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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그리스도 (사 50:4-9)

사순절 조회 수 8328 추천 수 0 2015.03.29 22:08:41
설교듣기 : https://youtu.be/lYXLwzRcJAU 
성경본문 : 이사야 50:4-9(전) 

고난의 그리스도

50:4-9(), 사순절 여섯째 주일, 2015329

 

4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9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사람들은 누구나 편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훨씬 편한 거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큰 고생은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러나 고생, 또는 고난을 무조건 피할 수는 없습니다. 주변을 조금만 돌아보십시오. 크고 작은 사고로 인해서 인생을 고단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난치병으로 평생 고생하거나, 갑자기 암이 발생해서 손쓸 사이도 없이 세상을 등지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입니다. 꽃 같은 나이의 자식을 잃어 참척의 고통 속에서 평생 살아가는 부모도 많습니다. 자식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거나 백수로 건들거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이와는 다른 종류의 고난이 있습니다. 자발적인 고난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의로운 일을 수행하다가 당하는 고난입니다. 굳이 그렇게 살지 말고 대충 다른 사람들처럼 적당하게 살면 당하지 않을 수 있는 고난입니다. 남아프리카 초대 대통령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만델라는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에 항거하다가 감옥생활을 27년간이나 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역시 당시 면죄부 판매와 교황주의를 비판하다가 종교재판을 받고 파문을 당했습니다. 목숨을 잃을 위기를 여러 번 맞았습니다. 지금도 그런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고난의 종

오늘 우리가 설교 성경본문으로 읽은 사 50:4-9절도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신탁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의 역할이라는 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왕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질 때마다 선지자들이 나서서 책망하고, 경고했습니다. 이런 말을 듣기 좋아할 사람들은 없습니다. 특히 왕과 귀족들은 선지자들을 늘 예의주시했습니다. 선지자들이 민중들을 선동해서 폭동이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은 왕과 귀족과 백성들에게서 배척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고, 때에 따라서는 신체적 위협을 받았습니다. 지금 이사야의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6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사야는 말로만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심한 모욕과 고통을 당했습니다. 위 문장에 따르면 그가 당한 고통은 세 가지입니다. 등을 맞았다는 건 일종의 태형입니다. 요즘도 이슬람 국가에서는 이런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수염을 뽑는다는 건 당사자를 남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당시 그 지역의 남자들은 모두 수염을 길렀습니다. 수염이 뽑힐 때 느끼는 아픔도 크지만 남자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게 큰 수치였습니다. 얼굴에 침을 뱉는다는 건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당시 그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되는 모욕과 고난을 당했습니다. 도둑질을 했거나 간통을 했거나 파렴치한 일을 했으면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선포했다는 사실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하면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도대체 당시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혹시 이사야가 공연한 모함을 받은 것일까? 당시 사람들은 모두 선과 악에 대한 기본적인 판단력마저 잃어버린 것일까요?

 

지금 이사야에 모욕을 주고 조롱하고 따돌림 시킨 사람들은 다 정상적인 사람들입니다. 인격적으로도 부족한 게 없었습니다. 그들이 이사야에게 모욕을 가한 이유는 이사야가 자신들의 존재 근거를 위협하는 발언을 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사야의 발언은 핵심적으로 바벨론 포로생활이 끝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곧 바벨론 제국이 망한다는 의미입니다. 47장은 바벨론의 심판에 대한 설교입니다. 1-3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처녀 딸 바벨론이여 내려와서 티끌에 앉으라 딸 갈대아여 보좌가 없어졌으니 땅에 앉으라 네가 다시는 곱고 아리땁다 일컬음을 받지 못할 것임이라. 맷돌을 가지고 가루를 갈고 너울을 벗으며 치마를 걷어 다리를 드러내고 강을 건너라 네 속살이 드러나고 네 부끄러운 것이 보일 것이라 내가 보복하되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리라.” 바벨론을 수치당할 처녀로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이 바벨론 제국에 직접 보복하겠다는 겁니다. 47장만이 아니라 앞과 뒤로 이런 말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바벨론 당국자나 그 나라 주민들이 이사야의 이런 설교를 직접, 또는 소문으로라도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생각해보십시오. 이사야는 혹세무민하는 자요,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자로 보였을 겁니다. 바벨론 체제의 안정화를 위해서 이사야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 안전을 어느 정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런 말을 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렇게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어쩔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 이사야는 자신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의 귀를 여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처럼 음성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그걸 이사야가 실제 귀로 들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런 표현은 문학적인 수사입니다. 이걸 오늘의 설교자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겁니다. 거기에 준비가 필요합니다. 기본적인 신학 공부가 있어야 합니다. 경건 훈련을 통해서 그 신학의 세계를 자기 몸으로 경험해야 합니다. 인류 역사와 국제정세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것은 알아야 합니다. 그게 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고 주석을 참고하고 기도하는 중에 깊이 생각하면서 성경이 자기에게 말하는 어떤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설교자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성경말씀을 해석할만한 능력과 그런 준비가 없으면 선포할 말씀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자칫하면 헛소리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이사야는 선지자이면서 신학자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학자들의 혀를 주셨고, 학자처럼 알아들을 수 있는 귀를 주셨다는 4절 말씀이 바로 그것을 의미합니다. 자기가 깨달은 것이 확실했기 때문에 바벨론 사람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한이 있더라도, 더 나가서 그로 인해서 박해를 당한다고 하더라도 그걸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사야의 설교는 바벨론 사람들만 불편하게 만든 게 아닙니다. 선조들이 그곳에 포로로 잡혀왔던 유다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포로 생활은 50년 가까이 흘렀습니다. 포로 1세대는 대부분 죽었습니다. 1세대 일부와 2세대와 3세대가 그곳에 정착해서 나름으로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민족적이고 종교적인 뿌리가 바벨론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자기 조국인 유다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신앙이 바벨론에서 잘 유지된 것도 아닙니다. 바벨론에는 주류 종교가 따로 있었습니다. 당시 근동을 지배하던 바벨론 제국의 신이 우월하게 보이는 건 당연합니다. 이사야를 비롯해서 소수의 사람들만 해방의 날을 기다리면서 여호와 하나님 신앙의 전통을 바르게 유지했을 뿐이지 대다수 유다 사람들은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곳 체제에 안주해서 편안하게 먹고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당시 바벨론은 최고 문명을 자랑하던 제국이었습니다. 요즘의 미국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제국들은 작은 나라를 침략한 뒤에 동화정책을 펼칩니다. 이름도 바꾸고, 말도 바꾸고, 문화도 바꾸도록 유명무영의 압박을 가합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 작은 나라들은 다 제국에 흡수됩니다. 지난 인류 역사는 다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바벨론에 정착한 2,3 세대 유다 백성들은 그냥 바벨론 머물며 사는 게 좋았습니다. 그게 그들의 불편한 진실이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다 알고 있었을 이사야는 바벨론을 하나님께서 치신다고 설교했습니다. 어쩌면 바벨론 사람들보다 유다 백성들이 이사야의 말을 더 꺼림칙하게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이사야는 어디에서도 하나님 신앙의 동지들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저 수렁으로 빠져들어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을 겁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이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채찍이나 회초리를 치는 자에게 등을 맡기고, 수염을 뽑는 자에게 뺨을 맡기고,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해도 얼굴을 가리지 않겠다는 말은 이사야의 이런 처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저는 오늘의 목사도 이사야처럼 청중들의 비위를 맞추는 설교에서 벗어나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청중들을 심리적으로 윽박지르고 공격하는 설교가 옳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만 의인인 것처럼 회중들의 부도덕성을 질타하는 설교이어야 한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에 바로 서는 걸 가리킵니다.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

복음서 기자들은 고난의 종에 대한 이사야의 설교를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암시로 받아들였습니다. 여러 곳에 이 구절이 나옵니다. 26:67, 14:65, 19:1절은 사 50:6절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26:67절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전 목요일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다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파송한 군인들에 의해서 체포당했습니다. 그리고 유다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에서 종교재판을 받습니다. 여러 증인들이 나서서 예수님의 잘못을 지적하지만 예수님은 아무런 반론도 펼치지 않습니다. 대제사장이 선고를 결심하기 전에 묻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 아닌지를 직접 이 자리에서 우리에게 밝히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요구에 직접 답하지 않고 이렇게 간접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그 말을 듣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면서 예수가 신성을 모독했다고 외칩니다. 산헤드린에 다루는 송사 문제 중에서 가장 큰 죄가 신성모독입니다. 산헤드린 의원들은 예수가 죽어야 한다고 결정합니다. 이어서 마 26:67절에는 사 50:6절을 연상시키는 설명이 나옵니다.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

 

이 일이 있는 뒤에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됩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로마법에 의해서 십자가형 선고가 내려진 뒤 곧바로 십자가형이 집행됩니다. 제자들은 유대의 종교 권력과 로마의 정치권력에 의해서 무기력하게 고난 받고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자신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게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제자들은 예수 운명의 마지막 순간에 제자답지 못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심지어 예수와의 관계를 부인하기까지 했습니다. 뭐가 문제였을까요?

 

16:21-28절에 제자들의 정신적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주는 그리스도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죽은 뒤에 제 삼일에 살아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만류했습니다. 메시아는 고난당하거나 죽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심판하고 전권으로 통치해야만 한다는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피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강한 어조로 책망하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16:23). 이 책망에 따르면 베드로는 광야에서 예수를 세 번이나 시험한 마귀나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사태를 벗어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예수님의 부활 경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제자들은 메시아, 즉 그리스도에 대한 전혀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런 깨달음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우주 물리학이 달라진 것과 같습니다. 기존에 알고 있었던, 그래서 그렇게 기대했던 지배와 승리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고난과 죽음의 그리스도에 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이라는 몰트만의 책 제목이 말하듯이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깨우침에 근거해서 이제 제자들은 이제 당시에 수치와 부끄러움의 대명사로 불리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세상에 과감하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셨다고 말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4백여 년 전에 고난의 종을 노래한 이사야의 글에 이런 단서가 있는 걸 확인하고 사 50:5절을 복음서에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사야나 예수님처럼 똑같이 고난을 당하라는 말이냐, 하고 저에게 질문하고 싶으신가요? 제 설교를 그렇게 들었다면 그건 오해입니다. 기독교인라고 해서 무조건 고난을 받아야 하는 건 아닙니다. 거꾸로 기독교인들만 고난이 피해가지도 않습니다. 고난은 우리가 투쟁해야 할 이 세상의 현실일 뿐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이미 극복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고난, 불행, 죽음에 의해서 파멸당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말이 여전히 실감 나지 않는 분들을 위해서 구체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현대인들은 가난을 가장 큰 고난이자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가난한 교회로 떨어질까 노심초사합니다. 그런 생각은 다 허상입니다. 거꾸로 생각하면 답이 나옵니다. 가난하지 않다고 해서 행복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가난이, 즉 고난이 모든 행불행의 근본 원인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저는 오늘 설교자로서 지나치게 친절한 거 아니냐 하는 말을 듣는 한이 있어도 이 문제가 우리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에 설교 마무리로 한 말씀 더 보충하겠습니다. 여러분이 큰 고난이나 불행한 일을 당할 때(그런 일이 없기는 바라지만)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이 죽음의 문을 통과하는 순간에 홀로 십자가에 처형당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십니다. 그분 외에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게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행복한 조건들입니까? 세상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뭔가 더 필요하다고 강요하고 설득하지만, 실제로는 없습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부르실 때까지 신앙의 길을 함께 가는 우리는 영적인 도반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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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사막교부

March 30, 2015
*.39.251.199

역사 통찰 없이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는 건 거짓이겠죠.

친히 역사 속에 오신 그 분을 탈역사적으로 만날 수는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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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30, 2015
*.94.91.64

말씀하신 그 사실을 목사님들이 좀더 진지하게 생각했으면 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실제 역사에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뜻이고,

기독교의 종말 사상도 기본적으로 역사에 대한 관점인데

오늘의 강단이 개인 신자의 사적인 삶을 해결해주는 것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는 게, 그런 부분이 무의미한 거는 아니지만

안타까운 점이지요.

고난 주간을 잘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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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staytrue

March 31, 2015
*.72.188.140

개인적으로 말씀을 읽다가 문득 든 생각인데요. 

지금이야 모든 사람들이 예수 십자가 사건이 

인류구원사건이라고 위대하게 생각하지만, 

당시 제자들 입장에서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패배감에

빠져 있었을 순간이였을텐데,

보통 상황이라면 우울증에나 빠져있을 법한 상황일텐데,


도대체 어떤 부활 경험을 하였길래,

제자들은 순교에까지 이르도록 예수를 선포했을까요 ....

당시의 제자들이 부럽기만 합니다.


마지막으로, 죽음의 문을 넘을때, 홀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은 너무 뭉클합니다 ....


종종, 비슷한 기도를 합니다.

죽음이 닥쳤을 때, 그 앞에서 두려움에 떨게 마시고,

주님손잡고 기쁨으로 건너가게 하소서 ~ 라고요 ..


말씀 잘 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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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31, 2015
*.94.91.64

다음 주일이 부활절이니

제자들과 그 유의 사람들의 부활 경험에 대해서

설교자들이 설교할 겁니다.

그때 들어보세요.

그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데,

기독교인들이 그것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더군요.

스테이투루 님은 (좋은 뜻으로) 종교성이 강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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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3]웃겨

April 03, 2015
*.252.49.18

아..언제나 예수그리스도 외엔 더 필요한 게 없는

그런 세계에 발을 들일까요?

이렇게 간절하다보면 언젠가는 거기에 이를 날도 오겠지요?

그 기대감을 늘 잃지 않고 한 눈 팔지 말고 살도록 주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목사님의 설교가 저에게 예전에는 다가오지 않을 때도 있었고

좀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었는데요,

 이제 조금씩 알아들을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 귀가 조금씩 열리나 봅니다.

특히 다음 주일 부활에 관한! 설교도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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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03, 2015
*.94.91.64

자유혼 님이 다비안이 된 게

벌써 8-9년이 다 되가는군요.

곧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을 바라봅니다.

자유혼 님의 귀가 새롭게 열렸다기보다는,

그 귀는 늘 열려 있었을 것이니까,

저의 설교가 알아먹을 수 있게

약간이나마 발전(?)했다고 보는 게 맞겠지요.

좋은 부활절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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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May 13, 2015
*.206.242.56

목사님 반갑습니다.

고통은 없어질 수 없는 물과 같다 생각합니다.

추울때 찬물만이 있고 더운데 뜨끈한 물이 있으면 그 것또한 고통입니다.

고통은 극복 되었습니다.

고통이 나를 파멸이 아닌 영원한 생명인 예수님께 인도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전 고통으로 주님을 알 수 있는 상황을 종종 맞이 합니다.

이  또한 주님을 향한자의 축복입니다.

항상 감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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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14, 2015
*.94.91.64

진인택 님, 오랜만이군요.

고통이 신앙의 진수를 알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니,

그걸 주님의 축복으로 알았다니

이보다 더 큰 은혜도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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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 창조절 '악' 앞에서 (롬 12:14-21) [4] 2023-09-04 1397
1019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2023-08-27 1152
1018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6] 2023-08-20 1513
101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2023-08-08 1706
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1625
1015 성령강림절 여기 계신 하나님 (창 28:10-19a) [4] 2023-07-23 1758
1014 성령강림절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1-11) 2023-07-16 1300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1590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2023-07-03 1269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4] 2023-06-25 1766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2023-06-18 1419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1569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1525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1446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1743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1572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1829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1334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1740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2172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2379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1892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1853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1844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2861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256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198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693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582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434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414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477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554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523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220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162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3117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349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3928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361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958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588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534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225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630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111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47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769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547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242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451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392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883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560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438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698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585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605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201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37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440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691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403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495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760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3983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551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905
952 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2] 2022-05-08 3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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