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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누군가? (벧전 5:6-11)

부활절 조회 수 7742 추천 수 0 2017.05.28 20:14:48
설교듣기 : https://youtu.be/tLAfQ2qfXJQ 
성경본문 : 베드로전서 5:6-11 

하나님은 누군가?

벧전 5:6-11, 부활절 일곱째 주일, 2017528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2)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11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고난과 믿음

베드로전서에는 고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1:6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 3:14절에서는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라고 했습니다. 4:12-16절에서는 좀더 많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16절만 보겠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오늘 본문인 5:8,9절에서도 다시 고난 문제가 제기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고난이 당시 기독교의 전반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신학자들은 그래서 베드로전서의 역사적 배경을 로마 황제 네로(64), 또는 도미티안(96) 시대로 보기도 합니다. 네로와 도미티안은 기독교를 몹시 박해한 대표적인 황제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들 치하에서 취업의 불이익을 받는다거나 재산을 몰수당하고, 로마 화재 범인으로 낙인찍히기도 하고, 심지어는 콜로세움 경기장에서 맹수들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전서가 기록되던 시대와는 다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으로 인해서 고난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간혹 비슷한 경우가 벌어져도 고난이 우리에게 일반적이지는 않습니다. 이슬람교가 국교로 지정된 나라는 제외하고 하는 말입니다. 북한에도 교회가 있다고 하지만 종교 자유가 보장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고, 중국에서도 공식적인 기독교 선교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런 일부 나라 외에는 기독교인들이 고난당하는 일은 현대사회에서 없습니다. 대한민국은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정치적으로 힘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은 베드로전서를 우리와는 별로 상관없는 말씀으로 대할 때가 많습니다. 그건 오해입니다. 고난 문제는, 즉 고난 영성은 오늘도 여전히 필요합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시대정신에 저항하는 사람은 어느 시대냐를 불문하고 항시적으로 고난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무한정의 힘을 발휘하는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불이익을 당할 겁니다. 교회에서도 성장주의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습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삶이라는 게 궁극적으로 고난 자체라는 사실입니다. 로마 시대에 일어났던 것과 비슷한 박해를 당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역시 이 땅에서 사는 한 외롭고, 불안합니다. 죽음을 피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맞서 싸우라는 베드로의 권고는 오늘 우리에게 똑같이 필요한 말씀입니다.

고난과 어떻게 싸워야 할까요? 온갖 종류의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은 힘을 키우는 것입니다. 21세기에도 많은 국가에서 여전히 무기개발이 끝없이 펼쳐지고 무기 사업이 크게 번성하는 걸 보면 현대인들 역시 힘을 키워야만 고난과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게 분명합니다. 힘은 외면적인 것과 내면적인 것이 있습니다. 외면적인 것은 연봉과 사회적 지위와 명예 등등입니다. 내면적인 것은 인격적이고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자신감과 안정감입니다. 현대인들은 내면적인 것에 관심을 더 크게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리 안정을 위해서 힐링 콘서트라는 것도 하고, 연예 오락에 빠지기도 합니다. 고전음악이나 대중음악에 심취하는 것도 이런 시도 중의 하나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생활입니다. 요즘은 특히 명상종교가 강조됩니다. 불교가 이런 점에서는 다른 종교에 비해서 더 인기가 있습니다. 가부좌하고 하루에도 몇 시간씩 참선을 하면 정신이 맑아진다고 합니다. 기독교에도 역시 이런 흐름이 있습니다. 예컨대 거룩한 독서라는 뜻의 렉시오 디비나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이 성경읽기 공부에는 읽기(lectio), 묵상(meditatio), 기도(oratio), 관상(contemplatio)의 단계가 있습니다. 관상 단계는 무아지경으로서 하나님과의 연합을 가리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고, 그 마음의 평화에 근거해서 세상의 근심과 걱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겁니다. 금요 심야집회나 씨씨엠 콘서트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비슷한 것을 경험합니다. 일종의 무아적 황홀경입니다. 그 순간만큼은 자신의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것을 실제로 경험합니다. 그런 경험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반복적으로 그런 집회에 참석합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외면적인 힘과 내면적인 힘이 고난과 싸우고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근본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기도 전문가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응답을 받는다고 확신해도 삶은 여전히 흔들립니다. 심야 집회에서 아무리 뜨거운 것을 경험해도 일상의 평화가 그대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딘가에 더 의존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돌보심

베드로는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돌보신다고 말입니다. 6,7절 표현은 문학적으로도 아주 재미있게 표현되었습니다. 마틴 루터 번역을 제가 우리말로 옮겼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강력한 손 아래로 자신을 낮추십시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여러분은 높아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염려를 그에게 맡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돌봐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손에 사로잡히는 것이 고난과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무슨 해괴한 소리냐, 하고 냉소를 보냈을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킵니다. 그게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게 아닙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거대한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현실(reality)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손은 강력한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손 아래로 자신을 낮추라는 말은 하나님의 손을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뭔가를 해낼 수 있다고 큰 소리 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겁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어떤 이들에게는 소극적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가장 강력한 겁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를 신뢰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알듯이 사람은 믿을만한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사람을 신뢰하면 삶의 토대가 부실해집니다. 사람을 무조건 불신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피조물인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강력한 손으로 우리를 돌봐주신다고 말은 하지만 그걸 실제로 느끼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해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미묘해서 위선을 신앙적인 것으로 합리화합니다. 기도와 찬송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돌봐주신다고 고백하지만 거기서 핵심은 자신들이 잘되는 것입니다. 다른 방식으로 우리가 잘되는 길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더 이상 찾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이 강력한 손으로 우리를 돌봐주신다는 말은 단순히 신앙 간증 차원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위로에 만족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주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10절에서 신학적으로 좀더 명확하게 짚었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베드로는 하나님이 그들을 온전하게 하고 굳건하게 하며 강하게 하고 터를 견고하게 하신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철저하게 돌봐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굳건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아무리 예수 잘 믿어도 힘이 생기지 않더라, 하고 고백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하나님을 현실로 느끼지 못하니까 예배에 참석할 마음도 절실해지지 않습니다. 물론 이 땅에서 사는 한 우리가 절대적인 상태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 강해도 여전히 흔들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형을 앞에 두고 기도하던 겟세마네 동산에서 한 순간이나마 크게 불안해하셨습니다. 바울도 완전하지 못했고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야 말해 뭐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우리 삶이 굳건해지는 근본적인 토대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방향성은 분명해야 합니다. 그럴 때만 우리의 삶은 실제로 성숙해지고 영혼이 자유로워집니다. 여기서 관건은 하나님이 누군가?’에 대한 질문에 달려 있습니다. 그걸 알아들어야만 실제로 삶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누군가에 대해 진정성 있게 질문할 줄 알고, 거기에 답을 찾아가는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하나의 팁을 드린다면 여러분의 정신, 마음, 영혼이 혼란스러울 때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거나 힐링 콘서트 쫓아다니지 말고 하나님을 아는 일에 더 힘을 쏟으십시오. 이 팁은 실제로 저의 경험에 의한 겁니다. 하나님을 깊이 아는 것 외의 일들은 다 임시 조치입니다. 응급상황이 벌어진 때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고, 간혹 콘서트에 가도 되지만, 거기에 의존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유적으로 말씀드리면, 영혼의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 옆에 있으면 고독, 배고픔, 죽음, 불안 등등의 모든 문제는 저절로 다 해결되는 거와 같습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그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어떤 존재일까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

본문은 하나님이 당신의 영원한 영광에 우리를 들어가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라는 단어와 뜻이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영광으로 존재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한 가지 사실을 말한다고 봐도 잘못이 아닙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각각 한 대목만 짚겠습니다.

구약 출애굽기는 고대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하는 과정과 광야의 시내 산에서 율법을 전수받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율법 전수가 끝난 뒤에 모세는 출 33:18절에서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고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다.’고 하신 뒤에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경험은 간접적으로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살아서 경험하는 이 세상의 방식으로는 하나님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신약 누가복음 9:28절 이하에는 변화산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자 세 명과 함께 산에 오르신 예수의 용모가 변화되고 광채가 났습니다. 그 순간에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예수에게 신적인 영광이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그 영광이 빛으로 경험되기도 하고, 화산이나 구름, 또는 어둠으로 경험되기도 합니다. 그 앞에서 사람들은 말문이 닫히고, 아득한 세계로 빠져들면서 거룩한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생명의 가장 깊은 차원에 대한 경험입니다.

이런 설명이 손에 잘 잡히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들과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주로 먹고 배설하고 소유하고 싸우고 사랑하는 방식으로 삶을 경험합니다. 이런 일상에만 묶여 있어서 그 일상을 관통하거나 초월하는 생명의 깊이를 눈치 채지 못합니다. 비유적으로 가장 쉽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태어난 순간과 지금의 여러분을 비교하면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일 겁니다. 죽음 직전이나 죽음 이후를 상정하고 비교해보십시오. 실감이 안 날 겁니다.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상 너머의 세계에 눈이 열리기 시작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등을 보거나 강렬한 빛으로 세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막연하고 비현실적인 것에 머무는 게 아니라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시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유대교의 하나님에 머물지 않고, 또한 철학자들의 궁극적인 존재에 머물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절대적으로 묶여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어 땅에 묻히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신 바로 그 나사렛 목수 출신 유대인 한 남자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고후 4: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은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생명의 가장 심층적인 차원이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해서 모든 신약성경 집필자들과 교회에 속한 이들은 예수를 통해서 바로 그 생명을 경험했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얻을 수 없는 구원경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의 구원은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것은 죄와 죽음입니다. 자신의 삶을 자기가 완성해야 한다는 강요로 인해서 우리의 삶이 파괴됩니다. 자기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지금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목사의 경우를 예로 들겠습니다. 그가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강요와 욕망에 빠지면 평화롭게 목회하지 못합니다. 신자들을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자는 구호로 몰아칩니다. 운이 좋아서 교회가 성장해도 영혼의 만족은 없습니다. 자신이 교회를 성장시켰다는 교만과 앞으로 더 성장시켜야겠다는 욕망이 그를 괴롭힙니다. 그게 죄이고, 그로 인해서 그의 목회적인 삶은 파괴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외치면서 정작 자신은 구원으로부터 점점 멀어집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예수 스스로 말한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여길 수밖에 없을 정도로 삶이 파괴된 사건입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보다 더 낮은 바닥으로 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의 예수와 운명적으로 하나라는 사실을 실제로 인식하고 믿는다면 그는 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절감할 겁니다. 예수의 십자가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다는 교리는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예수의 부활은 이 사죄 교리가 명백하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사건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 묻힌 자를 하나님은 삼일 만에 살리셨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절대 생명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와 더불어 죽기 때문에 예수와 더불어 삽니다. 창조의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완성하실 생명에 참여합니다. 이런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기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라 할 죽음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런 놀라운 하나님을 알고 있으신가요? 실제로 경험하고 있으십니까? 아니 하나님이 누군지에 대해서 실제로 알고 싶은 생각이 있으신가요? 우리는 지금 실제로는 그럴 생각이 없는데 있는 것처럼 흉내만 내는 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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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주안

May 29, 2017
*.69.199.48

천지창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을 생명의 주인과  완성으로 믿습니다.

아직 희미하지만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돌보아주심도 믿습니다.

결국 영생의 길로 가게된다는 것도요...

이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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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30, 2017
*.164.153.48

영생은 무한한 시간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 사건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모든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에 집중하는 게 최선입니다.

주안 님에게 이런 믿음이 흔들리지 않은 은총이 넘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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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mist

May 31, 2017
*.33.17.72

"하나님이 돌보신다.
하나님이 철저하게 돌보신다." 는 말씀 앞에
주저함 없이 아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누군가? 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과 그것을 알아 들어야 실제로 삶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들으면서 스르르 제 어깨의 힘이 빠지면서 자신이 없어집니다.

그 만큼 구원의 경험, 거룩한 두려움의 경험, 생명의 깊은 차원의 경험 그리고 일상 너머의 세계에 대해 무지할 뿐만 아니라 간절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목사님 말씀처럼 손에 잘 잡히지가 않습니다.
목사님의 경험은 실제로 어떤 것었는지 좀 나누어주십시오.
또 그것을 알아 듣는다는건? 어떤 자세나 행위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누군지 알고 싶습니다.
진정으로... 가슴으로..
(목사님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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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31, 2017
*.164.153.48

미스트 님을 대구샘터교회에서 딱 한번 봤을 때

예사롭지 않은 분이라 생각을 했지만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이렇게 큰 줄은 몰랐습니다.

상황만 조금 받쳐줬으면 미스트 님은

출가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구약의 선지자들, 예수는 물론이고 그의 제자들과

수많은 수도자들이 그런 길을 걸었습니다.

이유는 딱 한 가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었습니다.

미스트 님이 지금 얼마나 답답할지 상상은 갑니다.

자신이 결단해야 합니다.

그냥 무난하게 교회 성실하게 다니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구요,

작심하고  하나님 공부에 나서는 것도 하나의 선택입니다.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어요.

저 같은 사람이야 후자를 선택한 사람인데,

이미 신학과 상관없이 인생의 상당 부분을 살아버린 상태에서

이쪽 세계로 들어가는 건 쉽지 않는 일이에요.

물론 이쪽 세계라 해서 정식으로 신학교를 가는 건 아니라 하더라도

많은 시간을 신학책 읽는데 투자해야 하거든요.

그리고 교회 생활과 겸해서 해야 하는데

한국의 교회생활이라는 게 신학공부와는 담을 쌓은 상태라,

오히려 신학 무용론이 득세한 상태라 쉬운 일이 아니지요.

제가 지금 미스트 님에게 겁을 주려고 하는 게 아니라

본인의 하나님 갈망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그걸 해결하려면 상당한 투자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제일 확실하게 분명하게 쉬운 방법을 말씀드리면,

대구성서아카데미에 있는 저의 글과 녹음 파일을 다 읽고 듣는 겁니다. ㅎㅎ

내 경험이 실제로 어떤 것이었는지도 제의 글과 녹음 파일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게 너무 광범위하니까 일단 좁혀서 한 가지만 제안한다면

저의 책 <기독교가 뭐꼬>와

제가 번역한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해설>을

맛난 음식 꼭꼭 씹어 먹듯이 읽어보세요.

귀한 믿음의 도반을 만난 느낌이군요.

주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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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mist

May 31, 2017
*.33.17.72

예. 목사님~
일러주신대로 차근차근 공부해보겠습니다.
말씀처럼 인생의 상당부분을 살고 나서 하는
공부는 가슴에 더 잘 와닿는 장점이
있을거라 믿습니다.
「사도신경해설」밑줄쳐 가며 읽고 있는데
참으로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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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좋은나무

June 03, 2022
*.198.16.17

칼 바르트 '교의학 개요' 강독을 공부하다가, 그 강독하신 날 주일 설교문까지 찾아오게 되었네요~ ㅎㅎ 교의학 개요 강독 너무 좋습니다. 혼자 읽으면 놓치기 쉬운 배경과 의미를 짚어주시니까요! '하나님의 강력한 손 아래서' 말씀에서 '하나님의 손'이 저에겐 그분의 보이지 않지만 '열심으로 일하심'이라 읽히네요. 다스림과 통치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 맥락과 함께 우리가 다 손으로 일하듯이, 우리의 삶과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고 계시며 돌보고 계신다고 읽힙니다. 정말 이 사실을 우리가 뚫어볼 수만 있다면, 두려움과 염려에서 해방될 텐데 말입니다. 

그리고 목사님... 칼 바르트의 '개신교 신학 입문'(복 있는 사람)도 강독하실 계획이 있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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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03, 2022
*.137.91.189

깊이 있는 강독이 못 되는데도 경청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정용섭> 유트브 채널에 '칼 바르트' 항목으로 들어가면 

좋은나무 님이 듣고 있는 <교의학 개요>만이 아니라

<복음주의 신학 입문> 강독도 있습니다.

복있는 사람 출판사에서 "개신교 신학 입문"으로 나오기 전에 

먼저 번역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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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좋은나무

June 03, 2022
*.198.16.17

복음주의 신학입문이 같은 책이었군요~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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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 창조절 은혜를 갈망하는 시인 (시 123:1-4) [2] 2023-11-19 1128
1030 창조절 외면당한 사람들 (마 25:1-13) [5] 2023-11-12 1212
1029 창조절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의 역설 (마 23:1-12) 2023-11-07 985
102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마 22:41-46) [7] 2023-10-29 1277
1027 창조절 재림신앙 (살전 1:1-10) [4] 2023-10-22 1217
1026 창조절 금송아지 이야기 (출 32:1-14) 2023-10-15 1106
1025 창조절 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 (마 21:33-46) 2023-10-09 1058
1024 창조절 과정으로서의 구원 (빌 2:1-13) 2023-10-01 1093
1023 창조절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마 20:1-16) [2] 2023-09-24 1243
1022 창조절 홍해 이야기 (출 14:21-31) 2023-09-17 1237
1021 창조절 도반 공동체 (마 18:15-20) [4] 2023-09-10 1195
1020 창조절 '악' 앞에서 (롬 12:14-21) [4] 2023-09-04 1362
1019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2023-08-27 1116
1018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6] 2023-08-20 1486
101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2023-08-08 1653
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1582
1015 성령강림절 여기 계신 하나님 (창 28:10-19a) [4] 2023-07-23 1700
1014 성령강림절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1-11) 2023-07-16 1256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1542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2023-07-03 1219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4] 2023-06-25 1729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2023-06-18 1370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1520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1464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1381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1697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1507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1755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1282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1598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2022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2249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1848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1823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1796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2799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208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156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648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541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388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357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421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513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482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130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030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2888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145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3714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163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919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536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476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179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574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066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05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727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459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194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406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311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847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502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401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645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545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554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154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05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395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653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361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439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714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3914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496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850
952 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2] 2022-05-08 3593
951 부활절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의 삶 (계 5:11~14) [1] 2022-05-01 2754
950 부활절 예수를 '믿는 자' (요 20:19~31) [1] 2022-04-24 4636
949 부활절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 (행 10:34~43) [1] 2022-04-17 2660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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