했을 겁니다. 그게 사실이 아니면 메시아를 사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종교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의 이 예언이 과연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느냐 하는 게 관건입니다.

 

예수님께서 펼쳐 읽으신 이사야의 글에는 메시아로 인해서 벌어질 일이 네 가지로 나옵니다. 1)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 2) 포로로 잡힌 사람에게 자유를 준다. 3) 시각 장애인에게 시력을 준다. 4) 눌린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이런 일들은 ‘주의 은혜의 해’에 일어날 것들입니다. ‘은혜의 해’는 희년을 가리킵니다. 이때는 모든 것이 회복됩니다. 빚을 갚을 길이 없어서 판 땅을 되돌려 받는 해입니다. 종으로 팔렸던 사람들도 모두 돌아옵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가 꿈꾸었던 메시아적인 희망입니다. 쉽게 생각해보십시오. 실제로 사채에 쪼들리던 사람이 모두 탕감 받았다고 말입니다. 또는 남북통일이 이루어졌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내일이라도 기차를 타고 북한을 거쳐서 북경이나 베를린까지 갈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지구의 모든 핵무기가 완전히 제거되고, 더 이상 장애인도 없고, 실업자도 없고, 불치병도 없고, 노후에 대한 염려도 없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도 개인적으로 여러분의 삶에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랄 겁니다. 그걸 성취할 사람이 나온다면 그는 분명히 메시아라는 말을 들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일을 실제로 행하셨을까요?

 

네 가지 일을 좀더 구체적으로 보십시오. 1)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은 가난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가난은 삶을 총체적으로 파괴합니다. 사람을 비굴하게 만들고 불안하게 만듭니다. 많은 혁명가들이 민중들에게 가난을 면케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 약속이 부분적으로 지켜질 때도 있었고, 단지 말로 끝날 때도 있었습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도 결국 복지 운운하면서 가난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약속들이 판을 쳤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을 못하셨습니다. 2) 포로생활도 삶을 파괴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로마 식민통치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하셨습니다. 3) 시각장애를 비롯한 모든 장애와 불치병은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병과 장애를 고치기는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장애와 병을 고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목적으로 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도 아닙니다. 4) 눌린 자 문제는 두 번째로 언급된 포로생활과 비슷합니다. 예수님 이후로도 세상에는 여전히 억압적인 질서가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경제, 정치적인 억압에서 자유로워지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메시아적 희망이 자신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셨지만 실제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증거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들은 아마 예수님을 사이비 교주쯤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 고향 사람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마을 밖 낭떠러지로 끌고 갔습니다. 메시아를 사칭한 젊은이 예수를 징벌하려고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읽는 우리는 지금 혼란스럽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자기 독단에 빠져서 자기가 메시아라고 외치는 사이비 교주입니까? 아니면 이사야가 꿈을 꾸었던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투쟁하자고 선동하는 혁명가인가요? 그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근거로 자신에게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선포한 것일까요? 본문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분석하면 이사야 예언의 성취 운운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 아니라 누가복음 기자의 신앙 고백적 진술입니다.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이것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누가의 영적 통찰을 통해서 예수님 사건을 훨씬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누가는 무엇을 근거로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예수님에게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본 것일까요?

 

하나님 나라

 

메시아가 행하게 될 네 가지 사건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에게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판단은 예수님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메시아사상에 근거할 때만 옳은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보다 5백 년 전에 선포되었던 이사야의 예언을 새로운 차원에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차원에서 이사야의 예언은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이것이 누가복음을 비롯해서 복음서와 모든 신약성서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증언하고 있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 새로운 차원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삶과 운명은 하나님 나라와 직결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첫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예수님은 온 몸으로 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치병이나 비유 이야기 등은 모두 하나님 나라를 토대로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영혼을 바친 예수님의 운명은 역설적이게도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하나님의 존재방식입니다. 그것은 곧 사랑이며 창조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영적 관심을 거기로 집중시키셨습니다.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며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여기서 ‘모든 것’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그 내용까지 포함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전념하는 사람에게는 가난, 포로, 눈 멈, 눌림도 모두 해결된다는 선언이자 약속입니다. 이런 말씀이 이상하다고 생각되시나요? 아무리 하나님을 잘 믿어도 실제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또는 거꾸로 모든 문제가 실제로 다 해결됐다고 생각하시나요? 하나님 나라와 그 통치는 실제적인 문제의 해결과는 차원이 다른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한 밤중에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손전등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걸 서로 차지하겠다고 싸웁니다. 그렇게 싸우는 중에 아침이 옵니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손전등을 차지하기 위해서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싸우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아침이 올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회심하라는 말씀은 아침이 온다는 사실에 영혼의 방향을 정립하라는 명령입니다.

 

이제 문제는 하나님 나라를, 그의 통치를, 그의 능력을 일상에서 경험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구체적으로 언급한 가난, 포로 등등의 문제입니다. 그것을 해결하려고 애를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밤이 어두운 것처럼 그런 문제는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운 좋게 손전등을 하나 얻었다고 해도 세상은 캄캄합니다. 아무리 삶의 조건이 좋아져도 우리가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지는 여러분은 다 아실 겁니다. 근본적인 방향 전환이 없으면 구원은 불가능합니다. 그 방향전환을 성서는 회심(메타노이아)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이사야의 메시아적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분명히 증언합니다. 회당에서 그 말을 들은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오늘도 우리를 구원해줄 메시아를 찾고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 중에도 회당 사람들과 비슷한 생각에 멈춰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복음 기자의 증언을 여러분들에게 똑같이 전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생명의 현실(reality)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침침하고 어둡고 손전등 하나로 다툴 수밖에 없는 밤의 현실에서 살지만 손전등이 전혀 필요 없는 낮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그의 통치에, 그의 부활생명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의 진정한 성취자이신 우리의 메시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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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삶의 과제

January 28, 2013
*.230.165.185

목사님!

설교말씀 잘 들었습니다.

사실 주일 설교시간에 이성을 가리는 장막(??)이 한없이 찾아와 비몽사몽간에 설교를 들었습니다.

왜 그리도 눈꺼풀이 무거운지요!

 

졸음!

자고있음과 깨어있음의 경계.

깨어있을 땐 잔다는 것을 완전히 알지 못하고,

자고있을 땐 깨어있다는 것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는.

혹 우리의 삶이 졸음은 아닐런지?

졸음이라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속에서 잔다는 것과 깨어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인지하는......

그래서 졸음의 끝은 완전한 깨어남이자 영원한 잠일 수도 있다는 것을.

기다림이란 이 경계가 있다는 것과 경계가 궁극에는 없어질 것이라는 확신은 아닌지?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았는데, 결국 존 것에 대한 변명만 남았습니다.

추운 날씨 감기 조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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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28, 2013
*.149.31.175

ㅎㅎ 삶 님,

잘 졸았습니다.

아마 설교가 지루해서 졸았다기보다는

영혼이 편안해서 졸았을 겁니다.

약간 다른 말이지만

삶에도 졸음이 필요한 것 같아요.

현대인은 너무 각성되어 있어서

오히려 영적으로 병들어가는 게 아닐는지요.

잠간 졸다보면 인생이 이미 끝나 있겠지요.

아니 끝났다기보다는 완성되어 있겠지요.

걱정하지 말고

졸면서 살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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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January 28, 2013
*.34.116.82

목사님,

이번 주 설교말씀을 통해서

성서기자들의 놀라운 영적 통찰력을 다시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과연 난 회심한 자인가?

회심한 자라면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

그의 통치, 그의 부활생명에 전적으로 의존할텐데,

과연 그러한가 하고요.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또 전적으로 그렇지 않다, 부인하지도 못하겠고요.

성서기자들처럼 '그런'영적 통찰력의 부재 때문인 것 같습니다.

진퇴양난입니다.

어둠속에서 빛을 발견한 사람들,

정말 많이 부럽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한 동안 가슴앓이에 시달리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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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28, 2013
*.149.31.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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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라 님은 영혼이 부드러운 분이라서

늘 배우는 태도를 잃지 않으시는군요.

성서기자들은 우리의 영적 멘토들입니다.

그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그곳을 향해서

우리의 영적 시야가 열려야 할텐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 방해를 하는 거지요.

저도 그런 한계를 늘 느낍니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길을 가봅시다.

우리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가 옷입혀졌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말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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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2C120

April 22, 2013
*.21.5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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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경 안에
우리 믿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로 옷 입혀졌다”(??)는 구절 말씀이
(우리 믿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입혀진” 것이 아니라 ??)
어디에 있는 건지 궁금합니다?
성서 기자들의 가리키고 있는 바, 즉 사도들의 “손가락”은
“믿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혀졌다”
라는 성서 진리를 말하고 있는데 반해
이 게시물 안에서는
“믿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 의(義)로 옷 입혀졌다”
라고 하는 다른 이야기, 다른 “손가락”이 나오고 있으니,

성서 기자들의 진술과 이 게시물 댓글에서의 그런 진술은
그 자체가 서로 전혀 다른 이야기이자,
서로 전혀 다른 곳을 가리키고 있는, 서로 전혀 다른 “손가락”들이니 만큼
성서 진리 면에서 분명한 분별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PS) 
아울러 이 댓글에 마찬가지로 또, 비추천 표시해 놓으며 비방 의사를 밝혀 놓은 회원들에게도
한 말씀 놓습니다.
다비아가 ‘진리 추구를 위한 열린 교제’라는 걸 표방하고 있는 걸 님들이 안다면

<정 용섭 목사님 글에 대해서는 무조건 '찬양 일색' 댓글만이 달려야 한다>는 님들의 그 같은 입장에서
목사님 글에 대해 찬양, 찬동 내용이 아니라 질의 사항을 내놓은 경우에는
무조건 음성적으로 ‘비추천’하거나 양성적으로 ‘비방을 위한 비방’ 댓글들로 공격하곤 하는
그간 보아 온 그런 조잡한 짓들을 일삼을 게 아니라
적어도 다비아의 그런 표방 명색에 걸맞게,
찬양, 찬동이 아닌 이런 질문 형태의 댓글에는 무조건 반대와 비방부터 해 대며 나서는 대신
님 자신의 그 “제대로 된” 비방 “이유”와 '근거'에 대한 분명한 자기 의사 표명을 해 놓아야만
(적어도 님들이 자칭 “성서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 운운 하고 있는 한)
열린 교제” 안에서 저나 다른 독자들도 더 생각해 보고 더 토론해 볼 수 있는, 바람직한 기회가
된다는 걸 알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긴, '타이틀에 대한 그런 맹신' 플러스 '비방을 위한 비방'이 바로
님들이 생각하는 "평신도로서 목사님께 배우는 자세"(?)인 거라면, 그렇다면 뭐, 물론 이쪽으로서도,
그럼, 님은 그냥 그 모습 그대로 계속 그렇게 사시라고 할 수밖에는 없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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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June 13, 2013
*.176.175.67

하나님의 존재방식의 설명을 최선을 다해서 최후까지 부활로 예수님께서 설명을 하셨습니다.
표현방식은 유사한데 차원이 다른 두가지가 혼선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현실의 삶에서 해결과제를 원만하게해결 해주는 리더를 메시아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내가 배고프고 다급하면 당연히 저도 삶의 간절함때문에 해결사에게 집중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늘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떠오릅니다. 배부르다고 다 해결 되나, 배가 고프고 가진게 없을 때가 어쩌면 마음이 가난한자가 되기에 주님을 더 바라볼 수 도 있을지도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아무리 복음서를 읽고 또 읽어도 찾아내지 못한 중요한 부분을 한줄씩 이해할 수 있게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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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13, 2013
*.94.91.80

그렇지요.
모든 사람들이 메시아를 기다라고 기대합니다.
예수 당시만이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그걸 뭐라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실존이라는 게
늘 뭔가 채워지지 않는 구석이 있어서
메시아를 갈구합니다.
문제는 어떤 메시아냐에 달려 있어요.
유대인들의 메시아 관은
예수에게서 충족될 수 없었지요.
그들은 정치 경제적인 메시아를 기다렸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거절했습니다.
오늘 기독교인들도 상당히 많은 경우에
유대인들과 비슷한 메시아 관으로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형식은 기독교이지만
내용은 유대교인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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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 기타 하나님 나라의 통치방식 [1] 2004-07-02 14973
1030 기타 낡은 것과 새것 (고후 5:16-21) [2] 2004-07-02 18469
1029 기타 이스라엘의 고집 [1] 2004-07-02 13738
1028 기타 자유로움의 세계로! [2] [1] 2004-07-02 12665
1027 기타 비뚤게 보기와 바로 보기 [1] [1] 2004-07-02 12472
1026 기타 하나님의 나라와 영의 나라 [4] [1] 2004-07-02 13020
1025 기타 생명을 얻는 길 [1] [1] 2004-07-02 13300
1024 기타 야곱의 하나님 체험 [1] [1] 2004-07-02 12137
1023 기타 종말론적인 삶 (벧전 4:1-11) [1] 2004-07-02 11921
1022 기타 은폐와 노출 [3] 2004-07-02 11640
1021 기타 부자 이야기 [2] 2004-07-02 13972
1020 기타 흔들리지 않는 터전 [1] 2004-07-02 11654
1019 기타 자기 의와 은총 [1] 2004-07-02 11543
1018 기타 언어의 집 [1] 2004-07-02 9330
1017 기타 내면적 삶이란? [1] [1] 2004-07-02 9323
1016 기타 삶으로서의 예배 [1] 2004-07-02 9850
1015 기타 말의 구원론적 능력 [1] 2004-07-02 12013
1014 기타 불평을 넘어서 존재의 기쁨으로 [1] 2004-07-02 9542
1013 기타 주님의 재림과 생명의 완성 [1] 2004-07-02 9538
1012 기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 2004-07-02 10411
1011 기타 세례요한의 질문 [1] 2004-07-02 13810
1010 기타 이사야의 구원신탁 2004-07-02 11528
1009 성탄절 마리아의 노래 (눅 1:46-56) [1] 2004-07-02 12414
1008 기타 삶의 지혜를 넘어서 [1] 2004-07-02 10789
1007 기타 기쁨과 사랑의 역학관계 [1] 2004-07-02 10133
1006 기타 자유를 향한 길에 서서 [1] 2004-07-02 10952
1005 기타 사울의 어리석음 [1] 2004-07-02 12295
1004 기타 막힘에서 열림으로! 2004-07-02 12294
1003 기타 구름 타고 오십니다. 2004-07-02 11401
1002 기타 야훼의 진노와 모세의 기도 [1] 2004-07-02 11576
1001 기타 예수님을 먹다 [1] 2004-07-02 12986
1000 기타 땅을 묵혀라! 2004-07-02 11280
999 기타 마술과 신앙 2004-07-02 10761
998 기타 세계의 토대 2004-07-02 12142
997 기타 야훼의 자기 증거 2004-07-02 11389
996 기타 운명과 자유 2004-07-02 10436
995 기타 본질의 변질 2004-07-02 10496
994 기타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힘 2004-07-02 12075
993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10051
992 기타 노동하는 인간(1) 2004-07-02 9521
991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10023
990 기타 영광의 경험 [3] 2004-07-02 9370
989 기타 노동하는 인간(2) [2] 2004-07-02 8992
988 기타 무엇이 진실한 예배인가? [1] 2004-07-02 9766
987 기타 수행으로서의 신앙생활 [1] [1] 2004-07-02 8601
986 기타 돌무더기에 얽힌 사연 [1] 2004-07-02 9680
985 기타 메시아적 행위와 교회 [1] 2004-07-02 9389
984 기타 사랑이란 무엇인가? [1] 2004-07-02 15459
983 기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1] 2004-07-05 9321
982 기타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1] 2004-07-11 9601
981 기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2004-07-18 9658
980 기타 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2004-07-25 9335
979 기타 말씀 망각의 심판, (8월1일) 2004-08-05 8581
978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2842
977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724
976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398
975 기타 평화를 위한 분열, 8월29일 [5] 2004-08-30 8470
974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433
973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9156
972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926
971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277
970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333
969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291
968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170
967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669
966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350
965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283
964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364
963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9058
962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418
961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130
960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8937
959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505
958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626
957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643
956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467
955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3031
954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612
953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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