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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구원이다 (마 21:23-32)

창조절 조회 수 10594 추천 수 0 2014.09.28 21:39:49
설교듣기 : https://youtu.be/za3WrlXRiMI 
성경본문 : 마태복음 21:23-32 

믿음이 구원이다

21:23-32, 창조절 넷째 주일, 2014928

 

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2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6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27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우리는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과 잘 어울리면서 지내셨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분이니까요. 그런데 복음서에는 그렇지 못한 이야기들이 종종 나옵니다. 여러 사람들과 충돌하신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이런 충돌의 극단적인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무슨 이유로 사람들과, 특히 당시 유대교 고위층들과 충돌했을까요?

 

오늘 제3 독서인 마 21:23 이하의 말씀에도 이런 충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칠 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그리고 누가 이런 권위를 주었느냐?’ 하고 말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주도 세력들입니다. 그들은 뜨내기에 불과한 나사렛 예수라는 랍비가 자신들의 성전 전통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하신 일과 가르침이 바로 앞 구절인 마 21:12절 이하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매매하는 사람들과 환전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면서 사 56:7절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도다.

 

예수님이 강도의 소굴 운운하면서 비판하신 일들은 당시 성전에서 행해지던 일종의 관행이었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성지순례 차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성전 세나 헌금을 내려면 예루살렘에서 통용되는 돈으로 환전해야만 했고, 번제물에 필요한 비둘기나 양도 일정한 수준에 드는 것을 구입해야만 했습니다. 돈이 오가다보니 처음의 그 순수성은 떨어지고 상거래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들을 성전의 본질에 대한 훼손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오지랖 넓게 남의 제사에 와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거냐, 하고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가타부타 직접적인 대답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세례 요한 이야기로 말머리를 돌렸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인지를 당신들이 먼저 대답하면 나도 대답하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요한의 세례는 단순히 세례 행위만이 아니라 세례 요한의 설교 전체 가리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왔다고 말하면 그동안 요한과 대립했던 자신들의 행태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거꾸로 부정하면 요한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예루살렘 백성들에게서 원성을 살 테니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 원래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당연히 제사장이 되어야만 했던 인물입니다. 자세한 내막을 우리가 모르지만 우여곡절 끝에 그는 종교 엘리트인 계급인 제사장의 길을 포기하고 재야 선지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아버지가 일하던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요단강 근처 광야에서 탁발 수도승처럼 지내면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하나님 나라를 전했습니다. 대답이 궁색했던 대제사장들은 예수님께 세례 요한의 세례와 설교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당신 자신도 제사장들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뒤에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맏아들에게 포도원 일을 시켰습니다. 그러자 맏아들은 일하러 가겠다고 말만 하고 실제로는 가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에게도 똑같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시켰습니다. 그러자 둘째는 싫다고 말한 뒤에 나중에 돌이켜서 일하러 갔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대제사장들에게 적용시켰습니다. 처음에 예, 했다가 일하지 않은 맏아들은 대제사장들이고, 처음에 아니오, 했다가 일하러 간 둘째는 세리와 창녀들이라는 겁니다. 31b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이런 말을 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기가 막혔을 겁니다. 자신들을 세리와 창녀들과 동급으로 비교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보다 못하다는 말을 들었으니까요.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의 말씀에 비약이 심하다고 느꼈을 겁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거기에 세리와 창녀를 끌어들이는 것은 지나칩니다. 세리는 당시에 매국노나 사기꾼으로 평가되었고, 창녀는 가장 천한 사람으로 대접받았습니다. 세리와 창녀는 일종의 불가촉천민에 해당되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평생 세리와 창녀로 살았으니 그들의 매너나 말투 등이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저도 그런 분들과 만나서 함께 어울려 지내는 게 불편할 거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억측처럼 들립니다. 예수님은 왜 상식적으로 동의를 얻기 어려운 말씀을 하신 걸까요? 기존의 모든 권위를 무조건 부정하는 반발심인가요? 사회 하층의 민중들에 대한 편파적인 연민일까요? 여기에는 사람들을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대한 두 가지 입장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전통과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당시 사람들에 대한 평가 기준은 일단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을 성공했다고 하고, 더 나가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왕이면 돈이 많으면 더 좋습니다. 권력이나 돈은 없지만 종교적으로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들도 존경받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곧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될 텐데, 노벨상은 상금이 클 뿐만 아니라 그 명예도 큽니다. 일본은 몇 번에 걸친 문학상을 비롯해서 여러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았는데, 우리는 평화상 하나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일본이 우리에 비해서 인구도 많고 경제 수준도 높긴 하지만 노벨상 수상자 숫자로만 본다면 그 차이가 너무 심합니다. 어쨌든지 이런 상을 받으면 명예와 존경과 부를 한 몸에 받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게 바로 세상 이치입니다. 이걸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세상이 발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보면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대제사장들이나 장로들보다 세상으로부터 무시당하는 세리와 창녀들이 더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세리와 창녀의 행동이 제사장들보다 더 낫다거나, 최소한 부족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잘못된 건 잘못된 겁니다. 무슨 말로도 세리와 창녀들의 행동거지를 합리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그들을 더 높이 평가한 근거는 하나님 나라, 즉 구원 문제에서 이 세상의 평가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구원은 절대적인 세계이고, 세상 평가는 상대적인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수학 개념에서 보면 유한은 아무리 커도 무한 앞에서는 제로가 됩니다. 모래 한 알은 지구 전체 무게에 비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와 같습니다. 제사장과 세리를 비교해보십시오. 이 세상의 기준으로는 차이가 큽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앞에서는 그 차이가 없어집니다. 죽음이라는 사건 앞에서는 목사로 살았느냐, 아니면 사기꾼으로 살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목사의 몸도 곧 썩고, 사기꾼의 몸도 곧 썩을 뿐입니다. 파렴치한 행동을 해서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나 용케 그런 행위를 하지 않아서, 또는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아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나 근원에서는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예수님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에게 돌을 던질 태세로 버티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살인한 사람만이 아니라 친구에게 나쁜 욕을 한 사람도 살인한 거와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오해를 받을 때가 종종 있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준으로 사람을 보신 겁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와 운명은 바로 이것, 즉 하나님 나라에 집중해 있었습니다. 그걸 놓치면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체가 마비된 사람이 왔을 때 예수님은 당신 죄가 용서받았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께만 가능한 사죄선포를 감히 인간이 하느냐, 하고 트집을 잡은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이비 교주들이 그렇듯이 자기가 마치 하나님이 된 것처럼 사람들의 죄를 마음대로 용서할 수 있다고 착각한 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임했다는 사실을 자기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분이기에 그런 사죄를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곧 사죄가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이런 행동이 신성 모독으로 비쳤을 겁니다.

 

예수님에게는 사람의 겉모양이 아니라 믿음이 중요했습니다. 한 사람을 판단할 때 바로 그것이 절대적인 기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32절을 읽겠습니다.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여기서 다시 세례 요한을 거론합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대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세례 요한을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 요한의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부정하지는 못했지만 불편하게 여긴 겁니다. 세리와 창녀는 세례 요한을, 즉 그의 설교를 받아들였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이런 걸 보고도 끝내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이게 문제였습니다. 이들은 세례 요한이 아무리 귀한 말씀을 전했고, 그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아무리 큰 도전을 받았다 하더라도 자신들은 전혀 그런 것에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은 한 걸음 더 나가서 유대교 고위층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들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참된 믿음은 오히려 그들이 낮춰보던 세리와 창녀들에게서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요? 그리고 이런 믿음의 실체가 무엇을 가리킬까요?

 

이 대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세리와 창녀는 내세울 게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게 그 대답입니다. 그들은 남 앞에 나서면 부끄러워서 웬만하면 사람들을 피하고, 어쩔 수 없이 만나는 경우라 하더라도 자기 직업을 숨겼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삶의 전적인 변화를 요구한 세례 요한의 설교에 마음이 찔리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는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구원을 받을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를 감추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 바로 세리와 창녀의 믿음이자 영성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그들은 대제사장이나 장로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평가를 예수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거 아니냐, 제사장과 장로들도 늘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기도드린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이게 쉽지 않습니다. 제사장과 장로들은 당연히 위대한 랍비들의 기도문을 읽기도 하고,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비롯해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기도 예전을 철저하게 지켰을 겁니다. 그런 종교적 포즈를 취한다고 해서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종교의식은 얼마든지 형식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종교 형식에 깊이 참여하면 할수록 마음은 더 교만해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종교적인 업적이 많을수록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기가 더 힘들어집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사람의 심리라는 게 비슷하게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사회에서 성공한 분들은 그런 것에 영혼이 묶입니다. 아무리 인격적으로 훈련이 되었어도 그걸 극복하기가 어렵습니다. 며칠 전에 아무개 국회의원과 대리운전 기사 사이에 폭행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여러 가지 속사정을 우리가 다 알지는 못하지만 보도에 따르면 국회의원이 당신 나를 몰라보는군.’ 하는 태도를 취했다는 겁니다. 권력이 있으면 그렇게 힘이 들어가게 됩니다.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분들에게도 그런 위험성이 있습니다. 보통 486이라고 불리는 민주화 운동권 출신들 중에서 적지 않은 분들이 자신들의 민주화 업적을 훈장처럼 내세웁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는 듯한 태도를 은연중에 취합니다. 나름으로 민주, 평화, 정의에 대한 의식이 투철한 사람들도 이런 마당에 그렇지 않는 사람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대통령도 비슷합니다. 최고 자리에 올라섰다는 자부심과 자기만이 옳다는 독선이 진리를 거부하게 만듭니다. 자식에게 온갖 정열을 다 바친 부모들이 그걸 자꾸 내세우면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파괴됩니다. 세리와 창녀는 아예 내세울 게 없으니 영혼이 순수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세리나 창녀처럼 살아도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뜻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가능한대로 제사장이나 장로로 사는 게 좋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믿기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는, 구원받기에는 세리나 창녀보다 제사장이나 장로들이 더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이런 문제가 리얼하게 느껴지지 않는 분이라고 한다면 기독교 신앙이 뭔지 잘 모르는 겁니다. 하나님 경험이 없다고 봐야 합니다. 신앙을 수행의 차원에서 따라가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 영적 딜레마로 고민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세상 현실에서 최선의 길을 말씀드린다면 형식적으로는 대제사장이나 장로로 살면서 영적으로는 세리와 창녀로 살아가는 겁니다. 가능할까요? 그렇게 살아가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자신과 자신의 일을 부단히 부정하는 겁니다. 자신의 업적을 기억에서 지우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업적은 아무리 그럴 듯해 보여도 별 거 아닙니다. 그걸 경험해본 사람은 다 압니다. 노벨상도 그렇고, 교황직도 그렇습니다. 그런 거로부터 떠나야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집니다. 이런 대답은 다 알지만 문제는 이런 일이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자기 부정은 인간 본성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억지로 자기 부정을 흉내 낼 수는 있지만 실제로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믿음의 동지 여러분, 우리 영혼의 토대를 흔들 정도의 놀라운 사건 앞에 설 때만 자기 부정이 가능합니다. 그런 놀라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은총을 크게 깨달은 사람은 자기의 일이 얼마나 초라한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키리에 엘레이송!’이라는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그게 믿음의 모든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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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파란하늘지붕

September 30, 2014
*.197.156.140

목사님이 쓰신 글 중 '주의 제자로 살다보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의 제자로 사는것 그 자체가 바로 복이다.'라는 말을 늘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목이 참 좋습니다. 믿으면, 믿다보면 하늘에서 복이 떨어지는것이 아니라, 그 믿음 자체가 복이며 구원이라는것을 리얼하게 체험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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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30, 2014
*.94.91.64

파란하늘 님의 정곡을 짚으셨습니다.

믿음 자체가 복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겠지요.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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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거인삭개오

November 13, 2014
*.78.248.158

목사님의 설교에 아멘 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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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13, 2014
*.94.91.64

예, 저도 영혼의 호흡을 함께 할 수 있는 분을 만나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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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February 04, 2015
*.206.242.56

예수님의 사건의 부스러기만을 보아도 제 자신이 초라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십자가 부활이 전적으로 나를 부활하기엔 넘치고도 넘칩니다.

자신을 의자하는 교만함, 자신감이 조금이라도 밑바닥에 없는 상황이

사회생활에는 맥 빠지고 너 왜 그리사느냐 소리 딱 듣기 좋아도 정말로

막상 그 상황이 되니 더 하나님의 품을 생가갛게 되더군요.

겁나는 사람들을 웃으면서 맞이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내가 웃으면서 겁주면서 나를 겁내는 사람에게 찾아간적도 있었습니다.

과정이 어쨌든 나락으로 떨어져서 좀 더 방법을 찾고자 기도를 하는 과정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나에게 위로를 주는 존재란걸 조금이나마 알았었습니다.

가난한자가 복이 있나니..


돈이 좀 생기니 복이 화로 점점 변해 갑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신경쓰고 싸우고 있으니.

돈이 적었지만 지금처럼 싸우지 않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싸울려고 돈을 모은건 아닌데.

치열한 신경전으로 누굴 쳐 넣으려고 준비하는 모습이 다른 사람같습니다.

가난과 믿음, 부자와 불신사이에서 계속 왔다 갔다 합니다. 나의 인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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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04, 2015
*.94.91.64

ㅎㅎ 재미있게 생각하고

재미있게, 혹은 고민하며 사는군요.

그런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만이 위로의 근거라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겠지요.

그 사실의 깊이로 조금씩 더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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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 성령강림절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1-11) 2023-07-16 1306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1595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2023-07-03 1274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4] 2023-06-25 1771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2023-06-18 1425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1577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1535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1453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1754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1575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1839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1338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1753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2189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2390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1907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1859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1850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2869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268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207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703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588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444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430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487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566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532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240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194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3160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384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3978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404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969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598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543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239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643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121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57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780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561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258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470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399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898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575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449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714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599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620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212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45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450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697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415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507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773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3995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564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923
952 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2] 2022-05-08 3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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