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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기쁨 (눅 15:1-10)

창조절 조회 수 16467 추천 수 0 2016.09.11 23:00:18
설교듣기 : https://youtu.be/oknBMjHePEM 
설교보기 : https://youtu.be/wnFLt_D4vBI 
성경본문 : 누가복음 15:1-10 

하나님의 기쁨

15:1-10, 창조절 둘째 주일, 2016911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8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옛날부터 스승들은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비유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1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첫 번째 비유는 한 마리 양을 잃은 양치기’(3-7) 이야기이고, 두 번째는 드라크마 한 개를 잃은 여자’(8-10) 이야기이고, 세 번째는 둘째 아들을 잃은 아버지’(11-32) 이야기입니다. 세 비유는 주제가 똑같습니다. 잃었다가 다시 찾았을 때의 기쁨이 큰 것처럼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기쁨이 된다는 것이 이 비유들의 중심 주제입니다.


이 주제는 예수님이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 배경에서 이미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15:1절에 따르면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예수님 주변에 모였습니다. 세리는 매국노 비슷한 평가를 받던 사람들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을 위해서 동족에게서 세금을 거두는 직업이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들을만합니다. 죄인이라는 말은 훨씬 포괄적인 의미입니다. 당시에 심각한 질병에 걸리거나 장애를 지닌 사람들도 다 죄인들입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지 못한 사람들도 죄인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이런 죄인의 범주에 속합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총칭한다고 보면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였다는 건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신선하게 들렸다는 의미이겠지요.


이들과 대립되는 사람들도 이 장면에서 등장합니다. 2절 말씀은 아래와 같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바리새인들은 당시 율법을 실제 삶에서 구현해내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성실한 사람들입니다. 서기관들은 율법학자들입니다. 요즘으로 하면 신학대학교 교수, 검사나 변호사처럼 신학이나 법을 전공한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모두 율법의 전문가들로서 이들에게 의해서 유대교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개인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이기는 했지만 율법주의에 갇혀 있었다는 게 불행이라면 불행입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으로 존경받을만한 기독교인이지만 폐쇄적인 신앙의 틀에 갇히면 결국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율법을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했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 죄인들과 어울리고 함께 밥을 먹는 예수의 행동은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을 꿰뚫어보신 예수님은 눅 15:3절 이하에서 세 가지 비유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우리는 교회력의 성서일과에 따라서 앞의 두 가지 비유에 해당되는 본문만 읽었습니다.

 

한 마리 양을 잃은 양치기

첫 번째 비유는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다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이 사람은 어쩌다가 한 마리를 잃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사람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한 마리를 찾아나서야 할지, 아니면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를 돌보는 데 더 힘을 쏟아야 할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이 사람은 한 마리를 찾는 일을 선택했습니다. 이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를 들판에 놓아두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이런 상황을 보았다면 양치기를 어리석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자칫 한 마리를 찾다가 나머지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백 마리 중에서 한 마리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입니다. 본문의 양치기는 그런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가 그의 영혼 전체를 차지했습니다. 그 한 마리 양을 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을 각오로 길을 떠나서 결국 찾아 즐거워하면서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비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양치기는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재미있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이 이야기를 좀더 진행시킬 수 있습니다. 양치기가 손님들을 초대했으니 먹을 거를 장만해야 합니다. 귀한 손님이 올 때는 양을 잡습니다. 양을 잡았다면 이 사람의 양은 다시 아흔아홉 마리가 됩니다. 고생하면서 잃었던 한 마리 양을 찾은 효과가 없습니다. 이 양치기는 아주 특별한 사람입니다. 한 마리 양이 아까워서 양을 찾으러 나갔다기보다는 잃었던 양을 찾은 기쁨이 뭔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을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 하리라.

 

지금 비유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면서 어울린다고 비판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이 비유의 결론은 바로 이들을 향한 것입니다. 당신들 아흔아홉보다는 당신들이 죄인이라고 여기는 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역시 불편하게 들립니다. 우리는 죄인 한 사람에게 속하는 게 아니라 의인 아흔아홉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영적인 가르침이니까 실제로는 의인 아흔아홉에 속하지만 영적으로 죄인 한 사람으로 살면 되는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게 최선이기는 하지만, 죄인으로 산다는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죄인으로 산다는 것은 인정받을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인정해야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그런 삶을 두려워합니다. 가능한 많은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이런 데서 기독교인의 내면이 분열됩니다. 한편으로는 죄인으로 살기 싫어하는 욕망이 작동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죄인으로서의 영적 실존을 감당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힙니다. 이게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이런 딜레마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이런 문제의식을 안고 두 번째 비유를 보겠습니다.

 

드라크마 한 개를 잃은 여자

15:8-10절에는 잃은 드라크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양을 잃었다가 찾은 사람은 남자 양치기인데 반해서 여기에 나오는 사람은 어떤 여자입니다. 이 여자는 열 개 드라크마를 갖고 있었습니다. 드라크마는 헬라의 화폐 이름인데, 로마 화폐인 데나리온과 비슷한 가치가 있습니다.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열 드라크마라고 해도 그렇게 큰돈은 아닙니다. 당시 결혼하기 전의 여자들은 열 개의 드라크마를 실로 꿰어 목걸이처럼 만들어 지참했다고 합니다. 그중의 하나를 잃는다는 건 전체를 잃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이 여자가 드라크마 한 개를 기어이 찾으려고 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당시 집 구조는 창문이 아주 작아서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등불을 켜고 집안 구석구석을 다 살폈습니다. 드디어 그걸 찾아 손에 넣은 이 여자는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서 즐거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신분이 높은 여자였다면 드라크마 한 개를 찾기 위해서 이렇게 부산을 떨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디서 잃었는지도 확실하게 아는 게 아니니까 조금 찾다가 그만 둘 수도 있습니다. 이 여자는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찾은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에 나온 사람도 그랬고, 소위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도 그랬습니다. 다시 찾은 기쁨을 삶의 축제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경제논리가 개입될 여지가 없습니다. 사람들끼리의 예민한 파벌의식과 경쟁심리도 개입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것과 비교될 수 없는 기쁨만이 모든 것이었습니다. 이런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순간이 우리의 삶에서 얼마나 될까요. 예수님은 잃은 드라크마의 결론을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기쁨이 되느니라.

 

첫 번째 비유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죄인 한 사람의 회개가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세 번째 비유인 탕자 이야기에서도 둘째 아들의 회개가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죄인의 회개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이런 말씀을 상투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자기의 부도덕한 언행을 뉘우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더 과격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을 모두 죄인으로 여기면서 그들이 교회로 돌아오는 것을 회개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시 앞에서 말씀드린 딜레마에 빠집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를 믿어 의롭다고 인정받아 구원의 확신을 가슴에 안고 사는데, 하나님은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신다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이 잡히지 않습니다. 죄인은 되기 싫지만 죄인이 안 되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될 수도 없으니까요.


예수님이 이 비유를 누구에게 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는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을 삐딱하게 보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전자에 속한 사람들은 죄인이고, 후자에 속한 사람들을 의인입니다. 죄인은 부도덕하면서 비양심적이라면, 의인은 도덕적이고 양심적입니다. 이런 잣대로 예수님 주변에 모였던 사람들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판단은 피상적인 겁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준은 더 근본적입니다. 죄인은 자신이 인정받을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고, 의인은 반대로 인정받을만한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한 비유에서도(18:9-14) 이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자랑거리를 늘어놓은 방식으로 기도한 반면에 세리는 반대로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의 기도를 하나님이 받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의 소극적인 의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지만, 적극적인 의미는 자신의 무능력에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하겠다는 삶의 결단입니다. 삶의 중심을 자신에게서 하나님으로 완전히 옮기는 것이 바로 회개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라고 해서 잘난 척할 것도 없고, 죄인과 세리라고 해서 주눅들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말처럼 간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각자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숨어 계신 하나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비유 안으로 한걸음 더 들어가려고 합니다. 잃은 양을 찾았다는 사실과 잃은 드라크마를 다시 찾았다는 사실이 기쁨의 존재론적 토대였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야 합니다. 그건 쉽게 찾아지는 게 아닙니다. 양치기는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 양을 들에 남겨두는 모험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자는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면서 부지런히 찾았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그런 방식으로 찾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그런 숨어 있는 것을 찾아보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백 마리 중에서 한 마리가 없어졌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합니다.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려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걸 찾아야겠다는 거룩한 갈망도 없고, 그걸 찾는 기쁨을 맛보지도 못합니다.


시인들은 삶의 숨어 있는 구석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예술가들도 그런 눈이 있습니다. 영화감독들도 그렇습니다. 요네바야시 히로마사의 에니메이션 <마루 밑 아리에티>라는 영화를 보셨는지요. 10센티 크기의 소녀 아리에티 가족은 어느 집 별장의 마루 밑 지하에서 삽니다. 아리에티가 주인집 부엌에 각설탕 하나를 가지러 갔다가 요양 차 와 있는 주인집 아들을 만나는 사건으로부터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우리 삶의 마루 밑을 경험하셨는지요. 13:44절에 나오는 밭에 묻힌 보화를 발견한 사람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그 사람은 자기의 전 재산을 팔아서 그 밭을 샀습니다. 땅속에 묻힌 보화는 볼 수 있는 사람의 눈에만 보입니다. 정말 소중한 것들은 다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입니다.


이것을 좀더 실질적인 것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설거지를 예로 들겠습니다. 우리는 설거지를 빨리 해치우고 다른 일을 합니다. 돈을 벌거나 취미활동을 합니다. 설거지는 귀찮은 일이 되고 맙니다. 설거지에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놓친 부분들입니다. 손으로 그릇을 만진다는 사실, 그리고 손에 닿는 물의 느낌을 안다는 사실은 드러나는 게 아닙니다. 그 숨어 있는 것들이 정말 소중한 것들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설거지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우리 집 마당을 손질합니다. 호미질을 하기도 하고, 전지가위로 나무를 다듬습니다. 흙과도 친하게 지냅니다. 거미도 만나고 지렁이도 만납니다. 잔디와 토끼풀이 서로 경쟁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숨어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볼 때마다 생명의 신비와 비밀에 놀라곤 합니다. 설교 행위는 성서텍스트의 숨은 세계를 찾아내는 작업입니다. 그것을 찾을 때마다 저는 설교자로서 기쁨을 맛봅니다. 피상적으로 지나가면 맛볼 수 없는 기쁨들입니다.


우리 삶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존재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을 만날 때 궁극적인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게 분명한 사실이라면 오늘 성경 본문이 말하는 한 마리의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입니다. 이런 설명을 의아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잃은 한 마리 양을 찾는 양치기가 바로 하나님이고, 잃은 드라크마 동전 하나를 찾는 여자가 바로 하나님인데, 그걸 거꾸로 말하면 곤란하다고 말입니다.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는 분이면서 우리가 찾아야 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찾아오시기도 하면서 동시에 찾아지기를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계시의 하나님이면서 은폐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의 삶은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재산은 늘어날 수도 있고, 생활형편은 좋아질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일상의 반복을 그냥 감수하면서 살아갑니다. 오늘 성경본문이 말하고 있는 천국의 기쁨을 맛보지 못한다면 삶의 방향을 근본에서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교양인이 되거나 바리새인처럼 종교전문가가 된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찾고 만나야만 합니다. 그 하나님은 잃은 양처럼, 잃은 드라크마처럼 여러분의 인생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겁니다. 그 잃은 양을 찾아서 길을 떠나십시오. 잃은 드라크마를 찾으러 등불을 밝히십시오. 찾으면 하나님의 기쁨을, 즉 천상의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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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6]맑은그늘

September 12, 2016
*.212.139.114

설교영상링크입니다.

편집(설교) : https://youtu.be/wnFLt_D4vBI

무편집(전체) : 준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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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석진혁

September 12, 2016
*.104.132.13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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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serenity

September 12, 2016
*.102.120.87

회개의 적극적인 의미,

자신의 무능력에 좌절하지 않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의존하면서 살겠다는 삶의 결단이라..

평소 때는 평범하게 들렸는데........ 오늘 아침에는 그게 아닙니다.  

 눈물이 봇물처럼 가슴을 타고 내렸습니다.


무능력에 좌절하고 비참해서 자신이  보잘 것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능력있는 인간이 되려고 동분서주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갈급하고 허탈하고 기진맥진 ....


제가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들, 무관심했던 것들, 소외시켰던 것들은 무엇일까? 

그 가운데 하나님의 기쁨이 함께 하신다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잃어버린 한 마리 양은 바 로' 나' 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되어서 질책하고, 징계하고 , 비난했습니다.

인정받지 못하고 , 보호받지 못한 내가 불쌍하고 가엾어서 흑! 흑! 울었습니다.

그런 나를, 주님께서  품에 안으시고

 '내 딸아, 너는 나의 기쁨이노라'  위로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괜찮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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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2, 2016
*.164.153.48

영적 감수성이 예민하신 분이시군요.

둔감한 시대에 귀한 덕목을 지니셨네요.

예수님도 세리와 죄인을 닦달하지 않으시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공연한 염려와 자격지심으로 불안하게 사는 거 같습니다.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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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소명

September 12, 2016
*.143.125.39

세상속의 욕망은 끊임없는 갈증으로 자신을 서서히 파괴해감을...

하나님에 대한 갈망은 세상의 욕망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매순간 기억하며, 그길을 걸어가면서 주시는 기쁨과 평안속에 사는것~

오늘도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행복을 누려야겠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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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2, 2016
*.164.153.48

소명 님의 거룩한 갈망이

주님 안에서 충족되기를 바랍니다.

삶을 자기 목표의 실현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아가가는 순례의 길이 되어야겠지요.

저도 남은 인생을 그런 자세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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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주안

September 12, 2016
*.69.199.48

절로 찬송이 나오고 어깨 춤이 추어집니다


오! 이 기쁨! 주님 주신 것 ~ ~ 주께 영광 할렐루야 주만 찬양해!

앞뒤 동산에 꽃은 피었고 내 맘 속엔 웃음 꽃 피었네 ~

높은 하늘엔 종달새 우짖고 내 맘 속엔 기쁜 노래 있네 ~

오 친구여 즐겁게 노래해 ~ ~

손벽치면서 즐겁게 찬양해 ~

오 이 기쁨 주님 주신 것 주께 영광 할렐루야 주만 찬양해!


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숨어 계신 주님을 만나 기쁨을 누리게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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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2, 2016
*.164.153.48

예, 저도 주안 님과 더불어

기쁨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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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kakim

September 13, 2016
*.119.15.13

목사님 설교를 들으며 저도 모르게 계속 미소가 지어진다면

이건 무슨 기쁨인지요... 저는 사실 찾고싶지도 않을때가 더 많은데말이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숨바꼭질을 

세상에서 하도록 두신 하나님이

재밌고 신기합니다. 장난꾸러기 같으세요.


어릴때 숨바꼭질 밥먹듯이 했었는데

"못찾겠다 꾀꼬리 디스코추고 나와라~"

외치던 때의 즐거움과 짜릿함은

술래든 숨은아이든 모두에게 클라이맥스였던 것 같습니다.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주님이 디스코추고 나오실 날이요ㅎㅎ 


맨날 숨어서 말씀듣다가

가입하고 댓글은 처음인 것 같아요.

명절 앞두고 좋은말씀 선물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목사님도 기쁜 한가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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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3, 2016
*.164.153.48

k.a.김 님,

처음 댓글 단 거 축하드립니다.

모든 비밀이 환히 드러날 그 순간이

정말 기다려지지요?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일이

그 순간에 벌어질 겁니다.

그 순간이 올 때 놓치지 않도록

지금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겠지요.

그런데 혹시 그 순간이 이미 온 건 아닐까요?

추석 연휴에 저도 숨바꼭질하던 어린 시절을

다시 추억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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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뚜벅이

September 14, 2016
*.182.94.194

이번 주일 설교는 저에게 기쁨이 아니고 심각함으로 다가 왔슴다...

교양인을 추구하고, 종교전문가로 전락해 가는듯해서...

하나님을 느끼는 예민함이 현실에서 경험되는 감각에 눌려서 점점 종교인이 되어 가는것 같습니다.

아흔아홉을 들에 두고 한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은 위험한 선택입니다...

매 순간 선택의 귀로에 섯을 때 저는 아마 안전한 것을 선택할 것같습니다...

순간순간 경험되어지는 하나님을 놓치는 삶이라면 도반의 길을 가는 나그네라 할 수 없겠지요...

그래서 이 설교는 저에게 황색 신호등으로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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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4, 2016
*.164.153.48

빨간 신호등이 아니라서 다행이지요? ㅎㅎ

포기할 거와 붙들어야 할 것을 구분할 줄 아는 게

구도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안목인데,

그게 우리에게 턱없이 부족합니다.

뚜벅이 님은 이런 게 무엇을 가리키는지 느낌이 오잖아요.

그런 느낌이 전혀 없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저도 늘 도사처럼 말하지만

일상에서는 늘 시행착오의 반복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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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선비다움

September 15, 2016
*.2.249.86

목사님, 설교 말씀 잘 읽었습니다. 잃어버린 양과 잃은 드라크마를 통해 찾는자의 절대적 사랑을 느낍니다. 수량으로 계산되고 처리되는 우리의 삶이나 다른 피조물에 대한 찾는자의 한 없는 사랑을 포착하게  됩니다. 1:99가 아니라 1은 곧 100이라는 존재의 가치를 느끼게 하기에 잃어버린 것을 찾아낸  기쁨이 삶의 존재론적인 토대라는 사실은 큰 울림이 됩니다.

반대로 우리 삶의 근저이면서도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하나님, 그 분은 숨겨져 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잃은 양이나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자와 은폐된 하나님을 1:1로 바로 대응시키는 것은 무리 아닌가요? 텍스트에서 명시하듯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한 기쁨을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죄인이 바로 하나님은 아니잖아요? 물론 목사님께서 죄인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자로 총칭한다면, 역으로 하나님 입장에서 인간들에게 인정받을리는 만무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렇다고해도 하나님과 죄인을 잃어버린 자의 범주로 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본문에서 규정하고자 하는 찾는자와 찾을 대상물을 동일한 하나님으로 보면 논리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나요?

궁금해서 여쭈어 보게됩니다. 제가 잘못 이해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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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5, 2016
*.164.153.48

좋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 대목이 명쾌하게 전달되지 못했다면

저의 설명에 논리의 비약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일단 예수가 죄인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했으니 하나님을 죄인이라고 봐도 되겠지요.

질문의 요지는 찾는 자와 찾음을 당해야 할 자가 어떻게 동일할 수 있냐는 거지요?

거기에 바로 하나님 존재의 신비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가 온전한 인간이며 온전한 신이라는 신앙고백처럼

하나님은 잃은 드라크마와 같은 우리를 찾아오는 분이면서

우리가 끝까지 찾아야할 잃은 드라크마와 같은 분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분은 '계시의 하나님'이며 '은폐의 하나님'이시거든요.

주님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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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홍새로

September 16, 2016
*.224.15.62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을 죄인이라고 규정하는 통념과는 다르게, 유대사회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성실한 사람들이라 할수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죄인일수 밖에 없으며, 결국 우리들 모두는 죄인일수 밖에 없겠지요.
하나님은 그 죄인 하나를 잃어버렸다 되찾은 한마리양처럼 기뻐 하신다는 말씀이 가슴 뛰는 기쁨이 되는때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그때입니다.
죄인이란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라고 한다면, 그런 지경에 놓인 자신을 깨닫는 순간이 하나님께 찾아지는순간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요?

평범한 일상 가운데서 특별함과 신비함을 찾으려는 태도에서 드라크마 하나를 찾게되는 기쁨을 누릴수 있음을 믿기에 등불밝히는데 주의를 해야겠습니다.
목사님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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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6, 2016
*.164.153.48

'등불을 든 여자',

또는 '여자의 손에 들린 등불'이라는 표현이 멋지지요?

영혼의 등불이라고 해야겠군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창조 행위라고 한다면

거기에 하나님의 함께 하시겠지요.

그걸 찾아 볼 수 있으려면 등불이 필요하다는 건데,

이런 말이 손에 잡히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어요.

에스더 님의 영혼에 등불이 환히 빛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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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알아야

September 25, 2016
*.187.14.236

직장에 일이 너무 많아 2~3주 다비아에 잘 못들어 오다가 오늘 이 설교를 들었어요. 설교를 듣다가 3번 머릿 속이 꿈틀거리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3번이나 ‘wow’ 탄성이 나왔어요. 새로운 설교 내용,해석(?) 관점 때문이었어요.


첫째는 당시 유대교인들은 사회적 약자(아픈사람, 장애인, 가난한 사람) '죄인'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선은 한국 사회에도 똑같이 있는 것 같아요. 사회적 약자를 '무능한' 사람으로 보는 한국 사회나 '죄인'으로 보는 유대교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 전 일본에서 젊은 요양 보호사가 장애인을 죽인 사건도 어쩌면 같은 맥락에서 벌어진 극단적인 범죄인것 같고요완벽하거나 온전하지 않으면가치 없게 여기는 인간 사회의 냉혹한 현실에 씁쓸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냉혹하고 위험한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는 걸까요?


둘째는 일어버린 드라크마가 곧 하나님이라는 발상입니다.처음에는 의아하다가, 다시 본문을 읽어보니, ‘그러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99마리를 버릴 수 있는 선택, 경제적 논리와 비교 될 수 없는 기쁨, 그건 오직 하나님 뿐이겠네요. 지난 6,7월 열심히 다비아의 글을 읽고, 혼자 공부하던 시간이 떠놀랐어요. 말씀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다양하게, 깊이 생각해 보는 기쁨…… 그런 기쁨이라면, 저도 양 10마리까지는 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마, 더 깊이있게 하나님을 경험하고 기쁨을 맛보면, 언제가는 99마리 아니 그  이상도 두고 갈 수 있겠지요.


세째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개념입니다. 항상 계시의 하나님만을 생각하다보니, ‘은폐의 하나님에 대해 잘 생각하지 못했던 것같습니다. 기존 교회의 설교는 대부분 계시의 하나님에 대한 내용이 많아, 신앙 생활이 소극적이었는데, ‘은폐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에서는 적극적으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동력이 생겨 힘이 나네요. 그리고 '설거지' 비유는 어찌나 공감이 되는지...... 맞벌이 생활을 저는 설겆이가 참 싫었습니다. 반찬거리 사고, 다듬고, 요리하고 그리고 설겆이까지 제대로 된 식사를 하려고 2~3시간을 보내서요. 남편한테 설겆이 타령을 하면, 남편은 설겆이하는데 1시간이상 걸려제 맘이 답답해서 그냥 제가 하곤했죠. 결혼한지 어언 3…… 3년 간 설겆이를 하다보니, 설겆이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어요. 목사님 말씀처럼 물을 만지는 느낌, 깨끗이 닦인 그릇을  볼때의 기분이 제 마음을 가볍고, 기분 좋게 해 주고 있거든요. 하지만, 아직도 설겆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설겆이의 기쁨은 곧 사라지네요. “설겆이도 내 삶의 기쁨이다. 다른 일과 차이가 없다.” 라는 생각의 전환이 은폐된 기쁨을 찾는 열쇠(key) 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현대 사회, 특히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생활은 참 편리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활의 편리함이 은폐 된 것을 찾는 기쁨을 빼앗아 가는 것 같기도 해요.


오늘 오래간만에 너무 길게 섰네요. ㅋ 긴 글 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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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25, 2016
*.204.153.92

방근 이 근처에 있는 독일교회 예배에 다녀왔습니다.

오늘이 이들에게는 추수감사절이라 그런지

축제 분위기 비슷하게 예배를 드리더군요.

설교는 딱 12분이고 다른 세리모니가 있어서

전체로는 1시간 약간 못미치는 시간동안 예배가 진행되었어요.

알아야 님의 대글을 통해서 설교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좀더 정확하게 눈치 챌 수 있었습니다.

두바이에서의 생활은 상상이 가지 않지만

사람 사는 게 크게 다를 게 없겠지요.

씩씩하게 잘 지내시고

언젠가 한번 만날 기회가 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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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알아야

September 25, 2016
*.187.14.236

저를 다른 분하고 착각하신 것 같아요. 목사님~  전 서울에 살고 있고, 11월 초에 출산을 앞둔 임산부랍니다.

7월 8월 목사님 설교로 열심히 태교하다가, 다시 출근하며 바쁘게 지내다보니, 설교를 그간 못 읽었어요. 그러다 오늘

긴 장문을 썼네요. 지금은 7,8월로 돌아가고 싶어요. 말씀 읽고, 공부하고, 먹고, 쉬고......

아기가 나오면, 이런 생활은 더 어려워지겠죠? 바쁜 육아와 직장 생활에도 아기와 함께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가고 싶어요. ㅋ 지금 우리 아가가 뱃속에서 저보다 더 깊이 하나님을 체험하고 있겠죠? 부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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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26, 2016
*.204.137.242

아차, 착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기와 함께 알아가고 싶어하는 '알아야' 님을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특별히 이뻐해주실 겁니다.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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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참앎삶

October 14, 2016
*.125.90.106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죄인을 찾으시는 하나님은 결국 죄인 속에 은폐하시고, 동시에 죄인을 통해 계시하시는 분이라는 모순된 논리의 근거를 미약하나마 이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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