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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눅11:5-13)

성령강림절 조회 수 18931 추천 수 0 2013.07.29 09:04:14
설교듣기 : mms://61.111.3.15/pwkvod/dawp/dawp_0728.mp3 
성경본문 : 누가복음 11:5-13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눅 11:5-13, 성령강림절후 제10주, 7월28일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저는 몇 년 사이에 기도를 주제로 한 책을 두 권 썼습니다. <주기도란 무엇인가>(홍성사, 2011)와 <매일 기도하라>(한들출판사, 2013)입니다. 앞의 책 머리말에서 저는 기도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설득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설득시키는 영적 태도입니다.” 2012년 한 해 동안 매일 쓴 기도문을 담은 뒤의 책 머리말에서 저는 기도문을 책으로 엮어내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동안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수도원 영성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것 말고 저에게 요구하는 일이 없으실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기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기도 생활을 하시는지요?


복음서는 예수님도 틈틈이 날이 밝기 전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셨다고 전합니다. 그분이 무슨 기도를 드리셨는지에 대해서는 복음서가 전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기도 내용만은 나옵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의 짐을 가능하면 물리쳐 달라고 하셨고, 이어서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체포당하기 전에 드린 기도를 17장에 기록했습니다. 상당히 긴 기도입니다. 이런 몇몇 자료를 놓고 볼 때 예수님이 평소에 드린 기도는 당신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과 제자들의 운명에 대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적도 있습니다. 그게 “너희는 ... 이렇게 기도하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주기도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 바로 앞 구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곧 이어서 눅 11:5-8절에서 기도의 중요성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친구의 간청

어떤 사람이 한밤중에 이웃에 사는 친구에게 와서 떡 세 덩이를 빌려달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식구들이 먹으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손님이 왔는데 먹을 게 없었습니다. 요즘이야 24시간 편의점에 가도 되고, 냉장고에도 어느 정도 먹을거리가 저장되어 있으니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2천 년 전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늦은 시간에 갑자기 찾아온 손님은 아마 멀리서 하루 종일 걸어왔겠지요. 피곤하고 배도 고팠을 겁니다. 생각보다 늦게 도착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야심한 시각에 이웃집 친구를 찾아간 겁니다. 이건 예의가 아닙니다. 친구는 이미 문을 걸어 잠갔고, 모든 식구가 잠이 들은 상태입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떡을 찾아서 준다는 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8절)


이 결론은 우리의 예상과 다릅니다. 우리는 옆집 친구가 부탁을 하니까 그 우정을 생각해서 귀찮지만 일어나 그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이런 예상과 달리 집주인은 친구의 간청으로 인해서 요구를 들어주었다는 겁니다. 이런 것만 본다면 이 비유의 가르침은 ‘간청’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간청은 헬라어 ‘아나이데이아’의 번역으로 shameless persistence(부끄러움을 모르는 고집)이라는 뜻입니다.


한국교회 신자들 중에서 이 단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제법 됩니다. 간청기도, 또는 강청기도라는 말로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그런 제목으로 된 책도 있습니다. 그런 책은 쉽게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합니다. 그 책의 저자들은 몇몇 성경 본문과 몇몇 개인적인 간증을 곁들여서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낙심하지 말고 계속해서 간구하라고 닦달합니다. 이런 뜻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예수님의 비유가 눅 18:1-8절에도 나옵니다. 그 대목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과부가 원한을 풀어달라고 재판장에게 갔습니다. 처음에 재판장은 과부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과부가 계속해서 찾아오자 어쩔 수 없이 과부의 요청을 해결해주려고 마음을 바꾸었다는 겁니다. 요즘처럼 기도 냉소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필요한 말씀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마치 부모를 완전히 신뢰하는 어린아이들처럼 하나님께 열정적으로, 그리고 간청의 방식으로 간구하는 신앙적인 태도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바람직하고 필요합니다.


문제는 이런 성경말씀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종교적 욕망을 하나님께 강요하는 식으로 기도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주여, 삼창’으로 기세를 올리는 식입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교회의 어떤 목사님은 해외 선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설교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승합차의 크기와 색깔까지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응답받는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이런 분위기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청년들 중에는 결혼 대상자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는 방식으로 기도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키, 연봉, 취미 등등, 마치 결혼정보 회사의 요구와 비슷한 항목을 놓고 기도합니다. 그게 이루어질 때까지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이루어지지 않으면 기도가 부족하다고 자책합니다.


본문에서 아나이데이아(간청)에 초점을 두면 곤란합니다. 염치없이 무조건 매달리는 것은 당연히 잘못입니다. 야밤에 옆집 친구 집을 찾아가서 떡을 빌려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걸 잘했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본문에서 핵심은 떡을 빌리러 온 사람이 아니라 집주인입니다. 집주인은 무례한 친구의 ‘요구대로’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이 비유에서 집주인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 비유에서 무례하게 간청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에 초점이 있습니다.


간청 기도나 그걸 들어주시는 하나님이나, 결국 똑같은 이야기가 아니냐 하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예, 그렇게 생각해도 무조건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철없이 간청하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니까요.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즉 기도의 영성이 무엇인지는 알고 기도해야겠지요. 자식들도 철이 없을 때는 부모에게 떼를 쓰듯이 무언가를 요구하지만, 그래도 부모들은 지는 척하고 들어주지만, 철이 들면 부모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신앙적으로 철이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뭘 알고 기도하고, 제대로 알고 예배드려야하지 않겠습니까. 신앙적 철이 들려면 성경을 바르게 읽고 배워야 합니다.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

야밤에 찾아온 친구에게 떡을 주었다는 사람에 대한 비유가 끝난 뒤에 예수님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풀어주십시오. 그것을 잘 읽으면 앞에서 제가 말씀드린 내용을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9절과 10절에는 똑같은 말이 반복됩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그대로 주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멋진 표현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기도하는 자세를 이것보다 더 멋지게 표현할 수는 없어 보입니다. 이 표현은 앞에서 친구 비유에서 나온 간청이라는 단어와 그 느낌이 비슷하게 들립니다. 이런 가르침에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매달리듯이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뭔가 자신감을 주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실제로 뭔가를 얻은 경험을 하기도 하고, 또한 그런 경험을 통해서 신앙적으로 풍성해지기도 합니다. 좋은 일입니다. 본문 말씀을 좀더 따라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구하라는 말씀을 하신 뒤에 이렇게 보충해서 설명하십니다. 생선을 달라고 하는 아들에게 뱀을 줄 아버지는 없고, 알을 달라고 하는 아들에게 전갈을 줄 아버지는 없다는 겁니다. 결론 13절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 구절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사람이 아니라 거기에 반응하시는 하나님이 핵심입니다. 사람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줍니다. 그러니 하나님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신뢰가 기도의 토대라는 겁니다.


이런 표현이 너무 상투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늘 좋은 것만 주는 게 아니라고 느낄 때도 많습니다. 우리 자신과 주변에 불행이 일어납니다. 삶 자체가 힘들 때도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원망스럽게도 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좋은 것이라는 판단을 우리가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판단은 일시적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뭐가 좋은 것인지 잘 모릅니다. 우리 자식들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런지는 잘 모릅니다. 목회자인 저에게 무엇이 좋은 것인지 단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작은 불행이야 지나가면 좋을 일이 될 수 있겠지만, 정말 큰 불행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겁니다. 선천적 장애라거나 자식들이 부모 먼저 죽는 참척의 고통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이런 일 앞에서 저도 더 이상의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건 하나님만이 대답할 수 있습니다. 각자가 그분으로부터 대답을 들으십시오. 다만 저는 오늘 본문 13절에서 간접적으로나마 찾은 하나의 대답을 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말을 하면서 ‘성령’을 거론합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13절) 이 대답은 좀 뜬금없는 듯이 들립니다. 문장 흐름에서 볼 때 하늘 아버지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정말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성령을 준다고 합니다. 성령이 좋은 것들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 성령은 바로 앞에서 제가 대답하기 어렵다고 말씀드린 그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우리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들까지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궁극적으로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영적으로 뚫어보려면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견딜 수 없는 고난과 불행까지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이라는 인식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게 과연 가능할까요? 자기합리화나 말장난은 아닐까요?


지난 대구샘터교회 수련회 때의 주제는 ‘팔복, 깊이 읽기’였습니다. 마 5:1-12절에는 나오는 팔복 문장은 헬라어 성경에서 각각 ‘마카리오이...’로 시작됩니다. ‘복되어라.’는 뜻입니다. 그들의 운명은 실제로는 복된 운명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울고, 배고프고,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복된 이유는 그들의 실제적인 운명이 복지의 차원에서 잘살게 된다는 데에 있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생명의 힘에 결탁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생명의 힘은 하나님 나라이며,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부활의 능력이고 종말의 힘입니다. 그런 생명의 힘에 대한 인식과 경험은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생명의 능력인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과 삶을 새롭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본문의 말씀은 옳습니다. 이런 경험이 없으면 반찬 투정하는 아이들처럼 하나님께 투정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을 구하라

이제 우리는 본문이 말하는 구해야 할 것, 찾아야 할 것, 두드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성령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로부터 지금까지 교회는 “성령이여, 오소서.”(Veni Sancte Spiritus)라고 기도하고 노래했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마지막 질문은 이렇습니다. 성령의 임재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해서 성령이 임한다는 보장이 있을까요? 그런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성령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각각의 경험이 다를 겁니다. 성령 운동을 하는 분들을 보면 뭔가 비현실적인데 빠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령을 주술적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무당들이 초혼제를 올리듯이 우리가 성령을 마음먹은 대로 불러내는 건 아닙니다. 성령은 곧 하나님입니다. 당신 자신의 자유로 활동하십니다. 성령이 오시기를 기도한다는 것은 거룩한 영, 생명의 힘에, 즉 하나님 나라에 전적으로 의존하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염려는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니 그런 염려를 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그러면 모든 것을 더하신다고 명령하셨고, 약속하셨습니다(마 6:31-34).


그 명령과 약속은 오늘 본문에 그대로 반복되었습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즉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그러면 그 나라가 우리에게 올 뿐만 아니라, 그때서야 우리 삶에서 궁극적으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게 됩니다. 이런 설명이 막연하게 들리시나요?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릴까요? 우리가 곧 죽는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어떻게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지에 전념하십시오. 그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예상하지 못한 좋은 것으로 채우실 겁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시오.


*설교 듣기는 서울샘터교회 예배의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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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라크리매

July 29, 2013
*.156.155.23

제가 변한걸까요? 목사님의 설교가 변화된걸까요?
기도가 무엇인지 잘 들리네요..
연약한 믿음때문에라도 기도의 무릅을 굽혀야겠네요

근데..오타 있어요 목사님 찾아보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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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29, 2013
*.94.91.80

ㅎㅎ 누군가는 변했겠지요.
좋은 쪽으로 변화된 것 같으니까
주님의 은혜라고 생각해야겠습니다.
오타는 못찾았어요. 안타깝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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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라크리매

July 30, 2013
*.223.17.216

반찬 투정하는 아이들처럼 먹는다는 하나님..
먹여주는 하나님 아닐까요? 어법에 맞지 않아서요^^
혹시 설교문을 번역해서 사용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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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30, 2013
*.94.91.80

앗, 그렇군요.
그 문장에서 '먹는다는'을 빼야 합니다.
교정했어요.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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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르네상스

July 29, 2013
*.182.27.138

목사님의 어제 설교말씀이 너무나도 중요하고 좋은 말씀인데
이 설교를 대다수 한국교회 성도들이 듣는다면 이렇게 반응할 것 같은데요.

"이 설교는 은혜가 안돼!"

'야베스의 기도'를 좋아하는 한국교회 성도들에게는
목사님 설교가 '은혜'가 될 리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은혜가 되고도 남는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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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29, 2013
*.94.91.80

ㅎㅎ 은혜가 안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겠지요?
언제나 나는 대중적인 설교를 할 수 있을지,
아마 죽기 전까지 불가능할 거에요.
그냥 내 분수대로 살다가 죽어야지.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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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영육치료

December 22, 2013
*.187.32.49

목사님! "대중적인 설교를 죽기전까지 불가능 할것이며 내 분수대로 살다가 죽어야지" 라는 자조적 표현에 경의를 표합니다.
대부분의 목사들의 경우 아직까지 율법의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한체 대중적 설교를 통해 인기에 영합하며 기복신앙을 주창하는 삯군 목사들과
구분되는 목사님의 목회철학의 현장을 하나님 우편에서 구원받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는 주님께서는 졸지도 않으시고 분명히 바라보고 계시리라 저는 믿습니다. 언젠가 심판자로 다시오실 예수님을 두려워해야 할텐데 형제여 어찌할꼬.....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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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21, 2014
*.94.91.64

늦게나마 저를 위로해주신 말씀, 고맙습니다.

영육치료 님이나 저나 모두

하나님을 향한 관심으로 영혼이 뜨거워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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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March 21, 2014
*.220.104.49

배움이란 깨달음의 열차의 승차권과 같습니다.

승차권을 엉뚱한곳에서 찾아 헤메왔습니다.

심지어 틀린 승차권을 들고 자기 차례를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가솔린차에 경우넣고 시동 걸은 꼴이죠.

구하라....

아전인수에 빠진 인생이 었습니다.

무엇을 줄지도 모르고 왜 주는 지도 모르고

내가 원하는 것만 머릿속에 넣고 희망을 안고 되길 바라며 살았습니다.

진정으로 무엇을 주시는지 알 고나니

이 말씀이 참으로 참으로 귀하다.

인생을 구원해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더 가까이 들립니다. 다시한번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류와 아집에서 벗어나게 해주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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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21, 2014
*.94.91.64

길을 잘 들어서고 있으니

낙심 말고 가는데까지 잘 가봅시다.

주님이 도와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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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6 기타 땅을 묵혀라! 2004-07-02 11179
995 기타 마술과 신앙 2004-07-02 10672
994 기타 세계의 토대 2004-07-02 12058
993 기타 야훼의 자기 증거 2004-07-02 11290
992 기타 운명과 자유 2004-07-02 10322
991 기타 본질의 변질 2004-07-02 10397
990 기타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힘 2004-07-02 11975
989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9953
988 기타 노동하는 인간(1) 2004-07-02 9393
987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9892
986 기타 영광의 경험 [3] 2004-07-02 9267
985 기타 노동하는 인간(2) [2] 2004-07-02 8834
984 기타 무엇이 진실한 예배인가? [1] 2004-07-02 9647
983 기타 수행으로서의 신앙생활 [1] [1] 2004-07-02 8427
982 기타 돌무더기에 얽힌 사연 [1] 2004-07-02 9569
981 기타 메시아적 행위와 교회 [1] 2004-07-02 9286
980 기타 사랑이란 무엇인가? [1] 2004-07-02 15328
979 기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1] 2004-07-05 9171
978 기타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1] 2004-07-11 9451
977 기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2004-07-18 9543
976 기타 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2004-07-25 9176
975 기타 말씀 망각의 심판, (8월1일) 2004-08-05 8418
974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2755
973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626
972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308
971 기타 평화를 위한 분열, 8월29일 [5] 2004-08-30 8321
970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328
969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8984
968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823
967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124
966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183
965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121
964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071
963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541
962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185
961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124
960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268
959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8926
958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332
957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047
956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8798
955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400
954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519
953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547
952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355
951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2920
950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497
949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0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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