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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가득한 삶 (엡 5:15-20)

성령강림절 조회 수 10717 추천 수 0 2015.08.16 21:18:15
설교듣기 : https://youtu.be/N-0pZLtgEMs 
성경본문 : 에베소서 5:15-20 

성령 가득한 삶

5:15-20, 성령강림후 열둘째 주일, 2015816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

 

저는 신약성경을 읽을 때마다 거기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의 삶이 궁금해집니다. 그들도 지금 우리와 똑같이 주변 상황에 영향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가난하면 자신감이 떨어지고, 병들면 모든 게 귀찮고, 자식들이 잘되기를 학수고대 했습니다. 인생과정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물론 기쁜 일들도 많았겠지요. 성경에는 이런 일상이 자세하게 언급되지 않습니다. 대개는 하나님과 교회에 관한 이야기뿐이어서 자칫하면 구체적인 삶을 놓친 채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적지 않는 기독교인들에게서 신앙과 삶이 분리되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바탕에 두고 성경의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엡 5:15-20절도 아무 생각 없이 읽으면 신앙적인 덕담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 열거된 단어들을 보십시오. 지혜, 세월, , 주의 뜻, 술 취함, 성령 충만,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감사 등등입니다. 에베소서 기자가 이런 단어들을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는 지금 기독교인다운 삶의 태도를 설명하는 중입니다. 15절에서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 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삶의 지혜를 말하고 있는데, 이런 내용은 특별한 게 아닙니다. 헬라와 로마와 유대 선생들은 다 지혜를 역설했습니다. 일반적인 가르침입니다. 지혜는 인간으로서 누구나 갖춰야 할 기본적인 삶의 태도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도 지혜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16절에 나오는 때가 악하니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도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당시에 잘 알려진 경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에베소서 기자는 이런 일반적인 가르침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만의 고유한 삶의 태도를 17절에서 확실하게 짚었습니다. 지혜롭게 살고, 세월을 아끼며 사는 것에 머무는 게 아니라 주의 뜻을 아는 게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주의 뜻을 아는 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걸 오해하는 경우도 많고, 주의 뜻이라는 말 자체에 마음이 아예 없을 수도 있습니다. 주의 뜻 운운할 정도로 지금 세상살이가 한가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밤새도록 인터넷 게임에 빠진 학생들이 학교 수업이 귀에 들어오지 않듯이 기독교인들도 세상살이에 마음을 많이 빼앗겨서 성경이 말하는 주의 뜻을 아예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저는 주의 뜻을 이해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이 옳으며, 그 말씀대로 살아야만 실제로 삶이 풍요로워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설교자로서 그것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주의 뜻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을까요? 그리고 주의 뜻이 무엇일까요? 주의 뜻은 어떤 물건이나 상품처럼 고정되어 있거나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처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저절로 알아지는 게 아닙니다. 여기 시()나 미술을 공부한 분들이 있을 겁니다. 시와 그림의 세계가 저절로 우리에게 열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 ‘주의 뜻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술취함과 성령 충만함

성경이 친절하게 설명해줍니다. 18절에서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성령 가득한 삶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바로 주의 뜻을 아는 바른 길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성령 충만함과 술 취함이 대비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이 술 취함을 특징으로 한다면 기독교 신앙은 성령 충만을 특징으로 합니다. 취한다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다른 힘에 완전히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방식으로 자기를 초월하게 됩니니다. 예술가들에게서 이런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가수들은 마치 무당의 신들림처럼 자기 자신을 망각할 정도로 음악소리에 빠져듭니다. 음악소리가 그들에게 아주 강력한 에너지로 작동됩니다. 이런 특수 분야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일상 자체도 취함이 없으면 지탱하기가 어렵습니다. 돈에 취하고, 건강에 취하고, 취미생활에 취하고, 가족에게 취합니다. 그런 것으로 충분하지 못한 사람들은 간혹 마약에 취하곤 합니다. 맨 정신으로 세상을 버텨내기가 간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련의 현상을 가리켜 본문은 술 취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성령 충만함도 현상적으로는 술 취함과 비슷합니다. 술 취

한 사람처럼 성령 충만한 사람도, 즉 성령과의 존재론적 일치를 이룬 사람도 자기를 초월하게 됩니다. 이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삶은 없습니다.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성령에게 모든 삶의 토대를 맡김으로써 그는 그 외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좌고우면 하면서 계산하기에 바빴던 삶이 아주 단순해집니다. 삶의 껍데기는 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에서 울려오는 소리에 민감하게 됩니다. 돈이나 사회적 지위로는 얻을 수 없는 존재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제야 그는 실제로 삶을 사는 겁니다. 그 이전에는 자기가 사는 게 아니라 다른 것에 떼밀려 지낸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들에게는 성령 충만이 모든 문제 해결의 마스터키와 같습니다. 그래서 본문이 에베소 교회 신자들에게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와 같은 삶을 원하실 겁니다.

오늘 본문은 성령 충만함이 실제 삶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외형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면적인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구분되긴 하지만 깊이에서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선 외형적인 것에 대한 설명입니다. 19절은 이렇습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여기서 시는 시편이고, 찬송은 찬송가이고, 신령한 노래는 영가입니다. 이건 모두 예배 때 사용하는 노래들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배를 드리면서 시편과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냥 부르는 게 아니라 화답하는 방식으로 불렀습니다. 이는 곧 예배를 가리킵니다. 영어 새번역 성경은 너희가 함께 만날 때라는 표현을 첨가함으로써 이 구절이 예배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더 정확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성령 충만함을 경험한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는 거룩한 의식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서로가 성령 가득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함께 드린 공동기도만 해도 그렇습니다. 마지막 단락만 여기에 인용하겠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미래가 되시며, 우리 믿는 자들의 운명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주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우리의 삶에 신비한 방식으로 함께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런 기도문을 성령에 취하지 않고 맨 정신으로 읽을 수 있을까요? 입술로만 읽는 신자들을 제외하면 우리는 모두 성령에 취한 사람들입니다. 성시교독과 헌금과 모든 찬송이 다 그렇습니다. 제 경험에 따르면 한 걸음 더 나가서 이런 예배에 꾸준히 참여하는 것이 성령 충만함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고, 그것이 유지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클래식 음악을 이해하고 그 깊이를 알려면 그 음악을 꾸준하게 듣고 공부하고, 또 클래식 연주장을 찾아가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배는 거룩한 콘서트와 같습니다. 성령에 취하여 시편을 교독하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있는 한 누릴 수 있는 절정의 생명 경험입니다. 그래서 이를 성령 가득한 삶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성령 충만의 두 번째 요소인 내면적인 것을 엡 5:20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1)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감사 행위는 단순히 감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전체가 달린 문제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영혼의 깊이에서 관계가 성립되지 않으면 감사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말을 감사헌금 드리는 것쯤으로 이해합니다. 그것처럼 큰 착각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돈이 필요 없습니다. 전체 세계가 하나님에게 속했는데, 일부를 하나님께 바친들 그게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한 생명과 구원 사건 앞에 바로 선다는 뜻입니다. 바로 서려면 바로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면 놀랄 수밖에 없고, 하나님께 자신을 다 바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은 죽음마저 용기 있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완전히 하나님께 속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2) 본문은 그 감사가 범사에, 그리고 항상 일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누굴 놀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만 보면 이건 미션 임파서블입니다.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감사는커녕 하루에도 수없이 불평불만에 빠져듭니다. 평생 성경과 신학과 교회와 예배와 설교에 매달리듯이 살아온 저도 흔들림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살지는 못합니다. 작은 일에도 일희일비합니다. 그럴 때마다 저 자신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개인의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범사에 항상 감사하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도 경우에 따라서 불안해 하셨고, 화를 내기도 하셨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렇게 흔들리는 마음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범사에 항상 감사하라는 말씀은 범사에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라는 뜻이라고 봐야 합니다. 앞에서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관계에서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고 말씀드린 것이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할 때만 범사에 항상 감사하는 삶이 가능합니다. 그게 바로 성령이 가득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내면적인 태도입니다.

 

3) 본문은 한 걸음 더 나가서 감사의 삶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실행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만 이런 삶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가리키는 단어가 여기에 세 개 나옵니다. 예수는 자연인 예수의 이름입니다. 고유명사에요. ‘는 말 그대로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주는 생사여탈권을 가진 권력자를 가리킵니다. 당시에 주는 로마 황제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만이 주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을 주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아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단어로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 즉 구원자라고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다면 감사의 능력에 휩싸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그의 이름으로 감사하라는 말은 다른 것으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부활생명의 약속을 받았다는 사실보다 더 큰 감사의 조건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이 절대적인 조건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다른 조건들을 굳이 찾으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이런 삶을 가리켜 본문은 성령이 가득한 삶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영적 통찰이자 가르침입니다.

 

프뉴마

성령 가득한 삶은 접어두고, 성령이라는 말 자체를 낯설어 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정 목사가 성령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하는데, 도대체 성령이 뭐지, 하는 겁니다. 기독교 교리를 어느 정도 아는 분들도 성령을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사실은 성령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말도 막연하고 낯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 신앙을 실질적으로(real) 생각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지금 설교를 정리해야 할 이 순간에 갑자기 난감한 생각에 빠졌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말하는 성령을 신자들을 실감하지 못하고 느끼지도 못한다면 저의 설교는 헛수고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거기에 기초한 다른 이야기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설교가 뒷걸음치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오늘 본문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성령 개념을 설명하겠습니다.

 

5:18절에 나오는 성령은 헬라어 프뉴마의 번역입니다. 프뉴마는 원래 바람, , 공기를 가리킵니다. 고대인들은 바람을 신비한 능력으로 경험했습니다. 일반적인 사물과는 분명히 구별됩니다. 보이지 않는데도 강한 힘으로 나타납니다. 바람의 온도에 따라서 봄이 되어 식물이 살아나기도 하고, 가을이 되어 식물이 죽습니다. 고대인들은 바람과 같은 어떤 힘이 사람의 마음도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별로 배운 게 없는 사람인데도 세상을 정확하게 뚫어보는 것은 분명히 프뉴마의 활동인 거지요. 전쟁에서도 이 프뉴마가 활동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생명의 영으로 인식하고 경험하고 믿었고 선포했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살고,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죽는다고, 그리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인식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전혀 인식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이런 성경의 전통에 따라서 오늘 본문이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한 겁니다. 저는 이런 이 가르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성경 본문이 말하고 있듯이 성령이 가득한 삶을 원하시나요? 생명의 영이 우리의 영혼을 가득 채우기를 정말 원하십니까? 또는 안타깝게도 평생 누구를 뜨겁게 사랑해보지 못한 사람처럼 그런 삶에 목말라본 적이 없는 건 아닌가요? 그런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기준을 오늘 본문은 두 가지로 제시했습니다. 하나는 시와 찬송과 영적인 노래로 드려지는 예배를 영혼의 깊이에서 경험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부활 생명을 영혼의 깊이에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길을 함께 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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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홍새로

August 17, 2015
*.237.104.169

20대때 이세상은 모순 가득했었죠. 절대적 빈곤한 사람들, 날때부터

장애를 가진 사람, 부모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 

왜 하나님은 이세상을 완벽하게 아름답게 창조하지 않았을까?

범사에 감사하라, 이 말씀은 진짜로 `미션 임파서블`이라고

생각했었지요. 이제는 알겠습니다. 피조된 존재인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데도 강한힘으로 나타나는 생명의영, 프뉴마의 활동으로 

유한한 세계를 초월하는 부활생명을 약속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의 절대적인 조건이며, 더 큰조건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이제, 저의눈에는 모순은 있지만 그가운데 만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느껴집니다. 목사님 말씀을 통하여 새롭게 인식되는 하나님의나라가

기쁨으로 다가옴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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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17, 2015
*.94.91.64

맨 정신으로 세상을 살기는 힘듭니다.

모순투성이죠.

불폅화음투성이죠.

언어의 한계로 의사소통도 잘 안됩니다.

통한다고 생각하던 사람과도

언제 어느 때 충돌과 다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성서가 가르치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만큼

모순 가운데서도 놀라운 은총을 우리가 인식하게 될 겁니다.

에스더 님의 그 기쁨이 심화되고 지속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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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은빛그림자

August 17, 2015
*.223.20.44

어제는 컨디션이 너무 안좋아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잠들기 전에 이 설교문만 소리내어 읽었습니다.

마지막에 목사님께서, 여러분은 성령이 충만한 삶을 원하냐고 물으셨는데요..

이 질문 앞에 완전히 발가벗고(응??) 서 보았습니다.

대답이 선뜻 나오질 않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성령이 충만한 삶을 원한다고 착각만 했지 실제론 그걸 원하는 게 아니라

그냥 행복해지고 싶은 욕망이 훨씬 압도적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정말 궁금하기는 한데 대상 자체에 대한 순수한 궁금함이 아니라 "나"와 연관된 하나님이 궁금한 것 같아요. 하나님 혹은 성령 없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아마 미련없이 털고 그 길로 갈 것도 같아요. 그런 길은 없다고 믿기에 지금은 이 길을 졸졸 따라가고 있는데요... 근데요... 목사님, 분명히 행복한 순간이 있기는 있는데 전반적으론 너무 외로워요. 하나님 뒷모습이 머얼리서 보인다고 죽을 힘을 다해 뛰어가면 또 그만큼 머얼리 가계신 것 같아요. 원래 이런 겁니까? 뭐가 이렇게 힘이 들고 외로운 건가요? 하나님을 알아가는 만큼 고독감도 쌓여갑니다. 가을도 오는데 큰일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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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17, 2015
*.94.91.64

은빛의 순수무구한 이 솔직함은

도대체 어디서 온 건가요?

하나님 경험이 한 두번의 깨달음으로 해결된다면

누구나 다 가능하겠지만,

그게 전혀 그렇지 못하니까 헷갈리는 겁니다.

뒷부분에서의 질문이 핵심이군요.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도

외로움은 벗어날 수 없으니,

죽을 때까지 그냥 안고 갈 각오를 하세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외로움이 덜 하기는 한데,

그런 사람이 나타나기도 힘들 뿐더러

나타났다고 해도 늘 함께 할 수 없고

늘 함께 한다고 해서 외로움 자체가 없어지는 건 아니에요.

남이 부러워할 정도로 오손도손 사는 부부도

크게 차이가 없어요.

근원적인 외로움을 아는 사람들끼리는 참된 친구가 될 수 있어요.

이거 질문에서 너무 멀리 나가지요?

지금은 눈 딱 감고

신학공부 열심히 하세요.

어느 순간에 터널을 벗어나게 될 겁니다.

믿으면 아멘,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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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베샬롬

August 18, 2015
*.238.91.85

몇달 전 한 교수님으로부터 개인적인 메일을 받았습니다.

제가 전도사니까 전도사로서 어떤 충고를 주시는 내용이었습니다.

매 순간 하나님을 추구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역자가 그러한 태도로 사역을 하게 되면, 양들은 그러한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말로 아닌 행동으로 본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셨지만, 생각해주셔서 충고해주신 내용이라, 여러날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 생각을 많이하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훈련을

해야 되겠구나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그러한 삶이 성령충만한 삶의 구체적인 방법이

되겠구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성경말씀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이 성령충만한 삶이라 말하고 있구나"


당연한 말씀이지만 그것이 너무나 익숙하여, 때로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새롭게 들리게 됩니다.

사실, 이러한 과정을 겪다보면, '은빛그림자'님의 말씀처럼 외로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말씀처럼, 근원적인 외로움을 아는 자들끼리 참된 친구가 될 수 있겠구나라는 말에

쌓여있는 외로움이 씻겨가는 위로도 받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더 의지해야 됨을 절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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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18, 2015
*.94.91.64

베샬롬 님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한다는 것이
왜 중요하며,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설명하셨네요.

이런 경험이 축적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신학공부가 최선입니다.

지금 신학 과정 중에 있는 거 같은데,

당장 소득이 없어 보여도

좋은 신학책을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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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 은혜

August 19, 2015
*.125.153.176

성령충만이 범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통찰하는 삶이라면 산상수훈의 팔복 또한 성령충만의 또 다른
표징이겠죠?
신자라면 모두가 성령충만을 희구하면서도
정작 매일 그날이 그날같은
지지고 볶는 일상속에서
성령충만을 누리며 살기를 기대하기보다는
일상과는 구별된 특별한 사건 특별한 장소
특별한 경험으로 누릴수 있을거라는
편견에 여전히 갇혀 있지는 않은지요

일상이 은혜요 선물이요
그분과 동행하며 사는 하루 하루가
기적임을 인식하고
그래서 어제와 다를바 없는,
지난주와 다를바 없는 오늘 여기서
나의 일거수 일투족이 그분안에서 기뻐함을 입으며
살게 되었음에 그것으로 감사함이 성령충만임을
머리로는 아는데
영혼 깊숙이에서의 공명과는
여전히 간극이 있습니다

어제의 성령충만이 오늘의 승리를 보장해주지 않는,
오늘은 또 오늘의 싸움을 싸워야 하는...
죽는 날까지 이 영적전쟁에 전사로 부름받아
필요한 전투식량을 다비아로부터 공급받고 있는것 같아 감사할따름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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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19, 2015
*.94.91.64

그렇습니다.

일상이 영의 활동 공간이라 중요하지만

거기에 매물되면 영의 능력에서 멀어진다는 아이러니가 있어요.

그 긴장을 유지하면서 성령 충만함을 실제로 누리려면

우리와 동일한 고민을 겪었던 신앙의 선배들로부터 배우는 게 최선입니다.

그게 신학 안에 고스란이 들어 있어요.

성령에 충만하다는 것은 성령의 일에 영혼이 온전히 반응한다는 뜻이니

신학공부를 통해서 성령의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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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December 15, 2015
*.44.68.209

바로 서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바로 서려면 바로 알아야 하고

바로 알아야 보이는 것들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계속해서 듣고 보고 하니 뭔가 조금씩이라도

열리는게 있습니다.

약간의 내공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바로 서는 것인가에 고민도 많이 하였습니다.

길을 보지 못했고 보는 능력이 적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목사님 말씀에 더 집중할 수 있게 성령이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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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15, 2015
*.94.91.64

저의 설교가 진인태 님의 영적 여정에

약간이나마 도움이 되는 거 같아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신앙의 눈은 아주 천천히 열리다가

어느 순간에 비약적으로 열리기도 합니다.

성령이 도와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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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4 사순절 예수 승천과 하나님 우편 (벧전 3:18-22) [9] 2024-02-18 1182
1043 주현절 예수의 변모 사건 (막 9:2-9) [5] 2024-02-11 921
1042 주현절 여호와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 (사 40:21-31) [6] 2024-02-05 952
1041 주현절 예수의 배타적 권위 (막 1:21-28) [4] 2024-01-28 870
1040 주현절 부름-버림-따름 (막 1:14-20) [2] 2024-01-21 919
1039 주현절 사무엘의 하나님 경험 (삼상 3:1-10) [2] 2024-01-14 977
1038 주현절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 (행 19:1-7) [5] 2024-01-07 967
1037 성탄절 만물의 찬양 (시 148:1-14) [2] 2023-12-31 1097
1036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2] 2023-12-24 1994
1035 대림절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 (사 61:1-4, 8-11) [2] 2023-12-17 2159
1034 대림절 하나님의 날: 새 하늘과 새 땅 (벧후 3:8-13) [2] 2023-12-10 2153
1033 대림절 깨어있음이란? (막 13:24-37) [2] 2023-12-04 2440
1032 창조절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다! (엡 1:15-23) [2] 2023-11-26 1125
1031 창조절 은혜를 갈망하는 시인 (시 123:1-4) [2] 2023-11-19 1179
1030 창조절 외면당한 사람들 (마 25:1-13) [5] 2023-11-12 1267
1029 창조절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의 역설 (마 23:1-12) 2023-11-07 1021
102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마 22:41-46) [7] 2023-10-29 1315
1027 창조절 재림신앙 (살전 1:1-10) [4] 2023-10-22 1266
1026 창조절 금송아지 이야기 (출 32:1-14) 2023-10-15 1156
1025 창조절 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 (마 21:33-46) 2023-10-09 1102
1024 창조절 과정으로서의 구원 (빌 2:1-13) 2023-10-01 1140
1023 창조절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마 20:1-16) [2] 2023-09-24 1279
1022 창조절 홍해 이야기 (출 14:21-31) 2023-09-17 1269
1021 창조절 도반 공동체 (마 18:15-20) [4] 2023-09-10 1218
1020 창조절 '악' 앞에서 (롬 12:14-21) [4] 2023-09-04 1397
1019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2023-08-27 1152
1018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6] 2023-08-20 1513
101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2023-08-08 1706
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1625
1015 성령강림절 여기 계신 하나님 (창 28:10-19a) [4] 2023-07-23 1757
1014 성령강림절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1-11) 2023-07-16 1300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1590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2023-07-03 1269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4] 2023-06-25 1766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2023-06-18 1419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1569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1525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1446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1743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1572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1829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1334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1740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2172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2379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1892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1853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1844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2861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256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198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693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582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434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414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477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554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523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220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162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3117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349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3928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360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958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587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534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225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630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111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47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769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547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242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451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392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883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560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438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698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585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605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201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37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440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691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403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495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760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3983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551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905
952 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2] 2022-05-08 3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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