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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 (겔 37:1-14)

사순절 조회 수 25979 추천 수 0 2017.04.02 20:45:48
설교듣기 : https://youtu.be/UKM6gvlFh74 
성경본문 : 에스겔 37:1-14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

37:1-14, 사순절 다섯째 주일, 201742

 

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7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10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11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12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13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14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마른 뼈 골짜기

사람이 죽으면 며칠 만에 부패하기 시작해서 일정한 세월이 지나면 유골만 남습니다. 유골 중에서도 치아가 가장 오래 보존된다고 합니다. 간혹 대량 유골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황제가 죽으면 옆에서 왕의 시중을 들던 궁녀들이 함께 묻히기도 했습니다. 이집트 피라미드에도 그런 흔적이 있습니다. 가장 끔찍한 현장은 수십, 수백 명이 집단적으로 살해당해서 한군데 묻혔다가 발견되는 경우입니다. 독재자들이 그런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고, 전쟁 때 민간인들이 그렇게 몰살당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6.25 전쟁 중에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대량 유골이 발견되는 현장을 목격하면 아마 꿈인지 생시인지 감을 잡기 힘들 정도로 혼란스러울 겁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런 대량 유골에 관한 이야기를 유대 백성들에게 전했습니다. 37:1절에 따르면 여호와의 영이 자신을 어느 골짜기로 끌고 갔다고 합니다. 그 골짜기에는 뼈가 가득했습니다. 에스겔이 꿈을 꾼 것인지, 또는 어떤 환상을 순간적으로 느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술가들도 그런 환상을 종종 경험합니다. 에스겔은 자신이 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이 한 마디만으로도 그 광경이 눈에 선합니다. 꿈에라도 나올까 아주 섬뜩한 느낌이 드는 광경입니다.

반쯤 정신 줄을 놓고 있었을 에스겔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들립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살아날 것 같으냐?” 마른 유골이 다시 사람의 형체를 갖추고 살아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인간을 비롯해서 모든 생명체와 사물들은 불가역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똑같은 강물을 마실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죽어서 이미 유골이 된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에스겔이 모를 리가 없었지만 그는 지금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서 그 골짜기까지 온 사람이니 당연한 대답을 할 수는 없습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십니다.’는 대답이 최선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분이시니 불가역이라는 물리학적 원리에 제한받지 않는다는 뜻일 수도 있고, 또는 제발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여호와는 에스겔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뼈들에게 선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르디의 <레퀴엠>을 듣는 듯한 기분입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마른 뼈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뼈들에게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숨을 불어 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너희에게 힘줄을 이어 놓고 살을 붙이고 가죽을 씌우고 숨을 불어 넣어 너희를 살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이 시키는 대로 이 말을 외쳤습니다. 그러자 마른 뼈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서로 연결되었습니다. 뼈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을 겁니다. 뼈가 사람 형체를 갖추자 힘줄이 생기고 살이 붙고 가죽이 덥혔습니다. 어머니 자궁 속에서 태아들이 형체를 갖추는 순서가 이런 건지 모르겠습니다. 먼 훗날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을 만들 때 이런 순서로 만들어야 할 겁니다. 그러고 보니 집을 지을 때도 이런 순서입니다. 철근 콘크리트로 골격을 갖추고 칸을 나눌 거는 나누고 전기 배선도 하고 외장까지 끝내야 합니다. 에스겔이 본 골짜기의 뼈들이 이제 다 사람의 형체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생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다시 다음과 같은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받았습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붙어서 살아나게 하라.’ 에스겔이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 외치자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갔습니다. 그제야 그들이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큰 군대를 이룰 정도로 숫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포로 귀환

에스겔의 환상은 마치 공상과학영화처럼 보입니다. 본문은 그 환상이 무슨 뜻인지를 11절부터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골짜기에 널리 흩어져 있는 마른 뼈는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이렇게 한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37:11). 당시 이스라엘 족속은, 정확히 말하면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었습니다. 에스겔이 선지자로 활동하던 시기가 바로 그때입니다. 기원전 587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성전 함락은 그들의 하나님 신앙까지 뿌리 뽑을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의 말발굽 아래 예루살렘과 유대가 초토화되었습니다. 왕족을 비롯해서 지도급 인사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이제 유대라는 나라가 지도에서 사라진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바벨론 포로 신세를 한탄하면서 겨우 목숨만 부지할 뿐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골짜기에 무더기로 쌓여 있는 마른 뼈와 다를 게 없었습니다.

마른 뼈가 다시 형체를 이루고 생기가 돌아서 군대처럼 큰 무리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포로에서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인 겔 37:14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영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우리는 에스겔이 이런 환상을 선포한 얼마 뒤인 기원전 538년에 유대 백성들이 포로 신세에서 벗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에스겔의 이 예언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신탁을 받은 자이니 조국의 미래를 내다봐야하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개인이나 조국의 미래를 내다보는 점쟁이가 아닙니다. 표면적으로는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것보다 더 근원적인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에스겔이 활동하던 당시 상황은 바벨론이 절대적인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바벨론에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유대 백성들도 자신들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자신들은 망했으니 그냥 바벨론에 적응해서 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벨론이 그들에게는 가장 명백한 현실이었습니다. 에스겔은 당시 유대 귀족이나 민중들처럼 바벨론이라는 현실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이라는 현실 너머를 그는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오늘 마른 뼈 이야기 전체가 말하는 핵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호와는 마른 뼈에 형체를 주고 생기를 허락해서 살릴 수 있는 분이기에 하나님을 믿는 유대 백성을 해방시킬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여호와 하나님을 운명과 역사의 가장 궁극적인 현실로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마른 뼈가 살아난다는 말인 6절과 유대 백성이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말인 13절에서 에스겔은 다음과 같은 똑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이 문장을 상투적인 것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그분의 말소리는 우리에게 들리지 않기 때문에 내가라는 표현은 그럴듯해 보일 뿐이지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여호와는 창조주를 가리킵니다. 여호와만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즉 여호와만이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내가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생명을 주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거꾸로 사람과 세상의 모든 것들은 피조물이라는 뜻입니다. 에스겔이 유대 민족이 처한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이 사실을 사람들이 인식하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세상의 권력에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습니다. 에스겔 시대로 말하면 바벨론 제국이, 그 황제가 세상을 통치한다고 여깁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보면 당연히 그렇게 보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은 힘 있는 사람과 힘 있는 나라가 지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젊은이들이 취업하고 싶어 하는 기업은 초일류 대기업입니다. 들어가지 못해서 포기할 뿐이지 대개는 그런 회사를 목표로 공부합니다. 마음이 이미 거기에 기울었다는 뜻입니다. 미국은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입니다. 그들의 군사력은 세계 모든 나라를 자기들 구미에 맞도록 좌지우지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국방비는 나머지 2-8위에 속하는 나라의 군사비 합계보다 더 큽니다. 에스겔 시대의 바벨론과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경제적인 힘과 군사적인 힘이 세상을 통치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들을 싫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부러워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런 생각이 무의식까지 지배할 정도로 막강합니다.‘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는 말씀은 그런 고착된 생각에서 해방되라는 뜻입니다. 그게 쉽지 않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속으로는 다 그런 생각에 떨어져 있습니다. 바벨론 시대의 유대 백성들처럼 말입니다.

에스겔이 전하는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는 문장과 가장 가까운 문장을 구약성경 중에서 찾는다면, 3:14절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소수민족으로 고통당하는 유대 백성들을 해방시키라는 명령을 호렙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모세는 자기를 보낸 하나님이 누군지 유대 백성들이 물을 때 필요한 대답을 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냐,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이 문장은 나는 나다.”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말이 안 되는 문장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 문장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나는 앞으로 존재하게 될 그 자로 존재할 것이다.” 이것도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겁니다. 그 하나님은 누군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셨나요? 하나님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개념화되거나 범주화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즉 그는 창조주이지 피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고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피상적으로만 아는 경우가 문제입니다. 다음의 경우에 여러분이 해당되는지 살펴보십시오.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니까 그를 통해서 세상에서 우리가 잘 먹고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삶의 조건들을 채워달라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런 생각이 바로 바벨론 제국의 힘에 사로잡힌 유대 백성들의 생각입니다. 바벨론 제국의 힘 앞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마른 뼈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 권력 앞에서 느끼는 패배주의이자, 반대로 바벨론 제국에서 자기를 실현하려는 욕망입니다.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고 다른 한편으로 부러워합니다. 바벨론 체제에 절대적으로 종속된 겁니다.

 

하나님의 영

저는 오늘 에스겔 이야기를 본문으로 설교하면서 생각이 복잡합니다. 현실로서의 바벨론 제국은 두려움의 대상이고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힘에 종속되어서 살아갔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똑같은 힘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두려워하지 말고, 부러워하지도 말라고 설교한다는 게 신자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자칫하면 저의 설교가 현실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의 잔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큰 능력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셔서 다 부자가 되고, 건강해지고, 자녀손이 다 출세하고, 모두 부러워할만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고 설교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지만 저는 여러분을 위해서 설교하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 저 자신을 위해서 설교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가 믿지 못하는 것은 설교할 수 없습니다.

바벨론 제국의 막강한 힘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부러워하지 않기는 어렵습니다. 신앙적으로 아무리 다짐해도 무의식으로 그런 것에 마음이 쏠립니다. 에스겔도 그런 현실을 모르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오늘 이야기에서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른 뼈가 형체를 갖춘 다음에 생기가 필요했습니다. ‘생기라는 단어가 5,6,8,9,10절에서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유대 백성들에게도 생기와 똑같은 뜻인 을 부어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14). 하나님의 영을 받아야만 하나님이 여호와인 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고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깨닫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아무리 머리가 영특해도, 그리고 마음이 착하고 인격적이라 해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생기나 하나님의 영은 현대인들에게 매력적인 단어로 들리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또한 가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이 뭔지 알만한 것은 다 알고 있으니 그걸 실천해낼 수 있는 능력만 키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상식적인 차원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게 무엇인지도 압니다. 그런 정도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간 사람들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여호와인 줄 알라.’는 말씀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상식적인 판단이 늘 옳은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칼 바르트는 <교의학 개요>에서 믿음이 우리의 이성에 빛을 비춘다고 말했습니다. “기독교 믿음은 이성을 조명한다. 인간은 조명된 이성 안에서 자유롭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고, 그래서 자신의 고유한 현존재의 의미 그리고 모든 사건의 근거 및 목적의 의미를 확신하게 된다.”(31). 믿음이 이성을 조명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경험하지 못한 분들은 이해가 가지 않을 겁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어디 한두 개이겠습니까. 비유적으로, 어느 날 저는 중력을 느끼고 걸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놀랍도록 신비롭게 경험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이해가 가지 않겠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창조주이고,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삶의 심층에서 깨닫게 합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마른 뼈가 살아나듯이 새로운 생명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을 21세기에 우리는 마른 뼈처럼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는지요. 겉으로 세련된 모습을 갖추고 있어도 그런 삶 자체만으로는 여전히 빈곤한 삶입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삶이라고 해도 그것 자체로는 궁핍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인생살이에서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여호와인 줄 아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정말 풍요롭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마른 뼈가 어느 순간에 서로 연결되고 힘줄과 살이 붙고 가죽이 덮이고 혈관에 피가 돌고, 그리고 생기가 들어와서 살아나는 놀라운 일들이 여러분들에게 경험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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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6 대림절 깨어있음이란? (막 13:24-37) [2] 2023-12-04 2244
995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2252
994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389
993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401
992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423
991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478
990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482
989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514
988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538
987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543
98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574
985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650
984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653
983 부활절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 (행 10:34~43) [1] 2022-04-17 2663
982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728
981 부활절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의 삶 (계 5:11~14) [1] 2022-05-01 2756
980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2799
979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05
978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852
977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2890
976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921
975 주현절 예수 변모 순간 (눅 9:28~36) 2022-02-27 3028
974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031
973 사순절 예수의 하나님 (눅 15:1~3, 11b~32) [5] 2022-03-27 3044
972 주현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 71:1~6) 2022-01-30 3050
971 주현절 첫 제자들의 출가 이야기 (눅 5:1~11) [7] 2022-02-06 3051
970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130
969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181
968 주현절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전 15:12~20) [6] 2022-02-13 3183
967 사순절 목마름의 실체 (사 55:1~9) [4] 2022-03-20 3187
966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195
965 사순절 시험받는 예수 (눅 4:1~13) 2022-03-06 3198
96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05
963 사순절 유월절 마지막 식사 (눅 22:14~23) [2] 2022-04-10 3219
962 사순절 영광의 몸으로! (빌 3:17~4:1) [2] 2022-03-13 3304
961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313
960 주현절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창 45:3~11, 15) [2] 2022-02-20 3351
959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360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362
957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396
956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406
955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442
954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460
953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503
952 주현절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사 62:1~5) [7] 2022-01-16 3513
951 창조절 불행한 서기관 (막 12:38~44) 2021-11-07 3524
950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547
949 성령강림절 만물의 충만-그리스도의 충만 (엡 4:1~16) [3] 2021-08-01 3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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