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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창조를 기다리며... (사 65:17-25)

창조절 조회 수 6327 추천 수 0 2016.11.14 20:45:37
설교듣기 : https://youtu.be/kGYORiv5c18 
설교보기 : https://youtu.be/KZasctim4ko 
성경본문 : 이사야 65:17-25 

새로운 창조를 기다리며...

65:17-25, 창조절 열한번째 주일, 20161113

 

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18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19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20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어린이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 하겠고 백 세가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자이리라 21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22 그들이 건축한 데에 타인이 살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심은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내가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이며 23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 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25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우리는 오늘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인 기원전 6세기 초 예루살렘에 거주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어떤 사람의 글을 설교 본문으로 읽었습니다. 이런 사람의 글을 읽을 때마다 저는 가슴이 뜁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시간적인 차이입니다. 25백 년 전의 사람과 제가 문자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앞으로 25백년 후의 어떤 사람이 저의 설교를 혹시 접하는 기회가 있다면, 그도 놀라워할 겁니다. 다른 하나는 25백 년 전 사람의 글이 지금 내가 믿고 있는 바로 그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와 오늘의 제가 똑같은 하나님을 믿고 선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

바벨론 포로의 집단적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유대백성들을 향해서 이사야 선지자가 어떤 설교를 하는지 여러분을 그 세계로 안내할 테니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오늘 본문의 첫 구절은 아래와 같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65:17).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비롯해서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하늘 아래에, 그리고 땅에 붙어서 삽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전제 조건입니다. 고대인들은 우주를 삼층 구조로 생각했습니다.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땅 아래의 세계가 있다는 겁니다. 직관적으로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 현대 물리학을 약간 배운 사람이라고 한다면 아무도 고대인들처럼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주는 아득히 크고 먼 공간입니다. 지구는 둥급니다. 지구 표면은 바다와 대륙이지만 더 중심으로 가면 맨틀 지역에 용암이 흐르고 있습니다. 고대인들이 오늘 현대 물리학을 몰랐지만 하늘과 땅이 사람을 비롯해서 모든 생명체의 절대적인 토대로 생각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사야는 그 하늘과 땅을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한다고 외쳤습니다. 새롭게!


당시 유대의 모든 사람들의 뇌리에는 바벨론 포로 시절이 깊이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던 자신들이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기원전 587년에 완전히 망하고 식민 통치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유대라는 나라가 근동 지도에서 사라진 겁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정도의 저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 겁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절망합니다. 자신들이 믿던 신()을 의심하고 포기합니다. 하나님은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또한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렸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럴 때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한 인물들이 선지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유대 백성을 버린 것도 아니고 무능력한 존재도 아니라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그걸 무조건 전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의 근거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선지자들은 그 근거를 창조 이야기에서 찾았습니다. ‘빛이여, 존재하라!’는 창조 이야기가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능력으로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을 무()로부터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신앙 전통이 지금 이사야에게까지 내려왔습니다.


요즘 세상살이가 힘들다고 많이 말합니다. 장사도 잘 안 된다고 합니다. 특히 최순실이라는 이름으로 회자되는 시국 문제로 인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큰 어려움을 당한 분들도 있을 겁니다. 아무리 살아보려고 애를 써도 인생이 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입니다. 이럴 때는 하나님이 없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의 심정과 똑같습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하는 겁니다. 이런 창조 신앙이 구약과 신약의 중심입니다. 사도신경도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서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는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재앙을 만나 주위에서 조롱받고 스스로 낙심 가운데 떨어졌던 인물이 있습니다. 욥입니다. 욥이 그 삶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근거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창조의 신비를 알게 되니 자기의 저주스런 운명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한 희망과 믿음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창조 신앙을 삶에서 실질적으로 깨닫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기껏해야 야외에 나가서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이라는 노래를 부를 정도입니다. 이런 것은 일종의 자연친화적 영성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창조 신앙은 그런 것과 차원을 달리합니다. 더 본질적이고, 더 시원적입니다. 거기까지 우리가 이르러야 성서가 말하는 신앙의 중심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65:17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할 세계에서는 그 이전의 세계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전혀 새로운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처음 창조는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이런 세계입니다. 이런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그 이전 세계를 기억하거나 생각할 수 없습니다. 창조 이전의 무()를 모릅니다.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할 세계에서도 지금 우리 삶은 기억나지 않을 겁니다. 물리학 용어로 바꾸면 창조 신앙에도 불가역의 원리가 작동되는 겁니다. 일상적인 것으로 비유하면, 인간의 출생을 보면 됩니다. 우리는 어머니 태 안에서 열달 가까이 지내다가 밖으로 나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태아로 살던 순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자궁의 세계로부터 나온 건 분명하지만 다시 거슬러서 자궁 안의 태아가 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세계는 지금의 삶이 연장되는 게 아니라 질적으로 새로워진다는 뜻입니다. 이런 삶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부활입니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

이사야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유대인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현실적인 말로 설명합니다. 모두가 꿈에 그리는 그런 세상입니다. 19절 이하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1)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2) 유아 사망이 없고 천수를 누리지 못하는 노인이 없다. (백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고 할 정도다.) 3) 누구든지 자기가 지은 집과 자신의 농산물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4) 모든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열거된 항목들은 지금도 여전한 행복의 조건들입니다. 이런 행복한 세상을 인류는 지금껏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고, 이 세상의 미래에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을 말하는 이사야는 극단적인 이상주의자일까요? 그의 말은 망상에 불과할까요? 지금 이사야의 영혼 안에서 무슨 생각이 움직이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여기에 열거된 항목들이 가리키고 있는 세상은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이사야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선지자들은 정의와 평화를 외쳤습니다. 정의와 평화는 고고한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관계에서 발생합니다. 자기 혼자 있을 때는 정와 평화 개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한쪽은 힘이 세고 다른 쪽은 힘이 약할 때 정의와 평화가 깨집니다. 이사야 시대는 바벨론이나 페르시아 등의 제국들에 의해서 작은 나라들의 운명이 결정되었습니다. 제국 앞에서 작은 나라의 정의와 평화는 유지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기가 죽어서 제국의 말을 고분고분 듣습니다. 그래야만 최소한이나마 자신들의 생존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자칫 정의와 평화를 외치다가는 한 순간에 파멸되는 수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지금도 똑같습니다. 작은 나라들은 큰 나라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압박을 받습니다. 미국과 북한의 관계를 보십시오. 미국은 온갖 방법으로 북한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국제 무역에도 참여하지 못합니다. 미국의 압박에 맞서 북한은 핵무기라는 벼랑 끝 전술로 버티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북한을 옹호하려는 게 아닙니다. 옹호할 사람은 대한민국에 하나도 없습니다. 국제 역학관계를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고대 유대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정의와 평화를 요구하는 쪽은 작은 나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대기업과 하청기업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청기업은 억울해도 대기업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법대로 하자거나 우리도 좀 먹고 살자.’ 하고 말하다가는 알게 모르게 불이익을 받습니다.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서 가능하면 정의와 평화를 내세우지 않고 대세를 따르게 됩니다. 일종의 패배주의입니다.


이사야를 비롯해서 선지자들은 이런 패배주의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정의와 평화를 줄기차게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그걸 이루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선포할 수 있었던 데에는 현재의 세상이 완전하지 않으며, 결국 질적으로 새로워져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질적으로 새로워진다는 게 바로 새로운 창조입니다. 그런 신앙에서만 우리는 세상과 적당하게 타협하거나 냉소하거나 비관하지 않고, 치열하게 투쟁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읽고 설교하고 있는 저 자신은 과연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무슨 일을 했나, 하는 점을 반성하곤 합니다. 세상을 질적으로 새롭게 하는데 무슨 기여를 했느냐는 반문입니다. 아주 소극적으로 참여했을 뿐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여기서 내놓기도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언젠가 때(카이로스)가 오면 좀더 드러내놓고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또한 거기에 근거한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내 삶을 던지고 싶습니다. 그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위해서라도 좀더 오래 살아야겠습니다.

 

묵시적 상상력

이사야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이야기를 묵시적 방식으로 더 밀고 나갑니다. 힘이 있습니다. 마지막 25절을 보십시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은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이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참으로 놀라운 상상력입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는 세상을 이사야는 꿈꿉니다. 이 내용이 사 11:6절 이하에는 좀더 자세하게 나옵니다. 6절 한 절만 인용하겠습니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절대 평화가 보장된 세상입니다.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이들이 적대감 없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믿어지지가 않지요? 지금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삽니다. 양들끼리 싸우는 세상입니다. 온갖 곳에서 적대감과 싸움이 일상처럼 자리합니다. 대학사회도 그렇고, 심지어 교회도 그렇습니다. 이사야는 질적으로 다른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는 세상을 꿈꿉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1963년 흑인 평화 대행진의 한 연설에서 나에게 꿈이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언젠가 나의 어린 네 명의 아이들도 피부색이 아니라 그들의 인격으로 판단되는 나라에 살게 될 것이라는 꿈입니다.’ 이사야의 꿈과 똑같은 꿈입니다. 이런 꿈을 꾸는 사람들에 의해서 역사는 앞으로 나갑니다.


이런 사람들과 이런 사람들의 외침이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오히려 부담이 됩니다. 지금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들고, 가족이나 지인들과 관계를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없는 마당에 어떻게 저런 묵시적 환상을 꿈꾸며 사느냐는 부담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모두 이사야나 루터 킹 목사처럼 위대한 영성가요,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일상의 이 현실을 모두 팽개칠 수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영적인 영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웅보다 더 큰 집단이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그 어떤 영웅도 교회의 역사를 뛰어넘지 못합니다. 영웅이나 소시민이나 모두 교회 안에서 하나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질 때, 즉 교회가 이사야와 같은 묵시적 상상력을 안고 나갈 때 거기에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은 다 이 묵시적 상상력을 가슴에 안고 사는 겁니다.


교회를 재림 공동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재림은 바로 질적으로 새로운 창조입니다. 초기 교회의 묵시적 상상력을 신앙의 토대로 삼았던 요한은 이사야가 선포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21:1). 그리고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4). 이런 묵시적 상상력에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팔복 말씀도 현실이 됩니다. 이런 상상력이 없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맙니다.


저는 종말론적 재림 공동체에 속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신앙의 태도가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이미 이사야가 본 것이고 요한계시록이 말한 것입니다. 첫째는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입니다. 혼자 투쟁하기는 힘듭니다. 투쟁할 수도 없습니다. 혼자서는 투쟁의 방향도 찾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함께 그런 투쟁에 나선 사람들의 거룩한 연대입니다. 둘째는 정의와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감나무 밑에 감이 떨어지기를 막무가내로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것을 삶의 중심 주제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영혼이 순전하고 건강해야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세속화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혼자서 기다리는 힘듭니다. 옆에서 함께 이런 기다림에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종말론적이고 묵시적인 공동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25백 년 전에 살았던 한 선지자가 선포한 새로운 창조’에 대한 외침을 들었습니다. 거기에 마음이 움직입니까? 마음의 움직임이 없습니까? 후자라고 한다면 제가 설교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겁니다. 제 설교는 잊으시고 이사야의 예언 자체에 다시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그 말씀이 여러분이 영혼을 흔들어 깨울 것입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6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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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주안

November 14, 2016
*.69.199.48

우리 함께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가야한다고 봅니다.

민주주의를 위하여 125만 국민이 촛불을 든것 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연대하여 정의와 평화를 가꾸어갈 수 있겠지요.


저 웅장한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가 울립니다.

`저 하늘이 주 영광 나타내고~~~!!


베토벤의 '하나님의 영광'도요.

'저 하늘은 주의 영광 드러내고~~~!!


주님의 창조에 우리도 동참해야겠지요.

우리에게 동참할 용기와 힘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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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15, 2016
*.164.153.48

새하늘과 새땅을 하나님이 창조하신다는 사실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의 부활도 이 새로운 창조 안의 사건이에요.

'이전 것은 생각나지 않게 될 것이다.'는 말씀을 개인에게 적용한다면,

지나간 일로 인해서 속상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하나님의 창조, 새창조, 창조의 완성을 기뻐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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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주안

November 16, 2016
*.69.199.48

새로운 창조가 이어지니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해야하는 거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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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6]맑은그늘

November 17, 2016
*.212.139.114

설교영상링크입니다.

편집 : https://youtu.be/KZasctim4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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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3 창조절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수 3:7-17) [2] 2020-11-01 6423
872 창조절 삶의 견고한 토대 (시 90:1-6, 13-17) [4] 2020-10-25 2604
871 창조절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출 33:12-23) [4] 2020-10-18 7578
870 창조절 청함과 택함 "사이" (마 22:1-14) 2020-10-11 2824
869 창조절 자기 의(義)와 하나님의 의 (빌 3:4-14) [2] 2020-10-04 4209
868 창조절 대제사장과 장로, 세리와 창녀 (마 21:23-32) [2] 2020-09-27 5562
867 창조절 복음, 은혜, 믿음, 고난 (빌 1:21-30) [2] 2020-09-20 2726
866 창조절 용서, 그 불가능한 명령 (마 18:21-35) [9] 2020-09-13 5526
865 창조절 "급히 먹으라!" (출 12:1-14) [2] 2020-09-06 2859
864 성령강림절 "사탄아!" (마 16:21-28) [2] 2020-08-30 2326
863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5] 2020-08-23 2349
862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하심 (롬 11:1-2a, 29-32) [4] 2020-08-16 2417
861 성령강림절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마 14:22-33) [2] 2020-08-09 3106
860 성령강림절 "브니엘"에서 (창 32:22-31) [5] 2020-08-02 2826
859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마 13:31-33, 44-52) [5] 2020-07-26 2551
858 성령강림절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롬 8:12-25) 2020-07-19 2170
857 성령강림절 에서와 야곱 이야기 (창 25:19-34) [4] 2020-07-12 6282
856 성령강림절 쉼 (마 11:16-19, 25-30) [2] 2020-07-06 5987
855 성령강림절 냉수 한 그릇의 궁극적 의미 (마 10:40-11:1) [2] 2020-06-28 3107
854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9) 2020-06-21 2495
853 성령강림절 못 하실 일이 없는 하나님 (창 18:1-15) [6] 2020-06-14 3332
852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고후 13:11-13) [4] 2020-06-07 2686
851 성령강림절 성령 공동체의 길 (고전 12:4-13) [2] 2020-05-31 2509
850 부활절 영광과 영생 (요 17:1-11) [4] 2020-05-24 2353
849 부활절 사랑과 계명 (요 14:15-21) 2020-05-17 2423
848 부활절 어두운 데서 기이한 빛으로! (벧전 2:2-10) [4] 2020-05-10 2688
847 부활절 성찬 예배 공동체 (행 2:42-47) [2] 2020-05-03 2104
846 부활절 눈이 밝아진 제자들 (눅 24:13-35) 2020-04-26 4099
845 부활절 예수의 손과 옆구리 (요 20:19-29) [2] 2020-04-19 5730
844 부활절 "위의 것을 찾으라!" (골 3:1-4) [2] 2020-04-12 3923
843 사순절 주의 손과 주의 얼굴 (시 31:9-16) [6] 2020-04-05 2949
842 사순절 여호와의 손과 영 (겔 37:1-14) [2] 2020-03-29 2594
841 사순절 예수는 심판 주다! (요 9:35-41) [2] 2020-03-22 5147
840 사순절 생존의 위기 앞에서 (출 17:1-7) 2020-03-15 3130
839 사순절 영생과 예수 (요 3:1-17) 2020-03-08 2686
838 사순절 의와 생명 (롬 5:12-19) [2] 2020-03-01 3239
837 주현절 영광스러운 미래의 생명 (마 17:1-9) 2020-02-23 2264
836 주현절 "생명을 선택하라!" (신 30:15-20) [8] 2020-02-16 3610
835 주현절 십자가에 못 박힌 이 (고전 2:1-12) [8] 2020-02-10 3314
834 주현절 가난한 사람과 하늘나라 (마 5:1-12) 2020-02-02 6682
833 주현절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2] 2020-01-26 3062
832 주현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7] 2020-01-19 2851
831 주현절 하나님의 정의 (사 42:1-9) [9] 2020-01-13 4065
830 성탄절 하나님을 본 사람 (요 1:10-18) 2020-01-05 2920
829 성탄절 환난에 동참하시는 하나님 (사 63:7-9) [2] 2019-12-29 3220
828 성탄절 영광과 찬송 (눅 2:8-20) 2019-12-25 6807
827 대림절 예수와 임마누엘 (마 1:18-25) [5] 2019-12-22 3244
826 대림절 "파루시아" (약 5:7-10) [5] 2019-12-16 3091
825 대림절 알곡과 쭉정이 (마 3:1-12) [6] 2019-12-08 5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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