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1
성경본문 : 마가복음 14:22-25, 고린도전서 11:23-26 

교회는 성찬 공동체다

(14:22-25, 고전 11:23-26)

 

어느 평신도 한분과 성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들은 이야기다. 전통 의례인 제사에도 먹을거리가 등장하고 우리의 기독교 의례인 성찬에도 먹을거리가 등장한다. 근데 이 먹을거리가 제사에서는 죽은 이의 혼령을 위한 것인 반면에 성찬에서는 살아있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제사와 기독교 예배의 차이점이 있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였다. 듣고 보니 그럴 듯하다. 기독교 예배의 성찬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게 핵심이다. 이런 말이 실감 있게 들리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빵과 포도주가 단순히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하는 사물로만 경험된다. 빵의 맛이나 포도주 알코올 도수에만 마음이 간다. 이를 뚫고 들어가서 성찬의 영성을 경험하기 위해서 성찬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이런 공부는 성찬의 영성으로 들어가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과 구원 행위를 새로운 시각으로 경험하게 한다.

 

1) 기독교인들의 온전한 일치

성찬대 위에 놓인 빵과 포도주를 함께 먹고 마신다는 것은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하나라는 사실을, 또는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런 경험을 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서로 생각이 다르고 형편도 다르기 때문에 하나라는 느낌을 별로 갖지 못하고 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노력해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칭의 문제와 비슷하다. 칭의의 주체는 하나님이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줄 수 있다. 거기에 의존해서 우리는 의롭다는 인식으로 살아간다.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우리가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그 죽음은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 된다는 것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첫째, 공간을 초월해서 우리는 하나다. 샘터교회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모든 교회에 참여한 이들, 그리고 세계 모든 기독교인들이 공간을 초월하여 하나 된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바람은 한국에만 있지 않고 지구 모든 곳에 있듯이 성찬에 임재하는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는 다 하나가 된다.

둘째, 시간을 초월해서 우리는 하나다. 이게 성찬을 신비한 능력이다. 우리는 2천 년 전 카타콤에서 예배드리는 이들과 하나이며, 2천 년 후 이 땅에서 살게 될 기독교인들과도 우리는 하나다.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하나 되게 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실제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면서 살게 될 것이다. 그 실천은 무엇인가? 우리의 주제와 연관해서 대답한다면, 성찬의 일치를 모색하는 것이다. 한스 큉은 <왜 나는 아직도 기독교를 믿는가>(113쪽 이하)에서 리마의식(Lima Liturgy, 리마는 페루의 수도다.)을 거론하면서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의 성찬일치를 긴급하게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 사물(빵과 포도주)의 영성화

우리는 성찬을 통해서 세상의 사물들이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도구에 불과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서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은총의 자리라는 사실을 배운다. 동양의 선승들은 사물의 작은 것에서, 그것의 현상에서 큰 깨우침을 얻었다. 기와 깨지는 소리, 대나무 바람소리, 차 한 잔... 권정생 <강아지 똥>은 가장 하찮게 생각하는 강아지 똥이 어떻게 생명의 토대인지를 깊은 영적 감수성으로 묘사하고 있다.

성찬대의 빵과 포도주를 다시 직시하라. 그걸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는 우주 전체와 일치된다. 물리적으로도 사실이고, 신앙적으로도 사실이다. 지구 안의 모든 질료는 서로 서통, 교감된다. 사람 몸의 탄소와 나무의 탄소는 동일한 원소다.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몸이라고 믿는다는 것은 곧 그것을 하나님의 몸으로 믿는다는 뜻이다. 빵과 포도주가 하나님이라고 말해도 틀린 게 아니다. 문제는 이런 통찰이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와 닿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아래는 게오르크 트라클의 시 어느 겨울 저녁(수련회 소책자 톺아보기 3참조).

 

눈이 창가에 내릴 때

저녁 종이 길게 울리고

식탁은 여럿을 위하여 차려지고

집안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많은 사람이 방랑하다가

어두운 오솔길로 문밖에 이른다.

은혜의 나무는 금빛으로 꽃피운다.

서늘한 땅의 물기에서.

 

방랑자는 조용히 들어선다.

고통은 문지방을 돌이 되게 했다.

그 때 순수한 밝음 속에 빛난다.

식탁 위의 빵과 포도주가.

 

이 시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다. 눈이 내리는 저녁, 삶의 나그네들이 따뜻한 집 안으로 들어선다. 식탁 위에 놓여 있는 빵과 포도주에 거룩한 빛이 감돈다. 인간의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이 사물이 거룩해지는 순간이다. 하이데거는 이 시를 이렇게 해석한다.

 

말하기는 겨울 저녁 시간을 명명한다. 이 명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확정 가능한 대상들과 표상들을 기호표시에다 매다는가? 그 명명은 제목을 나누어 주지 않는다. 명명은 부른다! 부름은 불리는 것을 더 가까이 부른다. ... 이리로 부르는 것은 근처로 부르지만 그것은 또한 부름 받은 것을 원처(溒處, Ferne)에 내버려둔다. 그것은 이리저리로 부른다. 이리 임재 속으로 그리고 저리 부재 속으로 부른다. 눈내림과 저녁종의 울림은 여기서 우리에게 향하여 말해진다. 그것들은 부름 속에서 임재한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결코 지금 여기 이 방 안에 임재해 있는 것 중에 끼지 못한다. 어떤 임재가 더 고차적인가? 여기 방에 있는 것이 더 고차적인가, 혹은 부름 받은 것이 더 고차적인가? ... 부름은 물()들을 초대하여, 그것들이 인간에게 ... 관여하게 한다. 눈내림은 인간을 밤 깊이 어두워지는 하늘 밑으로 데려간다. 저녁종의 울림은 사멸할 자들로서의 인간을 신성들 앞으로 데려간다. 집과 식탁은 사멸자들을 땅에 매어둔다. 그러니까 명명된 물들은 부름 받으며 자기에게로 하늘과 땅, 사멸할 자들과 신성들을 회집한다. 이 넷은 본원적으로 하나가 되는 상호향성(相互向性)이다. 물들은 이 넷의 사중자(四重者, Gevierte)를 자기에게 머물게 한다. 이처럼 회집하면서 머물게 함을 우리는 물의 물화라고 명명한다. 물들 속에 머무는 사중자가 세계이다. 명명에서는 명명된 물들이 물의 물화 속으로 부름 받는다. 물들은 물화하면서 세계를 전개한다. 세계 속에 물들이 머문다. ... 물화하면서 물들은 세계를 분만(分娩)한다(오트, 사유와 존재, 204쪽에서 재인용).

 

하이데거에 의하면 물()은 사중자(Gevierte)의 회집 사건이다. 지금 내 서재 창문 너머로 빛나는 참나무의 잎에 하늘, , 사멸할 자, 신성들이 모여 있다는 것이다. 이걸 손으로 확인시켜 줄 수는 없다. 그걸 볼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하다. 세상은 이런 방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신비롭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셰익스피어가 유령과 요정을 등장시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3) 종말론적 희망의 현재화

- 복음서가 말하는 종말 표상은 축제다. 교회는 신부, 재림 예수는 신랑이다. 축제에서 함께 나누는 식탁이 중요하다. 성찬은 종말의 축제를 앞당겨 즐기는 종교의식이다.

- 종말이 축제인 이유는 생명이 완성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생명은 완성되지 않았다. 창세기의 창조 전승과 타락 전승에 따르면 완전했던 생명이 죄로 인해서 그 완전성을 상실했다. 성찬은 종말에 완성될 생명의 극치를 지금 여기서 앞당겨 경험하는 것이다.

- 생명의 완성, 또는 생명의 극치가 곧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는다는 말씀처럼 우리는 살아있는 한 생명의 완성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 다만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그것을 약속으로 받았을 뿐이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서 그 약속을 회상하고 기억한다.

- 종말론적 희망이 단순히 우리의 희망이며 믿음에 불과하지 실질적인 근거는 없는 거 아닌가, 하는 질문이 가능하다. 지구가 45억 년 후에 없어지면 인간도 없어지고 말 것이며, 더 이상의 생명은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이런 질문은 또 다른 주제이기 때문에 여기서 자세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성서와 신학이 말하는 종말론적 희망의 내용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게 최선이며, 그런 과정을 통해서 영적인 시각이 분명해질 것이다.

- 기독교인들은 지난 2천년의 세월을 지내면서 성찬을 통해서 종말론적 희망을 현재 삶의 역동성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 10월12일 주일과 19일 주일은 수련회를 인도하는 관계로 따로 설교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왜 설교문과 녹음 파일이 올라오지 않나, 하고 궁금해 하거나 기다리는 분들을 위해서

수련회에서 행한 세번의 강의 중에서 마지막 강의를 여기에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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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은빛그림자

October 21, 2014
*.108.173.77

이번 서울샘터 수련회는 "성찬 영성의 우주론적 지평에 대한 탐색"(헉헉)이어서

아, 나는 들어도 또 이해도 못하겠구나...  거의 포기하는 마음으로 참석했습니다.^^;

어후... 근데 저는 좀 충격을 받았어요.

"나의 몸"(예수 그리스도)을 왜 가장 일차원적인 "먹는" 방식으로 기념해야 했는지에 대해 제가 질문을 드렸었죠?

모태 신앙으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성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요,

목사님 답변을 들으면서 인간이 생명을 확인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으로 "성찬"이 이루어진다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뭐랄까...  이건 좀 딱히 표현하기가 힘든데 "하나님을 먹는다는(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되게 "안심"이 된다고나 할까요? 인간이라는 종의 속성을 완벽하게 아시고, 그것에 맞추어 주시는구나.. 하는 그런 종류의 안심이랄까요? (아... 이건 정확한 표현이 아닌데...) 고상하게 표현이 잘 안 됩니다.ㅎㅎㅎ

그런데, 달리 다른 단어가 없어요. 제 수준에서는 공부하면 할수록 "안심"이 되는 것 같습니다.

부디 다가올 종말을 "무한한 안심"으로 즐겁게 기대하며 기다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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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1, 2014
*.229.55.93

지금 나는 밖에서 잠시 틈이 있어

다비아에 들어와서 대글을 확인하다가

눈에 번쩍 들어오는 내용이 있어서

웬만하면 집에 돌아가서 답글을 다는 전통을 어기고

기어이 답글을 씁니다. ㅎㅎ

신학공부를 하면 할수록 '안심'이 되고

종말을 '무한한 안심'으로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지요?

이런 정도면 아퀴나스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루터의 영성과 비교해서

하나도 모자랄 게 없는 영성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전문적인 부분은 아는 게 더 많겠지만

그런 거로 인해서 도달해야 할 영성에서는 동일한 겁니다.

이번 수련회 때 이런 경험이 분명하게 주어졌다면

앞으로 평생에 걸쳐 이 순간을 기억하게 될 겁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의 경험을 죽을 때까지 기억했듯이요.

너무 거창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런 영적 거인들 앞에서 너무 기 죽을 필요는 없고,

자신의 길을 정확하게 가기만 하면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요.

'무한한 안심'이라는 단어를 나도 기억해두어야겠네요.

그것은 곧 무한한 안식이고, 영생이고, 구원이고, 하나님과의 일치에요.

성찬을 주제로 하는 수련회는 대한민국에서,

아니 세계에서 우리 교회에서만 가능한 겁니다. ㅎㅎ

어쨌든지 목사도 평신도들에게 배우는 게 많아서 좋네요.

주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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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February 06, 2015
*.206.242.56

나는 누군가가 내 쉰 숨을 들이킨다. 또 누군가는 내가 뱉은 숨을 들이키고. 서로가 하나의 공기속에서 같이 숨을 쉰다. 커다란 덩어리의 조직과 같다. 하나님도 우리와 같이 숨을 쉬신다고 믿는다. 내 숨을 거둬 가시는 분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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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08, 2015
*.94.91.64

우리 모두가 서로 신비한 방식으로 얽혀있네요.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더불어서요.

그 사실을 바탕에서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살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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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은나라

February 09, 2015
*.105.196.66

샬롬^^
제가 요즘 관심을 두고 있는것이 성찬과 하나됨이 무엇인가? 입니다.
신앙을 40년가까이 해왔는데..
작년부터 진지하게 기독교에 대해 공부하며..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지요..
책과 설교를 통해 알아가지만, 아는만큼 보인다고 그동안 제가 놓친부분이 많아요.
물론 아는게 별루 없었으니까요.
올해는 좀더 깊이있게 들어가 톺아보고 있어요.
작년에는 여러번을 읽어도 이해가 가지 않았던 목사님 설교들이 이젠 한번만 읽어도 이해가 조금은 됩니다.
이번 글은 조금 어려운데요..
빵과 포도주를 하나님의 창조와 연결시켜서 생각할때, 모두와 연결되어 하나됨을 이해했어요.
그리고 다시 읽어보니, 성찬은 예수의 부활을 통해 종말에 완성될 생명의 극치를 앞당겨 경험함으로...
또한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켜주시겠다는 약속으로..
성찬을 통해 그 약속을 회상할 수 있다는 말씀으로..
성찬은 종말의 축제를 앞당겨 즐기는 종교의식이다..는 말씀으로 성찬에 대한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하게 되었어요..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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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09, 2015
*.94.91.64

은나라 님, 안녕하세요?

성찬의 의미를 정확하게 요약해주셨군요.

종말론적 축제에 우리가 참여하는 훈련이 성찬예식이겠지요.

그때 우리는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면

빵이나 포도주와도 하나가 되겠지요.

하나님의 창조와 그 존속과 완성의 신비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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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은나라

February 09, 2015
*.105.196.66

우리가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야 할 이유까지도 다 연결되어있는 하나님의 신비함을 다시 깊이 확인하는 기회가 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쁨은 이 세상 어떤것으로도 채울수 없는 큰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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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3924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358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954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582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533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225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629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109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46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768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543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242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450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391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882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559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436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696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583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604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200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36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438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690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402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492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757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3979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549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901
952 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2] 2022-05-08 3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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