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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의 죽음 (막 6:14-29)

성령강림절 조회 수 19496 추천 수 0 2015.07.13 00:25:36
설교듣기 : https://youtu.be/azWQBSVo7ds 
성경본문 : 마가복음 6:14-29 

세례 요한의 죽음

6:14-29, 성령강림후 일곱째 주일, 2015712

 

14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 15 어떤 이는 그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16 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17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18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19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20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21 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22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소녀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23 또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24 그가 나가서 그 어머니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머니가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25 그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니 26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27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28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다가 소녀에게 주니 소녀가 이것을 그 어머니에게 주니라 29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로서 신약성경의 복음서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거명된 이는 세례 요한입니다. 당시 경건하게 살려고 하던 사람들은 빈부귀천을 가릴 거 없이 모두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던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기독교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믿고 있는 예수님이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게 별로 자랑스러울 게 없는데도 복음서 기자들이 그 사실을 숨기지 않은 이유는 그 사건이 명백한 사실이었을 뿐만 아니라 세례자 요한을 예수님의 구원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3 독서에 바로 세례자 요한이 등장합니다.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당시 그 지역의 왕은 헤롯 대왕의 큰 아들인 헤롯 안티바스입니다. 성경에는 그냥 헤롯이라고만 나옵니다. 그는 이복동생인 헤롯 빌립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재혼합니다. 고대 왕실에서는 이런 일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습니다. 헤롯이 헤로디아에게 마음을 빼앗긴 건지, 거꾸로 헤로디아가 주도적으로 남편인 헤롯 빌립과 이혼하고 헤롯 안티바스와 재혼한 건지, 또는 정략적으로 서로의 이해타산이 맞아떨어진 것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당시 유대백성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왕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드러내놓고 비판하기는 어렵습니다.

 

6:18절에 따르면 요한은 헤롯에게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은 옳지 않다.’고 직언했습니다. 헤롯의 심기를 아주 불편하게 하는, 그래서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 되는 발언이었습니다. 요한의 비판을 헤롯보다는 헤로디아가 더 못마땅하게 여긴 것으로 보입니다. 19절에 따르면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 했습니다. 요한이 헤로디아를 직접 비판한 게 아닌데도 그녀가 앞장서서 요한을 죽이겠다고 난리를 친 겁니다. 헤로디아는 남편을 들볶았을 겁니다. 요한을 죽이지 않으면 보따리 싸겠다.’고 말입니다. 헤롯의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요한을 죽이라는 아내 헤로디아의 요구를 모른 척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마음 깊이 두려워하면서 존경하고 있는 요한을 죽일 수도 없습니다. 그는 정치인이기 때문에 요한에 대한 유대 민중들의 여론을 무시할 수도 없었습니다. 자칫하다가는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는 일단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두는 수준에서 이번 일을 끝내려고 했습니다. 헤로디아의 분이 풀리면 적당한 때 석방시킬 계획이었겠지요.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꼬이게 되었습니다. 헤롯의 생일이 되었습니다. 왕의 생일이라 왕궁 내외 귀빈들이 다 모였습니다. 유랑 극단도 초청되었을 것이며, 연예 기획사도 동원되었겠지요. 한창 잔치 분위기가 무르익는 순간에 헤로디아의 딸이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무대 중앙에 등장해서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헤롯의 조카였지만, 헤로디아와 재혼한 뒤로는 딸로 부르는 여자아이였습니다. 공주가 나와서 춤은 춘다는 것은 당시 예법에 맞지 않습니다. 대개는 전문 무희들이 관능적인 몸짓으로 춤을 춥니다. 헤로디아가 일부러 딸을 그 자리에 내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공주의 춤이라는 파격적인 행위 앞에서 헤롯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크게 즐거워했습니다. 헤롯은 소녀에게 무엇이든지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라, 이 나라의 반이라고 주겠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기껏해야 로마에서 만든 최고급 가죽신이나 인형, 또는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아기 원숭이 한 마리를 원할 거라고 생각했겠지요. 그 뒤로 일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잘 아시지요? 소녀가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가서 조언을 구합니다. 헤로디아는 아무도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말을 합니다.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24).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옳은 걸까요? 헤로디아는 자기의 재혼을 비판한 선지자 요한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축제가 열리는 순간에도 그녀는 요한을 없앨 궁리에 몰두했습니다. 그 집념이 놀랍습니다. 팜므파탈(요부)의 한 전형일까요? 헤롯은 어쩔 수 없이 감옥에 갇혀 있는 요한의 머리를 베라고 명령을 내렸고, 기계처럼 명령을 수행한 시위병이 피가 흥건한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얹어 가져와서 살로매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소녀에게 주었습니다. 많은 화가들이 이 장면을 그렸습니다.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전달했습니다. 그 순간에 헤로디아의 표정이 어땠을지 상상해보십시오.


   마가복음 기자는 왜 세례 요한의 죽음을 이렇게 자세하게 보도하는 것일까요? 복음서에 간혹 다른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는 하지만 세례 요한의 이야기에는 비길 바가 못 됩니다. 예수님의 부모들도 잠간 언급되고, 예수님을 찾아왔던 여러 인물들도 행인 1,2’ 정도의 엑스트라 역할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빌라도 총독 이야기도 자세하게 나오지만 요한 이야기에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합니다. 북음서 기자들에게 세례자 요한이 특별하게 다뤄지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우선 초기 기독교 안에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들이 무시하지 못할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한 가지 이유입니다. 1924절 이하에 아볼로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는 초기 기독교에서 상당한 리더십을 보이던 인물입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입니다.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지 성령의 세례는 몰랐다고 합니다. 세례 요한 파에 속한 사람들이 에베소에도 많았습니다. 고전 1:12절에 따르면 당시 고린도교회는 네 파로 나뉘었는데, 그중의 한 파가 바로 아볼로 파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 중에서 일부는 나중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1:37). 기독교 공동체의 정회원 조건이 세례였다는 사실도 세례 요한의 영향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세례 요한을 예수님의 선구자로 간주했다는 사실이 다른 한 가지 이유입니다. 이게 실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한 목소리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세례 요한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서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3:3절만 인용하겠습니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세례 요한은 제사장 계급에 속한 인물이었습니다. 목수였던 요셉을 아버지로 하는 예수님과는 출신 성분이 좀 달랐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예수를 낳은 마리아와 요한을 낳은 엘리사벳이 친척지간이라고 했습니다(1:36). 사촌지간인지 육촌지간인지는 모릅니다만 어쨌든지 예수와 요한의 관계가 완전히 남남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해보입니다. 나이도 동갑입니다. 요한이 여섯 달 먼저 태어났습니다. 요한이 먼저 출가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당시 그는 대단한 카리스마를 발휘했습니다. 그의 설교는 유대인들의 양심을 뒤흔들었습니다. 오죽 했으면 예수님께서 그를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했겠습니까. 예수님은 요한에게서 영향을 받고 출가를 결심했을지 모릅니다. 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서 당신이 메시아인가.’ 하고 묻기도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운명에서 가장 큰 공통점은 죽음입니다. 둘 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다가 젊어서 죽었고, 둘 다 악한 세력의 음모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전개 과정도 비슷합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 처형 선고를 내린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헤롯이 요한을 거룩한 사람으로 알아 죽이지 않으려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유대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이 나서서 예수는 신성을 모독하고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를 위협한 인물이니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헤로디아가 헤롯을 부추겼고, 결국 음모를 꾸며서 요한을 없애버린 것과 비슷합니다. 선지자인 요한이 악한 세력에 의해서 참수형을 당한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도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이게 인류의 역사입니다. 선지자도 제거되었고, 하나님의 아들도 제거되었습니다. 악의 완벽한 승리입니다.

 

지금 설교를 듣는 분들 중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멀게 느껴지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2천 년 전에 일어났던 악의 승리가 어쨌다는 거냐,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일과는 아무 상관없는 문제로 보인다고 말입니다. 그런 생각을 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지금 당장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더미 같으니까 요한과 예수의 죽음 같은 이야기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예수 당시의 사람들도 우리의 생각과 비슷습니다. 자신들의 사는 일에 바빠서 세례 요한이 참수당하거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해도 거기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습니다. 요한에 관한 이야기를 나중에 전해 듣고 아까운 사람이 죽었네, 하고 안타깝게는 생각했겠지요.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도 마찬가지로 나사렛 예수라는 친구, 참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죽다니 안 됐군. 그래도 다행이야. 이런 일을 핑계로 로마 총독이 우리를 힘들게 했으면 어떨 뻔 했어.’ 하고 한 마디씩 했을 뿐이고, 그렇게 시간은 흘렀습니다. 사소한 것에 마음을 뺏겨 정말 중요한 일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게 인류 역사의 비극이고, 개인의 비극입니다.

 

실제로 중요하지만 일상에서 우리가 전혀 실감하지 못하는 한 가지 사실을 예로 들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입니다. 자전 속도는 적도를 중심으로 계산하면 시속 16백 킬로 미터입니다. 국제여객선 비행기보다 빠릅니다. 공전은 그것보다 10배 이상 빠릅니다. 엄청나게 빠르게 움직이는 지구라는 비행체에 우리는 잠시 올라탔습니다. 곧 내려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상황은 백척간두에 올라선 것과 비슷합니다. 이것 외에도 인류의 운명을 결정짓는 더 중요한 것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실에 밀착해서 살아가는 분들이 있고, 아무 의식 없이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이 자신의 실존에 밀착되어 있는 분들이 있고, 아무런 생각이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후자에 속한 분들은 다른 이유로 교회에 다니는 겁니다. 그냥 재미가 있다거나, 복을 받는다거나, 마음이 편해진다는 생각으로 나옵니다. 이런 상태에서 신앙생활은 그야말로 소비생활과 다를 게 없습니다. 다시 여러분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십시오.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이 우리의 영혼을 흔들고 있을까요? 아니면 여전히 겉도는 이야기에 불과한가요? 이 이야기를 좀더 따라가 봅시다.

 

저는 앞에서 마가복음 기자를 비롯해서 모든 복음서 기자들이 세례자 요한을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한 사람으로 보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요한의 비참하고 허무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예수의 죽음을 암시합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에 이미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죽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인간은 세상과 역사와 자기 자신을 파괴합니다. 인간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없습니다. 개인으로서의 인간도 그렇고 사회를 이루는 인간도 그렇습니다. 인간의 문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세상을 너무 비관적으로는 보는 걸까요? 세상에는 희생적으로 사는 착한 사람도 많지 않느냐, 그래서 그들을 통해서 좋은 일도 많이 일어나지 않느냐, 하고 말입니다. , 그런 사람도 많고 그런 일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과 그런 일은 예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산헤드린과 빌라도로 대표되는 로마 제국도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들은 그 시대의 인격자이고 지성인이었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이익, 또는 자신들의 이데올로기가 위협받는다고 느끼는 순간에 선지자와 하나님의 아들을 제거했습니다

 

여러분들은 21세기 인류와 문명을 어떻게 보십니까? 2천 년 전과 지금은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을까요? 겉으로는 달라진 게 많은 것 같지만 사람의 속성은 그대로입니다. 인간은 여전히 파괴적이고, 위선적입니다. 겉으로 친한 척하면서도 가슴 속에는 비수를 품고 있습니다. 지난 몇 주간에 걸쳐서 그리스 사태로 EU(유럽 연합)이 서로 옥신각신했습니다. 유사시에는 그 조직 자체가 와해될 것입니다. 미국, 중국, 러시아는 세계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서 계속 신경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미국 자체 안에서도 인종 간의 충돌은 화약고와 비슷합니다. 다른 나라에 대해서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남한과 북한은 해방 이후 70년 동안 적대관계를 청산하지 못했습니다. 이 문제를 전향적으로 풀어가려는 노력도 요즘에는 눈에 뜨이지 않습니다. 남한만의 문제도 힘에 버겁습니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지역감정은 왜 이렇게 불편한 걸까요? 빈부격차는 왜 더 심해지는 걸까요?

 

겉으로는 세련된 것처럼 보여도 21세기 문명 역시 계속해서 선지자들의 목을 치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처형할 계획을 세우고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은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습니다. 무늬만 달라질 뿐이지 근본은 그대로입니다. 그런데다가 우리가 직접 나서서 무얼 바꿀 수도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소시민으로서의 무력증에 빠지기도 하고, 개인의 무사안일주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세월아 가라, 하는 식으로 머물러 있으면 될까요? 내면의 세계가 공허감으로 가득 차거나 공연한 것에 삶의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으로 우리의 인생이 끝나도 되는 걸까요?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자기희생을 감수하고 투쟁에 나서야 할까요?

 

저는 여러분에게 세상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자기희생적으로 어떤 길을 선택하라고 강요할 생각이 없습니다. 각자의 정치적 판단도 다르고, 사회적 안목도 다르고, 성격과 심리도 다르고, 지식도 다르고, 더구나 각자 처한 삶의 조건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자기 자신이 선택해야 합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그 선택의 기준에 대해서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악의 승리로 보이는 이 세상 안에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우리는 의미 충만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것은 곧 여러분의 영적인 시선을 하나님에게로 돌리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의와 평화에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여기에 영적인 시선이 밀착해있지 않으면 우리는 의미 충만한 삶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은 여전히 선지자와 하나님의 아들을 제거하려는 시도가 진행되는 중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와중에 우리도 끼어듭니다. 이런 시도는 지난 인류역사에서 실행되었고, 지금도 실행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보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운명을 질적으로 다른 차원으로 돌리셨습니다.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고유한 통치 능력입니다. 이걸 보는 사람은 의미 충만한 삶으로, 즉 죽음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생명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세례자 요한의 끔찍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바로 이 놀라운 사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게 보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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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사막교부

July 13, 2015
*.39.218.195

십자가가 하나님의 통치 방법인데

우리는 늘 승리주의에 사로잡혀서

세상을 향한 분노에만 익숙한 듯 합니다.


정치 세력화 되고 압력단체가 되어버린

오늘의 교회의 모습을 보는 주님의 마음이 어떠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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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13, 2015
*.94.91.64

예, 사막교부 님 지적처럼

지금 한국교회는 세례 요한이나 예수의 자리가 아니라

헤롯이나 빌라도의 자리에서 큰 소리 치고 있는 듯합니다.

오지랖이 넓어서 낄데 안낄데 가리지도 않고 참견을 합니다.

정작 소리를 내야 할 자리에서는 뒤로 물러나버립니다.

말로만 십자가를 내세우지

실제 삶에서는 그걸 거리끼거나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십자가 신학이 정말 필요한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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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베샬롬

July 14, 2015
*.243.179.18

이번 설교는 동영상 보기가 없네요.

동영상이 음질이 항상 좋더라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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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14, 2015
*.94.91.64

사정이 생겨서 동영상 파일이 없습니다.

소리보다 영상의 음질이 더 좋다구요?

지금 녹음과 녹화 문제를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생각 중입니다.

녹음은 작은 엠피쓰리 녹음기를 설교단 위에 놓고

제가 스위치를 눌러가면서 작업하는데,

소리가 제대로 잡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가끔 환풍기, 에어컨 소리가 끼어들기도 하고,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가 중복되기도 합니다.

녹화의 소리는 녹음 전용 유선 스피커를

강단용 스피커에 묶어서 작업하기 때문에

비교적 괜찮게 들릴 겁니다.

잘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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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홍새로

July 14, 2015
*.237.104.169

지구의 자전속도가 적도를 중심으로 계산했을때, 

시속1천6백km 국제여객선 비행기보다 빠르며, 공전은 자전의10배속도..

엄청나게 빠르게 움직이는 지구라는 비행체에 올라탄 우리의상황은

백척간두이건만, 오늘도 우리들은 삶이라는 일상을 실행하고 있군요... 

인간실존이 느껴지는 말씀입니다.


선지자도 제거하고 하나님의아들도 제거한자들과 나는 아무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었고, 그런일이 현재 일어난다면 역시 그렇게 느꼈을것인데

말씀을 통하여 21세기 문명속에서 살고 있는한 아무도 상관없는자로

살아갈수는 없음을 알았습니다.


소시민으로서의 무력증, 개인의 무사안일주의가 이세상을 악의승리로

이끄는데 일조한다면, 그것에서 탈피할수 있는 힘은 오직,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운명을 질적으로 다른 차원으로 돌리신 하나님께로 눈을돌려

의미충만한 삶을 추구해야 하는것임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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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14, 2015
*.94.91.64

설교의 핵심을 깨끗하게 정리해주셨네요.

설교를 한 저에게 큰 도움이 되는군요.

저 세 가지 핵심을 잘 기억해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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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빚진자

July 28, 2015
*.210.63.133

다른 분들은 설교에 대해 깊은 피드백을 하시는데, 저는 좀 가벼운 피드백을 하겠습니다. 

정 목사님! 설교 중간에, "당신은 메시인가"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목사님을 "예수광"이 아닌 "축구광"으로 여길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대목입니다. 


진지하게 읽다가, 저 대목에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네요. (^^)/


언제나 깊은 영성이 있는 설교에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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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28, 2015
*.94.91.64

ㅎㅎ 그렇군요.

고쳤습니다.

메시는 세계 축구계의 메시아와 비슷하겠지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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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November 16, 2015
*.176.175.60

네. 목사님 하나님께 시선을 돌여햐 할 이유가 더 늘었습니다. 무력한 나를 방치하지 말고 악에 이기려드는 개인의 힘을 자랑말고 구주 예수님안에서 중심을 잡겠습니다. 하나님의 고유한 통치방식을 다시 생각하겠습니다. 말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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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16, 2015
*.94.91.64

하나님의 고유한 통치 방식에

우리가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살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을 겁니다.

늦가을 비가 촉촉히 내리는군요.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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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6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2] 2023-12-24 2006
1035 대림절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 (사 61:1-4, 8-11) [2] 2023-12-17 2176
1034 대림절 하나님의 날: 새 하늘과 새 땅 (벧후 3:8-13) [2] 2023-12-10 2169
1033 대림절 깨어있음이란? (막 13:24-37) [2] 2023-12-04 2457
1032 창조절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다! (엡 1:15-23) [2] 2023-11-26 1126
1031 창조절 은혜를 갈망하는 시인 (시 123:1-4) [2] 2023-11-19 1180
1030 창조절 외면당한 사람들 (마 25:1-13) [5] 2023-11-12 1269
1029 창조절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의 역설 (마 23:1-12) 2023-11-07 1027
102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마 22:41-46) [7] 2023-10-29 1317
1027 창조절 재림신앙 (살전 1:1-10) [4] 2023-10-22 1269
1026 창조절 금송아지 이야기 (출 32:1-14) 2023-10-15 1159
1025 창조절 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 (마 21:33-46) 2023-10-09 1103
1024 창조절 과정으로서의 구원 (빌 2:1-13) 2023-10-01 1142
1023 창조절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마 20:1-16) [2] 2023-09-24 1283
1022 창조절 홍해 이야기 (출 14:21-31) 2023-09-17 1270
1021 창조절 도반 공동체 (마 18:15-20) [4] 2023-09-10 1220
1020 창조절 '악' 앞에서 (롬 12:14-21) [4] 2023-09-04 1401
1019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2023-08-27 1154
1018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6] 2023-08-20 1514
101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2023-08-08 1711
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1626
1015 성령강림절 여기 계신 하나님 (창 28:10-19a) [4] 2023-07-23 1762
1014 성령강림절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1-11) 2023-07-16 1304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1591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2023-07-03 1271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4] 2023-06-25 1770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2023-06-18 1422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1571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1530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1450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1748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1574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1832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1335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1742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2174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2385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1898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1858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1848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2865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261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201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698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584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437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419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479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560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526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226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174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3129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363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3947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379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964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591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541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231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632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114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50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775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552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250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457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394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890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565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439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700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588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610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207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42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444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694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408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500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763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3990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555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912
952 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2] 2022-05-08 3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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