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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소금 (막 9:38-50)

창조절 조회 수 12443 추천 수 0 2015.09.27 22:41:17
설교듣기 : https://youtu.be/JRGZ9H5b5xc 
성경본문 : 마가복음 9:38-50 

신앙과 소금

9:38-50, 창조절 넷째 주일, 2015927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오늘 설교 본문인 막 9:38-50절에는 서로 다른 세 가지 이야기가 연속적으로 나옵니다. 첫 번 이야기는 막 9:38-40절입니다. 제자 요한이 예수님에게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은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 이외에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과 협조 관계에 있는 이들도 있었지만 반목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초기 기독교가 처한 상황도 비슷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행동을 나무라셨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막 9:41-48절입니다. 앞의 이야기와 연속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 내용이 과격합니다.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면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고, 손이나 발이 죄를 범하면 지옥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지옥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이라는 코멘트도 달렸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듣는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심판한다면 구원받을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고, 하나님이 마치 염라대왕처럼 폭력적인 존재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막 9:49-50절입니다. 신앙을 소금으로 비유합니다. 소금은 맛을 내고, 부패를 막아주고, 정화하는 기능이 있는데, 고대사회에서 중요한 물품으로 다루어졌습니다. 구약은 곡식예물(2:13)과 가루 향(30:35)에 소금을 치라고 했습니다. 9:50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세상에서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예수님은 마 5:13절에서도 제자들을 소금으로 비유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세 가지 이야기를 다시 정리해보십시오. 첫째는 예수를 따르지 않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고, 둘째는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할 경우에 임하는 심판에 대한 이야기였고, 셋째는 제자들이 소금의 맛처럼 신앙의 맛을 유지하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이야기의 기본 구조는 똑같이 사람 관계입니다. 첫째 이야기는 교회 밖의 사람들과의 관계이고, 둘째 이야기는 작은 자, 즉 사회적인 약자들과의 관계이고, 셋째 이야기는 제자들끼리의 관계입니다.

 

사람 관계

사람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작동되는 기본 원리가 경쟁이기 때문입니다. 적자생존이라는 진화의 과정을 거쳐 온 인간에게 경쟁은 숙명적입니다. 경쟁자와 어떻게 사이좋게 지낼 수 있겠습니까. 본문에서 요한이 어떤 이들을 비난한 건 이해가 갑니다. 오늘의 교회와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과 끊임없이 충돌합니다. 타종교와도 경쟁합니다. 그들을 적그리스도로 비난하기도 합니다. 고유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면서도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가 훼손되지 않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인간관계에서 또 하나의 어려운 대상은 오늘 둘째 이야기가 말하는 작은 자들입니다. 본문은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잘못을 짚은 뒤에 죄를 지은 손과 발을 찍어내고, 눈을 빼버리라고 말합니다.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약자들과의 관계가 그렇게 준엄할 뿐만 아니라 어렵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약자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거나 비난받는 이들입니다. 노예, 극빈자, 장애인, 성 소수자 등등입니다. 요즘은 아프리카 출신 난민들과 시리아 출신 난민들이 그렇습니다. 그런 이들과 잘 지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들은 민폐를 끼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입니다. 민폐를 무조건 받아주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그걸 받아주는 게 능사도 아니고, 어느 선까지 받아주어야 할지도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노숙자 단체가 우리교회에 와서 일주일에 하룻밤만 교회 사무실에서 노숙자들이 지낼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합시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룻밤만 약속했다가 다시 이틀 밤으로 늘어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돌을 짊어지고 바다에 들어가는 게 낫다는 주님의 말씀이 현실에서는 공허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게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이야기는 제자들 사이의 관계를 말합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는 말씀을 미루어 보면 당시에 제자들끼리 사이좋게 지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바로 앞 대목인 막 9:33-37절에는 제자들이 누가 잘났는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는 보도가 나옵니다. 제자들의 이런 행태를 보면 참으로 딱해 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교회 안의 신자들끼리도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믿는 사람들도 역시 앞에서 인용한 막 9:33-37절이 보듯이 누가 주도권을 행사하나, 라는 문제에 예민하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선의마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 한계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신앙의 요구와 인간적인 한계 사이에서 끊임없이 긴장하고 갈등하고 있습니다. 진정성 있게 신앙생활을 하려는 신자들은 그 사태 앞에서 힘들어합니다. 차라리 신앙이 없다면 막나가는 식으로 살아도 되겠지만 기독교인이기에 그렇게도 못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그런 고민을 좀 해라, 다른 사람들에게 연민을 품고 살라는 뜻으로 오늘 말씀을 주신 걸까요? 이 말씀을 읽는 우리도 계속해서 고민하면서 살아가야 할까요? 뻔뻔스럽게 사는 것보다는 고민하는 게 낫긴 하지만, 예수님이 제자들을 그런 방식으로 닦달했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서로 상대적이기 때문에 혼자서 고민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모든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는 것은 이를 주도한 이들과의 관계가 적대적이었다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저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모든 사람들과 무조건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런 말씀을 하신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소금 맛

오늘 본문에서 중심은 소금 맛이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소금 맛은 짭니다. 그게 본질입니다. 겉모양만 소금이고 그 맛이 달거나 시다면 그건 소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를 사람이 없을 겁니다. 예수의 제자라면 제자다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자답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의 제자는 이상적인 인격을 도야한다거나 유토피아적인 이상 세계를 도모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소금의 맛이 짠 거라면, 제자들의 맛은 믿음입니다. 본문은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느냐 했고, 병행구인 마 5:13절은 한걸음 더 나가서 아무 쓸 데가 없어서 버림받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예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말이 무슨 뜻인지 실감이 갑니까? 버림받는 것, 예수와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단순히 제자 집단으로부터 축출당하거나 교회로부터 출교당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출교를 당해도 여전히 예수님의 제자일 수 있고, 교회에서 중직을 맡아도 실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일 수가 있습니다.

 

이 문제를 좀더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기독교인이 예수님과의 결속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 버림받는다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기쁨과 자유가 그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존재론적인 기쁨과 존재론적인 자유입니다. 버림받는다는 말, 또한 더 이상 짜게 할 방법이 없다는 말은 사람이 생산해낼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자유로부터 멀어진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었을 때, 티브이에서 연예 오락 프로그램을 볼 때, 등산이나 테니스 등의 취미활동을 할 때 느끼는 기쁨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런 것들도 우리가 살아가가는 데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런 것으로 우리가 온전히 기쁨을 맛볼 수는 없습니다. 자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있어야 자유롭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으로 우리가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는 결코 없습니다.

 

이런 설명이 모호하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성취할 때 느끼는 기쁨과 교회생활에서 느끼는 기쁨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성취에서 더 큰 기쁨을 경험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 생각은 예수님을 통한 기쁨이, 즉 믿음의 기쁨이 뭔지를 경험하지 못해서 나온 겁니다. 진짜 보석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가짜 보석을 진짜 보석으로 착각하는 거와 같습니다. 그런 사람의 삶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현상의 하나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삶의 매너리즘입니다. 삶이 무료해지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를 성취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과 자기가 관심을 기울이던 것에 더 열광적으로 매달립니다. 이 두 가지 현상은 깊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삶의 상투성은 사람을 어딘가에 매달리게 합니다. 상투성과 매달림이라는 현상은 바로 버림받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기쁨과 자유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짠 맛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소금처럼 믿음의 깊이로 들어가서 기쁨과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여러분들은 다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황금 같은 시간을 내서 교회에 나왔을 겁니다. 신앙의 깊이로 들어간 경험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여러분이 실제로 믿음의 깊이로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영혼의 깊이에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음모에 가담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종교적으로 세련되고 전문가다운 이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타가 공인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종교적 전통에만 안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배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늬만 하나님을 믿는 거였지 실제로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믿음의 세계로, 즉 하나님의 존재 신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도 자신들에게 익숙한 삶의 형태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살이를 좀더 편하게 하고, 또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얻거나 도덕적인 품격을 유지하려고, 더 노골적으로는 세속적인 복을 받으려고 신앙을 필요로 할 뿐이지 신앙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뭔지를 모르면서 교회생활을 합니다.

 

요즘 우리는 수요일마다 <욥기>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는 14장을 공부했습니다. 그 시간에 저는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욥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욥이 처한 운명은 두 가지 점에서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기독교인들이 욥기 읽기를 어려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는 욥의 운명이 실제로 저주스러운 상태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던 모든 것을 그는 잃어버렸습니다. 재산, 자식, 건강, 명예를 다 잃었습니다. 그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다른 하나는 전통적인 신앙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불행과 재난은 죄로 인한 결과이거나 더 큰 믿음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시험이라는 유대인들의 전통적 지혜 신앙을 그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서 분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는 스올에 떨어져서 혼자 지내기를 바랄 정도였습니다. 하이데거의 표현으로 그것은 섬뜩한 기분으로서의 불안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세계--존재가 겪어야 할 이런 불안을 외면합니다. 그리고 일상의 익숙한 것에 길들여져 감으로써 안정감을 누리려고 합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런 태도는 비본래적인 존재로 퇴각하는 것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부활, 종말, 생명완성은 우리의 일상에서 볼 때 낯선 것이어서 기독교인은 그걸 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맛을 잃은 소금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이런 상태로는 신앙의 깊이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신앙의 맛

오늘 여러분들이 소금의 맛처럼 신앙의 맛을 실제로 느끼고 그 맛과 일치해서 살아가기 원하는지 돌아보십시오. 성경이 가리키고 있는 하나님과 그의 통치와 그 구원에 실제로 관심이 있는지 돌아보십시오. 거기에 관심이 없으면 사람은 결국 다른 것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누가 크냐?’ 라고 서로 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누가 더 잘하는가에 마음이 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을 향해서도 마음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모든 판단의 주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일도 자주 벌어집니다. 그들보다 자신들이 더 잘났다는 것에 우월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비교 우위로 만족하는 방식으로는 기쁨과 자유를, 즉 구원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세상의 기준으로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삶을 소진할 뿐입니다. 그렇게 살아도 멋진 인생이었다고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 삶이 우리를 일시적으로나마 흥분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삶에 기만당하면서 아무 대책 없이 따라갑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다른 이들이 볼 때 세련되고 교양이 있고 헌신적인 마음이 있다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똑같습니다. 거기서 남는 것은 자기 열정뿐이지 하나님만이 허락하실 수 있는 생명 충만감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소금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어지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잃어버리면 기독교인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어집니다. 존재 가치가 없어지면 버림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살이가 겉으로 아무리 화려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21세기 오늘의 문명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여도 그 바닥에 허무와 자기 파괴와 냉소가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자리와 그 순간이 바로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지옥이 아닐는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짠맛을 유지하고 있는 영적 소금으로서의 정체성을 놓치지 말고, 매 순간 신앙의 깊이로 한걸음씩 들어가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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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 은혜

September 28, 2015
*.33.160.42

신앙의 더 깊은 자리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 구원에 대해 관심이 없을뿐더러,
자기 세계에 철저히 갇혀있기 때문이다
무늬만 크리스천이지 믿음도 없다...

크리스천이라고 자처하며
나름 열심을 내며 신앙생활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우리에게
우리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이 날카로운 지적 앞에서
"혹시 나를 향한 질타가 아닌가?
내 믿음이 정말 그런게 아닐까?"
의문과 경계심속에
내 믿음을 근원적 관점에서 반추해보고자
하는 위기의식을 갖지 않는다면,
그저 은혜로운 설교 한편을 들었구나.. 로
그친다면,
내 영혼이 참으로 무뎌진채
세상것에 깊이 팔려있다는 반증이겠죠?

우리 영혼을 넋이 빠지게 하는
세상것들은 갈수록 더 맹위를 떨쳐갈테고
우리 안에 태생적으로 선한 것에 대한 관심이 없는데다가, 때론 나도 내가 싫기만한 뿌리 깊은 죄성은 여전히 하나님보다 더 위력을 발휘하고...
그 어느 조건도 나를 구원으로, 진리로
인도해갈 가능성이 없어보이니
그저 그분의 강권적인 간섭하심만이
유일한 소망인가요?


내가 지금 어떤 자리에 갇혀 있고
무엇에 포로되어 있는지를 꿰뚫어 볼수 있는
영안을 갖기를 갈급해하며
그 분 앞에 타는 목마름으로 나아가게 되는것조차
그분의 일방적인 은혜의 손길만이 유일한 탈출구인가요?

구원은 그렇다 하여도
구원 이후의 더 깊은 신앙으로의 진전은
시므온처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우리의 평소
영적 자세가 먼저 요구되는지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September 28, 2015
*.94.91.64

구원과 구원 이후라는 말은

편의상 하는 거지 실제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칭의와 성화라는 말도 마찬가지로

편의상 하는 거지 실제로는 차이가 없는 거구요.

'마지막 때 믿는 자를 보겠느냐?'는 말씀처럼

믿는 시늉은 할 수 있지만

실제로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목회자로서 저의 경험에 의하면

교인들 중에 20%는 믿음에 충실한 분들이고,

50%는 관심 없이 그냥 종교 취미생활에 머무는 분들이고,

나머지 30%는 양쪽에 걸쳐 있는 분들이에요. ㅎㅎ

목사들은 일반 신자들보다 상황이 더 나쁠 겁니다.

신앙생활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사람의 심정이 없으면

믿는다고 말하기 어려운데,

그것을 한번 경험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세상살이가 너무 절절하여 곧 포기합니다.

부스러기 님은 20%에 속하는 거 같습니다.

남은 추석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profile

[레벨:17]홍새로

September 29, 2015
*.237.104.169

관념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이 가리키고 있는 하나님, 그의통치와 구원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갈구할때 

그속에 거할수 있음을 알게되었습니다.

명절을 맞아 많은 만남들 가운데서

비교우위로 만족하는 방식으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존재론적인 기쁨과 자유를

경험할수 없다하시는 말씀이

실제적으로 와닿았습니다.

그래도 오락가락 하는 자신의모습을 보면서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버려지는것처럼

신앙을 잃으면 허무와 자기파괴와 냉소에 빠지는

지옥에 떨어지는 자리와 순간을 맞는다는것을

잊지 말아야함을 새겨봅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September 29, 2015
*.94.91.64

추석 연휴 잘 보내고 계시지요?

관념과 실재의는 긴장관계에 있어요.

관념이 실재를 담고 있다고 봐야지요.

그 실재가 없으면 관념은 정말 헛소리에 떨어지고,

관념이 없으면 실재가 실용성에 떨어질 수도 있어요.

에스더 님이 지금처럼 항심을 유지하고 수행적인 자세로 길을 가면

그런 긴장들이 더 또렷하게 들어올 것이며,

기독교 신앙으로 인한 기쁨과 자유가

밭에 묻힌 보물처럼 드러나게 될 겁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핵심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을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믿고 희망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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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January 22, 2017
*.222.51.58

섬뜩한 기분으로서의 불안

그리고 아무 맛이 없는 소금의로서의 존재를 먼저 생각하니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이 얼마나 인생에서 귀중한것인지를 알게 합니다.


소금이 되어가는 과정에 많은 것이 필요할 것 같은데

핵심적인 부분을 생각하니 간단하고 부끄럽습니다.

관심을 돌리지 않고 시선을 돌리지 않으니 다른게 생각나고 적게 보인 것이었습니다.

물에 들어가야하는데 물을 공부하는격입니다.

그냥 풍덩들어가는 제가 올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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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22, 2017
*.164.153.48

물에 풍덩 들어가는 것,

그게 핵심이기는 한데

물을 배우는 게 분명히 도움이 됩니다.

물론 배우더라도 정확하게 배우는 게 전제되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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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7 창조절 하나님께 마음을 두라! (살전 2:1-8) [6] 2011-10-23 23097
1026 기타 성만찬 공동체 [2] [1] 2006-09-10 22994
1025 창조절 삭개오 이야기 (눅 19:1-10) [14] 2016-10-30 22710
1024 부활절 부활의 증인 공동체 [17] 2011-05-01 22448
1023 성령강림절 기도와 믿음 file [20] 2010-10-19 22360
1022 성탄절 그리스도의 평화 (골 3:12-17) [9] 2012-12-30 22312
1021 기타 다윗의 통곡 [1] 2006-08-27 21776
1020 성령강림절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 file [12] 2010-11-22 21742
1019 주현절 두려워 말라! (사 43:1-7) [11] [1] 2013-01-13 21737
1018 성령강림절 복음의 능력, 믿음의 능력 [10] 2009-11-02 21695
1017 대림절 소망의 하나님, 우리의 소망 file [5] 2010-12-06 21625
1016 성탄절 영광과 평화의 노래 2010-12-26 21613
1015 대림절 주의 길을 준비하라! (눅 3:1-6) [11] 2012-12-09 21486
1014 성령강림절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삼상 17:32-49) [8] 2015-06-21 21372
1013 창조절 불행한 부자 이야기 (눅 16:19-31) [10] 2013-09-29 21064
1012 성령강림절 믿음과 구원 file [4] 2010-10-31 21010
1011 부활절 나를 따르라 (요 21:15-19) [10] 2013-04-14 20831
1010 주현절 예수는 하나님의 지혜다 [3] 2011-01-30 20766
1009 성령강림절 영적인 사람 [11] 2008-05-11 20755
1008 사순절 우리의 생각과 다른 하나님 [2] 2010-03-08 20452
1007 성령강림절 의인과 죄인에 대한 질문 [3] 2008-06-01 20414
1006 사순절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 [11] 2010-03-29 20376
1005 대림절 성령 세례와 심판 [36] 2009-12-14 20312
1004 성령강림절 나아만과 게하시 (왕하 5:1-14) [6] 2013-07-08 20267
1003 대림절 임마누엘 예수 [17] 2007-12-23 20172
1002 창조절 하나님과 금송아지 상 (출 32:25-35) [7] 2011-10-17 20149
1001 창조절 예수 재림과 영적 각성 (살전 4:13-18) [11] 2011-11-06 20103
1000 부활절 예수의 기이한 빛 (베드로전서 2:1-10) [16] 2011-05-16 20090
999 기타 사람 차별 마시오! [1] [2] 2006-09-24 19913
998 사순절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 [18] 2011-03-27 19904
997 주현절 창조의 빛, 인식의 빛 [15] 2009-02-23 19862
996 기타 무엇을 기다리는가? [3] [2] 2004-06-14 19799
995 부활절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의 주 [17] 2011-04-24 19632
994 기타 높은 사람, 낮은 사람 [2] [2] 2006-10-08 19608
993 성령강림절 그리스도의 가난과 우리의 부요 [23] 2009-07-13 19582
992 대림절 주의 날과 십일조 [49] 2009-12-07 19537
991 성령강림절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 [8] 2010-08-09 19480
990 성령강림절 세례 요한의 죽음 (막 6:14-29) [10] 2015-07-13 19461
989 사순절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26] 2009-04-06 19367
988 기타 예배로서의 삶 [5] [1] 2006-09-03 19340
987 부활절 예수는 왜 선한 목자인가? [11] 2009-05-04 19321
986 성탄절 성탄에 참여하는 길 [18] 2007-12-25 19266
985 주현절 포도주 사건의 실체와 의미 [20] 2007-01-14 19250
984 기타 다윗왕조의 존재근거 [1] 2006-08-06 19247
983 성령강림절 하나님은 누구인가? file [8] 2010-09-26 19098
982 사순절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과 믿음 [27] 2010-03-22 19063
981 사순절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라! [13] 2011-03-21 19057
980 성령강림절 믿음과 종됨의 관계 file [18] 2010-10-04 19040
979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이다! [12] 2011-05-22 18979
978 창조절 제자의 길과 소유의 길 (눅 14:25-33) [10] 2013-09-08 18975
977 주현절 이사야 예언의 성취 (눅 4:14-21) [7] [1] 2013-01-27 18949
976 성령강림절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눅11:5-13) [10] 2013-07-29 18935
975 성령강림절 은혜의 보좌 앞으로! [28] 2009-10-26 18923
974 기타 생명이 죽음을 삼키다, 7월2일 2006-07-02 18875
973 주현절 원수사랑, 가능한가? [16] 2011-02-22 18839
972 사순절 여호와는 가까이 계시다 (사 50:4-9) [10] 2013-03-24 18824
971 주현절 하나님의 은폐, 하나님의 침묵 [17] 2010-01-18 18815
970 주현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24] 2011-01-09 18772
969 사순절 믿음이란 무엇인가? [11] 2008-02-17 18762
968 성령강림절 믿음과 행함의 긴장관계 [25] 2009-09-14 18738
967 대림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file [8] 2010-12-20 18719
966 성령강림절 한 말씀만 하소서 [17] 2010-06-07 18712
965 주현절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고전 1:18-31) [16] 2014-02-02 18575
964 성령강림절 율법을 넘어서 [2] 2008-06-29 18506
963 성령강림절 요한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 [17] 2009-07-27 18348
962 사순절 유혹 받으신 예수 (마 4:1-11) [10] 2014-03-09 18333
961 기타 낡은 것과 새것 (고후 5:16-21) [2] 2004-07-02 18327
960 주현절 하나님의 ‘선택의 신비’ [10] 2011-01-17 18313
959 창조절 하나님을 기억하라 (신 8:11-18) [16] 2011-11-21 18302
958 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는 누군가? [16] 2010-07-19 18268
957 성령강림절 대재앙 앞에서 [8] 2008-05-25 18239
956 성령강림절 예수는 생명의 밥이다 [22] 2009-08-10 18176
955 성령강림절 솔로몬의 꿈 이야기 [27] 2009-08-31 18163
954 주현절 성령 임재와 마술 [21] 2010-01-11 18128
953 대림절 관용과 주의 재림 (빌 4:4-7) [7] [3] 2012-12-17 18115
952 사순절 “나는 아니지요?” [23] 2011-04-18 18027
951 대림절 인자가 오리라 file [8] 2010-11-28 17977
950 기타 하나님을 알자 [4] 2004-06-30 17971
949 주현절 예수가 왕이다 (마 2:1-12) [3] 2013-01-07 17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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