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2

영광의 몸으로! (빌 3:17-4:1)

사순절 조회 수 7373 추천 수 0 2016.02.21 19:39:51
설교듣기 : https://youtu.be/QCWZBhtRjEY 
성경본문 : 빌립보서 3:17-4:1 

영광의 몸으로!

3:17-4:1, 사순절 둘째 주일, 2016221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신자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타의도 있고, 자의도 있습니다. 소위 모태신앙이라서 교회 나오는 게 몸에 밴 사람도 있고, 교회의 분위기 등이 마음에 들어서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삶이 허무해서, 또는 병들어서, 복 받기 위해서 나오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리고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이유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구원의 길이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길에 대한 체계적 설명을 기독교 교리라고 합니다. 따라서 기독교 교리를 가능한 많이 아는 게 중요합니다. 최소한 세례를 받을 때 배운 교리만이라 단순히 정보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아는 게 중요합니다. 오늘 저는 핵심적인 교리 중에서 하나를 여러분에게 설명하겠습니다.

 

할례파 비판

바울은 오늘 제2 독서인 빌 3:17-4:1절에서 현대인들에게는 매우 낯선 이야기를 합니다. 우선 20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하늘의 시민권이라는 말이 뭔지 느낌이 오긴 하겠지만, 막상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려면 쉽지 않을 겁니다. 21절에는 좀더 멀게 느껴질 만한 말씀이 나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이 구절은 이해하려면 바울이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빌립보교회의 속사정을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합니다. 빌립보는 기원전 358/357년에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빌립 2세에 의해서 세워졌고, 기원전 30년경에는 아우구스투스 로마 황제에 의해서 로마의 직할 도시라는 지위를 얻었습니다. 미국에서 출생한 사람에게 미국 시민권이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처럼 빌립보에서 출생한 사람은 자동으로 로마 시민권자가 되는 겁니다. 바울은 기원후 49/50년경에 이 빌립보에 유럽 최초의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그 교회에서 중추 역할을 한 사람이 여성 사업가 루디아입니다. 루디아가 재정적으로 크게 기여한 탓인지 빌립보 교회는 오랫동안 바울을 재정적으로 후원했습니다. 4:15, 16절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후원금을 받았고, 빌립보 교회의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소식 중의 하나는 빌립보교회에 바울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이 들어왔다는 겁니다. 당장 달려가서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지만 지금 바울은 감옥에 갇힌 신세라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일단 편지로나마 자신의 생각을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 편지가 바로 빌립보서입니다. 빌립보서에 기쁨의 성경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긴 했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아픔의 성경이라고 하는 게 정확합니다.

 

특히 빌립보서 3장은 다른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 즉 이단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3:2절에서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라고 지칭했습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심한 욕설처럼 들립니다. 바울이 여기서 개라고 부른 이들은 파렴치하고 몰상식하고 저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이었다면 아예 처음부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3:3절에 따르면 그들은 할례파입니다. 할례파는 말 그대로 할례를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의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태어나서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초기의 대다수 기독교인들도 다 할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로 유대인들로 구성된 초기 기독교에서는 이게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할례전통과 전혀 관계없이 살던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오면서 문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안에 할례를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이 나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볼 때는 정말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당시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방인들에게까지 할례를 강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할례파입니다. 이들과 대척점에 서서 가장 적극적으로 투쟁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빌 3:18절에서 바울은, 앞에서 개라고 비판한 그 할례파 사람들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고 규정했습니다. 바울이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할례 유무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18절을 공동번역으로 읽을 테니 들어보십시오. 바울의 안타까운 마음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가 벌써 여러 번 여러분에게 일러 준 것을 지금 또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바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이어 19절에서는 그들의 최후는 멸망뿐이며, 그들은 자기네 뱃속을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네 수치를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하며 세상()일에만 마음을 쓰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는 겁니다. 이런 표현만으로 보면 바울이 비판하고 있는 할례파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기초한 기독교 신앙을 지키면서 동시에 유대교의 전통을 받아들이려고 한 것입니다. 유대교와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게 기독교의 생존과 선교활동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볼 때 할례파들은 유대교의 눈치를 보다가 결국 복음의 본질을 놓치고 파괴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을 멀리하라고 빌립보교회 신자들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시민권

이런 정황을 전제하고 앞에서 읽은 빌 3:20절 말씀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시민권이라는 표현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정치적인 것입니다. 빌립보 사람들은 로마 시민권자들입니다. 그 시민권에 대한 자부심이 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독교인들의 본질이 로마 시민권이 아니라 하늘 시민권에 달려 있다고 보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종교적인 것입니다. 바울이 비판하고 있는 할례파 사람들은 이 땅에서 종교적으로 완성된 삶을 살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원이 이 땅에서 완성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소위 구원파 유의 신앙과 비슷합니다. 바울은 기독교인의 구원은 땅에서 완성되는 게 아니라 하늘에서 완성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 하늘은 단순히 우주공간이 아니라 생명의 은폐된 근원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하늘나라를 지향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땅에서 자신을 성취하는 것에 몰두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수 믿고 복 받아서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자는 생각이 가장 크고 뜨겁습니다. 인생에서 뒤처지면 뭔가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게 아닌가 하고 두려워합니다. 하늘의 시민권을 외면하는 행태입니다.

 

그렇다면 땅에서의 일은 모두 잘못된 것이니까 오직 하늘의 것만 찾으라는 말인가, 하고 생각하는 것도 바울의 생각을 오해하는 겁니다. 우리가 땅에서 해야 할 일은 어느 한 순간에도 소홀하면 안 됩니다. 학생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직장 다니는 사람들은 직장생활에 성실해야 하고, 목사는 목회를 진정성 있게 해야 합니다. 정치도 필요하고 사업도 필요하고 문화 예술도 다 필요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핑계로 땅에서의 책임을 방기하거나 역사를 외면하는 건 결코 건강한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에 그 모든 것들은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됩니다. 그런 것의 마지막은 멸망이고 신은 배이며, 영광을 부끄러움입니다. 그 모든 것이 다 땅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유명 가수가 되는 걸 목표로 살았다고 합시다. 그런 목표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다음은 뭘까요? 더 유명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래서 돈을 더 버는 것일까요? 계속 해서 인기를 얻으려고 노력해야만 할까요? 그것 자체로는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라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가 되어서 우주의 비밀을 발견해서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의 운명과 그 과학적 발견도 다 지나가고 맙니다. 남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 모든 사물, 그 모든 것들은 무상한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 것만을 목표로 산다면 삶이 끝날 때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을 겁니다. 이걸 가리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고 표현했습니다.

 

인생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게 인생인데, 어쩌란 말이냐, 대안이 뭐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허무하니까 그럴수록 더 악착같이, 더 열정적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을 제가 옳다 그르다 하고 이 자리에서 판단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성경을 설교하는 목사로서, 더 근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그 대답을 제시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진리이기 때문에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기쁨으로 전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지나감으로써 허무할 수밖에 없는 인생살이에서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린다는 것이 그 대답니다. 그 기다림이 기독교의 재림신앙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인의 실존은 기다림입니다.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구원자를 기다립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질문해보십시오. 구원자를, 구원을 실제로 기다리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그게 너무 재미있어서, 혹은 거기에 너무 지쳐버려서 재림신앙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하늘로부터 오는 구원자를 기다린다는 게 실제로 무슨 뜻인지를 잘 몰라서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할 수는 있습니다.

 

종말론적 변화

바울은 하늘로부터 오는 구원자가 우리에게 어떤 일을 행할지에 대해서 21절에서 설명합니다.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낮은 몸을 영광의 몸으로 변화시키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재림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변화됩니다. 여기서 변화가 그 핵심입니다. 바울은 고전 15:35절 이하에서 몸의 부활을 설명합니다. 51, 52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부활의 핵심 개념도 변화입니다. 단지 모양만 변하는 게 아니라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몸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몸인지를 우리는 아직 모릅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과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영광의 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영광의 몸은 곧 죽음이 더 이상 개입되지 않는 생명으로의 변화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5:53절에서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 말했습니다.

 

영광의 몸이라는 말을 좀더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설교를 듣는 시간만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게 우리의 궁극적인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영광은 하나님에게만 붙여질 수 있는 단어입니다. 영광의 몸으로 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몸으로 변한다는 뜻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고전 15:52절에서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고 했는데, 썩지 아니할 것은 곧 하나님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이 말하는 것도 역시 우리가 하나님처럼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직접 신()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몸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일치를 가리킵니다.

 

이런 엄청난 일은 우리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다는 사실이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합니다. 그는 하늘에서 하나님 오른 편에 앉아 계십니다. 하나님 오른 편에 앉아 있다는 말은 하나님과 동일한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창조입니다. 창조는 21절이 묘사하듯이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빅뱅이 첫 창조였다면 예수 재림은 첫 창조의 완성이자 재창조입니다. 첫 창조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라고 한다면 재창조는 유의 질적인 변화입니다. 이런 재창조의 능력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하늘로부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변화의 그 순간을 기다립니다.

 

이런 설명이 막연하거나 멀게 느껴지십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영광의 몸으로 변화된다는 사실을 그 무엇보다도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부분적으로는 지금도 제가 변화되고 있습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63년 동안 살면서 내 몸을 구성하던 모든 세포가 계속해서 변화되었습니다. 언젠가 죽음을 통해서 총체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영광의 몸으로 변화된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큰 위로가 되는 가르침입니다. 현재와 같은 몸으로는 참된 만족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도 이런 믿음 안에서 어려운 시절을 잘 버텨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이단들과의 진리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야기가 바울이 할례파들과 논쟁 중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전혀 새로운 몸으로, 즉 영광의 몸으로 변화하는 게 분명하다면 이 세상에서 누가 잘났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여기 관광버스를 타고 단체로 온천에 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시다. 그들이 서로를 향해서 얼굴에 먼지가 많다거나, 화장이 잘 됐다 못 됐다 하는 말로 서로 논쟁하고 있다면 어리석은 겁니다. 그런 것들은 벌거벗고 온천물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유효한 것입니다.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는 순간은 바로 온천물에 들어가는 순간과 비슷합니다. 이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기만 한다면 땅의 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전혀 새로운 자세로 이 세상을 살아갈 것입니다. 바울이 영광의 몸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말한 다음에 한 마디 덧붙인 빌 4:1절을 저도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여러분에게 그대로 전합니다. 공동번역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을 믿으며 굳세게 살아가십시오.”


profile

[레벨:20]문전옥답

February 23, 2016
*.194.68.169

바울의 안타깝고 간절한 심정이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2000년 전의 일인데 저기 건넛마을에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네요.

할례파와 바울 사이에서 자신들이 진실이라고 믿는 두 주장이 부딪칠 때

어느 것이 옳았는지의 판단은 세월에 맡길 수밖에 없는가 봅니다.

자칫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라는 생각도 듭니다.

결국 역사는 바울의 손을 들어줬고 지금 우리가 바울의 서신서를 보며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네요.

영광의 몸으로 변화될 때를 기다리며 살아가야겠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February 23, 2016
*.94.91.64

2천년 전의 성경 이야기가 지금의 이야기로 들린다는 말은

설교 행위에 대한 최고의 찬사에요. ㅎㅎ

역사적 판단에 맡긴다는 것은

궁극적인 판단이 종말론적으로 실행된다는 사실을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기다릴 뿐만 아니라 

지금 현실을 역사적 빛에 근거해서 부단히 해석하고 투쟁하며

변혁시켜나간다는 결기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기다림과 투쟁! 

profile

[레벨:16]맑은그늘

October 24, 2016
*.212.139.114

설교링크입니다.

https://youtu.be/VEszfpNabvM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sort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9939
1052 부활절 부족함 없는 삶, 가능한가? (시 23:1-6) 2024-04-21 255
1051 부활절 죽은 자 가운데서 (눅 24:36b-48) [2] 2024-04-14 507
1050 부활절 생명의 로고스 (요일 1:1-10) [2] 2024-04-08 553
1049 부활절 예수 부활의 첫 증인들 (막 16:1-8) [4] 2024-03-31 662
1048 사순절 향유를 손에 든 여자 (막 14:1-11) [4] 2024-03-24 688
1047 사순절 새 언약의 날 (렘 31:31-34) [2] 2024-03-17 598
1046 사순절 죽임에서 살림으로! (엡 2:1-10) [6] 2024-03-10 845
1045 사순절 십자가의 길과 하나님의 능력 (고전 1:18-25) [2] 2024-03-04 878
1044 사순절 예수 승천과 하나님 우편 (벧전 3:18-22) [9] 2024-02-18 1211
1043 주현절 예수의 변모 사건 (막 9:2-9) [5] 2024-02-11 942
1042 주현절 여호와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 (사 40:21-31) [6] 2024-02-05 978
1041 주현절 예수의 배타적 권위 (막 1:21-28) [4] 2024-01-28 889
1040 주현절 부름-버림-따름 (막 1:14-20) [2] 2024-01-21 942
1039 주현절 사무엘의 하나님 경험 (삼상 3:1-10) [2] 2024-01-14 991
1038 주현절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 (행 19:1-7) [5] 2024-01-07 989
1037 성탄절 만물의 찬양 (시 148:1-14) [2] 2023-12-31 1147
1036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2] 2023-12-24 2084
1035 대림절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 (사 61:1-4, 8-11) [2] 2023-12-17 2275
1034 대림절 하나님의 날: 새 하늘과 새 땅 (벧후 3:8-13) [2] 2023-12-10 2248
1033 대림절 깨어있음이란? (막 13:24-37) [2] 2023-12-04 2550
1032 창조절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다! (엡 1:15-23) [2] 2023-11-26 1138
1031 창조절 은혜를 갈망하는 시인 (시 123:1-4) [2] 2023-11-19 1191
1030 창조절 외면당한 사람들 (마 25:1-13) [5] 2023-11-12 1291
1029 창조절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의 역설 (마 23:1-12) 2023-11-07 1040
102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마 22:41-46) [7] 2023-10-29 1334
1027 창조절 재림신앙 (살전 1:1-10) [4] 2023-10-22 1285
1026 창조절 금송아지 이야기 (출 32:1-14) 2023-10-15 1174
1025 창조절 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 (마 21:33-46) 2023-10-09 1118
1024 창조절 과정으로서의 구원 (빌 2:1-13) 2023-10-01 1161
1023 창조절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마 20:1-16) [2] 2023-09-24 1290
1022 창조절 홍해 이야기 (출 14:21-31) 2023-09-17 1284
1021 창조절 도반 공동체 (마 18:15-20) [4] 2023-09-10 1230
1020 창조절 '악' 앞에서 (롬 12:14-21) [4] 2023-09-04 1406
1019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2023-08-27 1164
1018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6] 2023-08-20 1526
101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2023-08-08 1720
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1649
1015 성령강림절 여기 계신 하나님 (창 28:10-19a) [4] 2023-07-23 1775
1014 성령강림절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1-11) 2023-07-16 1317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1603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2023-07-03 1284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4] 2023-06-25 1775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2023-06-18 1431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1589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1545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1464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1766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1591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1864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1357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1779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2211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2401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1919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1868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1871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2895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285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224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713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610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457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461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508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585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550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279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220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3219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435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4039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467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993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618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566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254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660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136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72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791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580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275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484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411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914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596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468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729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612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639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228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59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468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711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431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517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797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4015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591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937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